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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대간의 조령산 마루를 넘는 새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대로 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였다.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억새풀이 우거진 고개, 또는 하늘재와 이우리재 사이, 새로 된 고개등의 뜻으로 새재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임진왜란 이후 이곳에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등 3개의 관문(사적 제147호)을 설치하고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문경읍에서 서북쪽으로 깊은 협곡을 따라 3.5km 가면 조선 숙종 34년 (1708년)에 쌓은 영남 제1관문인 주흘관문에 이르며 3km 더 가면 제2관문인 조곡관, 이곳에서 3.5km 떨어진 곳에 제3관문인 조령관이 있다. 이 일대를 198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했다. 문경의 3관문을 품고 있는 주흘산(1,106m)은 관문까지의 험한 계곡에 이루어진 풍치가 매우 뛰어나며, 여궁폭포, 혜국사, 용추, 원터,교구정터 등의 명소가 있다. 최근에는 KBS 촬영장이 들어서 관광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관광코스 : 제1관문-제2관문-제3관문(왕복) (13km, 4:30소요) 문경새재 박물관 : 공원입장시 무료관람.
입장료 성인 개인 - 2100원, 성인 단체 - 1700원 청소년 개인 - 1100원, 청소년 단체 - 900원
[문경팔경] ○ 쌍용계곡 속리산봉 동쪽 골짜기 따라 흐르는 물이 낙동강으로 합류하기전 농암천 상류쪽 도장산 기슭 4km구간에 펼쳐놓은 계곡으로 태백준령에서 내륙 깊숙히 서남쪽을 향해 달려온 소백산맥이 마지막 힘을 모아 빚어 놓은 비경이다. 도장산과 불일산의 기암괴석과 층암절벽등 솜씨를 자랑하는 조물주의 작품들이 천고의 신비를 간직한채 병풍처럼 둘러싸고 옥계수가 구비구비 휘감아 돌며 부딪혀 깨어지며 수천년 세월속에 거대한 암석을 갈고 쪼아내서 훌륭한 예술품으로 조각한 걸작들을 이곳 저곳에 펼쳐놓아 보는 이로 하여금 환성을 울리게 한다.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왔고 고승대덕을 머물게 한 유적들이 수많은 전설과 함께 전해 오는 쌍용계곡은 용추에서 청용, 황용이 살았다 하여 쌍용계곡으로 불리우고 있다 ○ 용추계곡 점촌~문경간 국도(3호선)변의 마성면사무소(소야교)앞에서 가은.농암 방면으로 10여km를 가면 가은읍내를 지나게 된다. 여기서 석탄박물관쪽(청주.괴산방면)으로 8km쯤 더 가면 가은읍 완장리 본동(마을회관)이 나타난다. 여기서 계속 2km정도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도로변 좌측에 1,000여평 규모의 주차장이 보인다. 주차장 옆 송림이 우거진 경사진 도로가 있으니 이곳이 선유동계곡의 입구이다. 선유동 입구에서 922번 지방도로를 따라 600m쯤 올라가면 대야산 용추 관광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벌바위 마을을 통과한다. 벌바위란 마을 뒷 산의 바위들이 벌집 같다고 지어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마을 가운데로 개설된 시멘트 농로 길을 800m쯤 올라가면 승용차 수십대는 주차 할 수 있는 돌마당이란 휴게소를 만난다. 휴게소입구 오른쪽 언덕에는 넓디넓은 암반 하나가 누워 있어 농민들은 이곳에서 타작을 하기도 하며, 웬만한 농가 마당만큼 넓다하여 마당바위로 불리우고 있다. 휴게소 앞 계곡을 건너 용추에 도착하는 임도가 개설되어 있으나, 대다수는 휴게소 앞으로 연결 된 소로를 많이 이용한다. 휴게소 앞에서 용추까지 올라가면서 내려다보면 좌측계곡의 풍경이 아무런 장애 없이 잘 보이고 산행의 아기자기한 맛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야산(大耶山 930.7m)은 가은읍 완장리에 위치하며, 충북 괴산군과 경북 문경시의 경계를 이루면서 소백산맥 고지에 천혜의 비경을 간직한채 깊숙히 숨어 있는 산으로 깍아지른 암봉과 온갖 형상의 기암괴석이 울창한 수풀로 둘러싸인 장엄한 모습으로 반공에 솟아 있어, 흔히 북한산과 도봉산을 합친 것 같은 산으로 비유되기도 하며, 사계절 맑은 물이 계곡을 흘러 내리고 있다. 대야산 자락의 비경이 한 둘이 아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2단으로 이뤄진 용추폭포의 장관이야 말로 명소중의 명소로 비경중의 비경이 아닐 수 없다. 암수 두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오른 곳이라는 전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용추 양쪽 거대한 화강암 바위에는 두 마리의 용이 승천을 할 때 용트림 하다 남긴 용비늘 흔적이 신비롭게도 선명하게 남아 있고, 아무리 가물어도 이곳의 물은 마르는 일이 없어 옛부터 극심한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올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용추의 형상을 보면 위아래 두 개의 용추가 이어졌으며 수만년 기나긴 세월을 쉼 없이 흘러내려 마침내 떨어지는 폭포 아래에는 천하에 보기드문 신비스런 하트형(♡)으로 깊게 파인 소(沼)가 윗 용추로, 절묘한 형태는 보는 이 마다 미소를 머금게 한다. 윗 용추에서 잠시 머물던 물이 다시금 매끈한 암반을 미끄럼 타듯 흘러내려 부드럽게 이루어 놓은 것이 아래 용추로 하절기에는 개구쟁이 꼬마들의 미끄럼틀로 이용되기도 하는 곳이다. 용추폭포 위의 넓디넓은 암반지대를 지나 20분쯤 올라가면 월영대(月影臺)라는 또다른 명소가 기다리고 있으니 휘영청 밝은 달이 중천(中天)에 높이 뜨는 밤이면 희디흰 바위와 계곡을 흐르는 맑디맑은 물 위에 어린 달 그림자가 더할 나위없이 낭만적이라하여 월영대라 했던가 ○ 선유동계곡 동서로 흐르는 계곡 따라 1.7KM에 걸쳐 있는 이곳 선유동은 전국의 선유동이라 이름 붙여진 명승지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으니 수백명이 앉을 수 있는 거대한 암석들은 마치 대리석을 다듬어 뉘어 놓은 듯 하고 자연스레 포개진 거암들은 마치 인공적으로 쌓아 놓은 듯 정교하게 느껴 진다. 대리석을 깔아 놓은 듯 하얀 암반이 절묘한 하상을 이룬 가운데 기묘하게 늘어선 암벽들 사이로 수정보다 더 맑은 옥계수가 사계절 쉬지 않고 흐르는 정경은 하나의 오묘한 자연 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예로부터 이곳 경관이 얼마나 수려했으면 소금강이라 하였으며 옥수 또한 티없이 맑았으면 오늘에 와서도 명수로 알려졌을까? 한국의 비경 100선 중 하나요 한국의 명수 100선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은 것만 보아도 능히 알 수 있는 일이며 신라의 석학 고운 최치원 선생께서도 이곳을 합천 해인사 계곡인 홍유동 계곡보다 좋다고 하시면서 이곳에 지내셨다.
이 골짜기는 아름다운 경승을 아홉구비로 나누어 선유구곡이라 하여 곡마다 그 나름의 독특한 아름다운 정취를 달리한 경관은 하늘을 뒤덮는 아름드리 노송과 함께 태고의 자태를 고스란히 간직한채 골골이 숨어 있다. 이 계곡 관란담 위에 손재 남한조가 정자를 짓고 글을 가르쳤다는 옥하정터가 있고 도암 이재는 용추동에 둔산정사를 짓고 후진을 양성했다. 지금의 학천정은 바로 도암선생을 추모하는 후학들이 그의 위덕을 기려 1906년에 세워졌으며 오른쪽에 조그마한 건물 한칸이 있어 도암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정자와 주변경관이 조화를 잘 이룬 절경지로 정자 뒤 거대한 암벽에는 산고수장이라는 힘찬 필지의 글이 새겨져 있다.
선유동 하류쪽 관란담 위에 서 있는 칠우정은 1927년 이 고장 출신 우은, 우석 등 우자호를 가진 일곱 사람이 뜻을 모아 세운 정자로 정자이름은 의친왕이 붙여준 것이라 전해오며 곡외의 학천정 앞 바위에는 선유동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고 석문이라는 석각글씨도 있었으나 석문을 찾을 길이 없으며 모두 최치원의 친필로 전해지고 있다. ○ 운달계곡 태고이래 도끼소리 모르고 자라온 수림이 대낮에도 하늘을 가리듯 빽빽히 들어선 원시림이 버티고 서 있어 웅장하면서도 포근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골짜기마다 흐르는 계곡에는 한여름에도 손을 담그면 얼음덩어리를 띄워 놓은 듯 차가워서 냉골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그 물속에 발을 담그고 하늘을 뒤덮은 숲의 계곡바람을 맞고 있으면 뼈 속까지 서늘해지는곳이다. 수령 300년이 넘는 전나무 숲속에는 군데군데 천수를 다한 고목들이 조각품마냥 운치를 더해주고 이름모를 산새들의 지저귐이 이방인의 혼을 뺏어 갈 듯한 울창한 숲의 터널을 걷다보면 우측으로, 수림으로 둘러쌓인 고찰이 나타난다.
○ 조령계곡 백두대간의 조령산을 넘는 이 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문화,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새재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옛 문헌에 초점(草岾)이라고도 하여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또는 하늘재와 이우리재 사이의 『새(사이)』, 새로 된 고개의 『새(新)재』등의 뜻이라고도 한다.임진왜란 뒤에 이곳에 3개(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의 관문(사적 제147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이곳은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유서깊은 유적과 설화.민요 등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이 곳에는 나그네의 숙소인 원터, 신구 경상도관찰사가 관인을 주고 받았다는 교귀정터만이 남아 있는 것을 1999년 중창하였고 옛날에 산불을 막기 위하여 세워진 한글 표석 "산불됴심"비(지방문화재자료 제226호)가 남아 있다. 그리고 역사에 얽힌 갖가지 전설을 비롯하여 임진왜란과 신립장군, 동학과 의병이 남긴 사담이 골골이 서리어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이 일대를 1974년 지방기념물 (제18호), 198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어 전국에서 관람객이 많이 찾고 있는 곳이다. ○ 봉암사 백운대계곡 봉암사내에 위치하여 일명 옥석대라고 함. 울창한 숲, 맑은 계곡, 은은한 목탁소리와 청아한 풍경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잠시 속세의 고뇌도 잊고 신선이라도 된 듯 끝없는 평온함에 젖어드는 곳이며 금강산 만폭동에 버금 가는 것으로도 유명하며, 화강암 바위면에 양각된 마애보살좌상은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5년(AD 879), 지증대사가 창건한 절로서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로서 유명하며, 보물 제169호인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9개의 문화재와 암벽이 웅장한 희양산(998m)과 봉암사 계곡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현재에는 조계종 특별수도원으로서 스님들의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일반인 출입을 금하고 있으나 석가탄신일만 개방하고 있다 ○ 진남교반 점촌에서 문경 충주방면으로 3번국도를 따라 10KM쯤 달려가면 70년도 문경경제의 전성기를 일구었던 광산의 하나인 문경탄광의 복구된 폐광지 모습이 나온다. 계속 S자형 만곡지형인 강변을 끼고 3KM쯤 달리면 오른쪽 강변을 따라 하늘로 치솟은 기암괴석과 층암절벽이 이어지고 맑고 푸른 강 위에는 가지런히 철교와 함께 3개의 교량이 모습을 나타내어 자연과 인공의 묘한 조화를 나타내는 곳이 진남교반으로 마성면 신현리에 속한다. 봄이면 진달래 철쭉이 만발하고 계절따라 천태만상으로 변하는 금강산을 방불케 한다해서 문경의 소금강으로 불리우고 있다. 1933년 대구일보사 주최로 경북팔경을 정하는데 이곳 진남교반의 경승이 단연 제1위로 선정되어 진남휴게소 폭포 왼쪽 암벽 위에는 '경북팔경지일' 이라 새겨진 석비가 세워져 있다. 국도따라 펼쳐지는 울창한 수림 강변따라 이어지는 기암절벽, 조령천이 영강에 합류하여 굽이도는 강변 모래벌과 아름드리 노송이 우거진 진남숲 일대 는 울창한 산림과 더 넓은 모래사장이 풍부한 휴식 공간을 제공하여 하절기의 강변휴양, 야유회, 각종 수련대회 장소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야간에 텐트촌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들은 휘영청 밝은 달밤에 강물위 달 그림자와 함께 또하나의 명화를 방불케 한다. ○ 경천호반 경천호는 낙동강 지류인 금천을 막아서 만든 전형적인 계곡형 저수지로 물이 맑고 수심이 깊은 광활한 호수다. 1983년 6월에 착공하여 3년 6개월 간의 공사 기간과 602억원을 들여 1986년 12월에 준공하였으며 제방길이 368m, 높이 63.5m, 최대수심 57m이며 총저수량2,822만톤으로 문경, 예천 2개시군 9개읍면에 76개 리동의 몽리면적 3,400ha에 농업용수를 공급하여 준다. 적성리 황장산에서 발원한 수원이 골짜기마다 흐르던 개울과 함께 경천호를 가득채운 경천댐은 무엇보다 공해없는 맑은물 수려한 경관으로 피서를 겸한 낚시터로 인기가 있으며 담수 초기에 향어 가두리양식장에서 흘러나온 향어와 금천이란 이름 그대로 비단같이 물이 맑아 댐이 축조 되기 전에는 메기, 피라미, 꺽지등 강고기의 보고로 1급 천렵지였던곳에 댐이 조성되어 어느 댐보다도 어종과 수량이 풍부하여 지금은 월척 붕어들을 쉽게 낚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최근에는 빙어양식과 은어방류로 강태공의 구미를 한층 돋우고 있다.
봄 나들이, 2014 5,27,
문경새재, 옛 길을 걷다.
嶺路崎山虛苦不窮 危橋側棧細相通 長風馬立松聲裏 盡日行人石氣中 幽澗結氷厓共白ㅁ 老藤經雪葉猶紅 到頭正出林界 西望京華月似弓
새재의 험한 산길 끝이 없는 길 벼랑길 오솔길로 겨우겨우 지나가네. 차가운 바람은 솔숲을 흔드는데 길손들 종일토록 돌길을 오가네. 시내도 언덕도 하얗게 얼었는데 눈 덮인 칡넝쿨엔 마른 잎 붙어있네. 마침내 똑바로 새재를 벗어나니 서울 쪽 하늘엔 초생달이 걸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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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丁若鏞)<1762년(영조38) 1836년(헌종2)>
다산 정약용 선생의 '겨울 날 서울 가는 길에 새재를 넘으며 (冬日嶺內赴京 踰鳥嶺作)'라는 작품입니다.
이 밖에도 문경새재의 험한 산길을 노래한 시는 많습니다.
그만큼 문경새재 고개는 '새들도 쉬어가는 고개'라 할 만큼 험하기로 유명한 고개랍니다.
백두대간인 조령산을 넘는 문경새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였다.
새재라는 이름은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억새가 우거진 고개, 하늘재와 이우릿재(이화령) 사이 등 그 의미도 다양하다.
공원 입구에는 근래에 보기 드문 흙길이 펼쳐지고 맨발로 거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3개의 관문을 따라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감상하며 옛사람들의 발길을 쫓아가보자.
-문경 관광 안내서 中-
벌써 나뭇가지에는 봄기운이 내려앉았네요~
그냥 지나칠 수 없었어요^^
한국의 아름다운길 100선에도 선정된 문경새재 옛길.
그 옛날 과거시험을 보기위해 한양을 향하는 선비들이
추풍령, 조령(문경새재), 죽령 중에서 굳이 선택했던 그 길.
(추풍령으로 가면 가을 바람에 낙엽 떨어지듯 낙방하고,
죽령으로 가면 대나무에서 미끄러지듯 낙방한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해요.ㅎㅎㅎㅎ믿거나 말거나~)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야외공연장이예요.
누런 잔디밭을 보니 아직 이 곳엔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겨울기운이 남아있는 듯 하네요.
(주차비는 주차장에 들어갈 때 선불로 2000원 계산했어요.)

조금 걷다보면 오른쪽에 옛길 박물관이 있습니다.
원래 이름은 문경새재 박물관이었다고 해요.
'옛길 박물관'이라는 이름이 문경새재를 걸으며 과거를 여행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을 듯 하네요.
입장료는 성인 기준 1,000원입니다.

옛길 박물관 앞에는 전동차 매표소 및 정류장이 있습니다.
이 전동차는 제 1 관문을 지나 문경새재 오픈세트장까지 운행한답니다.
편도 요금이 1,000원이니,
왕복 요금은 2,000원이 되겠네요.
전동차가 대기하고 있네요.
문경새재까지 와서 흙길을 밟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서
갈 때만 전동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합니다.

가는동안 뽕짝 음악이 너무 크게 흘러나와서...ㅋㅋㅋㅋ
조용히 걷는 분들께 좀 민망.....했어요.ㅋㅋ

전동차의 종착지,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입니다.

입장료는 어른 기준, 2,000원이네요.
세트장을 지나 이 길을 쭉 따라 걸어가면
문경새재를 넘어가는 제 2 관문, 제 3 관문을 만날 수 있겠지요.
문경새재 1관문에서 3관문까지의 거리는 약 7km정도 된다고 합니다.
왕복이면 약 14km정도 되겠지요.
우리나라에 이렇게 흙길로 된, 유모차를 끌고 다닐 수 있을만큼 완만한 산책길이 잘 보존되어있다는 것이
새삼 자랑스럽습니다.
저는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에서부터 제 1 관문(주흘관) 쪽으로 향하는 길까지 산책하기로 합니다.
아스팔트로 포장되지 않은 흙길을 걸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가는 길 왼쪽에 선정비군이 보이네요.
모두 문경을 거쳐간 지방관리들의 자취랍니다.

조금 걸어 내려가다보면
제 1 관문이 보이는데, 그 앞에 있는 광장이 바로,

'타임캡슐 광장'이네요.


경북 도립 100주년을 기념하며 만든 이 타임캡슐에는
400년 후에 개봉될 475종의 품목들이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지금 박물관에 보관되어있는 약 400년 전의 조선시대 물건들을 보는 내 감정들을
후대 사람들이 이 곳에 파묻혀있는 물건들을 보며 똑같이 느끼겠죠....ㅋㅋㅋㅋ
상상만 해도 참..ㅋㅋㅋㅋㅋㅋ
얼마나 신기해할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 이제 '주흘관'이라고도 하는 영남 제 1관을 통과하겠습니다.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숙종 34년(1708)에 설관 하였으며
3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잘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아, 그래요!!
문경새재 길을 일명 '장원급제길'이라고도 하죠.
이 길을 거쳐 한양으로 가면 장원에 급제한다는 소문때문에
호남지방 선비들 중에서는 일부러 문경새재길로 돌아간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호고곡-
1관문에서 3관문까지 6.5km........
흐음, 만만히 볼 거리는 아니네요.
거의 20리 가까이 되는 길...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제 1 관문을 나오니
더욱 가깝게 다가온 성벽.
그 옛날,
어쩜 저렇게 네모반듯한 돌들을 구해서
또 저렇게 빼곡히 쌓을 수 있었을까요?
2관문과 3관문은 중간에 훼손되어 복원한 부분이 있다지만,
1관문은 거의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있다하니
저 돌들도 300년동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겠네요.

흙길은 또 다시 이어집니다.
흙길 옆의 개울 역시
300년동안 쉼없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전동차의 뽕짝보다
개울노래가 훨씬 좋았어요~
세트장부터 1관문까지 거꾸로 길을 걷다보니
옛길의 시작을 알리는 안내석을 이제서야 만나네요.
이 길을 걸으며 선비들이 염원했던 장원 급제가 이루어졌다 하니,
저는 저를 아는 사람들의 행복과 건강과 안녕을 염원했답니다.

우리가 옛길을 걷는 동안에도
봄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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