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장은 죽은 자를 살리는 말씀이고
6장은 말씀을 듣고 살아난 자가 먹는 말씀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
죽은 자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사망을 안고
운명적으로 허물과 죄로 죽은(엡2:1) 상태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육신으로 살다가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 사망에
의해 사망이 가는 둘째 사망(계20:14) 곧 불 못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 무섭습니다.
어떤 이들은 지금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서 영생을 얻는
구원을 모르고 주님이 다시 오시면 그때 첫째부활에 참여를 한다고 벼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목적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바로 흰 보좌 심판입니다. 생명을 가진 자는 생명을 가진 채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 그 앞에서 서고 사망을 가진 자는 사망을
가진 채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 흰 보좌 심판 앞에 서게 됩니다(요5:29)
그러므로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고 하는 말씀을 믿고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다는 사실이 지금 결판이 나야지요(요3:36, 요일5:12)
그래야만 요6장에서 살아난 사람들이 먹을 양식에 참예하게 됩니다.
세례(침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과 연합이 되어 그 부활로
죽었던 내가 다시 살고 그 생명으로 영생을 얻었으니 이제 주를 먹고 사는 겁니다(요6:57)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았으니 즉 거듭났으니 그리스도를 먹고 산다는 간단한 이치죠.
그런데 예수님이 떡에 대한 말씀 하시니(요6:5) 빌립은 얼른
이 백 데나리온은 있어야 한다며 계산을 잽싸게 해 냅니다(요6:7)
지금도 주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의 일용할 양식에 대해서 말이 많습니다.
오직 영의 양식이냐 아니면 생활비 전체냐 하는 이야깁니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그 양식이 뭐라고 말하던 그게 그 사람의 영적 수준입니다.
다만 주님이 당부하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마6:33) 말씀에 우리의 기도를 늘 비추어 봐야 할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육신의 것이라면 일용할 양식도 당연히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영의 영역이면 일용할 양식 또한 그렇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돈이 되는 것이면 일용할
양식이 육신적이며 생활을 위한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와 그의 의로 돈을 바꿀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세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과연 통장이나 금고에 넣을 수가 있을까요?
사람이 고통스러운 것은 영혼의 창고가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마음이 공허하고 몸의 기운이 쭉쭉 빠지는 겁니다.
사람이 머리 아프고 똥줄이 타는 이유는 무슨 일이 잘 안되어서가
아니라 영혼의 양식이 기갈인 상태이기 때문입니다(암8:11절 참조)
그래서 마5:3절 “심령이 가난 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뜻은 성령에 대한 배고픔을 느끼는 겁니다(poor in Spirit)
목마른 사슴이 시내를 찾듯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간절히 사모하는 상태입니다.
혼돈하고 공허하여 흑암이 깊음 가운데 가라앉고 있는 상태지만 성령이
암탉이 병아리를 감싸듯 우리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성령을 사모합니다(창1:2)
그리스도인들이 머리와 팔다리가 묵직하고 마음의 상태가
늘 개운치가 않는 이유는 영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는 원래 선천적으로 연약한 사람이 아니라면 자신 안에
임재 역사하시는 성령의 기름부음 여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 다음 안드레가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요6:9)
하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사건이 나옵니다. 오병이어라고 하지요?
우리가 아는 대로 비록 적은 것이지만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사건은 오병이어로 5000명이 먹고 12 바구니가 남았다는 음식 이야기이긴 합니다.
물론 물질도 하나님께 드려지면 크게 쓰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물질을 많이 드려 뻥튀기하자는 말을 하고자 하심이 아니라
비록 우리가 오병이어와 같이 한 끼 식사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면 큰일을 할 수 있음을 영적으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옛날 기드온과 300용사의 이야기를 상기해 보세요.
그들도 성경은 보리떡 한 덩이에 비유했습니다(삿7;13)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물질은 하나님께 드리기는 해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습니다. 아니 드리는 방법을 모르겠지요.
유대인들처럼 언제나 대용품을 하나님께 보내 하나님께 안부나 전하고
자신은 하나님께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일날 헌금하는 모습은 흡사 “하나님 이것 잡수시고 다음 연락 할 때까지
저를 잘 돌봐주시고 다시 찾아 뵐 때까지 안녕히 계셔요”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 오병이어의 사건의 진정한 의미는
물질을 하나님의 손에 드리자 하는 것 이상의 차원의 메시지입니다.
비록 보리떡 같은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300명의 군사지만 그들을 통해
메뚜기 떼 같은 미디안을 진멸해 버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는 잘 압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오병이어 같이 보잘것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 되어 주님이 우리의 양식이 되고, 우리가 주님의 손에
드려지는 양식이 된다면 우리를 통해서 그 분은 큰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는 원리를
터득하십시오. 로마서의 복음의 전개 과정을 자신에게 반복 적용해 보세요.
그러면 죄와 육체를 처리하고 성령이 꿈틀거리며 일하시는
새로운 체질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진리를 배우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세례와 성찬의 의식과 함께 그의 오심과 죽으심
그리고 살아나심과 승천과 성령의 임하심을 믿음으로 찬찬히 따라가 보세요.
그 때부터 성령과 진리로 참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될 겁니다.
참 예배야말로 진정한 헌신입니다. 참 예배를 드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께 제대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많은 영혼들의 생명을
살리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사명을 알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