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에서 말하는 인간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사람다움의 본성 다섯 가지가 곧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다.
이를,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의 떳떳한 도리(道理)란 뜻으로 오상(五常)이라고 부른다.
인(仁)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란... 불쌍한 것을 보면 가엾게 여겨 정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
의(義)의 수오지심(羞惡之心)은... 불의를 부끄러워하고 악한 것은 미워하는 마음,
예(禮)의 사양지심(辭讓之心)이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하며 남을 위해 사양 배려할 줄 아는 마음,
지(智)의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마음이다.
신(信)의 광명지심(光名之心)은... 중심을 잡고 항상 가운데에 바르게 위치해 밝은 빛을 냄으로써 믿음을 주는 마음이다.
유교 철학을 창업 기반으로 삼았던 조선은 유교의 이 5상(5대 덕목인 인의예지신)을 넣어 한양의 4대문을 만들었다.
동대문은 '인'을 일으키는 문이라 해서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은 '의'를 두텁게 갈고 닦는 문이라 해서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예'를 숭상하는 문이라 해서 숭례문(崇禮門),
북문은 '지혜'를 넓히는 문이라 해서 홍지문(弘智門)으로 불렸다.
* 홍지문은 숙정문(肅靖門)으로 바뀐다.
그리고 인의예지의 중심에 '신(信)'을 넣어서 보신각(普信閣)을 건립하여 4대문을 열고 닫는 신호로 타종하였다.
북대문은 태조 5년 도성 축조 때 건립된 문으로 백악산(현 북악산)의 동쪽 마루턱에 위치한다. 하지만 태조 13년 경복궁의 좌청룡 지맥을 보존해야 한다는 풍수지리 사상에 의해 문이 닫혔다.
조선 후기에는 서울 성곽뿐 아니라 서울 성곽 밖으로 북한산성과 탕춘대(蕩春臺) 성을 쌓기 시작했다. 이 3개의 성을 이은 것이 지금의 도성이다. ‘지(智)’는 이때 지어진 탕춘대 성문에 들어가며 ‘지(智)혜를 널리 전파하라’는 의미로 홍지문(弘智門)이라 세워졌다.
마지막 덕목인 ‘신(信)’은 고종 때 ‘믿음을 널리 울려라’라는 뜻으로 ‘보신각(普信閣)’을 세워 수도 안의 5대 덕목을 채웠고 당시 백성들은 문을 드나들며 이 다섯 가지 덕목을 마음에 기렸다.
한편, 4대문은 저마다 상징적인 동물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를 사신사(四神沙)라 한다. 동대문은 좌청룡, 서대문은 우백호, 남대문은 남주작, 북대문은 북현무를 뜻한다. 그 가운데 조선실록 기록을 보면 우청룡·좌백호라는 말이 표현돼 있다. 이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좌청룡·우백호를 경복궁 중앙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앉은 왕의 관점에서 표현한 것으로 다른 뜻을 가진 것은 아니다.
특히, 동대문 부근이 지형이 낮고 적을 방어하기에 부적합하다고 판단한 태조는 이를 보안하기 위해 밖에서 성문이 보이지 않게 흥인문을 옹성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왜구의 침투는 끊이지 않았고 이후 1869년 고종은 흥인문의 지형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 용의 형상을 한 ‘지(之)’를 붙여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개명했다.
♤홍지문(弘智門)과 숙정문(肅靖門) ♤
조선조 초에 정도전(鄭道傳)은 한양의 성문과
중앙의 종루 이름을 사람이 살아가면서 늘 지켜야 할 다섯가지 도리,
즉 인(仁) 의(義) 예(禮) 지(知) 신(信)의 오상(五常:五行)을 따서 붙였다.
그리하여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 돈의문(敦義門:서대문),
숭례문(崇禮門:남대문), 홍지문(弘知門),
보신각(普信閣)이란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홍지문(弘知門)은 그 당시 정치인들은
백성들이 똑똑해져서 정치를 바르게 하는지
잘못하는지를 구별할 줄 아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북대문을 홍지문이라고 부르는 것에 반대해서,
그 당시 뜻으로 개혁(改革)과 정화(淨化)라는 의미를 지닌
숙청(肅淸)이라는 말을 붙여 '개혁의 문'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북대문인 숙청문은 북한산 동쪽
산마루턱의 성북구 성북동 계곡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서울은 국방에서 뛰어난 지리적 요건과 함께 배산임수(背山臨水)를 고루 갖춘 도성이다.
-성호찬-
첫댓글 조선시대에 그렇게도 완벽을 일삼아했어도 일본의침략을받은것은 국력이 약해저서 일본의침략으로 망하는처지가되었든가?
일본은 서구문명을 받아들려 조선 청 로시아까지 굴복시켰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