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의 서편에 작은 개울이 있고 개월 건너편에 야트막하지만 꽤나 가파른 언덕에 육각형 단칸 모양의 건물이 자리잡고 있는데 그게 환벽정(環碧亭)이다.그 정자는 16세기 초에 건축되어 이후 몇 번의 중건과 개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개교 110년을 넘긴 신녕초등학교 교가에도 환벽정이 나오는 걸 보면 오래된 역사적 건물임은 분명한 듯하다.
그리고 환벽정 옆으로 난 좁고 가파른 산길을 5분 여 오르면 너른 성환산의 정상이 나온다. 산이래봤자 기껏 해발 151m밖에 되질 않으니 단숨에 오를 수 있는 높이라 하겠다. 비록 고도는 낮은 산이나 정상은 꽤 넓은 곳으로 거기엔 영천신녕지구전승비를 비롯한 갖가지 기념물들이 세워져 있다. 사실 지금은 퇴락한 시골 동네 수준에 다름아니지만 조선말까지는 영천군에서 영천현과 쌍벽을 이루는 신녕현(新寧縣)으로 존재했었다니 믿거나 말거나...
영천신녕승전비는 1950년 8월 30일부터 9월 15일까지 영천 북방의 신녕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국군 제6사단이 영천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북한군 제8사단의 공격을 저지시킨 신녕전투의 승리를 기념하는 기념물이란다. 우리가 어릴 적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승전비 주변을 맴돌며 뛰어놀았던 그곳이 6.25 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장이요, 나라의 존망을 결정하였던 중요한 승전지의 하나였던 것이다. 이하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지켜낸 전환점이 된 신녕전투의 역사적 전투 내역을 살펴 본다.
북한군 제2군단은 그들의 주공격선이 투입된 다부동(군위군)∼효령(의성군) 일대에서 돌파계획이 좌절되자, 의흥(의성군)∼신녕(당시 영천군) 라인에 투입된 제8사단에 전차부대를 증원하였다. 이에 고무된 북한군 제8사단은 신녕∼하양(당시 경산군) 라인을 목표로 대대적인 돌파 및 침투작전을 전개하며 8월말에는 조림산∼화산 라인까지 진출하였다. 하지만 적은 연일 계속되는 국군 및 유엔군의 지상 작전과 공중폭격으로 상당한 병력과 장비의 손실을 입었을 뿐 아니라 사기마저 극도로 저하되어 있는 상태였다. 여담이지만, 그러고 봉게 세월회 회장 신관군과 내가 살았던 이곳은 겨우 갑령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어린 시절을 보냈었구만그랴.
반면에 위천(당시 경산군)을 따라 방어선을 형성했던 국군 제6사단은 전차를 앞세운 적의 강력한 공격에 주저항선이 와해되자, 558고지∼637고지∼화산을 연하는 선에 임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이 선에서 적군을 저지하기로 작정하였다.
9월초 인접 제15사단의 영천 점령에 고무된 북한군 제8사단은 신녕을 점령·돌파하여 영천으로 진격하기 위해 화산 일대(의성군과 당시 영천군의 경계)에 주공을 두고 주간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국군 제6사단은 포격을 집중해 적의 대열을 분산시키고, 유엔 폭격기와 전폭기 혼성편대가 진지 정면의 적에 맹폭을 가함으로써, 적의 총공격은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기회를 포착한 제6사단은 즉시 방어진지 전방으로 반격해 전과확대에 돌입하였다. 적 제8사단은 이후 공세작전을 중단한 채 현 전선만을 유지하고 야간에 중대규모 수준의 소규모 전투만을 전개하였다.
10여 일간에 걸친 낮과 밤의 전투를 거듭하는 가운데 9월 중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신녕 지역의 북한군 제8사단은 고립무원의 지경에 빠지고, 신녕을 거쳐 영천을 우회 공격하려던 적의 기도는 완전히 좌절되었다. 이로써 낙동강 방어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의 총반격을 위한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었으니, 신녕전투의 승리가 가져온 결과는 대단한 것이었다고 육군본부의 전쟁사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