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1 11 말씀
주의 종
1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사람이다.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2 그는 소리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실 것이다.
3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
4 그는 쇠하지 않으며, 낙담하지 않으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이니, 먼 나라에서도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
5 하나님께서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을 만드시고, 거기에 사는 온갖 것을 만드셨다. 땅 위에 사는 백성에게 생명을 주시고, 땅 위에 걸어 다니는 사람들에게 목숨을 주셨다. 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6 “나 주가 의를 이루려고 너를 불렀다. 내가 너의 손을 붙들어 주고, 너를 지켜 주어서, 너를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할 것이니,
7 네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이끌어 내고, 어두운 영창에 갇힌 이를 풀어 줄 것이다.
8 나는 주다. 이것이 나의 이름이다. 나는, 내가 받을 영광을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넘겨 주지 않고, 내가 받을 찬양을 절대로 우상들에게 양보하지 않겠다.
9 보아라, 전에 예언한 일들이 다 이루어졌다. 이제 내가 새로 일어날 일들을 예언한다. 그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일러준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새해 어간에는 이사야서를 많이 읽는다. 그중에서도 제2 이사야서는 문학적으로 가장 시적이고, 내용에 있어서는 놀라운 상상력으로 희망을 전한다. 이사야서 40~55장의 저자를 “제2 이사야”라고 한다. 이 문서는 기원전 540년 어간을 배경으로 기록되었다고 알려졌다. 이 시기는 고대 중동 지역에 패권이 바뀌는 거대한 변화의 시대였다. 유다를 멸망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했으며, 유대인을 포로로 끌고 간 초강대국 바빌로니아가 이제 새롭게 부상하는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의 위기에 빠진 것이다. 바빌로니아는 기원전 539년에 멸망한다. 그러니까 제2 이사야는 바빌로니아가 멸망하기 직전에 전개되는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이다.
그러니까 제2 이사야는 여전히 유다를 절망에 빠뜨린 바빌로니아 체제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임박한 새로운 세계를 보았으며, 그간 처한 어둠의 체제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새로운 희망의 세계를 예언할 수 있었다. 범속한 인간들은 세계 질서의 대격변에서 불안을 느낀다. 현재 이재명 정부는 통일교와 신천지의 불법 선거 개입을 빌미로 이들 비즈니스에 능한 신흥종교의 기세를 꺾으려 하지만, 이게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종말론적인 사이비 종교들이 활개를 칠 수 있는 여건은 농후하다고 할 수 있다.
새해 벽두에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의회 승인 없이 베네수엘라의 대통령 부부를 납치하는 광기를 자행해 바야흐로 약육강식이 판치는 야만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지금 내란범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윤석렬은 누가 봐도 저와 제 처 일가의 권력 독점을 위해 대한민국 전체를 위기에 빠뜨리는 뻘짓을 자행하면서도, “가치 외교,” “민주주의” 운운하는 가소로운 행태를 벌였지만, 트럼프는 그나마도 거추장스러운 모양이다. 물론 베네수엘라 침공이 마약범을 체포하기 위한 조치였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베네수엘라의 석유가 필요하다는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더 나아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현재 백악관 부비서실장직을 맡고 있는 스티븐 밀러는 최근 언론 인터뷰와 공식 석상에서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국제적인 관례나 타국의 주권을 넘어서는 행동도 불사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그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그린란드에 대한 미국의 야욕을 뻔뻔하게 떠벌이면서,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는 힘과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이며, 미국이 강하기 때문에, 원한다면 그린란드를 점령하거나 통제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주먹이 말하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국제질서의 수호자에서 모든 질서를 파괴하는 깡패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자기들이 만든 질서를 제 손으로 허물고 있는 것이다. 이제 미국은 원하는 것이 있으면 골치 아픈 협상이나 명분은 집어치우고 전투기를 띄워 미사일을 쏟아붓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마두로를 체포한 후, 그린란드에 대한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으며, 이제 멕시코를 침공하겠다고 을러대고 있다.
모든 국가의 자치와 독립을 존중하던 질서가 와해되면서 세계 곳곳이 들썩이고 있다. 여자 윤석렬 다카이치 일본 총리는 1970년대 이후 국제적으로 공인된 하나의 중국 논리에 도전해 중국과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다. 태국과 캄보디아는 전쟁 중이며, 이란은 시민들의 시위로 신정국가가 붕괴 위기에 빠졌다. 아프리카는 전체가 거의 무질서 상태가 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이다. 수단 내전은 이 대륙의 무질서를 대표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중동과 남아메리카가 그렇게 될 것이다. 아시아, 특히 남아시아는 이런 난장판으로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이란의 위기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주도한 제재가 초래한 결과다. 문명 질서가 무너지면 폭력이 질서다. 사실 전 세계에서 전개되고 있는 모든 분쟁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 미국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아니 미국의 소수 특권 지배층의 무궁한 환락을 위해 세계는 신음하고 있다. 이제는 그럴듯한 명분 따위는 필요 없어졌는데, 극단적인 부의 편중으로 실질적으로 세계가 거의 봉건적 신분사회로 퇴행했기 때문이다. 극소수 특권 지배층이 온갖 사치와 향락, 권력의 방종을 누리는데 이에 대해 해명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그런 삶이 보장된 신분에 속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인류는? 그냥 개돼지들이다. 그들은 특권층이 그런 삶을 살기 위해 존재하는 수단일 뿐이다. 세계는 정글이 되었다. 약자들에게는 길 가다가 깡패에게 얻어터지고 온갖 모욕을 당한 후 재물까지 빼앗겨도 죽지 않은 게 다행인 세상인 것이다. 장삼이사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사이비 종말론에는 비옥한 토양이다. 사실 임박한 미래의 종말을 선전하며 공포 마케팅을 하는 사이비 종교는 오늘 우리 세계가 이미 종말의 세상이라는 진실을 부인하려는 애처로운 물신주의적 도착이다.
기원전 609년부터 기원전 539년까지 거의 70년 동안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구축된 세계 질서가 붕괴하는 세계의 몰락 속에서 제2 이사야는 어떻게 불안을 극복하고 희망을 노래할 수 있었을까? 그의 노래에 비밀의 열쇠가 있다. 그는 소리치거나 목소리를 높이면서 폭력을 휘두르는 제국에 의해, 약자들은 상한 갈대처럼 꺾이고, 모든 등불이 꺼져 세상은 암흑으로 뒤덮여, 진리는 터무니없는 헛소리라고 조롱받으며 불의가 판치는 세상을 살아왔다. 혼란에 혼란이, 어둠에 어둠이, 야만에 불법이 가중되는 위기의 세계에서 그는 선배 예언자인 이사야, 즉 제1 이사야의 예언을 목숨처럼 부여잡고 살아왔다. 제1 이사야의 예언은 간단하다. 하나님은 불의한 세상을 놓아두지 않으실 것이며, 심판을 통해 쓸어버릴 것이지만, 이는 더 큰 은혜를 내리시기 위한 정지 작업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오늘 우리가 읽은 42장 5절에 나온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을 만드시고, 거기에 사는 온갖 것을 만드셨다. 땅 위에 사는 백성에게 생명을 주시고, 땅 위에 걸어 다니는 사람들에게 목숨을 주셨다.”
이 세계는 극소수 특권층이 분탕질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 오직 이 세계를 창조하신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만이 그 통치권을 주장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혼란과 위기 속에서 우리는 두려워 떨기보다는, 이 세계와 함께 고통받으면서 하나님의 심판, 그분의 공의의 통치를 향해 전개되는 과정을 겪으며 오히려 희망을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의 종, 즉 “내가 붙들어 주는 사람,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 내가 나의 영을 주어,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사람”은 바로 이런 믿음, 이런 통찰, 이런 실천을 통해 불안과 절망의 세계에 진정한 희망을 주는 사람이다.
바로 이 시기, 즉 제2 이사야가 활동하던 기원전 6세기 중후반이 유대-기독교 역사에서 하나님이 유일신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시점이다. 하나님은 한 민족의 수호신에서 온 세계의 창조자로서 모든 피조물에 대한 유일한 주권을 주장하는 존재가 된다. 하나님은 이제 유대인을 심판하기 위해서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를 들어 쓰시는가 하면, 이제 포로 생활에 고통받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를 들어 쓰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율법의 이념을 구현하는 윤리적인 존재로서 온 세계의 보편적인 심판자, 즉 잣대가 된다. 헤겔이라면 이 하나님이 대표하는 것이 “추상적 보편성”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추상적 보편성”에 머물지 않는데, 이 보편성은 네부카드네자르나, 키루스라는 구체적인 인간을 통해 구현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보편성의 도구가 되는 이들을 가리켜 “구체적 보편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개별성 혹은 단독성이라는 의미의 구체적 보편성은 그 이상의 도약을 필요로 한다.
일반적으로 신 인식은 단일신론에서 유일신론으로 발전한다. 단일신론은 신은 여럿이지만 그 중 단 하나의 신이 최고 존엄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구약성서>에서 이런 신관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이 마치 다른 신들을 어전회의의 문무백관들처럼 다스린다. 유일신론은 단 하나의 신 이외의 다른 모든 신에게서 신성을 박탈한다. 신은 단 한 분뿐이며, 나머지는 우상, 즉 가짜에 불과하다. 유일신관은 유대교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조로아스터교는 이사야와 유사한 시기인 기원전 6세기경부터 유일신 사상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 유일신교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적 유일신교다. 이런 경우 패권을 잡은 민족만이 신의 배타적인 백성이 된다. 유대교 역시 배타적인 민족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지만, 유대교의 유일신교는 내적 모순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바로 유대민족이 제국의 민족이 아니라 억압받고 멸시당하는 피식민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유대교는 이 내적 한계와 씨름하는 과정에서 민족적 한계를 넘어설 뿐만 아니라, 신의 전능을 약자의 형상에서 발견하는 전혀 새로운 신론의 지평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새로운 신 이해의 지평에서 십자가에 달린 한 남자가 구세주로 고백될 수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는 온 세상의 약자와 연대할 수 있는 진정한 보편성을 획득한다.
주의 종은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진리의 삶으로 인식하고 실천하는 모든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가 바로 주의 종, 즉 “내가 붙들어 주는 사람,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 내가 나의 영을 주어,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