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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요논평 ** 하버마스, 혹은 '친미좌파'의 현재: 김남시님께
ahjabie 추천 0 조회 346 08.03.06 17:47 댓글 1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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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03.08 19:28

    첫댓글 자상하고도 친절한 응답 감사드립니다. 한 동안 비평고원에서 제 발언이 - 꼬리말이건 독립된 글의 형태건 - 대화의 '종결'을 선언하는 마침표가 되어 버리는 씁쓸한 경험을 한 이후 저를 분명한 수취인으로 명시하는 아쟈비님의 이 답변은 절 기쁘게 합니다. 아쟈비님의 악트글과 지난 화요논평에 대한 제 답글의 문제의식은 한가지 단순한 질문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건 선함과 악함, 좋음과 나쁨, 나아가 옳바름과 그름의 구별에 어떤 식으로든 관계맺지 않고 과연 '정치적인 것'이 기능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그건 칼 슈미트나 그의 '정치적인 것'의 이론에 기반, 새로운 - agonistic! - 정치적 대립을 활성화

  • 08.03.08 19:44

    시키려 하는 샹탈 무페 ("On the Political") 등의 책을 통해 얻어진 질문이었지요. "정치적인 것"을 다른 가치들, 무엇보다 도덕적인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이런 이론들은 제가 보기엔, 칼 슈미트처럼 정치적인 것을 '전적으로 자의적인 의지적 결정'의 문제로 환원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런 의미에서라면 '정치 외적인' 다른 도덕적, 심미적 가치 판단들에 의거하지 않는 정치적 판단과 결정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일까요? 오늘날 미국의 헤게모니적 세계 지배를 '다극적이고 복수적 정치 질서'로 재편할 것을 주장하는 샹탈 무페의 '정치적 진술'은 미국의 헤게모니적 세계지배를 '나쁜 것, 좋지 않은 것' 이라고 보는 가치적

  • 08.03.08 19:57

    판단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어떤 현실의 정치적 결정 혹은 실행등을 'illegitim' 하다고 판단, 비판하는 정치적 진술과 행위는 그 결정과 실행에 대한 '도덕적, 가치적 판단'에 의해서만 가능하지 않을까요? 칼 슈미트를 쫓아 샹탈 무페가 정치적인 것의 근본 범주로 여기는 "우리/그들"의 구분이 어떤 '정치외적' 가치 판단들 없이 가능한 것일까요? 테러, 전쟁, 내전 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한 국가 내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순수한 정치적 판단'이란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 '정치적인 것'을 다른 모든 가치로부터 분리, 독립시키려는 이러한 니힐리스트적 제스쳐야말로 결국엔 오히려 antagonistic 한

  • 08.03.08 20:09

    '우리/그들'의 순전히 '의지적 결정'에만 의거하는 대립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따라서, 제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것은 정치적인 것과 다른 가치들이 갖는 이러한 연루 관계를 결정주의 Decisionism 적으로 분리, 독립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 하나의 정치적 행위와 결정들 속에 내재되어 있을 수 밖에 없는 이러한 '가치판단'의 계기들을 주목하고 부각 - 거기엔 당연히 그에 대한 비판이 포함되지요 - 시킴으로써 그를 이후의 정치적 행위와 결정의 규범적 토대로 삼으려는 노력입니다. "인권" 개념의 부르조아적 (맑스 "유대인 문제에 대하여"), 나아가 bio-political (아감벤 "호모 사케르")한 근원과

  • 08.03.08 20:34

    탄생배경을 숙지하고서라도, 저는 예를들어 아프리카 기아 아동을 위해 성금을 내는 행위를 "고통받는 타자로 부터 안전한 심리적 거리감을 확보하려는 이데올로기적 감정적 자기보호 메커니즘의 소산"이라고 비야냥거리는 지젝 ("Die Revolution steht bevor") 의 냉소보다는, 차라리 인권운동 단체들에 대한 후원과 지지를 권하겠습니다. "부르조아적 도덕"에 대한 이러한 방식의 심리주의적 해체가 오늘날 모든 실천 가능한 사회운동들을 냉소적으로 부정하면서 스스로는 아무 실천도 하고 있지 않는 '룸펜좌파'들의 이데올로기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우린 목격하고 있으니까요. "인권보호"를 위한 명분으로 이루어지는 무력적 개입

  • 08.03.08 20:55

    에 대해 당연히 우리는 비판하고 경계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비판의 근거가 그것이 한 국가 Nation 의 '절대적 주권 Souveranity' - 칼 슈미트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의 근본적 담지자인 - 을 침해했다는 데서 찾아져서는 안되겠지요. 왜냐면 그 '절대적 주권'이라는 개념이야말로, 데리다 ('불한당들")와 아감벤 ("호모 사케르")이 지적하듯, 근대의 일국적 Nation과 그 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그 Nation의 '시민'으로 등록시켰던 근대적 Bio-Politic 의 출발점이었으니까요. 오히려 우리는 데리다가 말했듯, 한 Nation의 '주권의 절대성'까지 제한하고 규제할 수 있는 어떤 초월적 가치 - '정의' - 를 향해

  • 08.03.08 20:56

    나아가려고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후기 데리다의 정치적 입장은, 제가 보기엔 하버마스의 그것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 08.03.08 21:10

    미국에 대한 유럽 지식인들의 복잡한 내적 관계를 이야기하는 걸 잊었습니다. 외부적으로, 특히 한국에서는 마치 유럽의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선 "반미주의" 만이 지배하고 있는 듯 보여지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유럽의, 소위 '좌파'로 분류될 수 있는 지식인들 사이엔 일정한 시간을 두고 소위 "pro-americanism"이 재생산되어오고 있지요. 토크빌에서 부터 출발해, 한나 아렌트, 나아가 질 들뢰즈에게까지 이어지는 이러한 Pro-Americanism 은 유럽에서의 '반유대주의'와 'Nationalism' 등과 서로 복잡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들뢰즈의 pro-americanism 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 08.03.08 21:22

    봅니다. 68 운동의 주요한 이념적 기반을 제공한 당사자이면서도 들뢰즈는, 68의 중심 이슈 중 하나였던 '베트남 전쟁'을 매개로한 광범위한 '반미(제국주의)'와는 다른 미국에 대한 입장을 보여줍니다. 예를들어 그의 글 "Bartleby and Formel" (Kritik und Klinik)에서 들뢰즈는 미국을 '형제, 자매들 사이의 패치워크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아비없는 사회'의 모델로 이야기합니다.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토크빌이 자신의 글이 미국에 대한 "찬양가 Loblied" 로 들릴 것을 우려하고 있는데 반해, 그런 비난이 더 개연적일 수 있던 시대에 글을 쓰면서도 들뢰즈는 미국과 미국적 Pragmatism 을 유럽의 억압적이고

  • 08.03.08 21:34

    "아버지적 정신"에 대비시키고 있지요. (유럽 지식인들의 이러한 pro-americanism은 예를들어 오늘날엔 독일 바이에른 출신으로 독일에서 교수활동을 그만두고 자진해서 Stanford 로 건너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비교문학" 학자로 성장한 Hans Ulrich Gumbrecht 에 의해 대변되고 있습니다. 좌파보다는 보수적 입장에 가까운 그는 미국의 pragmatic 한 '민주주의'를 유럽의 폐쇄적 사회구조에 대립시키면서 내세우고 있지요.) 이런 인물들을 고려해 본다면 우리는 소위 '친미좌파'의 출현 시기를 좀 더 뒤로 미루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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