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영순의 <덴마>에 드러나는 육체와 정신 그리고 존재에 대한 고찰
2012101027 국어국문학과 장정민
한국의 대표 포털사이트 'NAVER'에는 매주 웹툰을 무료로 제공하는 서비스가 이루어지고 있다. 과거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에는 모든 글과 그림은 종이에 인쇄되어 사람들의 손으로 들어가야 내용을 전달받을 수 있었으나, 현대에는 글과 그림은 모두 데이터화 되어 개인용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쉽게 받을 수 있는 편리한 사회가 정착되었다. 다른 문서 매체에 비해 만화는 그 영향을 매우 크게 받은 콘텐츠 중 하나이다. 웹툰서비스가 정착되면서 종이로 인쇄된 만화책은 관심을 잃어버리게 되고 많은 작가들 또한 웹툰계로 입성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양영순의 <덴마> 역시 시대의 흐름에 편입한 작품 중 하나이다.
주인공 덴마는 10살 정도의 작은 아이로 머리에 작은 기계를 달고 다닌다. 그의 몸은 꼬마 아이지만, 사실 그는 ‘뇌전단 스캐닝’이라는 과학기술로 인해 ‘다이크’라는 이름의 이전 육체에서, 기억이 아이의 몸으로 옮겨진, 정신은 어른이지만 아이의 몸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뇌전단 스캐닝’이란 인간이나 동물의 기억을 데이터화 하여 기계의 소켓에 옮긴 뒤, 다른 생명체나 기계에 연결하여 다른 육체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기술로 주인공 덴마는 의식을 잃은 사이에 이 ‘뇌전단 스캐닝’을 당하게 된다.
따라서 작품의 주요 내용은 주인공 덴마가 자신의 몸을 찾는 과정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작품 중간에 주인공이 옮겨지기 이전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즉 어린 아이 속으로 옮겨진 주인공과 옮겨지기 전의 본래 육체를 가지고 있는 주인공이 동시대에 공존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난 후 독자들은 큰 혼란에 빠진다. 기억이 옮겨져 본체를 찾고있는 덴마와 기억이 옮겨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다이크, 그 둘 중 무엇이 실체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주제를 실제로 다른 인물을 통해 직접 언급하기도 한다,
도대체 나를 나라고 말하는 존재의 정체는 뭘까? 전혀 다른 물질로 이루어진 나를 무엇이 닥터 고드라고 규정짓는 거지? 복제된 의식 체계라, 스스로를 고드라고 인지하고 있는 나는 뭐냐고? 나는 정말 나인가? 아니면 고드의 기억을 가진 전혀 다른 존재인가?
데이터화 된 자신의 기억이 여러 개로 복제되어 여러 육체로 존재하게 된다면, 그 중 본래의 나라는 존재는 누구일까. 영화 <아일랜드>에서 주인공은 본인이 인간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인간의 치료를 위해 배양한 복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영화 속의 인간들은 복제 인간을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것이 아닌 그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기계와 같은 부품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그러나 <덴마>에서의 주인공 덴마는 그들과 다르다. 그는 본인이 복제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신의 육체는 정신을 잃은 채,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우주를 떠돌아 다닌다.
<아일랜드>에서의 복제인간은 기억이 없이 유전자 세포로만 배양된 새로운 의식과 기억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고 <덴마>에서의 복제된 주인공은 육체는 다르지만 본래의 정신과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이 중 본체와 가깝다고 볼 수 있는 존재는 어떤 것일까. 육체를 복제한 존재와 기억, 즉 정신이 복제된 존재가 있다면 그들은 본체와 다른 인격체일까. 또한 만약 육체에 대한 복제 기술과 정신에 대한 복제 기술이 모두 개발되어 두 가지의 실험이 동시에 행해져, 육체와 정신 모두 같은 존재가 생겨난다면 우리는 이 존재를 무어라 정의해야 할까. 작가 양영순은 이러한 문제를 독자들에게 던져 준 것이 아닌가 싶다.
인류 최초의 철학자로 불리는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저서 <파이돈>에서 인간은 영혼과 육체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육체의 감각적인 부분이 영혼의 맑은 이성과 사유를 방해한다고 한다, 따라서 소크라테스 자신이 죽을 때 육체를 벗어나 맑은 영혼이 될 수 있다며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며 제자들을 설득하는데 소크라테스에게 인간 존재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지만 사실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이었다, 육체는 오히려 진정한 인간적 구성인 영혼을 가두어둔 어떤 기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몸과 정신의 상하체계는 고대를 지나 중세시대에도 여전히 이어진다.
종교철학이 지배하던 서구의 중세시대에도 역시 인간의 육체는 원죄를 짓고 있는 잠시 머물러가는 하위의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때문에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육체를 빠져나와 사후세계로 가게 되며 그곳에서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평생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근세 철학자 데카르트는 모든 것에 대한 회의를 통해 제일원리로서 자신을 발견해냈다.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는 세계의 모든 관념과 현상을 끊임없이 회의하면서 모든 것을 부정하기 시작하며 그 끝에 의심하고 있는 절대 의심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이 원리를 통해신의 존재를 증명하여 인간의 정신이 물질의 실체를, 진정한 지식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충분히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실체에 대한 탐구는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바로 육체의 주관성 때문이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우리를 실로 자주 속일 수 있으며 우리는 그 때문에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육체는 오랜 기간 동안 잃어버렸던 권위를조금이나마 되찾게 된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 송과선(松果腺)을 통해 상호작용을 하며 의식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의 주장은 지금 와서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지만 육체를 뱀의 허물 보듯이 인식했던 이전까지의 사상과는 다른 방면이라 볼 수 있다.
데카르트 이후 생겨난 많은 경험론자들이 정신은 육체의 경험이 낳은 산물이라 주장하며, 오히려 그 체계를 뒤집어 놓는 일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근대 이후의 의식은 과학의 발전이 인간과 현상 대한 구체적인 발견을 이루면서 생긴 영향이 적지 않다.
과학의 놀라운 발전을 이룬 현대에 과학계에서 인간의 의식은 단순히 뇌의 전기신호로 이루어진 것일 뿐이라는 주장이 일반이적이다. 인체에 대한 과학 발전은 호르몬이라는 신경물질을 발견하고 또한 근래에는 뇌과학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며 인간 또한 기계와 다를 게 없다는 생각까지도 가지기 충분한 실험과 결과들이 드러나고 있다. 심지어 동식물의 복제에 성공하며 인간 복제도 조만간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바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명 복제의 문제는 철학적·사회적 문제를 언제나 야기해왔다.
<덴마>에서 역시 ‘뇌전단 스캐닝’을 통한 인간 복제 및 이식은 우주평의회에서 인권 침해와 같은 문제들로 인해 법률로 금지한다. 그러나 권력자들과 암흑가, 심지어는 종교계에서도 ‘뇌전단 스캐닝’의 무분별한 실험이 일어나고 있어 과학과 종교 및 사회 간의 큰 갈등 이슈로 남아있다.
<덴마>에서 다루어지는 ‘뇌전단 스캐닝’의 개념은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두 가지 생각해 볼 만한 거리를 던져준다. 하나는 육체와 정신이 나의 존재를 규정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가, 즉 육체로 대비되는 물질과 정신이나 기억으로 대비되는 관념이 모두 실체로서 존재하는가 혹은 둘 중 하나만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과학기술에서 인간 복제를 포함한 생명 복제의 문제가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유전자공학과 뇌과학의 발전은 무섭도록 우리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해체시키는 학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발전은 곧 인간의 고귀함과 상징성을 길가의 돌맹이와 같이 그 권위를 추락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계와 사회에서 이에 대한 시험 그 자체에 반대를 펼치고 있으며 우리는 과학의 발전과 인간성의 보존 중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참고자료
- 양영순, <덴마>, NAVER
아시아철학의기초_2012101027 국어국문학과 장정민.hwp
첫댓글 인간은 몸인가요? 기억인가요? 이 둘의 합인가요? 이 질문은 상당히 오래되었습니다만, 아직도 유효하지요. 그런데 어쩌면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다른 답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 또한 인간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