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헌공 1571.-1645, 창발 1599-1653
창발-정헌=30살 차이
정헌 1629-1676(덕계)
정의 1631-1698(대여)
매헌공이 돌아가실 때 창발은 46세이고 정헌은 16세인 것으로 보아 정헌은 결혼도 하지 않고 어려서 아버지의 제사를 창발할배가 먼저 모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족보나 성씨를 가진 사람이 10-20[%] 내외인 상태에 우리 집안도 족보가 필요한 상태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최초 족보는 1476년 안동권씨 세보인 성화보이고, 우리 족보는 1668년 무신보인 학성세보가 최초 만들어진 것이다.
무신보를 만들 때, 창발은 69세이고, 무신보 작성에 참여한 정의 할배는 37세인 것으로 보아. 창발할배는 상당히 노쇠한 상태로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정의 할매는 28세에 울산향교 석전에서 구강서원 창건을 발의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신 것으로 보아 상당한 학식을 지닌 지녔을 것이다.
무신보를 만들면서 중리 문씨 할매 자손과 심씨 할매 자손은 서손으로 해놓은 것으로 보아. 이 때부터 손씨 할매 자손을 제사를 모셨을 것으로 보인다.
18-19세기 근세에 들어 문중에서 족보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평민층에서도 성씨를 가지게 되었다.
우리 중리문중에서도 무선보 이후 각 집안 별 파세보를 작성하게 우리 되었고, 1868년 무신부 (학성세보), 1904년 갑진보, 1952년 와산할배 가첩, 1953년 계사보 (서면파보), 1972년 학성이씨 대동보, 1997년 서면파보가 만들어졌고, '용이천가례 봉선사'라는 글이 들어간 족보는 계사보에 처음 표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근세에 들어와 무신보의 잘못에 대해 격정을 통해 서자로 무신보에 등재한 것이 잘못되었음이 확정되었다.
무신보의 잘못에 대해 1833년 주남의 이승명(판관공 16세손) 등이 이근찬(용암)을 상대로 46년간 격정을 통해 서손으로 한 것이 잘못되었음이 밝혀졌으나 일부 일족들이 인정을 하지 않고 1953년 서면 파보를 만들면서 '용이천가례 봉선사'를 인용하여 내려오다 1997년 서면파보를 만들면서 이수전, 이동환, 이수철 등의 중재로 화합 차원에서 삭제되었다.
2024년 10월 5일에는 중리와 연산계를 합친 문중이 발족되어 새로운 통합된 ‘학성이씨 서면파 매헌공문중회’로 양재 이수춘 초대 회장으로 통합 되었다.
무신보를 만들면서 문씨 할매와 심씨 할매는 서손으로 되어 그 후손들은 학문을 익힐 수도 없었으며, 선조 숭모 행사에도 참석하지 못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즉 학문을 익히지 못하고 문중행사에 참여도 하지 못하자, 우리 중리 집안에서는 매헌공의 10세손인 구락(1866-1929: 족보에는 성락(成洛), 채욱씨의 증조부)공이 매헌공과 강성문씨의 추모지소로 체화당(棣華堂)을 주남에 축조하였으나 10년 뒤 돌아가시고 일제 강점기로 어려워 축조한지 20여년 만인 1944년 은진송씨에게 매각되었다.
우리 강성문씨 후손들이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276년 만에 어려운 일제하에 끼니조차 해결도 어려운 시기 임에도 별도 재실을 지어 오직 일념의 조상 숭배를 위한 지극 정성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우리 후손들은 고개 숙여 감사함과 존경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1. 주요 인물 및 연도 정리
| 인물 | 생몰연도 | 관계 | 비고 |
| 매헌공 | 1571–1645 | 서면파 시조 | 창발의 부친, 정헌/정의의 조부 |
| 창발 | 1599–1653 | 매헌공 장자 | 정헌·정의의 부친 |
| 정헌(덕계) | 1629–1676 | 창발의 장자 | 무신보 작성 당시 40대 후반 |
| 정의(대여) | 1631–1698 | 창발의 차자 | 무신보 주도 참여 (1668년, 당시 37세) |
| 구락(성락) | 1866–1929 | 매헌공 10세손 | 체화당 건립 (주남) |
2. 족보 연혁 요약
| 연도 | 족보명 | 주요 특징 |
| 1476 | 안동권씨 성화보 | 조선 최초 족보 (참고용) |
| 1668 | 학성세보 (무신보) | 학성이씨 최초 족보. 정의 주도. 창발 고령으로 미참 |
| 1868 | 무신부보 | 파보 형태 |
| 1904 | 갑진보 | - |
| 1952 | 와산할배 가첩 | - 온양에 사셨음 |
| 1953 | 계사보 (서면파보) | "용이천가례 봉선사" 문구 등장 |
| 1972 | 학성이씨 대동보 | 대동보 성격 |
| 1997 | 서면파보 | "용이천가례" 삭제 (중재: 이수전, 이동환, 이수철) |
3. 서손 논쟁과 문중 화합
| 시기 | 내용 |
| 1668 | 무신보에서 문씨/심씨 자손을 서손으로 등재 |
| 이후 | 서손 자손 학문 및 문중 행사 제한 |
| 1833~1879 | 이승명 등 → 이근찬 상대로 격정 제기 (46년간 논쟁) |
| 1953 | 계사보에 "용이천가례 봉선사" 문구 삽입 |
| 1997 | 서면파보에서 해당 문구 삭제 → 문중 화합 도모 |
| 2024.10.5 | '학성이씨 서면파 매헌공문중회'로 통합 발족 (초대 회장: 양재 이수춘) |
4. 체화당 건립과 매각
체화당(棣華堂)
건립자: 구락공 (성락, 매헌공 10세손)
시기: 일제강점기 (1920년대 초 추정)
목적: 매헌공과 강성문씨 추모
상황: 구락공 사후, 경제적 곤란으로 1944년 은진송씨에 매각
가계도 도표
매헌공 (1571–1645)
창발 (1599–1653) 정헌 (1629–1676) 정의 (1631–1698) 정례,정지,정신
구락(성락, 1866–1929)
마무리 메시지
276년 만에 체화당을 세운 구락공의 뜻은 조상 숭배의 한과 정성이 응축된 결정체이며, 서손 논란에도 굴하지 않고 조상의 은덕을 기억하고자 했던 후손들의 헌신입니다.
우리 후손들은 이 가슴 아픈 역사와 화합의 노력을 기억하고, 문중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계승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