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양공의 둘째며느리가 되며 휘 맹균 (孟畇) 문혜공 (文惠公)의 배위가 되시는 정경부인 (貞敬夫人) 전의이씨 (全義李氏)는 공주목사 (公州牧使, 정3품) 를 지낸 이구직 (李丘直)의 4남3녀중 3녀요, 전법좌랑 (典法佐郎, 종6품 )을 지낸 이득영 (李得榮)의 손녀요, 판전교시사 (判典校寺事, 정3품) 를 지낸 낙안인 (樂安人) 김인관 (金仁琯)의 외손녀 (外孫女)입니다. 정경부인은 당대 명문가 집안에서 곱게 자란 귀한 막내따님이셨습니다.
정경부인의 외조부 김인관은 양경공 (良景公)의 전배위 (前配位) 정경부인 안동권씨의 외조부가 되기도 하니 정경부인의 친정어머니와 안동권씨의 친정어머니는 자매 (姉妹)간입니다. 그리하여 정경부인과 안동권씨는 이종사촌지간(姨從四寸之間)이면서 시댁으로 보면 시숙모 (媤叔母)- 시조카며느리관계였던 것입니다. 즉 휘 맹균 문혜공과 휘 종선 (種善) 양경공은 3살 터울 숙질간 (叔姪間)이면서 처가쪽으론 이종사촌 동서지간 (同壻之間) 이기도 하였던것입니다.
[참고: 흥미로운 사실은 양경공과 문혜공은 어렸을때부터 총명 (聰明) 하기로 소문났는데 숙부되신 양경공께선 1382년에, 조카인 문혜공께선 3년뒤인 1385년에 각각 나이 15세에 문과에 급제하는 쾌거(快擧)를 올려 한산이문을 빛냈습니다.]
정경부인의 시부모 (弟父母)되시는 문양공 (文襄公)과 진주류씨는 남편 문혜공이 18세되던 1388년에 서거 (逝去)하셔서 시집오셨을 당시 시부모님이 살아계셨는지는 명확치 않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정경부인이 시부모의 3년상 (三年喪)을 같이 치뤘다는 기록이 있어 아마도 시부모님 문양공내외 살아생전 시집오지 않았겠나 보여집니다. 시조부모 (媤祖父母)님이 되시는 목은선조 (1328-1396)와 정신택주 안동권씨 (1331-1394)는 생존해 계셨고 수년동안 둘째 손자며느리 (=손부, 孫婦)를 아껴하셨을 겁니다.
정경부인의 친정 아버지되는 이구직은 고려조에서 여러 벼슬을 거쳤는데 숭복도감녹사 (崇福都監錄事), 삼사좌윤 (三司左尹), 판선공시사 (判繕工寺事)를 거쳐 봉익대부 형조판서 (奉翊大夫 刑曹判書, 종 2품 재상직)에 이르렀습니다. 1392년( 태조 1)에 조선이 건국되자 새왕조에 출사하여 개국원종공신 (開國原從功臣)으로 책록되고, 그뒤 호조전서를 거쳐 공주목사를 역임하였던 분입니다. 그러나 곧 있어 1394년에 세상을 뜨십니다.
정경부인의 친정집이 굉장히 잘 풀렸습니다;
이구직의 후손들은 나중에 현달하여 명문 전의이씨중에서도 번창한 한 파인 예조참판공파 (禮曹參判公派)등을 이루었고 출세한 후손들 덕분에 친정아버지 이구직은 사후 (死後)에 높은 증직 (贈職)을 조정으로부터 계속 받았습니다.
남형제 4명, 즉 문혜공의 처남 (妻男)들 네명 모두 출사하였는데 이정간 (李貞幹)은 중추원사 (中樞院使)를 지냈고 그 아래 동생 이진간 (李珍幹)은 홍문관 부제학(弘文館 副提學)을 지냈고 또 그 아래 동생 이양간 (李良幹)은 내섬소윤 (內贍少尹)을 지냈고 막내 이문간 (李文幹)은 군기시 부정 (軍器寺 副正)을 지냈습니다.
[역사적 고찰 하나:
시집간 정경부인의 언니 두명의 시댁들은 절의와 충성 (忠誠) 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1)맏언니는 안동권씨 집안에 출가했는데 맏언니의 손자되는 즉 정경부인의 이손 (離孫, 촌수로는 4촌 손자뻘)되는 권절 (權節)은 수재들만 뽑혀 들어간다는 집현전 (集賢殿)에 들어가 벼슬이 교리 (校理)에 이르렀습니다. 평소 세조 -당시 수양대군 (首陽大君)과 친분이 있어서, 수양대군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찾아와 계유정난 (癸酉靖難)에 동참할 것을 여러번 권유하였으나, 귀머거리로 가장하여 못들은 체하고 거사 (擧事)에 끝끝내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세조가 여러차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미친사람처럼 가장하며 벼슬에 오르지 않고 평생동안 절의 (節義) 를 지켰다 합니다. 그를 생육신 (生六臣)의 한 명으로 남효온(南孝溫)을 대신하여 말하기도 합니다. 숙종 때 정문 (旌門)이 세워지고 증직 (贈職) 되었습니다.
2)정경부인의 둘째 언니는 청주곽씨 (淸州 郭氏) 곽순(郭淳)에게 출가하였는데 언니의 시아버지 되는, 즉 정경부인의 사장 (査丈) 어른되시는 곽추 (郭樞)는 일찌기 고려조에 출사하여 여러 요직을 거쳐 예문관 직제학 (藝文館 直提學) , 밀직사사 (密直司使) 에 올랐으며, 1383년(우왕 9)에는 상당군 (上黨君)에 봉해졌던 고려조의 대신 (大臣)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태조 이성계가 역성혁명 ( 易姓革命)을 일으키고, 정몽주등의 고려충신들이 참화 (慘禍)를 당하자 모든 것을 버리고 두문동 (杜門洞)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합니다. 조선을 개국하고 난 후 태조가 즉위하여 개국공신 (開國功臣)에 책록하였으나 받지 않았고, 태종이 즉위하여서는 좌찬성판호조 (左贊成判戶曹)의 관직을 내려 입사 (入仕)할 것을 청하였으나 물리치고 고려의 신하로서 절개를 끝끝내 굽히지 않았다 합니다. 목은선조, 인재공 (麟齋公)등과 함께 두문동 72현 (杜門洞七十二賢) 중 한분으로 후세에 추앙 (推仰)받는 인물입니다.
곽추의 장남인 둘째 언니의 남편되는 즉 정경부인의 형부 (兄夫) 곽순 역시 고려조에 출사하여 벼슬이 봉상시소경 (奉尙寺少卿)에 올랐으나 사직하고, 아버지의 뜻을 이어 광주 (廣州)와 저자도 (楮子島)로 내려가 은거해 살며 조선조에 입사하지 않았다 합니다. 청주지역에 사는 청주곽씨들중엔 곽추의 네 아들 –곽순, 곽홍 (郭郭), 곽휘(郭煇), 곽운 (郭惲)으로부터 내려온 후손들이 많다고 합니다.]
남편 문혜공은 일찌기 글씨와 시문에 능해 대문장가로 이름이 높았고 대제학을 비롯하여 벼슬이 종1품인 의정부 (議政府) 좌찬성 (左贊成)에 까지 이르러 출세하였습니다. 정경부인 또한 글도 잘 썼고 시문 (詩文) 에도 뛰어났던 학식에 밝았던 지적인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남편 문혜공 사이에 무후 (無後)하였습니다.
중국 진 (秦)나라때에 등백도(鄧伯道)란 사람이 난리를 피하여 부인과 아들 및 조카를 데리고 피신 (避身) 하다가 아들과 조카를 둘 다 데리고 갈수 없는 사정이되어 부인과 의논끝에 결국 조카를 구하고 아들은 버리고 갔다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등백도는 결국 아들을 더 이상 두지못하여 세인 (世人) 들이 등백도가 아들을 못둔것은 하늘이 무심 (無心)한 탓이라고 일컬었다 하는데 문혜공을 등백도에 비교하기도 하였습니다.
정경부인 친정의 남매 (男妹)들 6명 모두 후손들을 두어 다복 (多福)하며 날이 갈수록 번창하였는데 정작 본인은 무자식 (無子息)했던것이 아마도 부인에겐 평생 가슴아픈 상처의 엉어리로 남은 비참한 일이었을것입니다.
칠저지악중 (七去之惡)에 하나가 무자 (無子)한 것이고 또 하나는 질투 (嫉妬)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부인의 나이 70세 가까워 남편 문혜공이 총애하는 젊은 계집종의 머리를 자르고 흠씬 두들겨 팬 다음에 움에 가두고 죽물 한 모금 주지않으며 굶어 죽였습니다. 또 시체도 장사지내주지 않고 그냥 길거리의 구렁텅이에 갖다 버렸습니다.
아끼는 대신집에서 가화 (家禍)가 일어나자 세종은 여로모로 관대하게 일을 처리하려 하나 사간원 (司諫院) 과 사헌부 (司憲府)에서 자꾸 들고 일어나 결국 영의정 (領議政) 황희와 독대 (獨對) 끝에 남편 문혜공은 폄출 (貶黜) 되어 황해도 우봉현 (牛峰縣) 으로 귀양을 가는 고초를 겪고 부인은 좀 있다 정경부인의 작첩 ( 爵牒)을 회수하는 선에서 일이 일단락 (一段落) 됩니다. 물론 현대의 상식과 법으론 이해할수 없는 말도 안되는 관대한 처분이라 할수 있겠으나 신분제약 (身分制約)이 엄격했던 당시 봉건적 (封建的) 사회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남편 문혜공은 곧있어 귀향길에서 풀려 돌아오다 개성부 (開城府)에 이르러 70세의 나이로 돌아가십니다.
부인은 다복한 집안에서 성장하였고 학식도 있었으며 충분히 현모양처 (賢母良妻)가 될 자질을 갖췄으나 후사 (後嗣)가 없는 아픔을 평생 겪으며 끝내 가화를 일으켜 후세에 일부로부터 지탄을 받는 조선시대 악처 (惡妻)의 대명사 (代名詞)중 한 명으로 전락 (轉落)되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부인의 막내 시제 (弟弟) 휘 맹진 (孟畛) 판중추공 (判中樞公)의 3남인 휘 보기(保基) 부정공( 副正公)이 중부 (仲父)되신 문혜공에게 출계 (出系)하여 후사를 이었습니다.
[참고: 문양공의 장남 휘 맹유 (孟㽥) 사윤공 (司尹公)이 무자하여서 막내 동생 휘 맹진 판중추공의 2남 휘 유기 (裕基) 도총진무공 (都摠鎭撫公)이 백부 (伯父)되신 사윤공에게 출계하여 뒤를 이었는데 사육신화때 연루되어 도총진무공은 처형됐으나 아들 휘 은산(銀山)이 다행히 살아남아 가계를 이었습니다.]
이상까지 내멋데로 풀어본 우리 할머니네집 이야기였습니다.
첫댓글 다음 두편엔 문양공의 3남 휘 맹준 선조 배위 경주이씨와 4남 휘 맹진 선조 배위 무송윤씨가 실리겠습니다. 계속하여 흥미진진한 얘기들로 엮어질것 같습니다.
"숙부인 양경공"은 오타가 아닌지요?
안녕하세요 안유재님! 가끔 인터넷에서 뵙는데 팬입니다~ 지금 "숙부되신"으로 정정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앞으로 부족한 사람 글쓸때 잘못된것 지적해주시고 인도해주십시요~
흥미진진한 얘기. 연재 소설처럼 기다려 집니다.
역사속 선조님들의이야기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맹자 돌림 선조님들의 백-중-숙-계의 서열을 확실히 하여 편집하였습니다. 앞으로 더 신경쓰도록 하지요.
작첩을 회수하였다가 다시 돌려준 것에 대한 왕조실록상 기록을 생략한 기록이나 빠뜨린 기록을 많이 보내요 많은 상소에도 불구하고 작첩을 회수에서 다시 돌려준 것을 유지함
생략한 것에 대해 죄송합니다. 먼저번 아이디를 분실하여 지금 글을 수정할 수가 없으니 양해 바랍니다. 앞으론 더 신경쓰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