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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부대 모두가 전멸한다 해도 우리의 승리다"
- 샤밀 바사예프
2005년 10월 13일, 체첸 4대 대통령 압둘 할림 사둘라예프에 의해 '코카서스 전선'이 형성된지 5개월 정도 지난 어느 가을날이었다. 인구 23만 5천명이 거주하던 카바르디노 발카리아 공화국의 수도 날치크는 조용하게 하루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인근의 이슬람 사원(모스크0에 모여 아침 예배를 올린 뒤에 자기 직장으로 출근하였다. 1달 전에 러시아 연방에 의해 새로 임명된 아센 카노코프 대통령은 전임자와는 다르게 모스크를 개방하는 등의 유화적인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한결 편한 기분 속에 예배를 마쳤다.
날치크 도심의 레닌 거리
정확히 아침 9시 14분, 출근하고 일을 하던 사람들은 어디선가 폭발음이 나는 것을 들었다. 뭔가 사고가 났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연이어서 점점 큰 폭발음이 들리는 것을 듣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밖을 내다보자 중무장한 경찰과 러시아군이 장갑차를 탄 채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제서야 교전이 벌어졌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황급하게 집으로 도망가려고 하였지만 시내의 모든 버스가 끊겼고 택시도 다니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쓰려고 했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다.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고 사방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날치크 시내의 경찰차
시내에 있던 러시아군과 현지 공화국 경찰은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도시 인근의 공항이 공격받은 이후로 여기저기서 전투가 확산되었다. 한곳의 전투에 투입되기 위해 증원병력이 움직이는 동안 그 병력의 주둔지가 공격받기 일쑤였다. 현장에 있던 지휘관들은 상부에서 보내는 무전 속에서 자기 부하들을 보낼 곳을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상 시내 전체의 관공서 및 군부대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평상복 차림에 운동화를 신은 5-6명의 반군들이 복면을 쓴채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목적지에 주차하고 바로 건물에 뛰어들었다.
FSB 건물을 공격하는 반군들
누가 이 공격을 감행한 것인가? 전장에 있던 러시아군에게는 미처 생각할 여유가 없었겠지만 체첸 반군의 수장에 의해 감행된 공격이었다. 사둘라예프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새롭게 형성된 '코카서스 전선'은 사령부의 방침에 따라 카바르디노 발카리아 공화국 수도의 러시아 세력에 대한 일제 공격을 시작하였다. 카바르디노 발카리아 공화국의 '야무크 자마트'의 수장인 세이풀라가 현장을 지휘하는 가운데 잉구세티야 자마트, 오세티야 자마트의 수장이 참가하였고 심지어 러시아 국내의 크산도르 자마트의 수장도 자신의 부대와 함께 전투에 참가하였다. 물론 공격의 전체적인 기획은 샤밀 바사예프가 담당하였다.
'야무크 자마트'의 수장 안조르 아스테미로프와 바사예프
샤밀 바사예프와 각 자마트의 수장들은 공격 계획을 면밀하게 검토하였고, 각 분대가 개별적으로 도시에 집결하여 일시에 공격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전체 병력을 각 지휘관에 따라 6개의 부대로 나눈 뒤에 이 부대를 이동에 용이하게 5명에서 10명 사이의 분대로 편성하였다. 전체 분대는 15개의 공격대와 4개의 예비대로 나눠졌으며, 공격 분대가 위에 언급된 것처럼 평상복 차림으로 자동차로 이동을 하여 기습을 할 때 예비대가 인근에 위치했다가 증원이 필요하면 교전에 참가하기로 하였다.
공격 당시 시내 사진. 사방에 연기가 솟아오른다
최초 공격은 9곳에 집중되었다. 날치크 공항을 시작으로 카바르디노 발카리아 공화국 내무부, FSB 지휘부, 현지 주둔 오몬 사령부, 연방 교정국 지역 본부, 카바르디노 공화국 신병모집소, 연방 세무서, 날치크 도로 순찰대 등에 반군들이 우선 공격을 가했다. 이어서 날치크 시내에 위치한 제1, 제2, 제3 경찰서 건물에도 공격을 가했으며 제43 국경수비대와 러시아 내무군 여단, 날치크 광역수사대 등도 공격을 당했다. 공격 부대는 중화기를 동원하지 않은 채로 신속하게 이동하면서 각 목표지점을 습격하였다.
날치크 시내 지도. ОВД가 경찰서를 의미한다.
반군들은 몇몇 건물에는 진입하는데 성공하였다. 잉구세티야 자마트의 수장인 리야스 고치라에프가 직접 지휘했던 내무부 건물 공격은 안에 진입하는데 성공하였고 격전 끝에 건물의 일부가 파괴되었다. FSB 사령부를 공격했던 부대는 3층 건물 중에 1층과 2층을 점거하는데 성공하였다. 전투 과정에서 러시아 FSB 요원 1명이 죽고 7명이 부상을 당했다. 3층까지 진입하려고 시도했지만 남아있던 FSB 요원들에 의해 격퇴되었다.
다른 부대들도 격전을 벌였으며 경찰서 건물과 대테러 건물에도 불길이 솟아올랐다. 특히 날치크 제 2 경찰서의 경우는 모든 유리창이 깨지고 철제 울타리가 녹아서 휠 정도로 불길이 일었다. 도심부에 있던 하이랜드 거리와 소겐스코프 거리에 있던 고층 건물 2개가 불탔고, 시내에 있던 메가폰 이동 통신사의 중개 기지소가 파괴되었다. 그로 인해 시내에 휴대 전화가 통하지 않았고, 교전으로 인해 모든 교통 수단이 차단되었기 때문에 시민들은 교전 속에서 숨어 있어야 했다.
시가전 중의 러시아군
공격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러시아 측의 대응이 점차 거세지자 3일전부터 날치크 시내에 잠입하고 있던 샤밀 바사예프는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때가 공격 시작 이후 정확히 2시간 뒤인 11시 15분이었다. 주력 부대는 시가지 북쪽으로 이동하여 강가를 따라 후퇴하거나 민가 속에 숨어들어 은신하였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반군들은 인질들을 잡았다. 인질극이 벌어진 장소는 날치크 제 3 경찰서과 연방 교정국 건물, 그리고 레닌 거리와 노그모바 거리의 교차점에 있던 선물 가게에서 였다. 적게는 2명에서 많게는 12명의 반군들이 건물 속에서 러시아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선물가게에 들어선 반군을 소탕하는 러시아군
정오가 지나서 사태의 전모가 파악이 됬던 러시아 정부는 심각하게 대응하였다. 오후 3시에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내무부 장관 알렉산더 체카린에게 날치크 봉쇄 명령을 내리면서 '무기를 손에 들고 있는 자는 모두 제거하라"고 지시하였다. 날치크를 빠져나가는 모든 통로가 봉쇄됨은 물론 북오세티야와 잉구세티야로 통하는 국경까지 봉쇄되었다. 반군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준비하였다.
신속하게 철수하지 못한 반군들은 러시아군에게 사살되거나 체포되었다. 인질을 잡고 있던 소수의 반군들은 다음날인 2005년 10월 14일까지 버티다가 러시아군에게 모두 사살되었다. 경찰서 건물 안에 있던 반군들은 심야에 버스를 몰고서 탈출하려고 시도했지만 검문소에 걸려서 모두 죽었다. 러시아군의 작전으로 인질은 모두 무사히 구출되었지만 도로와 건물 곳곳에 시신이 널려 있었다. 교전 현장은 너무나 위험했으며 심지어 이를 촬영하던 러시아 NTV 기자인 루슬란 무사로프가 총상을 입고 죽었다. 교전 속에 죽은 시민의 수가 러시아 정부 측의 발표에 따르면 12명이었다.
전사한 반군의 시체. 평상복에 운동화를 신었고 군용 벨트를 메고 있다.
10월 14일 정오 쯤이 되자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다. 러시아군은 파괴된 건물 잔해 속에 있던 시신들을 모았고, 도로에 쓰러진 부상자들도 조치하였다. 러시아군의 발표에 따르면 반군 87명이 사살되었고 50명이 체포되었다. 교전에 투입된 반군이 200명 남짓이었기 때문에 거의 절반 이상이 죽거나 체포되었다. 러시아 측의 사상자는 35명 전사, 85명 부상이었다. 샤밀 바사예프는 37명의 반군이 전사했다고 발표한다. 러시아군의 발표에 비하면 절반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체첸의 단일 작전으로는 보기 드문 전사자였다. 불과 6명의 체첸군이 죽었던 2004년의 잉구세티야 나즈란 기습과 대조되는 부분이었다.
공격 당시 파괴된 차량
체첸의 대규모 공격이 생각보다 쉽게 해결된 점에 대해 여러 분석이 있었지만 중요한 점은 체첸인들이 실제 전투에 투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샤밀 바사예프는 위 공격에 217명이 참가했다고 하였는데 그 중에 체첸인은 한명도 없었다. 100명 정도는 날치크 거주하는 카바르다 발카리아 인이었고 나머지는 코카서스의 다른 공화국 출신들이었다. 심지어 전사자 중에 러시아인 2명도 있었다. 크산도르 자마트 소속으로 추정된다. 이 점을 들어서 전투에 대해 보고 받은 체첸 친러시아 진영의 수장인 람잔 카디로프는 "약해 빠진 현지인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끝났다. 체첸인들이었으면 상황이 달라졌을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샤밀 바사예프는 전투 직전에 러시아 측에 정보가 누설된 점을 그 이유로 들었다. 전투 5일 전에 위 공격 작전의 내용이 러시아 FSB 측에 누설되었고, 러시아군은 2005년 10월 11일부터 날치크 시내에 1천명의 스페츠나츠와 내무군을 급파하였다. 심지어 전차와 장갑차까지 시내에 배치하였고 교전 당시 러시아 측의 병력은 1500명의 정규군과 500명의 스페츠나츠에 달했다. 200명 남짓의 코카서스 반군들이 기습의 이점까지 상실한 상태로 제대로 대응하기는 무리였다.
날치크 시내에 배치된 러시아군 장갑차와 파괴된 차량
실제로 체첸 측에서는 정보가 누설됬기 때문에 공격을 연기해야 된다는 말이 있었다. 이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샤밀 바사예프는 2005년 10월 11일에 카바르다 공화국 인근의 산악지대에서 각 지휘관들과 군사 회의를 열었다. 현재 상황에 대한 분석을 끝낸 지휘관들은 강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어짜피 대대적인 색출 작전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에 시도조차 못하고 실패하느니 어렵게라도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지 지휘관들의 의사를 존중한 바사예프는 예정대로 작전을 시작하였다.
작전 실행 전의 작전회의. 여기서 각 지휘관들은 공격을 강행하기로 결정한다.
거기에 더해서 '코카서스 전선'의 반군들은 아직 경험에 있어서 충분하지 못했다. 물론 각 분대의 지휘관 급 중에는 미군의 관타나모 수용소까지 갔다 온 루슬란 오지에프처럼 교전 경험이 풍부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 밑의 대원들은 대개 간단한 훈련 끝에 경장비 만을 들고 러시아군의 관공서와 사령부를 습격하였다. 자연히 사상자도 많이 발생하였고 체포된 사람도 많았다. 그 중에는 레닌 거리 근처의 FSB 사령부를 공격하다 사살된 잉구세티야 자마트의 수장인 리야스 고치라에프도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오세티야와 크산도르 수장도 부상을 입었다.
잉구세티야 자마트 수장인 리야스 고치라에프
마지막으로 러시아 측의 반군 소탕 작전이 의외의 성과를 거둔 면이 있다. 위 날치크 공격 직전에 러시아군은 벨라야 레카 마을의 발카르 마을에 대해 소탕 작전을 준비하고 실행 중이었다. 공교롭게도 위 날치크 공격을 실행했던 부대들의 주요 기지가 벨라야 레카였다. 이제 막 반군 분대들이 움직여서 날치크 시내에 잠입하려는 순간에 러시아군은 카산야와 벨라야 레카 사이의 도로 상에서 그 분대 중의 하나를 포착햇다. 즉시 교전이 벌어졌고 러시아군은 도로를 완전히 차단해 버렸다. 이로 인해 추가로 공격에 투입될 150명의 병력이 시내에 잠입하는데 실패하였다. 그래서 계획된 병력의 절반 정도인 217명 만이 전투를 벌였고 위와 같은 결과가 발생한 것이다.
카바르디노 발카리아 지도. 파란원이 날치크. 붉은 원이 벨라야 루키, 녹색 원이 크산야
러시아군은 날치크 남쪽 산악지대에서 잠입해오던 반군들의 일부를 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샤밀 바사예프는 위의 사상자에도 불구하고 전략적으로는 승리했다고 자평하였다. 설령 공격에 투입되거나 투입되려고 했던 병력 400명 모두 전멸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체첸의 승리라고 봤다. 이건 무슨 의미인가? 앞서 언급했던 체첸인이 바사예프를 제외하고는 단 한명도 투입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람잔 카디로프는 그것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비아냥 거렸지만 실제로는 그 점이 성공의 핵심이었다. 체첸인들이 직접 병력을 투입하지 않아도 위와 같은 대규모 작전이 가능함을 입증하기 때문이었다.
공격 다음날의 날치크 시내
공격 자체로 인한 타격은 막대했고 이에 대한 재정비가 불가피했지만, 카바르디노 발카리아 자마트의 수장 안조르 아스테미로프는 정치적 감각이 탁월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전술적인 능력의 부족을 선전전으로 만회할 수 있었다. 그는 인터넷 상에 자신들의 이념과 각오, 전과와 성공 요인 등을 분석하고 올림으로써 카바르디노 발카리노 공화국의 젊은 무슬림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었고, 그들을 통해 병력과 지원을 보충할 수 있었다. '야무크' 자마트의 반군들은 차츰 교전 경험을 쌓아갔고 점차 카디로프가 비웃을 수 없는 실력까지 올라간다.
카바르다 발카리아 반군의 남서 전선 사령관, 라트미르 샤메에프. 일명 아미르 자카리아
결국 체첸인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전장의 확대'가 완전히 실현되었다는 것이 이 날치크 공격의 의의였다. 다섯달 전의 체첸 4대 대통령 압둘 할림 사둘라예프가 명령한 '코카서스 전선'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대러시아 전쟁의 새로운 전열이 되었다. 그리하여 세이크 만수르 이래의 오랜 숙원이자 수만은 체첸군의 지휘관들이 꿈꿔왔던 '제2전선'의 구축에 성공하였다. 러시아는 새로운 반군에게 대처해야 했고, 체첸 주력 부대가 굳이 이 전장에 투입될 필요가 없었다.
체첸 신임 대통령의 명령은 완벽하게 실행되었다. 1999년 가을 러시아군이 새로운 전쟁을 시작한지 만 6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체첸군이 전략적인 승리를 얻어냈다. 이제 전쟁의 흐름은 러시아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출처 : http://en.rian.ru/russia/20051014/41771970.html
http://www.rferl.org/content/article/1062095.html
http://en.rian.ru/russia/20051013/41761991.html
http://www.rferl.org/content/article/1071996.html
http://newsru.com/russia/13oct2005/school.html
http://www.regnum.ru/news/721071.html
http://www.kavkazcenter.net/eng/content/2006/01/12/4362.shtml
http://www.kavkazcenter.net/eng/content/2006/01/12/4362.shtml
http://ru.wikipedia.org/wiki/%D0%9D%D0%B0%D0%BF%D0%B0%D0%B4%D0%B5%D0%BD%D0%B8%D0%B5_%D0%BD%D0%B0_%D0%9D%D0%B0%D0%BB%D1%8C%D1%87%D0%B8%D0%BA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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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으로 들어왔네요....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접하기 힘든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보다 좋은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코카서스 전선" 이라는 게 러시아 내 소수민족 연합전선 같은 건가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정확히는 코카서스 내의 반군들의 연합체입니다.
반대로 보면, 전선확대를 위해 잡다한 조직들을 끌어들였기 때문에 기밀유지에 실패한 것 아닐까요. 그동안 체첸인들만으로 작전을 할때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기습이 이루어 졌던 것 같습니다. 물론 체첸인들이야 손안대고 코푼 격이니 아쉬울 거 없지만, 다른 민족들과의 연합전선이 무조건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군사적인 면 외에도 정치적인 단점도 있습니다. 차차 서술하게 될 것 같습니다.
체첸인들의 대단함을 느끼네요. 체첸인들만 참가했다면 사망자가 별로 나오지않았을듯.!
정보가 샜기 때문에 아마 만만치않게 피해가 컸을겁니다.
적 전력을 분산시키는 의도군요. 잘 읽었습니다.
우리측의 수를 늘려서 광범위하게 분산되면 상대는 그만큼 넓은 전선을 상대해야 되죠
진짜 기다리고 기다리던 글이 올라왔어요 야거님 화이팅~~
늘 리플 하나하나에 힘이 됩니다.
좋은 글 좋은 글 좋은 글 Jager 님 화이팅.~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댓글 올립니다. 아직까지 투쟁하고 있는 체첸인들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지네요.
정말 독한 사람들이죠
야거 님도 오랜만에 들르셔서 댓글 다셨군요. 오랜만에 뵈니 기쁩니다. 건강하게 지내시길~ ^ ^
그러니까 잡다한 조직들을 보내서 '경험치쌓기레이드'를 보낸거군요 물론 목숨을 담보로한
전투를 겪으면서 경험은 점점 늘게 되죠.
삭제된 댓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