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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生은 말을 달려 草溪에서 公을 뵙고 며칠동안 從行 하였다.
○ 戊辰日 : 陜川에 도착, 梅月樓에 오르고 庚午日 雲溪에 돌아오다.
군수 金永錘가 객관의 동북에 새 누각을 세웠는데, 마침 완성되었으나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鄭公이 梅月樓라 명명하고 先生은 樓記를 지었다. (記文은 文集 3卷 참조)
○ 辛未日 : 通德郞 홍문관 著作 겸 경연 說經에 전직인 注書와 檢閱직을 겸직하도록 제수하고 독촉하는 교지가 있었다. 그러나 이를 固辭하고 취임하지 않다.
○ 丙子日 : 寒暄과 함께 冶城에 가서 伽倻山을 유람하고 釣賢堂에 머물면서 강학하다.
方太和, 宋懼甫, 李浩源, 安時叔, 河應期 등도 와서 같이 놀았다. 그리고 함께 머물면서 춘추에 대한 강을 했으며 나중에 하산하여 부도(浮屠)에 은거중인 노승 螺和尙의 강설도 있었다.
先生은 堂記를 지어 게시하였다. (文集 3卷 참조)
◉ 秋 7月 丙辰 : 홍문관 博士겸 경연의 司經, 춘추관 記事官, 世子侍講院1) 說書에 승직하고 이전의 注書, 檢閱직은 그대로 겸하도록 하는 교지가 내려 고사하였는데 윤허되지 않았다.
○ 乙丑日 : 부름을 재촉(促召)하는 교지가 내려 新舊職을 거두어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 庚午日에 또 부름의 명을 받아 己卯日에 비로소 배명하고 다음날 또 힘껏 고사하다.
◉ 8月 癸未 : 교지가 내려 注書와 說書직이 경질되고 朝奉大夫, 홍문관 副修撰, 知製敎(王의 敎書 등을 초안하여 올리는 관직) 겸 경연의 檢討官, 춘추관 記事官으로 승직되고 예문관 檢閱직은 그대로 가지게 되다. 이에 전과 같이 재차 고사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아 직임에 나아가다.
先生 이후 知製敎와 經筵, 春秋館의 직함을 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성종의 치세에 비록 玉堂(홍문관의 실무직)에서 다른 직책을 배수하더라도 종전직책을 아울러 兼帶하였는데, 이는 모두 임금의 특별한 배려에 의한 것으로써 신하된 사람으로 이 이상의 영예가 있을 수 없었다.
◉ 9月 庚申 : 秋江과 함께 三角山에 있는 雪岑스님 金悅卿을 방문하다.
悅卿의 이름은 時習2)이요 호는 東峰 또는 梅月堂인데 고려 명신 金台鉉의 후손이다. 5세 때 詩에 능하여 神童으로 이름나서 세종대왕 앞에 불려가 詩作 시험을 받은 바 있다.
1455년 乙亥(단종 3년, 세조 원년) 山寺에서 독서를 하고 있던 중 단종의 왕위 선양소식을 듣고는 즉시 문을 닫고 대성통곡하며 그의 책을 불살라 칙간에 처넣고 달아나 머리를 풀어 늘어뜨리고 중이 되어 名山을 두루 유람하며 방랑했다. 외견상으로 그의 사람됨은 호탕하고 재기가 뛰어나며 대범하고 솔직하며 뜻이 굳고 곧았다. 당시의 세속에 대하여 슬퍼하고 분통해 하며 거짓 미친 체하고 스스로 은둔하였다.
달 밝은 밤을 만나면 매양 이소경(離騷經)3)을 노래하고 노래가 파하면 통곡했다. 나무를 마주 대하고 題詩를 지어 읊조리기를 즐겨 했는데, 한참 지나서는 문득 통곡하고 지워버리거나 간혹 종이에 써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고 물이나 불 속에 던져 버리곤 했다. 사람들은 그의 마음속을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참으로 세상을 숨어사는 節義之士이었다.
先生과는 나이 차이를 불고하고 許交하여 서로 깊이 맺은 사이였다. 이 때 雪岑(일찍이 麟蹄 雪嶽에 오래 은거한 연유로 지은 自號)이 重興寺(北漢山에 있었으나 지금은 폐사)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秋江과 더불어 술을 가지고 방문하였다. 사람들을 물리치고 세 사람이 둘러앉아 밤새 담소하고 드디어는 함께 白雲台에 등정하였으며 道峰에 이르기까지 무려 5일 동안 같이 지내고 헤어졌다. 세분은 다같이 절조가 높고 행실이 고상하며 博學하고 雄辯이었으며 물질에 얽매이지 않는 세계에서 從遊했다. 그 담론 속에는 필시 上下, 古今, 縱橫 그리고 하늘과 사람에 관한 것이 있어 가히 세상에 전하여 後生들로 하여금 행하게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두 없애고 기록에 남기지 않았는데, 그 말씀 속에는 忌諱하는 바에 저촉되는 것이 많아 그렇게 한 것인지 後生들이 감히 엿볼 바가 아니다.
○ 丙子日 : 成均館 典籍 겸 中學 敎授로 이동 보직 命이 내려 고사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
◉ 閏月 丁亥 : 또 다시 翰苑의 겸직을 사양하였으나 윤허되지 않다.
◉ 10月 丙辰 : 朝散大夫 사헌부 監察이 종전 직함에 추가하여 제수되어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 戊午日 : 時政의 폐단 7 개 사항을 논하는 疏를 올리다.
○ 戊寅日 : 다시 檢閱직을 사임하고 대신 一蠹를 천거하여 윤허를 받다. 己卯日에 檢閱직이 경질되고 待敎(檢閱의 상위직)로 승직됨에 고사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배명하다.
先生은 一蠹가 과거에 급제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 대신 국사를 관장할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다.’ 라고 하고 자기 대신으로 추천하였는데, 그 소장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새로 급제한 臣 鄭汝昌은 道가 天人에 통하고 학문은 체용(體用 : 原理와 運用)을 갖추었으며 性情은 욕심 없이 담담하고 器質은 단정하며 몸가짐은 청렴결백하여 곤궁을 견디고 모든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어질고 너그러우며 효성과 우애가 있고 진실과 믿음이 있어 가히 풍속을 바르게 할 만하고 그의 도타운 겸양은 가히 백성을 敎化할 만 하옵니다. 또한 깊고 넓은 學問과 공평무사한 논의는 모두 그의 經學에 바탕을 두고 있어 가히 顧問의 자격을 갖추었으며 식견과 도량이 깊고 밝으며 문장의 어휘가 풍부하여 예스런 면모가 있어 가히 제찬(制撰 : 임금의 말이나 명령을 대신 짓는 일)을 맡길 만하고 뿐만 아니라 말을 받아 기록하는데 있어서는 細史를 다룰 재주가 뛰어납니다. 그 외의 일은 모두 하찮은 재주에 속합니다. 세상에 알려진 그의 행실의 평판은 온 儒林에 빛나고 있고 시대적 人望과 年輩 모두 臣보다 앞서 있습니다. 전하 엎드려 바라옵건대 臣대신 이 사람을 뽑아 등용하소서. 그리하여 유학을 숭상하고 문신을 중히 여기며 어진 이가 진출하고 불초(不肖)는 물러가게 하는 政事를 펴시어 聖朝를 빛나게 하소서.
이에 주상은 그 말을 깊이 납득하여 先生을 待敎로 승진시키고 一蠹를 檢閱로 보임시켰다.
◉ 11月 己丑 : 본직을 가진 채 陳賀使 書狀官4)으로 임명되어 明나라 서울에 가다.
◎ 1491년 辛亥 (성종 22년, 先生 28세)
◉ 春 1月 : 燕京(지금의 北京) 烏蠻館에 체재하다.
◉ 2月 庚戌 : 禮部 員外郞 程愈를 만나 小學集說을 얻다.
先生은 몸은 비록 동방의 한 쪽에 치우쳐 살고 있으나 뜻은 中華의 君子들 즉 위로는 程朱(程子와 朱子)로부터 아래로 金許(金履祥과 許衡 : 모두 元대의 유학자)에 이르기까지 흠모하면서 항상 이들과 同時代가 아니라서 서로 만나보지 못함을 한탄하곤 했다. 또한 현재 중국에 있는 賢士들을 생각하고 한 번 만나 볼 생각이 있었는데, 전 번에 왔을 때 이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이번에도 천자를 알현하기 위하여 힘들여 방문해 와서 끝내 못보고 곧 귀국하는가? 했는데 伴送(호송관) 劉銊果가 두 사람을 만나게 했다. 그 중 한 사람은 道를 좋아하는 程愈요 또 한 사람은 博學한 周銓이었다.
愈는 당시 禮部 員外郞이었는데, 先生이 가서 만나보고 그의 道의 깊이를 시험해 보기 위해 천근한 말로 求道의 질문을 하였다. 愈는 자기가 지은 小學集說과 晦翁(朱子)書 한 첩을 先生에게 주었다. 先生이 생각하기를 이는 茫仲淹(北宋의 학자)이 橫渠(北宋의 학자 張載)에게 중용을 읽을 것을 권하고 兵學 論하기를 허락하지 않은 것과 같은 뜻이라 생각했다. 이별함에 이르러 先生이 시문을 지어 증정하였더니 愈는 이에 화답하는 詩와 序를 지어 전별의 징표로 주었는데 韓歐(唐나라 韓愈와 北宋의 歐陽脩)風의 문장과 洛閩學(程朱學)에 연원을 둔 어휘가 있었다.
또 한 사람 順天府 學士 周銓은 博學하고 詩 읊기를 즐겨하며 정연한 모습은 古人의 풍모가 있고 더불어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先生이 패도(佩刀 : 허리에 차는 칼)를 풀어주고 글을 지어 그에게 증정했더니 銓은 도서와 排律(漢詩의 한 體) 1편을 답례로 주었다. 銓은 말하기를 翰林 李東陽의 文望이 세상에 높다 했다. 先生은 銓을 중개자로 하여 한 번 만나보고 싶었으나 귀국할 기한이 이미 촉박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 燕京에 가는 인편이 있을 때마다 잊지 않고 있다는 뜻을 두 사람에게 전하게 했다. 대체로 선생은 어질고 착한 이를 좋아하고 더불어 즐기기를 좋아했는데, 이런 정성은 천성에서 타고난 것이었으니 이른 바 천하의 善士라면 그의 벗 또한 天下의 善士이렸다.
◉ 3月 癸卯 : 燕京으로부터 귀국, 복명하고 小學集說을 진상하니 주상은 校書館에 하명, 인쇄하여 전국에 반포하게 하다.
先生은 小學註疏(註를 달아 本文을 해설한 것)로서 이 集說과 같은 것이 없다고 跋文을 지어 책 끝에 첨부, 주상에게 入對하여 아뢰었다. 주상은 이를 열람하고 기뻐하며 즉석에서 刊布할 것을 명하고 先生에게는 이 공로를 기리어 말안장을 특별히 하사하여 포상했다.
우리나라에 集說이 있게 된 것은 여기서 연유된 것으로서 소학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 乙巳日 : 전 직함에 겸하여 司諫院 正言이 추가로 제수됨에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아 丙午日에 취임하고 箚子를 올려 정사를 논한 후 귀근(歸覲)할 것을 주청하여 윤허를 받다.
先生은 正言직을 배명한 후 관직 正言이란 이름을 가지고 不正言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箚子로 다음 네 가지 사항을 아뢰었다.
첫째, 임금의 면학(勉叡學)에 대해서는 正心 誠意(大學의 修身)의 중요함을 말하였고
둘째, 조정을 바르게 함(正朝廷)에 대해서는 어진 이를 가까이 하고 간신배를 멀리 (親賢遠奸)하는 계책을 말하였으며
셋째, 東宮의 양육을 돕는 일(輔養東宮)은 宮官을 가려 써서 國本(世子)을 튼튼히 하는 길을 논하였고
넷째, 人才를 양성(作成人才)하는 일은 학교를 일으키고 풍속을 바르게 하는 방법을 논하였다.
그 내용에 있어서 바른 점과 빠지거나 잘못된 점을 지적한 말은 매우 적절했다. 주상은 따뜻이 批答하고 칭찬하며 차례대로 시행하리라 하였다.
그러나 권세 있는 간신배들은 심히 꺼려하였다.
◉ 夏 4月 戊申 : 雲溪에 귀향하다.
○ 丁卯日 : 종전 직함에 겸하여 奉列大夫, 홍문관 修撰에 제수됨에 모친 병환을 이유로 고사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는데, 또 사양하였다.
◉ 5月 辛巳 : 北征都元帥 從事官으로 부름이 있어 상경하는 도중에 면직을 청하는 글을 연이어 올리고 서울에 이르러 또 힘껏 고사하다.
己丑日에 龍驤衛 司正職에 보직변경이 되어 삼가 받겠다는 글(拜章)을 올리고 곧 돌아오다.
野人들이 慶源(함경북도 북단, 6 진의 하나)을 침범함에 주상은 許琮을 北征都元帥로 임명하여 토벌하도록 하였다. 許公은 先生이 兵略에 정통함을 알고 從事官으로 주청하였는데, 주상이 수락하고 역마를 타고 속히 서울로 올라오라는 교지를 내렸다. 先生은 전쟁의 대사라 앉아서 사면만 청할 수가 없어서 상경하면서 또 疏를 올리고 서울에 도착하여 親病이 극히 위독한 상태이니 마지막 봉양을 하게 해 줄 것을 간곡히 乞請 하였다.
이에 주상은 부득이 司正직에 직함을 붙여 두고 歸養하도록 하였다. 先生은 사은하고 곧 귀향하였다.
◉ 6月 甲寅 : 5月 乙未에 본직으로 校書館 博士에 보직하고 綱目校讐廳에 예속시키는 교지가 내리고 재촉하여 부름에 고사하였으나 乙巳日에 또 부름이 있어 6月 甲寅에 비로소 배명하다.
朱子는 資治通鑑에 의거 綱目을 지었는데, 綱(大要)은 春秋를 준거하고 겸하여 여러 史記의 장점을 채록하였으며, 目(細目)은 左氏傳을 준거하였다. 그 후 여러 유학자들의 빼어난 저작들을 고찰 규합하여 다시 정하였는데, 大書(本文)와 分註에서 미완성된 것, 빠진 것들이 있고 간혹 모순된 점도 있었다. 주상은 문학사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선발 設局(임시기구를 설치하는 것)하여 교정하게 했다.
先生은 첫 번째로 선발되었는데, 이 때 자당의 병환은 이미 나은 상태라 부름에 응하여 校讐廳에 부임하였다.
先生은 논의가 맑고 밝으며 義理가 엄정함이 同輩들 가운데 우뚝 뛰어나 朱子의 지은 뜻에(筆意)에 매우 환하게 밝았다. 여러 名公들은 모두 節操를 꺾고 아래 사람의 눈치만 보았다. 고찰하여 결정할 즈음에는 반드시 先生의 말에 좇으니 그 명성이 조정안에 가득했다.
이에 奸黨들은 눈을 흘겼다.
◉ 秋 8月 庚午 : 전직에 겸하여 兵曺佐郞이 제수 되고 거듭 綱目校讐직임에 임명함에 고사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壬申日 배명하다.
◉ 9月 癸未 : 白雲洞의 趙伯符를 방문하다.
伯符의 이름은 之瑞인데, 문학에 능하고 성격이 강직하며 氣節이 있었다. 선생과는 校讐廳에 같이 예속되어 서로 깊이 경애하는 사이였다.
이날 휴일이어서 목욕하고 李仲鈞과 더불어 그의 셋집을 방문하여 산수 좋은 곳에서 술을 마시며 종일 즐겁게 놀고 헤어졌다.
○ 辛未日 : 동료들과 더불어 敦義門 밖에서 西評事 柳智翁을 송별하다.
智翁의 이름은 順汀이고 晋州人인데, 활쏘기와 말 타기를 좋아하고 兵略이 우수하여 文武의 재능이 있었다. 先生은 평소 서로 좋아하고 將相의 그릇이라 믿고 있었다.
그는 일찍이 北道 評事를 하고 있을 때 그 직임을 매우 칭찬한 바 있는데, 이번에 또 西幕(평안도 兵營)에 보직된 것이었다. 이에 兩館(홍문관 및 예문관)및 校讐廳의 여러 僚友들이 서대문 밖에서 송별연을 베풀었다.
先生은 여기서 序를 지어 송별했다. (文集 2卷 참조)
○ 己亥日 : 전직함에 겸하여 吏曺佐郞이 제수되고 강목교수의 직임도 그대로 보임함에 재차 고사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壬寅日에 배명하다.
이는 전 銓郞5) 洪瀚, 李宗準 등의 천거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 冬 10月 丁未 : 綱目校讎가 완성되어 주상에게 보고하였다. 先生은 奉正大夫로 승진되고 銓郞직은 그대로 가지다.
○ 戊申日 : 中訓大夫 忠淸 都事 겸 춘추관 記事官이 제수되어 고사하였으나 윤허되지 않다.
○ 庚申日 : 밤에 흰 무지개가 달을 관통하는 현상이 생겨 임금은 直言을 구하는 敎旨를 내렸다. 壬戌日에 疏를 올려 昭陵 復位를 주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다.
先生은 언젠가 전에 秋江과 이야기하던 중에 昭陵 事件에 화제가 미치자 문득 눈물을 흘리며 昭陵을 復位하지 않는다면 이는 국가의 흠전(欠典 : 典禮上의 결함)이요 백성들의 한 맺힘이 된다고 한 적이 있었다. 지금 주상이 直言을 구하는지라 상소로 그 復位를 청하였는데 그 내용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우리 국가는 금 단지(金甌 : 영토와 주권의 완전하고 견고함의 비유)같이 반듯하고 이지러지거나 빠짐이 없사온데 다만 臣이 보는 바로는 한 가지 결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綱常(三綱과 五常)이 무너진 가운데서도 전 조정의 신하된 사람들이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서서 희희낙락 즐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무엇이 이지러지고 빠진 것인지 모르고 있으니 가히 통탄할 일입니다.
자고로 帝王의 廟에는 獨主(홀로 있는 神主)가 없는 법이온대 유독 우리 文宗廟에만 獨主입니다. 이는 綱常의 결함이요 典禮의 결함으로서 이보다 더 큰 일이 없습니다. 光廟(世祖)는 세상을 구제할 지략을 감추어 왔으나 뭇 사람의 마음(衆心)이 다그쳐와 부득이 寶位를 선양 받게 되었고 昭陵을 폐한 것도 光廟의 본의가 아니라 생각됩니다. 臣이 듣기로는 文廟가 동궁일 때 昭陵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여서 魯山의 모의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만약 魯山의 어머니라는 연고가 그 까닭이라면 당시 首謀者 여러 사람들의 자식은 벌을 받았으되 여식들은 바깥일에 무관하다 하여 죄를 용서받은 사실이 있습니다. 宋玹壽는 魯山의 장인이 온대 그의 아들 琚와 조카 瑛 등은 이미 先王의 죄 사함의 은총을 입어 여러 왕조에 관직을 가졌습니다. 그러 하온즉 어찌 昭陵을 다시 罪 赦할 수 없겠습니까?
옛날 중국 漢나라 昭帝는 上官皇后의 부친 安이 복종을 거역하는 모의를 하다가 誅殺되었는데, 皇后는 나이 어려 모의에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므로 폐위를 당하지 않았으며 그의 모친은 敬夫人으로 追封하고 園邑(묘 주위에 있는 묘지기의 마을)을 두어 享祀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아조의 昭憲王妃(세종 비)의 부친 沈溫이 賜死되고 그의 처 安氏는 관천(官賤)으로 이적되었는데 당시 죄인의 여식으로 王妃됨은 불가하다는 논의가 있었으나 太宗께서 말씀하시기를 “오! 이 무슨 말인고! 恭妃는 동요할 이유가 만무하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세종 조에 이르러 대신들이 말하기를 “한 나라 王后의 모친을 천인으로 지내게 함은 恩誼上 불가하오니 賤籍을 특별히 제거하고 작첩(爵牒)을 환급함과 아울러 그들의 자녀들도 같이 면제하여야 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는 私親의 죄가 무관한 王后, 王妃에게 미칠 수 없으며 王后, 王妃의 은혜는 이미 죄를 입은 부모에게도 두루 미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臣이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昭陵이 생전에 곤위(壼位)에 계실 때는 충심으로 존경을 받았으며 文宗의 치세에는 폐하여 내치라(廢黜)는 명이 있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지 15 년이 지나서 어머니와 아우라는 연고로 해서 그 陵廟를 추후에 훼손하였으니 이는 漢나라 昭帝의 上官皇后 赦罪와 恭妃에 대한 太宗의 처리와는 크게 어긋나옵니다. 이 어찌 綱常 典禮의 결함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聖朝는 어지심이 깊고 은택이 두터워 가히 五帝 三王과 비견되오나 정사의 처리는 오히려 漢나라의 잡스런 覇王에도 미치지 못 하온즉 臣은 남몰래 통탄해 마지않습니다.
성현의 말씀에 “3년을 두고 선친의 道를 고치지 않아야 孝라 할 수 있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자식 된 사람은 그 아비의 道에 옳지 않은 점, 마땅히 고쳐야 되고 급히 고쳐야 될 참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해도 반드시 3년을 기다린 연후에 서서히 개정하도록 하라는 것이며 선친의 도가 비록 옳지 않아도 종신토록 고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3년 동안 관망하라는 字句에 가히 聖人의 깊은 뜻을 엿볼 수 있습니다.
臣의 어리석은 생각에 昭陵의 폐위는 전적으로 옳았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이미 3세대를 지나면서 37년 동안을 보아왔은즉 〈三年無改〉의 교훈에 미룰 수는 없습니다. 昭陵이 있음으로써 뒤를 잇는 왕위 계승의 명분이 선다는 점에 개정의 뜻이 있습니다. 지금의 復位는 명분이 바르고 언론이 순탄할 것이며 아무도 의심쩍어하는 자 없을 것입니다.
臣은 원하옵니다. 속히 昭陵을 復位하시어 (묘역에서) 땔나무 베고 가축 방목하는 것을 금하여 주시고 神主를 文廟에 같이 모시게 하소서. 그러면 이는 나라의 큰 多幸이 될 것입니다.
이에 주상이 친히 批答하여 말하기를 “너는 다른 사람들이 능히 말할 수 없는 바를 능히 말하는구나. 충경(忠鯁 : 충성스럽고 강직함)함이 가상하다. 나 역시 여러 해 마음이 편치 못하였도다. 그러나 이 일은 지극히 중차대한 일인 만큼 마땅히 심사숙고하여 처리하는 절차가 있어야 할 것이다. 너는 거기에 대하여 더 이상 말하지 말고 돌아가서 기다려라.” 라고 하였다.
先生은 史記를 읽을 때마다 奸凶輩들은 권세에 아부하고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들은 해를 입는 史實을 접하게 되며 이때는 미상불 격앙되고 강개(慷慨)할 뿐 아니라 마치 몸소 당한 것 같아 굳건한 의기(剛大之氣)와 忠義心이 생기고 이 마음은 곧 그의 한 몸을 綱常이 만세에 존중되도록 하는데 바쳐야겠다는 의욕을 불러 일으켰다.
昭陵이 폐함을 입은 지 30여 년, 秋江이 일찍이 말하기 “復位에 대한 주청이 여러 조목의 끄트머리에 간신히 오르게 되더라도 奸黨들이 헐뜯고 무고하여 몇 번이나 함정에 빠뜨릴지 예측할 수 없다.” 라고 한 적이 있다. 朝野에서 모두 기피하고 두려워 위축되어 감히 복위에 대하여 말을 꺼내지를 못했는데 先生 홀로 개연(慨然)히 陳疏하였던 것이다. 그 언사는 매우 극진하고 격렬하며 간절하여 듣는 사람들을 감동케 했다.
주상은 너그럽게 嘉納하는 批答을 하였는데 한편에서는 저지하기 위해 요란을 떠는 자가 많았다.
결국 사안은 잠잠해지고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 甲子日 : 주청한 사안이 채용되지 않음을 보고 스스로 탄핵한 다음 모든 職名을 사면하여 줄 것을 주청하였는데, 윤허되지 않고 속히 부임하라 재촉하는 令이 내렸다. 丁卯日이 지난 다음 비로소 배명하고 公州(忠淸道 監營 소재지)에 갔다.
○ 甲戌日 : 또 다시 사직을 상소했으나 윤허되지 않다.
◉ 11月 丙子 : 親疾로 또 사직疏를 올리고 곧 바로 雲溪에 귀향하였는데, 윤허를 받다.
○ 丁亥日 : 金海에 가서 納陵을 배알하고 會老堂記를 짓다.
옛날부터 늘 행하여 오던 일로서 冬至日에 父老들이 모여 陵에 祭祀를 지내고 제사에 사용한 태뢰(太牢 : 소, 돼지, 양을 갖춘 제물)는 향리 인들이 다같이 나누어 먹었는데, 이 날이 바로 그 날이었다.
前 縣令 金係錦, 縣監 白啓英, 引儀 裵炯, 參軍 宋叔亨 그리고 先生의 종형 진사 伯堅 등이 鄕正(좌수)으로서 향리 父老들과 함께 堂에서 모임을 갖고 先生에게 堂記를 청함에 會老堂記를 지었다.(文集 3卷 및 續東文選 14권 참조)
◎ 1492년 壬子 (성종 23년, 선생 29세)
◉ 春 1月 己丑 : 木川에 있는 별서(別墅 : 일종의 별장)에 가다.
별서는 木川縣 동쪽 鵲城山 밑 磻谷 즉 先生 계배부인 본댁 인근에 있었다. 선생은 일찍이 그 山과 계곡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계곡 위쪽에 작은 별서를 지어 노비 두 사람을 두고 왕래하면서 휴식소로 사용하여 왔는데, 이번에 또 精舍를 지어 편액에 竹林이라 새기고 그 오른 쪽에 朱子를 우러러본다는 뜻으로 寓慕라 다시 새기었다.
◉ 2月 壬子 : 홍문관 修撰에 제수하는 교지가 내리고 재촉하여 불렀으나 사양하는 疏를 올리고 취임하지 않다.
○ 癸亥日 : 雲溪에 귀향, 모부인을 뵙고 己巳日에 밀양에 가서 金선생을 배알, 7일간 周易을 講한 다음 돌아오다.
○ 辛未日 : 다시 재촉하여 부르는 교지가 있었으나 또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다.
◉ 3月 庚辰 : 다시 吏曺佐郞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상소하여 賜暇讀書를 청하다.
상소 내용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臣은 어린 나이에 등과하여 벼슬하고 있사온데, 배움은 아직 임금을 섬기는 방법도 알지 못하고 進言은 물론 계옥(啓沃 : 사심 없이 충성된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를 임금에게 사뢰는 것)의 실적도 볼 수 없으며 처세에 있어서도 입을 열면 忌諱하는 바를 범하여 시기하고 배척하는 원한을 많이 쌓아 왔습니다. 修身도 다 할 수 없는 몸이 어찌 治人을 한가하게 논할 수 있겠습니까.
古人이 훈계한 바에 의하면 〈少年登科는 一不幸〉이라 했는데, 이는 臣을 두고 이르는 말 같습니다. 옛말에 “40세는 되어야 벼슬살이에 힘쓸 수 있다.” 라고 했는데, 이것이 臣이 道를 이루고 德을 세운 연후에 벼슬살이에 나아가기를 바라는 所以이옵니다. 지금 臣은 나이 30미만 이온데, 화려한 요직인 翰苑(예문관), 玉署(홍문관), 史官과 吏曺의 銓郞 등을 거치면서 승진해 왔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淸選이라고 합니다. 臣이 이런 직책을 모두 겸하고 있는데 臣이 무슨 재능이 있어 이 분에 넘치는 직책들을 감히 차지하겠습니까? 비할 데 없이 과분한 은총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禍福은 無門이라 오직 사람이 부르는 바에 따를 뿐이며 사람의 재앙이 없으면 반드시 천벌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미칠 때마다 공연히 두려워 집니다. 오직 聖上께서 보전하신 이 태평 세상에 臣이 태어나 일찍이 학업에 힘쓰고자 하였으나 벼슬살이에 여가가 없어 실은 평소의 뜻을 어기고 있습니다.
엎드려 성상의 자애를 걸구하오니 속히 臣의 직임을 교체하여 田野로 물러나게 하여 주소서. 그리고 10년의 여가를 주시어 독서함으로써 修道하고 마음을 다스리며 착한 천성을 기르고 학업의 발전을 얻은 다음 從仕하게 하시어 전화위복되게 하여 주소서….
이에 주상은 너그러이 批答하되 허락하지 않았다.
○ 丙戌日 : 또 부름이 있어 辛卯日에 비로소 배명하다.
壬辰日에 다시 상소하여 하사 받은 저택을 반환하고 田里로 퇴거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했다.
◉ 夏 4月 乙卯 : 종전 직함에 더하여 修撰직이 다시 제수 되어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다.
◉ 5月 乙亥 : 端午 帖子 12章을 應製(王命에 응하여 詩文을 짓는 일)하다.
이 날 주상이 仁政殿에 나와 교시하여 말하기를 “최근 많은 帖子(帖子詞)6)들을 보았는데 내 뜻을 전하지 못하였다. 지금부터 문신들을 궐 안에 모이게 하라.” 라고 하고, 詩에 능한 재상에게 영을 내려 高下 등급을 매기고 으뜸을 차지한 사람에게는 상을 내리게 하였다.
先生은 帖子 12 편을 지어 四殿에 올렸는데, 그 내용에는 칭송, 축도, 찬미하는 말이 극진하고 여기에 경계(箴誡)하고 바르게 諫하는 말이 이어졌다. 명을 받은 재상은 先生의 글을 제 3위의 서열에 올렸다. 주상은 이를 살펴보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 古體詩를 쓴 사람은 여기에 충성과 사랑의 마음을 끼쳐 놓았다.” 라고 하고, 제 1위로 뽑아 안감을 갖춘 녹색 비단 옷감 한 벌을 포상으로 하사하였다.
◉ 秋 7月 癸未 : 中直大夫 홍문관 副敎理, 知製敎 겸 경연의 侍讀官, 춘추관 記注官, 예문관 奉敎로 승진되어 재차 고사하였으나 윤허되지 않다.
◉ 8月 丁未 : 어가(御駕 : 임금이 타는 수레)를 수행, 成均館에 이르러 석전(釋奠 : 문묘에서 공자를 제사하는 의식)을 지내고 백관 및 유생과 함께 하련대(下輦台)에서 연회에 참석하다.
이날 주상은 成均館에 거동하여 친히 先聖에 석전을 지내고 이어 하련대에 임하여 백관과 유생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재상 급 문신들이 殿內에서 입시하고 당하관 문신들이 뜰아래에 나누어 앉았으며 연회에 참석한 유생 3000여 인은 橋門을 둘러싸고 앉았다. 구경꾼들이 무려 만여 명이나 되었는데, 상하가 모두 꽃을 꽂았다.
이에 앞서 홍문관에 명하여 大射禮樂章7)을 본떠 새로 樂章을 제작하게 하였는데, 이제 악공들로 하여금 그 노래를 부르게 하고 각 부서에서 맡아 준비한 음식들을 권하여 먹게 하였다.
○ 壬子日 : 종전 직함에 겸하여 成均館 直講이 제수 되다.
◉ 9月 己巳 : 佔畢齋 金先生의 訃音이 다다라 글을 지어 요곡(遙哭 : 멀리서 곡함)하며 禮에 따라 心喪(제자가 스승의 상을 입는 것)을 행하다.
金先生은 1489년 己酉(성종 20년) 형조판서 직을 마지막으로 벼슬살이를 마치고 밀양에 돌아가 지금에 이르렀는데, 享年 62세로 별세하였다.
先生은 당장 관직을 풀고 달려가 곡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梅軒公 喪을 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 甲申日(16日) : 梅軒公을 哭하다.
公은 1455년 乙亥(세조 1년) 11月 11日 출생하여 28세 때인 1482년 壬寅(성종 13년)에 문과에 장원한 후 관직에 종사, 형조 좌랑까지 역임하고 지금에 이르러 38세로 卒하였다.
先生의 送終 祭文이 남아있다.(文集 4卷 및 續東文選 19권 참조)
○ 戊子日 : 종전의 직함에 더하여 司諫院 獻納이 제수됨에 형의 장례를 이유로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말미가 주어졌다. 辛卯日에 재차 사양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 癸未日 : 司諫院에 취임하여 忘軒과 더불어 箚子를 올려 권세를 다투고 分黨을 획책하는 李克墩과 成俊을 탄핵하다.
이에 앞서 李克墩이 兵曺 판서를 하고 있을 때 成俊을 北道 兵使로 임명하였는데, 이에 成俊이 노하여 克墩의 아들 李世經을 그의 휘하 評事로 징용하여 克墩 역시 노하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권세 있는 간신으로 서로 세력을 기울여 다투게 되었다. 자기편에 붙는 자는 후대하고 떨어져 나가는 자는 배척하여 제각기 당의 무리를 나누고 있었다.
忘軒은 당시 司諫院 正言을 하고 있었는데, 先生은 이 사람과 더불어 箚子를 올려 탄핵하기를 小人輩들이 서로 공격하고 있어 그대로 두면 牛李의 黨8)과 같이 될 것이니 모두 먼 곳에 귀양 보내야 한다고 주청하였다. 주상은 이를 좇아 당장 克墩과 俊을 파직하고 관직자 명부에서 빼 버렸다.
克墩과 俊은 크게 앙심을 품었다.
○ 丙申日 : 종전 직함에 겸하여 다시 副校理가 제수 되고 賜暇湖堂讀書9)를 하게 되다.
讀書堂은 한강 북쪽 기슭 구 용산 폐사(廢寺)에 있었는데, 성종 19년에 弘文館의 독서 장소로 쓰기 위하여 개축한 것이었다. 지금에 이르러 대제학 魚世謙에게 명하여 先生과 李宗準 등 10인을 賜暇讀書하도록 하였다.
이 제도는 대체로 세종조의 故事(세종이 인재양성을 위하여 集賢殿 學士에게 賜暇讀書하게 한 전례)를 다시 부활하는 것으로서 당시 이들을 湖堂學士라 칭하였다. 명절 때마다 임금은 이들 學士에게 꼭 술을 내리고 잔치를 베풀어주어 당시 사람으로서는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 冬 10月 癸卯 : 湖堂에서 秋江의 訃音을 듣고 곡하다.
秋江은 그의 모친의 훈계에 따라 진사만 하고 벼슬살이는 하지 않았는데, 杏洲에 있는 그의 시골집에서 이제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先生은 통곡하고 애통해 했다. 빈소가 마련된 뒤에 또 제문을 지어 가지고 가서 잔을 올렸다. 강신 할 때 조그마하고 희미한 광채의 서쪽 별자리(奎宿) 하나가 깊은 하늘 속으로 떨어졌다. 斯文(儒學者의 경칭)을 읽고 누구와 더불어 講明의 말을 나눌고!
○ 壬子日 : 누님의 아들 趙如愚로 하여금 제문을 가지고 가서 金先生의 祭를 지내게 하다.
佔翁의 葬期가 곧 다가오는데 마침 梅軒公 장사 일을 방금 해야 하므로 先生은 갈 수가 없어서 제문을 지어 如愚를 보내어 奠禮를 행하게 하였다.
그 제문에는 “선비들은 大經(經書와 같은 큰 스승)을 잃었고 나라에는 典刑10)이 없어 졌습니다. 兄弟의 일이 급하여 전당(鱣堂 : 講堂)에 나아가지 못하옵니다.” 라는 말이 있다. (제문은 文集 4卷 참조)
◉ 11月 庚午 : 梅軒公을 龍仁의 介谷에 장사지내다.
장지는 介谷에 있는 外祖 參議公 墓의 서쪽 베개머리의 언덕이었다.
先生의 遣奠祭文이 남아있다.(文集 4卷 및 續東文選 19卷 참조).
형조판서 蘇隱 李封이 誌文을 짓고 先生이 篆書하였다. 비석에는 黃甲第一名及第靑春三十八浮生이라 했다.
○ 癸酉日 : 鄭而信, 辛德優, 李浪翁이 내방하다.
而信은 誠謹의 字다. 그는 문학에 능하며 충효가 돈독하였다.
辛德優의 이름은 永僖요 호는 安亭인데, 뜻이 크고 기개가 있으며 大節이 있고 과거나 명예에 개의하지 않았다.
李浪翁의 이름은 黿이요 호는 再思堂인데, 성품이 호탕하고 인품과 재능이 유달리 뛰어나 세인들이 그의 문장과 行義를 추앙하고 존경하였다. 이 분들은 모두 先生과 神交를 맺고 있었는데, 함께 服舍(직장)로 先生을 방문하였다. 佔翁과 秋江 그리고 梅軒公이 연이어 서거한 터라 서로 마주 대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심히 탄식하기를 “이는 우리 道의 외로움을 더하는 일이요 朝野의 불행이다.” 라고 하였다. 화제가 佔翁의 시호를 의논하는 사안에 이르자 先生이 文正 아니면 文忠이 적당하겠다고 하자 여러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하기로 확론을 지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浪翁이 太常(太常寺 : 제사와 贈諡일을 담당한 관청)에 있었는데 과연 文忠으로 의결하였다. 이 일로 해서 浪翁은 뒤에 甲子士禍에서 화를 입었다.
○ 乙亥日 : 朴希仁을 곡하다.
希仁의 이름은 增榮이요 호는 訥齋인데, 先生과는 동갑이었다. 효성과 우애가 두텁고 문학을 쌓았는데 居喪 중에 지나친 슬픔으로 性命을 잃어 2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先生은 애석해 하고 그의 아들을 거두었는데 先生의 감화로 가르침을 받은바 되어 후에 천거와 과거를 통하여 名臣이 되었다.
先生의 哀詞가 남아있다. (文集 4卷 참조)
◎ 1493년 癸丑 (성종 24년, 先生 30세)
◉ 春 1月 癸未 : 홍문관 校理에 승진하는 발령을 받아 고사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 甲申日에 또 다시 疏를 올려 해직과 歸覲을 주청하였으나 丙戌日에 頒諭御史11)의 특명을 받게 되어 가는 길에 고향에 귀성하다. 가는 도중 丁亥日 龍仁館에 유숙하면서 鄭光弼과 時事를 논하다.
이 때 光弼과 더불어 嶺․湖南에 頒諭의 명을 받아 조정에 고하고 가던 중 龍仁 객관의 한 방에서 같이 유하면서 담론하였는데, 先生이 시사를 논하면서 강개하여 언사에 격렬한 바가 많았다. 그런데 光弼이 저지하면서 언사가 그렇게 과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에 先生은 분연히 힐책하여 말하기를 “사훈(士勛 : 光弼의 字)마저 비굴한 논리를 편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氣節없는 썩은 선비가 되도록 참아야 한단 말인가! 선비가 어릴 적부터 학업을 닦는 것은 장년이 되어 실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임금의 조정에 들어와서 임금의 녹을 먹고 우리 임금을 堯舜같이, 우리 백성을 堯舜時代의 백성같이 되게 하지 못하고 그저 분주히 뛰어 다니며 잔심부름이나 하고 받들어 순종하면서 녹 먹는 자리나 채우고 있는 것은 곧 자기의 직위 잃을 것만을 걱정하는 소인배가 할 일이다. 임자는 나로 하여금 그것을 본받게 하려는 것인가!
우리 성상은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검소하고 총명하며 용기와 지혜가 있고 어진 이를 좋아하고 여색을 가벼이 여기며 諫言 쫓기를 물 흐르듯이 하고 三代(夏, 殷, 周의 3王朝)의 정치에 관심을 두고 뜻을 펼쳐 일으키시는데 지금의 公卿大夫와 모든 관료와 뭇 선비들은 학문이 저급하고 재주와 식견이 천박하여 아직 임금의 德治를 보필할 좋은 계책 하나 제대로 올렸다는 말을 못 들었으며 時政의 弊端을 교정할 直論을 한 번 제대로 발의했다는 말을 못 들었다. 이래 가지고는 비록 聖人이 임금 자리에 있을 지라도 빛나고 융성한 치세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다. 天子의 使臣 董越이 꾸짖어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임금은 있으되 신하는 없다.’ 라고 했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한데도 임자말대로 봉록을 구하고 영화를 탐하는 따위의 행세를 취할 수 있겠는가. 장차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道를 행해야 할 사람으로서 괴이하지 않은가. 권세에 쏠리고 세력에 부화하는 풍조가 온 세상에 퍼지면 혹 맑고 바른 논의가 있어도 반드시 말이 그와 같아서는 안 된다 하고 온 세상을 몰아세워 결국은 의혹과 아첨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어 파리처럼 악착스럽게, 개처럼 닥치는 대로 부끄럼 없이 오직 자기의 부귀만을 도모할 것이며 그 말세적 풍조의 폐단은 조정의 班列을 市井 정도로 보고 임금과 어버이를 길가는 사람 정도로 보게 되는 데까지 반드시 이르게 될 것이다. 古人이 말 한 바 나라를 잃어 없어진 다음에야 가까워지려 하는가? 라는 말을 士勛은 어찌하여 범하려 하는가? 임자의 평생사업은 내가 잘 알고 있다. 성품과 행실이 선량하고 조심성이 많으며 언론이 법도에 맞고 점잖으며 여기에 겸하여 문학이 넉넉하고 견식이 매우 넓으니 가히 일대의 偉人이 될 만하지 않은가. 나라에 도덕이 무너져 없을 때는 입을 다물고 침묵함으로써 容身(세상에 겨우 몸 붙이고 살아가는 것)에 만족해하고 나라에 도덕이 행해지면 재주와 명망이 있는 사람은 벼슬을 가지는데 만족해한다 했는데 여기에 빠진 것은 剛直함 일세.
그대가 가령 宰相의 자리에 있어 임금을 측근에서 보필할 때 임금이 간사한 말을 잘못 믿어 忠誠 서럽고 어진 이를 욕되게 함을 본다 해도 그대는 반드시 죽음을 무릅쓰고 피눈물을 흘리며 매달려 임금의 마음을 돌려 奸凶을 내치게 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관직이 온전하고 몸뚱이가 百世에 보전된다 해도 어찌 張禹 胡廣의 꾸짖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 士勛은 훗날 내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라고 했다.
이날 밤 일경(一更 : 9시 전후)에 이르러 마침내 돌아서고 말았다. 그 후 光弼은 폐조(廢朝 : 燕山朝)에서 三司를 두루 거치고 兩館을 출입하였는데, 근신하고 침묵함으로써 戊午, 甲子의 양 士禍에서 화를 면했다. 己卯士禍 때는 光弼이 영의정이었는데 눈물을 흘리며 힘을 다하여 趙光祖 등을 구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야심한 밤 옥중에서 光弼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季雲은 나의 앞일을 마치 본 것같이 헤아리었다. 참으로 異人이다.” 라고 했다.
◉ 2月 丙辰 : 雲溪에 이르러 母夫人을 뵙다.
모부인을 뵙는 일이 비록 주상의 명에 의한 것이었지만 王事가 정체해서는 안 되었으므로 겨우 3일 머문 다음 다시 행차하였다.
◉ 3月 己巳 : 密陽에 도착해서는 祭文을 지어 金 佔畢齋선생 墓에 제사를 지내다. (제문은 文集 4卷 참조)
○ 壬申日 : 金海館에 도착, 臨錦堂에서 堂記를 짓다. (文集 3卷 참조)
○ 甲戌日 : 儲福山의 先祖 묘를 성묘하다.
○ 丁亥日 : 河東을 지나다가 섬진의 은거 처에 있는 一蠹를 방문, 大學衍義를 講하다.
一蠹는 일찍이 岳陽洞의 절경을 사랑하여 蟾津 어귀에 집을 지었다. 이 때 그는 世子侍講院의 說書직을 사임하고 돌아와 竹을 심고 梅花를 모종 내며 講誦(뜻을 새기며 읽는 것)하고 시를 읊으며 아주 벼슬을 마칠 것 같았다.
先生은 이곳에 도착하여 하루를 留하며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의 근본을 講하였다.
◉ 夏 4月 癸卯 : 昌寧에서 다시 雲溪에 돌아오다.
◉ 5月 庚辰 : 聞慶에 이르러 頒諭임무를 마치고 바로 서울로 향하다.
○ 甲申日 : 便殿에서 주상을 뵙고 복명한 다음 백성들의 민생고에 대하여 조목조목 아뢰고 거기에 관련된 時政을 논하다. 乙酉日에 전 직함에 겸하여 司憲府 持平이 제수 되어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
先生의 이번 행차는 비록 감찰하는 임무는 아니었지만 한 道를 두루 여행하면서 여러 지방장관들의 청렴과 탐욕, 민생에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등을 분명하게 살펴보고 자세하게 조사하여 조목조목 열거한 책자를 만들어 주상에게 入對하여 보고하였다. 인하여 말씀 올리기를 “治國의 요체는 安民에 있고 安民의 계책은 어진 이를 임용하고 간사한 사람을 멀리함(任賢遠侫)에 있으며 任賢遠佞의 길은 誠正格致(誠意, 正心, 格物, 致知 : 大學의 修身)에 있고 誠正格致의 방법은 講學에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주상은 허심탄회하게 듣고 받아들였다. 先生은 또 當世의 급선무는 안으로는 宮中, 밖으로는 조정에서 항간에 이르기까지 풍속에 대한 임금의 心術이라 하고 政治와 敎育에 관련된 여러 실례들을 일일이 모두 사뢰었다. 가슴속의 진심을 모두 털어놓는데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忠誠스럽고 강직함이 극진하여 좌우의 사람들이 송연(竦然)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주상 역시 안색을 고치고 先生이 퇴장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멀리 물러간 뒤에 곁에 있는 신하들을 둘러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은 지략이 깊고 원대하며 言論이 正大하다. 참으로 宰相의 材木이로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즉시 持平직을 제수 하였다.
先生은 먼저 사뢴 내용을 疏章으로 다시 품신 하였고 주상은 친히 批答하고 포상하며 총애하여 특별히 작위를 한 품계 올려 주었다.
○ 己丑日 : 다시 이전 직함에 겸하여 通訓大夫 弘文館 校理에 제수 되다.
◉ 秋 7月 戊戌 : 본직으로 예문관 應敎를 맡고 賜暇讀書하도록 교지가 내리다.
대제학 洪貴達이 玉堂(홍문관) 학사 중 연소하고 才名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번을 나누어 돌아가면서 賜暇讀書하게 하도록 주청하여 시행되었는데, 先生은 申用漑, 姜渾, 李希舜과 함께 피선되어 湖堂에서 독서하였다. 이 때에 쓰던 五絃琴, 六絃琴, 거문고걸이(琴架), 책상(書案), 책장(書架), 짧은 등잔걸이(短檠) 등에 銘文을 지어 남겼다. (文集 4卷 및 續東文選 11卷, 18卷 참조)
○ 丁巳日 : 下賜酒를 받고 전문(箋文-길흉의 일이 있을 때 임금께 아뢰던 四六體의 글)을 올려 謝恩하다.
주상은 中使(내시)를 보내어 술을 내리면서 손수 쓴 글을 함께 보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너희 문학사들은 모두 이 다음에 크게 쓰일 才士들인 만큼 마땅히 학업에 더욱 힘써서 나의 育英하는 즐거움에 부응하라. 특별히 술을 보내어 뜻을 표하는 것도 그 즐거움의 하나로다. 이에 일동은 箋文을 올려 사은했다.
湖堂에는 전부터 하사된 水晶盞이 있었는데 소반이 없었다. 이제 와서 銅바탕에 황금 도금을 하여 소반을 만들었는데, 소반 가운데(盤心)와 四周에 銘文을 새기었다. 銘文은 先生이 짓고 任熙載가 盤心에 內賜讀書堂 이라는 다섯 자를 八分書體로 써서 양각하고 그 주위의 명문은 姜士浩가 篆字體로 써서 음각하였다. (銘文은 文集 4卷 참조)
◉ 8月 戊子 : 御製 48詠(詩)에 화답하는 詩를 짓고 그 끝에 跋文을 지어 올리다.
당시 대궐 뜰에 있던 사람에게 벼락이 떨어진 사건이 있었다. 주상은 교지를 내려 간언을 구했다. 그리고 임금이 지은 詩 48詠에 대하여 湖堂에 下問하고 화답 詩를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詩는 전에 匪懈堂(安平大君)이 읊은 詩의 제목을 취하고 그 韻을 따서 주상이 지은 것으로써 화훼(花卉), 竹石, 조수(鳥獸), 煙雲 등의 48종을 읊었기 때문에 48詠이 된 것이다. 先生은 그 詩歌에 화답하는 詩를 짓고 그 끝에 跋文을 지어 이었는데 거기에는 빗대어 표현한 경계의 말씀이 포함되어 있었다. (詩는 文集 4卷, 跋文은 文集 2卷 참조)
주상은 친히 스스로를 비평하고 극진히 稱賞하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붓을 잡았다 하면 規諫(옳은 도리로 諫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남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고 包容하고 이해하며 허락함이 크도다.” 라고 하였다.
先生은 참으로 뜻 맞는 임금에게 쓰임을 당한(遭遇) 분이었다. 주상은 예사로운 詞賦에 까지도, 善을 베풀고 邪惡을 막으며 德을 닦는데 힘쓰고 충신의 의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을 빗대어 표현한, 올바르면서도 완곡한 간언을 반드시 올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跋文을 보면 그 대략을 알 수 있다.
◉ 9月 己卯 : 龍仁에 가서 제문을 지어 梅軒公 小祥을 지내다.
先生은 두 형과 세 누이에 대한 우애가 지극히 두터웠는데, 그 중에서도 仲氏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세상을 떠남에 이르러 先生은 슬프게 울부짖으며 오직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 그 제문 두 편을 읽으면 참으로 슬프고 애절하며 측은하고 痛恨스러운 情이 문면에 넘쳐흐른다.
사람들은 이 제문을 중국의 문장가 韓昌黎의 祭十二郞文에 비견된다고들 하였다.(文集 4卷, 續東文選 19卷 참조)
○ 庚申日 : 先生은 秋懷賦를 지어 뜻을 보이다.
先生은 讀書堂에서 달 밝고 고요한 밤을 만날 때면 몇 잔의 술을 마신 후 문득 거문고를 잡고 이 賦를 노래하며 슬프게 타고 慷慨하곤 했는데,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훗날 靜菴이 말하기를 “先生의 이 賦는 문장의 품격이 千古에 드물 뿐 아니라 그 품은 뜻이 慷慨하면서도 격앙하고 그 기개가 웅장하면서도 분방함이 출가이후의 평생의 心迹을 토로한 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 라고 했다. (文集 1卷 및 續東文選 2卷 참조)
◉ 冬 10月 己酉 : 茂豊副正 李摠이 내방, 거문고 曲에 대하여 논하다.
茂豊은 太宗大王의 증손으로 字는 百源이다. 시문에 뛰어나고 음률에 있어서는 當世의 으뜸으로 秀泉副正 李貞恩과 그 명성을 나란히 했다. 일찍이 佔畢齋 문하에서 교유 했는데, 先生과는 神交를 맺은 사이였다.
집이 西湖에 있는데, 이날 밤 달이 밝아 거문고를 가지고 와서 後殿曲을 탔다. 그런데 그 곡의 음률이 심히 애절하여 先生이 말하기를 “이 곡은 태평한 세상의 음이 아니다. 樂은 音에서 비롯되며 그 근본은 만물에 대하는 사람 마음의 느낌에 있다. 그런고로 슬프게 느낄 때는 그 소리가 느긋하지 못하고 낮아지며(噍殺) 즐겁게 느낄 때에는 가락이 화평하고 한가로우며(嘽緩) 기쁘게 느낄 때는 그 소리가 높아져서 흩어지고(發散) 분노를 느낄 때는 거칠고 사나우며(粗厲) 경건할 때는 진지하고 분별이 있으며 애정을 느낄 때는 그 소리가 온화하고 유순하다(和柔). 또 대체로 聲音의 道는 정치와 통한다. 治世의 음은 편안하고 즐거우니 이는 그 정치가 화평한 때문이며 亂世의 음은 원망과 분노가 차있으니 이는 그 정치가 도리에 어그러진 까닭이다. 망국의 음은 슬프고 시름에 잠겨 있으니 이는 그 백성이 곤궁한 까닭이다. 그런고로 그 樂을 들으면 그 정치를 알 수 있고 그 음을 살피면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곡을 들어보니 애절하여 거부감을 느끼게 하고 變調의 宮音(5音의 第1音)은 희미하고 商音(5音의 第2音)은 사나우니 그 중에 살벌함이 들어 있다. 생각건대 이 곡을 만든 사람은 우환과 분노를 지니고 있지 않았을까?” 라고 하였다.
百源이 말하기를 “이는 바로 先王께서 작곡한 것으로 그 음의 근본은 쾌활하고 온화하며 화평함을 북돋우는데 어찌 그대의 所論과 같은 사실이 있을 수 있는가?” 라고 하였다.
先生이 말하기를 “이는 필시 위난한 때에 작곡했을 것이다.” 라고 하고, 六鉉琴을 취하여 한 곡 타 보였다. 百源이 말하기를 “나는 이 곡을 배운지 오래되었으나 이 곡이 이렇게 까지 애절하고 소리가 죽어간다던가 심히 反抗的이라던가 하는 사실을 내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 라고 했다.
先生은 거문고를 밀쳐놓으며 말하기를 “내가 들은 바로는 간사한 음악은 사람을 감동시키나 그 거스르는 기운은 큰 두려움을 자아내게 하여 훗날 즐거움이 지극해지면 슬픔이 생기는 반응이 일어난다고 했다.” 라고 하였다. 百源은 그러하겠다고 수긍했다.
先生은 이 일로 해서 근심스럽고 두려운 기색을 띄었으나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 11月 丁亥 : 擬別知賦를 지어 晋州에 귀성하는 姜士浩를 송별하다.
◉ 12月 庚戌 : 南原으로 귀성하는 李師聖(希舜)에게 聚散이란 글을 지어 기쁘게 해주다.
◎ 1494년 甲寅 (성종 25년, 先生 31세)
◉ 春 1月 戊午 : 종전 직함에 겸하여 議政府 檢詳에 제수 되었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다.
◉ 2月 癸未 : 다시 司諫院 獻納을 拜受, 교지에 응하여 天災時變을 논하는 소장을 올리다.
당시 혜성이 나타나 箕星 별자리에서 그 꼬리가 갈라진 기현상이 나타났다. 주상은 반찬가지수를 줄이고 풍악을 거두며 直言을 구하는 교지를 내렸다.
先生은 소를 올려 정권을 쥐고 있는 재상이하 10여 인을 탄핵하고 변방으로 내치는 법(屛裔之典)을 시행하도록 주청하였다. 이에 주상은 친히 비답 하였는데, 直聲에 대한 권장의 유시가 온 조정을 진동시켰으며 奸黨들은 숨을 죽이고 가슴을 조였다.
◉ 3月 壬子 : 전직함에 겸하여 兵曺正郞으로 옮겨 제수 되다.
◉ 夏 4月 癸酉 : 歸覲을 위해 사직, 윤허를 받고 드디어 夫人과 함께 雲溪에 귀향하다.
◉ 5月 庚寅 : 다시 弘文館 校理, 知製敎, 守藝文館 應敎 등의 문신 겸 宣傳官에 제수 되어 재차 고사하였으나 윤허되지 않다.
◉ 6月 甲子 : 또 임금의 부름을 받아 壬申日에 배명하고 庚寅日에 사직을 주청했으나 허락되지 않다.
◉ 秋 7月 乙亥 : 禦侮將軍 忠武衛의 副司直, 知製敎 겸 世子侍講院 文學, 春秋館 記注官으로 이직 명을 받아 고사했으나 허락되지 않아 癸丑日에 謝恩하다.
○ 甲寅日 : 東宮에 進講하고 乙卯日에 親疾로 인하여 사직서를 내고 곧바로 귀향하다.
당시 趙伯符(之瑞)가 세자시강원 輔德을 하고 許獻之(琛)가 弼善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세자였던 廢主(연산군)는 매일 같이 하는 일이 그저 유희나 즐기고 학문에는 뜻이 없었으며 다만 주상의 훈계와 배움에 힘쓸 것을 타이르는 御書에 대해서만 두려워하였다. 筵宮官(시강원의 관원)이 비록 온 마음을 다해 講을 베풀어도 그저 귀 밖으로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伯符는 천성이 아주 강직하여 매번 進講할 때마다 책을 앞에 던지며 말하기를 “저하 학업에 힘쓰지 않음이 이 지경에 이르면 마땅히 주상에게 고해 올려야 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럴 때마다 폐주는 매우 고민스러워 했으며 그를 마치 원수같이 보았다. 그러나 獻之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부드럽고 순한 말로 조용히 開導했는데 이에 폐주는 그에게 매우 너그러웠다. 이날 先生은 宮僚와 더불어 講에 나가 입시했는데 벽 위를 보니 趙之瑞는 大小人이고 許琛은 大聖人이다. 라고 크게 써 붙여 놓았다.
先生은 전부터 폐주의 사람됨을 알고 있었으며 일찍이 동궁의 보양(輔養)을 청하는 소를 올린 바도 있었는데 오늘 여기서 벽서를 보고는 크게 놀라고 염려되었다.
다음날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가서 우인들에게 말하기를 “주상이 돌아가신 다음에 반드시 焚坑의 變12)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 8月 辛未 : 다시 校理 겸 文學에 제수 되었으나 재차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다.
◉ 9月 丙申 : 吏曺正郞, 知製敎 겸 승문원 校理, 경연 侍讀官, 춘추관 記注官이 제수되고 역마를 타고 속히 부임하라는 영이 내려 庚戌日에 일단 배명하고 癸丑日에 사임코자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 冬 10月 癸未 : 求道次 燕京에 가는 李仲雍을 송별하면서 感舊遊賦와 序를 짓다.
仲雍의 이름은 穆이요 호는 寒齋인데 어릴 적부터 佔畢齋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문학에 능하고 志節이 있으며 약관(20세)전에 진사에 올랐었다. 일찍부터 중국을 한 번 둘러보고자 했는데 이번에 賀正使를 수행하여 燕京에 가게 된 것이다. 先生은 賦와 序를 지어 송별했다.(文集 1 및 2卷, 續東文選 2 및 16卷 참조)
◉ 11月 甲辰 : 본직으로는 兩館(홍문․예문)의 應敎를 겸하고 거기에 경연의 侍講官, 史館의 編修官, 春坊(세자시강원)의 弼善이 제수되어 세 차례나 고사했으나 윤허되지 않아 戊申日에 배명하다.
○ 庚申日 : 경연에 進講하여 大學衍義에 관하여 講하고 하사酒를 받다.
先生은 경연에서의 직책을 오래 가졌는데, 매번 당직 때마다 講할 서적을 가지고 동료관원들과 질의하고 토론을 밤새 철야로 하더라도 명쾌한 해답이 나와야 일을 마치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한 군데 미흡하거나 의문스러운 점이 있을 수 없었다. 단지 읽기만 하고 책장에 표를 붙여 두기만 하는 다른 사람들을 본 받지 않았다. 先生은 눈앞의 이런 소홀한 처사에 대해 잘못을 지적하면서 말하기를 “伊川선생(宋 나라 程頤 : 程子)은 매번 진강할 때마다 반드시 서재에서 자면서 미리 재계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사색하고 정성을 다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이것이 정녕 강을 맡은 신하의 모범이다.” 라고 하였다.
이날 밤 명을 받들어 주상을 모시고 대좌하였는데, 주상은 특히 여러 서적에서 발췌한 것을 가지고 글의 뜻이 가장 어려운 대목에 대해 先生으로 하여금 강하게 하였다. 先生은 조용히 풀어서 읽은 다음 자세히 뜻을 풀이하고 추리하여 밝히며 論說하였는데 막힘이 없었다.
좌우의 모든 사람들이 탄복하고 주상은 크게 칭찬하며 술을 내리게 했고 先生 또한 임금에게 잔을 올렸다. 한 밤중이 되어서야 물러 나왔다.
○ 丙寅日 : 編修官으로서 史館에 當直하라는 특별교지를 받아 고사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아 庚午日에 또 고사하였는데, 역시 허락되지 않았다.
당시 주상은 疾患이 있어 앞일을 예측할 수 없었고 時事가 장차 변고가 있으리라 내다보고 극력 사양하였는데 허락되지 않았다.
◉ 11月 24日 己卯 : 成宗大王의 昇遐를 당하여 禮에 따라 服喪하다.
先生은 史局에 있으면서 時政을 기록하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全羅監司를 하던 李克墩이 분향은 올리지 않고 기생을 태우고 行樂한 사실을 곧이곧대로 기록하였다.
이 사실을 克墩이 듣고 사람을 시켜 삭제하여 주도록 청을 넣어 왔으나 先生은 이에 불응하여 말하기를 “孔子는 春秋를 지어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와 不孝 不忠하는 자들을 두렵게 했는데, 나는 이러한 孔子를 배운 사람이다. 이 일은 내 머리를 자를 수 있을지언정 이 책을 고칠 수는 없는 일이다.” 라고 하였다.
克墩은 감히 두 번 다시 말을 하지 못하고 심히 원망하며 중상할 뜻을 품었다.
◎ 1495년 乙卯 (연산군 1년, 先生 32세)
◉ 春 2月 丙子 : 疾患이 있어 사직을 주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다.
成廟가 하늘의 賓客으로 오르니 先生은 애통하여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였고 거기다가 폐주가 居喪하는데 많은 失德을 하여 근심과 탄식을 더 함으로써 病이 되어 마침내 해직을 청하게 되었다.
폐주는 大行大王(죽은 임금의 시호 올리기 전의 존칭)이 아직 빈소에 계신데 신하된 사람들이 사직할 시기가 아니다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先生은 成廟에 뜻이 맞고 인정을 받아 은총을 입었었다. 進言할 때마다 반드시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고 너그럽게 批答하며 칭찬하고 총애했다. 관직을 제수할 때도 특별한 은총을 베푼 적이 많았다. 주상은 경연에서 參贊官 曺偉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金馹孫은 문장과 학문이 모두 뛰어나며 재능과 기량을 겸비하였고 풍채가 장대하며 기절이 바르고 곧으며 논의 또한 준엄하고 정연하여 가히 臺閣(사헌부와 사간원)을 통솔할 풍모가 있고 지략이 넓고 깊어 가히 廊廟(議政府의 별칭)의 직책(즉 宰相)을 맡길 만하다. 나는 그의 언론을 듣고자하여 누차 백부(栢府 : 사헌부의 별칭)의 요직을 맡긴 바 있고 그의 학문을 연구하고자 경연의 직임과 翰苑의 직위에 오래 있게 했으며 비록 다른 관직에 제수 하더라도 반드시 經史의 직임(弘文館과 春秋館의 직임)을 겸하도록 했는데, 그것은 장차 輔相之官(大臣을 거느리고 임금을 받들어 나라를 다스리는 官員 즉 首相)으로 크게 쓰고자 함이다. 그런데 다만 그의 나이가 젊어 그의 뜻은 크고 성품은 너무 준엄하며 기상은 너무 날카롭고 언론은 심히 곧으며 행적은 너무 고상하니 마땅히 그의 老成을 기다려 쓸 수밖에 없구나.”
先生은 이 말을 전해 듣고 그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 뼈에 새기고 뜻을 가다듬어 더욱 굳게 하였다. 先生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지 않음이 없었고 말하게 되면 다 말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생각한 바를 논하고 諫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간곡하고 극진하여 예스러운 대신의 풍모가 있었다.
이제 주상이 하늘의 賓客이 되어 가니 先生은 실성통곡하며 울부짖었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우리 東國으로 하여금 堯舜의 治世를 다시 보려 하지 않으십니까?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되었는고!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되었는고! 오직 蒼生의 無福만이 아니라 그 누구의 無福이라 해도 이것은 너무 하오이다!”
이로 인하여 병이 발생하고 退官할 것을 간절히 주청하였던 것이다.
◉ 3月 己丑 : 상소하여 10개 조목의 경계해야 할 사항을 진언하고 인하여 免官을 주청하였으나 회답이 없다.
새 정사에 있어서 궐하였거나 잘못된 점들을 일일이 열거하여 심히 절실하고 정직한 언사로 상소하였는데 폐주는 마음 언짢아하면서도 속으로 묻어둔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 癸巳日 : 스스로를 탄핵하며 職名을 깎고 향리로 돌아가게 하여줄 것을 주청하는 소를 올려 윤허를 받다.
先生은 疏의 언사가 매우 강직하여 폐주를 거슬리었다.
드디어 進言으로써 임금을 바르게 하지 못하고 구차스럽게 녹 먹는 자리만 채우고 있다고 스스로를 탄핵하고 待罪하며 파직을 주청하였는데 그대로 되었다.
○ 甲午日 : 또 상소하여 하사 받은 저택의 반환을 주청하였으나 회보가 없자 다음날 바로 귀향길에 오르다.
임금의 하사 물이므로 중히 여겨 집을 지킬 奴婢 두 사람을 남겨 두고 떠났다.
한강을 넘을 때 지은 詩 한 首가 남아 있다.
一馬遲遲渡漢津 (필마로 느릿느릿 한강 나루 건너니)
落花隨水柳含嚬 (떨어진 꽃잎 물 따라 흐르고 버들은 찌푸린 듯...)
微臣此去歸何日 (微臣 이제 가면 언제 또 돌아오리까!)
回首終南已暮春 (南山을 돌아보니 이 봄도 이미 저물어 가네.)
이 詩句를 읽으면 한없이 감개가 일고 한 없이 구슬퍼진다.
○ 庚子日 : 提川縣을 지나면서 權子汎을 방문, 癡軒記를 짓다.
子汎 (또는 君饒)은 景裕의 字다. 그의 성품은 강직하고 의연하며 가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癸丑年에 홍문관 校理를 사임하고 외직을 구걸하여 提川縣監으로 나오게 되었는데, 이 때 先生은 敎化說을 지어 송별한 적이 있었다. 지금에 이르러 객관 서쪽 채를 새로 신축하여 先生에게 軒記를 청함에 癡軒이라 이름하고 軒記를 지었다. (敎化說은 文集 1卷 및 續東文選 18卷, 癡軒記는 文集 3卷 및 續東文選 14卷 참조)
○ 丁未日 : 雲溪에 당도하다.
先生은 자신의 점대 점을 쳐 본 적이 있는데, 벼슬살이 초반에는 편안하겠으나 일신은 殉國할 운세가 있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先生은 세상 道義가 유익한 일을 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판단 물러나 향리에 돌아와서는 杜門不出, 浩然한 심정으로 세상과 인연을 끊을 뜻을 가졌다.
그러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단 하루도 버리지를 못하였다.
○ 宣陵(성종의 능호) 輓詞를 지었으나 올리지 못하다.
宣陵의 因山(國葬)日이 가까워 옴에 先生은 시종하던 신하로서 마땅히 輓詞會에 나아가야 하나 퇴직 명을 받은 터라 輓詞를 올리지 못했다. 輓詞는 무릇 5편으로 애통하고 측은하며 슬퍼하는 정성이 넘쳤으며 그 표현 속에는 감히 할 수 없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聖恩의 대답 말씀을 듣게 해 줄 이가 없었다.
◉ 冬 10月 甲子 : 疾風知勁草13)賦를 짓다.
당시 많은 小人輩들이 정사를 어지럽히고 임금으로 하여금 惡政을 행하도록 인도하며 온 조정을 휩쓸고 있었으나 감히 말 한마디 하는 사람이 없었다. 先生은 이 賦를 지어 탄식하였다. (文集 1卷 참조)
◉ 12月 庚申 : 사간원 獻納에 제수하는 교지가 내리고 재촉하여 재차 고사하였으나 윤허되지 않다.
이조판서 魚世謙이 등용하도록 추천했다. 魚公은 先生이 충성스럽고 강직하여 어떤 사건에 당하면 반드시 進言하는 諍臣의 풍모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물러난 유능한 인사로서 新政府를 보필하도록 箚子를 올려 강력히 추천 재가를 받음으로써 이 명이 내려지게 된 것이었다.
◎ 1496년 丙辰 (연산군 2년, 先生 33세)
◉ 春 1月 辛卯 : 재촉하여 부르는 교지가 또 내려 壬辰日 역마를 타고 상경, 庚子日에 성밖에서 묶고 辛丑日에 배명한 다음 時政에 대한 상소문을 직접 올리고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
先生은 곧 강력히 사직하려하였으나 魚公이 또 서신을 보내어 관직에 出仕할 것을 권하므로 부득이 부름에 나아가기로 하였다. 정중한 사례를 다한 다음 入侍하여 직접 疏章을 올려 時政의 잘못되고 모자라는 점을 논하고 任士洪, 尹弼商, 李克墩 등 간사한 무리들을 탄핵한 후 사직을 청하였는데, 너그럽게 비답하며 사직은 허락하지 않았다.
○ 癸卯日 : 諫僚(사간원 관료)들과 더불어 箚子를 올려 昭陵復位를 주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다.
先生은 成廟朝 때 충청都事로 있으면서 昭陵復位를 소청한 바 있었는데, 그 사안은 잠잠해지고 행하여지지 않은 채 지금에 이르렀다. 이제 또 다시 대사간 金克忸, 사간 李宜茂, 正言 韓訓, 李冑 등과 연대하여 箚子를 올렸는데 그 내용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문종 元妃 權氏는 魯山君의 손위(遜位)가 있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나셨으나 그 뒤에 폐위되어 종묘에서 문종 홀로 향사를 받으시게 되었습니다. 이는 예법상의 흠결이며 事理상으로는 가슴 아픈 일입니다. 성종은 일찍이 몰수한 재산을 도로 환급하게 하시어 魯山夫人 宋氏의 생계의 자산으로 하게 하시었으며 그 친족들을 용서해 주어 벼슬길에 나갈 수 있게 해 주시었는데, 이는 성종의 지극한 뜻을 엿 볼 수 있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속히 昭陵을 復位하시고 廟主를 文廟 감실 配位 자리에 돌아가게 하소서. 그러면 심히 다행하겠나이다.
이에 예조판서 韓致亨 등이 임금의 재가를 받아 회신하여 이르되 자고로 廟에는 獨主가 없는데 文宗만이 종묘에서 獨享되니 의리상 미안하지 않은바 아니나 다만 昭陵은 祖宗께서 폐한지 이미 오래된 일이라 지금 경솔하게 바꾸어 復位함은 불가하다…운운 하였다.
○ 丙午日 : 밤 文宗 廟室에서 불빛이 나타난 일이 생겨 다음 날 상소하여 전에 올린 箚子 내용을 다시 품신 했는데, 회답이 없어 戊申日에 또 상소하고 사직하였으나 윤허되지 않다.
좌의정 魚世謙이 文宗 廟室에서 있은 불빛이 괴이하여 禮官에게 명하여 위안제를 올리도록 임금에게 주청하였다. 先生은 또 다시 昭陵復位를 청하는 소를 올렸는데 그 疏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孔子는 先人의 遺志를 이어 받들고 先人의 사업을 이어 완성한 武王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