그러니까.. 제가 조성민이를 처음으로 본게.. 91년..
그때 "신일고교"라는 문자가 박힌 유니폼을 강속구를 줄창 뿌려대는데.. 거기 완전히 반했었죠. 특히 직구는 정말 명품이었는데.. 고교야구 수준에서는 한다운데 넣어줘도 도저히 칠수 없는공 같았습니다. 어찌나 빠르고 지저분하던지.. 정말 나중에 큰일 낼줄 알았는데.. 세월이 지나고 이제는 그가 "C양과 별거하고 있는 2명의 자녀를 가진 남편"라는 사실과.. 강병규와 비교되고있는 현실이.. 세월이 흘렀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실패한 몇몇 선수만 빼고, 이름 석자만 들어도 얼굴과 투구폼이 "딱!"떠오를 만한 유명한 선수들이죠. 위에도 많이 언급들을 하셨는데... 당시 92학번중 가장 대어라고 본 선수들은 세명인데.. 임선동, 조성민, 손경수 이렇게 세명으로.. 프로야구 스카우터들과 전문가들에게 임선동, 조성민, 손경수 순으로 실력을 인정 받았죠. 특히 임선동이와 조성민은 1-2위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정도로 용호상박이었는데.. 91년 말에 LG가 임선동을 먼저 지명 함으로써, 조성민이는 졸지에 2인자가 되어버립니다. 당시 임선동이나 조성민이는 고딩때 이미 90%정도는 완성된 투수들이라 프로에 진출해도 10승은 가능하리라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언론도 말들이 많았죠. "선동열의 계보를 잇는다"는 말도 많이들 했고.. 당시 고교야구 기사는 임선동으로 시작해서 조성민으로 끝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공주고는 박찬호의 호투로 8강에 안착했으며, 대전고는 정민철의 부진으로 예선탈락...."이런식의 기사로 박찬호나 정민철은 그냥 이름이나 알수 있을정도 였으니까요. 당시 기사를 보시면 이들의 고교야구내의 위상을 간접적으로 알수 있습니다. 얼마전 김진우, 류제국이 받은 스포트라이트와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고, 오히려 더했다고 하면 맞을라나?
조성민은 고등학교때부터 빠른공을 던졌는데.. 들은바로는 비공식으로 150km정도를 던졌다고 하고.. 신문지 상에 나온 최고 스피드는 148km로 임선동과 똑같은 스피드였죠. 그런데 조성민이는 직구 자체가 굉장히 지저분하고 묵직했습니다. 당시 임선동이는 그 묵직(?)한 등치를 제대로 못 이용하고, 그냥 제자리에서 서서 던진다는 인상이 짙었는데.. 조성민이 같은 경우는 그나마 중심이동이 잘 이루어져서 직구가 좋았습니다. 투구 동작에 대해서는 뒤에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조성민이의 좋은직구는 팔스윙에서 나온다는게 저의 생각이기 때문 조성민을 이야기 할때는 빼놓지 말고 이야기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당시 잘생긴 외모덕에 상대팀의 여학생 응원단들이 조성민을 응원하는 괴이한(-_-;)현상을 만들기도 해서 스타성까지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이는 요미우리 진출후의 방송활동에서 유감없이 그의 스타성을 보여주는데.. 그이야기도 후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하튼 조성민은 고딩때의 도미네이트한 투구로 대학야구 명문인 고려대에 입학하게 됩니다.
조성민의 고대 1,2학년 시절의 투구는 왜 전문가들이 조성민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는지를 알수 있는 좋은투구를 보여주던 시절이었습니다. 공은 고딩때보다 더 빨라져서 150km를 육박했죠. 92년에 KBS나 MBC에서 대학야구를 평일에 해주곤 했는데.. 그때 보았던 조성민은 "대학야구의 선동열"이었습니다. 당시 문동환이 가장 잘나갔었는데.. 저는 조성민이가 더 인상적이더군요.
언젠지는 정확히 기억은 안나고, 상대팀도 기억이 안나는데.. 그때 직구만 5개 던져서 삼진 잡는데.. 그때 정말 멋있었습니다. 당시 직구는 98년 선발로 잘나갈때와 비슷한 직구였는데.. 190의 장신에서 내리찍는 직구라, 중계로 보면 시원시원해 보였죠. 무브먼트도 어찌나 좋던지.. 몸쪽 위로 던져놓으면 타자들은 연신 헛스윙을 하기 일수였고, 바깥쪽 몸쪽으로 하나씩 직구박고.. 슬라이더로 유인하면 완전히 속았었습니다.
그런데 3학년에 들어서서 팔꿈치에 이상을 느끼죠. 그전에 많이 던진 탓도 있겠지만, 사실은 폼에 이상이 있었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혹사 혹사 하시는데.. 사실 조성민이 보다 혹사 당한사람 엄청 많습니다. 김건덕이는 팔이 완전히 맛이 간 다음에도 던져대서 투수완전히 관뒀었는데요 뭐. 아래 제가 쓰겠지만 조성민은 팔을 너무 튀틀어서 던집니다. 덕분에 공은 지저분하게 나가는데 팔은 조금씩 아작나는거죠. 최근에 팔을 꼬는투수는 현대의 조용준정도인데.. 조용준도 부상의 위험이 크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인지 3학년 이후로는 선발투수 보다는 구원으로 주로 나왔습니다. 선발은 손민한이나 손혁정도가 나오고, 한 7회부터 구원으로 나왔었죠. 구원투수라 그런지 전력투구를 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그래도 팔꿈치가 정상이 아니어서 인지 공의 위력은 예년만 못한 모습을 보입니다. 공은 예전보다 별로인데.. 그래도 잘하더군요. 좌우 코너웍해서 슬라이더로 승부하는데.. 타자들 예전이나 그때나 똑같이 잘 속아넘어가는 모습을 보여줬죠.
그리고 4학년때는 아주 요상한 폼으로 대학야구 팬들을 놀래키는데... 이름하야 "토네이도폼". 당시 메이져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던 노모의 폼을 따라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노모보다는 케빈브라운에 가까운 폼이었는데.. 여하튼 완전히 몸을 180도 틀어서 공을 던졌었습니다. 그게 아마 연고전이었나? 그랬었는데..당시 방송에서 중계도 해줬습니다. 당시 선발이 지금 롯데에 있는 손민한 이었고, 조성민이는 구원으로 나왔는데.. 첨에 보고 해설자들이 굉장히 놀라더군요. 그러면서 "저렇게 던져도 제구력은 괜찮군요."라는 멘트를 날리기도.. 기억나는게 그폼으로 던질때 평소보다 직구의 공끝이 대단해 좋았습니다. 사실 3,4학년에는 팔꿈치가 좋질 않아서 구위가 떨어졌을 시기였는데.. 그때는 대학 초기시절처럼 직구가 굉장히 좋았습니다. 라이징 패스트볼로 삼진을 잡기도 했는데.. 그때 공끝은 정말 좋았다는...
그리고 윗 분이.. 조성민이 대학시절에 포크볼이 좋았다고 하셨는데..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당시 조성민이는 포크볼을 던지려다 손에 안익어서 중도에 포기했다고 본인이 인터뷰에서 이야기 했었습니다. 한번은 포크볼 시험할려고 대학 정기전에서 던졌다가 홈런도 맞고 그랬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때는 그냥 슬라이더나 커브가 괜찮으니까 그걸로 승부하는 쪽으로 했다죠. 포크볼은 요미우리입단해서 제대로 연습해서 자신의 무기로 만듭니다.
조성민이가 요미우리로 진출할수 있었던것은, 출중한 실력과 국가대표로써의 많은 경험, 출중한 외모가 가진 스타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임선동이와는 다르게 우선지명도 받지 않은터라, 걸림돌도 없었죠. 그래서 조성민이는 망설임 없이 요미우리 행을 일찌감치 택하고 95년 말경에는 TV에서 다큐멘터리가 나오기도 했는데, 그때 일어공부를 하는 모습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여하튼 화려한 대학시절을 지나, 일본최고명문 구단 요미우리에 당당히 입단합니다.
그리고 96년 요미우리에서 새로운 야구인생을 시작합니다. 당시 조성민에 대한 일본전문가들의 평은 "7-8승에서 10승까지 올해 당장 가능하지만, 긴 안목을 갖고 육성하면 20승도 가능할만한 구위를 가진 뛰어난 선수"라는 식의 평이었죠. 실지로 요미우리는 조성민이를 "조성민을 2000년 요미우리의 에이스로 키운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조성민에 대한 요미우리의 애정은 대단했는데.. 제 기억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요미우리의 정기 간행지에서 커버를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팀내의 스타들을 제치고 루키가 커버를 장식해서 당시 국내 언론에도 소개가 되었었습니다.
꿈의 일본생활은 시작되었으나.. 시작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시범경기 첫등판때도 1.2이닝을 던지고 4실점인가를 하고.. 선발등판도 한번 해서 9실점이라는 최악의 성적을 내기도 하죠. 당시 조성민이는 대학때부터 자신을 괴롭힌 팔꿈치부상 때문에 구속도 145km정도로 줄어 있었습니다.
거기다 투구폼이 안고 있는 문제도 있었고.. 여러가지가 복합적으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96년은 대부분을 2군에서 보냅니다.
2군에서는 97년부터 주무기로 사용하게 되는 포크볼을 연마했는데.. 그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위에서 말씀 드렸다 시피 대학때는 포크볼을 거의 던지지 않았지만, 1년만에 자기것으로 만들죠. 싱커도 익히는데.. 좌타자를 상대할때 유용하게 써먹었습니다. 투구폼도 당시 평가를 보면 "직구와 변화구를 던질때, 투구폼이 차이가 난다."라는 평가였고, 96년부터 투구폼을 뜯어고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97년... 96년 2군에서의 연마로 한층 업그레이드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직구가 살아나서 구속은 150을 상회했습니다. 무엇보다 공끝이 다시 살아났는데... 당시 공끝은 대학초창기에 보여줬던 무시무시한 공끝이었습니다. 특유의 지저분함과 묵직함을 동반한 그만의 직구였죠. 그리고 포크볼을 완전히 마스터 했는지.. 자주 던졌는데.. 각이 정말 대단했습니다. 당시 조성민은 일본시절에 "작년부터 슬라이더가 각이 무뎌졌다. 그래서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그동안 익혀왔던 포크볼이 왼만큼 완성이 되면서, 많이 던지기 시작했다. 그다음 부터는 슬라이더가 좋으면 포크볼이 죽고, 포크볼이 좋으면 슬라이더가 죽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는데..97-98년은 포크볼의 시기로 보면 좋을거 같습니다. 여하튼 97년은 되살아는 직구와 새로익힌 포크볼로 1군에서 구원투수로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팬들과 요미우리의 관계자들에게 그 다음해를 기대하게 했죠.
시즌이 끝난뒤에는 방송에 출연을 하게 됩니다. 그의 방송출연은 그의 스타성이 어디까지 인가를 알수 없게 만들었는데.. 기억나는 것은 당시 잘나가는 음악프로였던 "이소라의 프로포즈"인데.. 당시 되지도 않는(-_-) 섹소폰을 들고나와서 연주하고 그리고 나서 귀여운(?)행동으로 관객들의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죠. 또 모 쇼프로에서는 자신이 학창시절 가장 좋아했다는 C모양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98년.. 본인도 전지훈련에서 열심히 했고 팬들도 기대를 많이 했습니다. 당시 구와타는 조성민의 훈련모습을 보고 "조성민은 몸을 만들줄 아는 선수다. 그는 어딜가나 좋을활약을 펼칠것이다."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범경기에서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는데.. 당시 시범경기 초반에 엄청 난타 당했었습니다. 직구 스피드도 최고 145km정도로 줄어있었고... 스포찌라시들도 난리 법석 들이었죠. "작년에 잘했던 조성민 갑자기 왜이러나?"라는 식의 반응이었는데.. 그러다가 막판가서 구위가 살아나는데.. 요코하마와의 경기에서 6이닝 무실점을 기록합니다. 이경기에서는 공을 채는감을 확실히 잡은건지.. 직구스피드는 무려 153km까지 나오고, 150km도 3번연속찍는등.. 다시 강속구를 선보여서 1군잔류에 청신호를 보냅니다. 그리고 시즌 개막..... 그는 전반기에만 7승을 거둬 올스타브레이크 직전까지 다승왕을 합니다. 한창 잘나갈때는 방어율부문과 승률부문도 1위였는데.. 올스타브레이크가 다가올때 약간 페이스가 떨어져서 타이틀을 내줬던 기억이 납니다. 페이스가 떨어지면서 팔꿈치부상에 관한 이야기가 서서히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좋은 성적으로 그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올스타전에 나갑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되었죠. 당시 구원으로 나왔는데.. 1이닝인가를 던지다가 갑자기 나가더군요. 왜 그런가 했는데.. 나중에 스포츠뉴스보니까.. 팔꿈치부상을 당했다고 나오더군요. 우려했던 일이 급기야 벌어진거죠. 사실 조성민이의 투구폼을 자세히 보면 팔꿈치에 굉장히 무리가 가는 폼이라 우려를 많이 했는데.. 결국은 일이 벌어진겁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8월이면 복귀한다"고 하더니.. 결국은 시즌이 끝날때까지 나오지 못하죠.
그런데.. 그게 선발로테이션으로 쭈욱 나왔던 "투수"조성민의 끝이었습니다. 2001년에 148km까지 던지면서 완봉승을 함으로써 부활하는듯 했으나.. 다음 등판때 급기야 138km라는 저속구를 던져 관계자들의 의문을 삽니다. 그리고 2군으로 강등당하고.. 다시 부상으로 신음하죠. 당시 138km짜리 스물스물한 직구를 던지면서 시름시름하던 조성민의 모습은 정말 불쌍(?)하기 까지 했습니다. 153km까지 던지던 놈이 138km라니... 불쌍(?)할만도 했죠.
여하튼 그렇게 해서 부상의 여파로 본인이 요미우리에 퇴단 의사를 밝히고 쓸쓸히 퇴단하게 되고.. 그이후로는 아시는데로 국내에서 뛰는걸 모색하지만, 1차지명에 실패했고, 조성민 본인이 자존심이 용납을 못하는 것인지.. 그냥 야구포기하고 지금은 이렇게 C양과 안좋은 이야기만 나돌고 있습니다.
조성민.. 정말 좋은 선수였습니다. 그의 전성기적 구위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면
1.150km를 육박하는 지저분하고 묵직한 빠른볼
2.손재주가 좋아서 단기간 내에 변화구를 자기것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다.(포크볼, 싱커는 아주 좋은 예임.)
3.몸이 부드러운 편이라 중심이동도 자유로운 편이었는데.. 공을 제대로 때릴줄 알았다.
4.안정적인 릴리스포인트 유지로 좋은 제구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렇게 이야기 할수 있을것입니다. 일본진출도 저 위의 4가지 덕분이라고 말씀드릴수 있겠습니다. 단점은 말씀드린대로
1.투구시 팔꿈치에 무리가 가는 팔스윙.
2.하체의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투구폼.
두가지 단점으로 인해 부상의 전초를 만들게 됩니다.
어느 사이트에 가보니.. 조성민이 박찬호 만큼 하체를 이용할줄 알면 박찬호와 비슷한 스피드의 직구를 던질수 있었다는 글이 있더군요. 그만큼 그의 투구폼에는 아쉬움이 많습니다.
뭐.. 글을 쓰다보니.. "조성민예찬론"에 가까운 글을 써버렸네요. 그래도 오랜만에 예전의 조성민이의 활약을 기억해내니까 재미는 있네요.
여하튼 많은 도움 되셨길 바라며.. 저는 이만....
신문기사 에서 봤는데 당시 올스타전때 자신은 팔에 이상을 느끼고 교체를 요구했다네요.. 근데 당시 감독인지 투수코치인지는기억이안나는데 교체를 요구할때 부상인거 같다고 말했는데 조성민이의 일본어를 못알아듣는 척했대나 확실히는 기억안나는데요 그 사람속셈이 조성민이 가 내려가면 올라올 투수가 자신의 팀
선수라서 아낄려는 속셈이였다고.... 그래서 조성민이가 어쩔수 없이 계속 던졌는데 던지던 도중 갑자기 팔에서 '뚝'소리가 나더랍니다...그리고나서 교체를 했는데 알고보니 인대가 끈어졌대나? 아무튼 큰 부상으로 이어졌데요 조선일보에서 조성민이랑 인터뷰한거 봤었어요..참......씁쓸하네요..
첫댓글 제가 생각했던거보다 뛰어난 선수였던거 같네요...근데...조성민선수...선수로 활약할때 수입이 적었나요...?? 얼마전까지 이혼에 돈문제로 보도될때마다 안타까워보이더군요...결국은 친권을 포기했다던데...
일본에서도 1군과 2군을 왔다갔다 하면서 활약했죠...수익이 좋았을리가....
옛날 고교야구 볼때 단연 돋보였습니다 강력한 피칭에다가 타격까지.. 부상만 아니었음 지금어떻게 되있을지 모르죠 최진실과 불화도 결국 선수관두고 사업하다가 여자관계얽혀서 터져나온 셈아닌가요
'조성민이'의 압박.. ^^ 잘 읽었습니다. 안타까운 선수죠, 조성민 선수..
단연 돋보이진 않았고....임선동이 1위, 조성민이 2위였죠. 하지만 둘이 빅2라고 하는게 더 정확할듯..그 당시엔...박찬호는 4,5위 그리고 돈은 꽤 많이 벌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진실이 더 부자죠..;;;
아 조성민 고려대 시절 노모폼 따라해서 던진거 본 기억나네요. 그때가 95년도인가...스포츠뉴스에 나왔었어요. 그리고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출전한것도 기억나네요.
돈은 꽤 많이 빛만 있었다는군요.. ㅡ.ㅡ 양육권 포기할테니까 빛갚아달라고 합의 했음..
꼭 임선동이 1등만은 아닌거같네요.제가본 조성민은...임선동한테 밀리는게 별로없었다고생각하는데...얼굴이 잘생겨서 점수를 더 후하게 좋나...여튼 굉장한 투수였습니다.일본 최고명문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그때 진짜 멋있었는데 올스타전까지!!...
솔직히 두배만 됩니까?-_-......솔직히 조성민 그당시 야구계의 no.1미남이라면 임선동은 이름도 못내밀...-_-...아닙니까?
신문기사 에서 봤는데 당시 올스타전때 자신은 팔에 이상을 느끼고 교체를 요구했다네요.. 근데 당시 감독인지 투수코치인지는기억이안나는데 교체를 요구할때 부상인거 같다고 말했는데 조성민이의 일본어를 못알아듣는 척했대나 확실히는 기억안나는데요 그 사람속셈이 조성민이 가 내려가면 올라올 투수가 자신의 팀
솔직히 한국으로 왔으면 꽤 활약했을 투수.. 잠재력이 너무 아쉬운투수..
선수라서 아낄려는 속셈이였다고.... 그래서 조성민이가 어쩔수 없이 계속 던졌는데 던지던 도중 갑자기 팔에서 '뚝'소리가 나더랍니다...그리고나서 교체를 했는데 알고보니 인대가 끈어졌대나? 아무튼 큰 부상으로 이어졌데요 조선일보에서 조성민이랑 인터뷰한거 봤었어요..참......씁쓸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