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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만한물가-열락회(悅樂會)
 
 
 
카페 게시글
쉴만한물가얘기 스크랩 강감찬
열락당(悅樂堂) 추천 0 조회 50 10.11.08 04:4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우리 역사에서 위기의 순간 나라를 구한 명장을 꼽자면 고구려의 을지문덕, 조선의 이순신, 고려의 강감찬을 들 수 있습니다.

강감찬 장군은 살아서는 귀주대첩의 신화를 세운 명장으로, 죽어서는 오랜 세월 민중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유독 외침이 잦았던 고려시대의 영웅으로 훗날 전설이 된 강감찬 장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출처 : 선현의 표준영정

 

 

강감찬은 고려 정종 3년(984)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금주(衿州: 지금의 시흥), 어린 시절 이름은 은천(殷川)이었습니다. 

경주에서 금주로 이주해 호족으로 성장한 강여청(姜餘淸)의 5대손이며,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강궁진(姜弓珍)의 아들입니다.
강감찬은 이러한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지략이 뛰어났습니다.

 

성종 2년(983년) 12월에 진사과에 합격하였고, 갑과에 장원 급제하여 문관으로 처음 벼슬에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1018년(현종 9) 거란의 성종이 침공해 오자 강감찬은 20만 군사를 이끌고 적군의 후면을 공격,

귀주(龜州)에서 크게 적을 섬멸하였으며, 귀주대첩 이후 거란은 다시는 고려를 침범하지 못하였습니다.

강감찬은 조용히 노년을 보내다가 현종 22년, 덕종 즉위년에 84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 강감찬의 생애 더 보기

 

 

거란은 고구려 후손들이 세운 발해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로서는 거란을 탐탁치 않게 여겼습니다.
당시 고려는 문화적으로 우수한 송나라와 교류하였고, 거란은 기회만 있으면 고려를 침입하려 했습니다.

거란의 성종은 1018년 12월 소배압에게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게 했습니다.

이때 치러진 전투를 귀주대첩이라고 합니다.

 

귀주대첩은 대외항전사상 중요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고려의 20만 대군은 안주에서 대기하다가 적의 접근을 기다려 흥화진(興化鎭)으로 나가

정예기병 1만 2,000명을 산기슭에 잠복배치한 뒤 큰 새끼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아두었다가

때를 맞추어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큰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거란군의 퇴각하는 길목을 지키고 있던 강감찬 장군은 귀주에서 복병을 대기시켜 놓았고
적군이 귀주를 통과하자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강감찬은 거란군을 격퇴한 무공 외에도 백성들에게 베푼 선정에 관련된 설화 자료가 풍부하여

전국적으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구비전승되고 있습니다.

실제 역사적인 업적과는 달리 무한한 능력을 가진 신이한 존재로 그려져

민중들로부터 얼마나 많이 숭앙받아 왔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 강감찬 전설에 관한 논문 보기

 

  

 

강감찬에 관한 설화 중 대표적인 것으로 출생에 관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신이 밤에 시흥군에 들어왔다가 큰 별이 인가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사람을 보내 가서 보게 하였더니,

마침 그 집 부인이 아들을 낳았다고 하였습니다.

사신이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겨 그 아이를 앗아와서 양육하니 이가 곧 강감찬이었다고 합니다.

 

큰 별이 떨어졌다는 곳은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곳으로 지금의 낙성대입니다.

낙성대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 낙성대 더 보기

 

 

▶ 강감찬과 얽힌 설화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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