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에서 느끼는 고독
1. ‘역’은 묘한 공간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때론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져 침묵이 지배하는 장소로 바뀌기도 한다. KTX가 연결된 큰 역을 제외하고는 작은 역들의 일상의 모습은 비워있는 대합실, 텅 빈 플랫폼이 대부분이다. 특히 밤에 외로이 불을 밝히고 있는 모습은 ‘바다’을 지키는 ‘등대’ 못지않은 비장감을 보여주기도 한다. 살아남아서 쇠락하는 땅을 보위하고 있는 최후의 방어선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밤’에 방문한 역은 ‘고독’을 절감할 수 있는 최적의 모습으로 서있다.
2. 낯선 지역이나 산과 바다의 외진 지역에서의 밤은 고독보다는 불안이 더 큰 감정적 요소로 다가온다. 익숙하지 않은 공간으로부터 뿜어 나오는 불편한 기색이 그 곳에 서있는 사람을 내면의 고독보다는 긴장 속으로 빠지게 한다. ‘고독’은 조금은 익숙한 장소에서 나타난다. 익숙하기에 외부의 영향과 관계없이 내면의 감정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역은 기차를 타는 곳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의 감정은 그리움을 떠올리게 하며 그리움은 지나간 시간의 기억과 함께 현재의 고독을 절감하게 만든다. 시간의 정지 속에서 고독만이 떠오르는 것이다.
3. 나에게 가장 익숙한 두 역을 방문하게 되었다. 제천에 입원하고 있는 형을 방문하고 나서 <봉양역>과 <양동역>을 찾은 것이다. 그동안은 스치듯 지나가는 연결 장소였지만, 숙소를 봉양에 얻고나니 시간이 여유로워졌고 밤의 역을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 두 장소 모두 농촌 지역에서는 제법 큰 곳이지만 밤이 되면 낮에 남아있던 온기는 빠르게 냉각되어 버린다. 그리고 남은 것은 어둠과 침묵뿐이다. 오로지 그 시간에 움직이는 것은 기차들의 움직임과 역의 존재일 뿐이다. 침묵의 시간을 음악을 들으면서 견뎌낸다. 내가 탈 기차 시각은 2시간이 넘고 움직일 수 있는 장소는 없다. <양동역> 앞 식당은 문을 닫았지만 불을 밝힌 술집이 하나 보인다. 하지만 술을 마실 체력이 안 된다. 술은 나에게 1주일 이상의 간격을 두어야 하는 일종의 의례가 되어가고 있다.
4. 두 역을 내가 사랑하는 이유는 역의 조용함이 있고, 최소한의 정차가 있으며, 무엇보다 역 근처에 도서관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저녁 8시에 문을 닫는 도서관 역시 침묵과 고요만이 지배하는 장소이다. 시골의 도서관들은 비워있다. 역이 비워있는 것처럼, 하지만 움직이고 활성화되어야 공간들이 비워있는 것이 좋아서 이곳을 찾는다. 역설적으로, 고독을 체감할 수 있는 곳이다. ‘안정된 고독’, 봉양과 양동 두 곳에서 느끼는 고독의 색깔이다. 그래서 편안하다. 극도의 위험이 배제된 장소, 사람들은 없지만 언제든 인간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장소, 그렇기에 그곳에서는 사람을 만나도 반갑고 두렵지 않다. 당연히 사람이 있어야 할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공간이 비워있을 때 고독이 등장한다. 이때의 고독은 어쩌면 위안의 고독이다. ‘실연’이 때론 달콤함을 선사하듯이, 고독도 때론 힘이 된다. 무한하게 빠져 들어가는 내면의 허무에 대한 반전으로서 새로운 일에 대한 가능성을 얻기도 하는 것이다.
5. 인간에게는 고독, 아니 혼자만의 사색의 시간이 필요하다. 과거 어떤 글을 읽다보니 석가도 예수도 혼자만의 시간을 일정 시간 가졌다고 한다. 혼자만의 시간보다 타인과의 교류나 인정에 목매다는 현대인들은 오히려 더 고독해진다. 이때의 고독은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라 지나친 욕심에 따른 후유증에 가깝다. ‘고독’은 페쇄적인 공간으로의 칩거가 아니다. 일상의 힘을 얻기 위해 필수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수행일지 모른다. 가끔 사람들이 없는 시골의 작은 역을 방문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특히 그런 역들을 밤에 만날 때, 정말로 아름다운 ‘고독’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역 앞에는 편의점이 있으니 가벼운 알코올과 외로움을 동행할 수도 있다. 그리고 막차로 서울로, 안동으로, 체천으로, 이동할 수 있으니 고립의 위험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그저 멍하니 시간의 침묵 속에서 머물다 기차가 오면 다시 돌아가면 된다. ‘춘천가는 열차’의 고독이 조금씩 맛을 잃어갈 때, 중앙선의 두 역에서 만나는 고독의 색깔은 기분좋다. 남아있는 날들의 프로그램으로 기록해둔다. 고독을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소로.......
첫댓글 - ‘밤’에 방문한 역은 ‘고독’을 절감할 수 있는 최적의 모습으로 서있다. + 시간의 정지 속에서 고독만이 떠오르는 것이다. + 침묵의 시간을 음악을 들으면서 견뎌낸다. + 고독의 색깔!!!!!!!!!!!!!!!!!!!!! + 아름다운 ‘고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