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마이 페어 레이디' '사운드 오브 뮤직' '왕과 나'…
이들은 단순히 뮤지컬이 아니다. 뮤지컬이기보다는 영화로 먼저
다가왔던 이 작품들을 누구나 한번쯤은 스크린을 통해 접했을
것이다. 오래 전 때로는 웃으며, 때로는 가슴 졸이며, 때로는
눈물 흘리며 보았던 이들은 우리에게 향수요, 추억이다.
성공적인 뮤지컬은 영화로 만들어지고, 이 영화들은 또다시 무대
위의 뮤지컬로 재생된다. 극장 뮤지컬과 뮤지컬 영화는 으레
그렇게 공생해왔다. 영화로 만들어지는 뮤지컬들은 대부분
1950~70년대의 할리우드식 낭만을 담고 있다. 미국의 경제 공황,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애니' '사운드 오브 뮤직'이나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투영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그리스' '토요일 밤의 열기', 혹은 이국적인 정취를
불러일으키는 '왕과 나' 등.
원작이 누구이든, 어떻게 탄생되었든, 혹은 배경이 어디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들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카사블랑카'를 보면서 느꼈던, 바로 그때의 감성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영국 웨스트엔드 뮤지컬과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던 시절, 뮤지컬이라고는
외화를 통해서나 맛볼 수 있었던 시절을 살았던 세대의
비애랄까.
최근 국내 공연장은 뮤지컬 전성시대가 도래했다. 2~3년 새,
국내 뮤지컬 시장은 국내 음악계의 메이저 공연으로 성장하며
빠른 속도로 세를 불렸다. 댄스 뮤지컬, 넌버벌 퍼포먼스,
클래식 뮤지컬 등 이름을 달리한 무대들은 모두 뮤지컬이라는
장르로 포장되었다. '거품이다' '과도기다'라는 우려어린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뮤지컬은 대중화, 기업화로 분화하며
어느덧 영화 시장까지 넘보고 있다. 올 상반기 동안 국내 무대에
오른 뮤지컬만 해도 '캣츠'를 필두로 '마네킹'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백조의 호수' 등 어림잡아 20여 편이 넘는다.
‘레 미제라블' '캣츠' 같이 대형 수입 뮤지컬에만 의존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어린 시선은 '그리스' '토요일 밤의 열기'
'유린 타운' '지하철 1호선' 같은 작품이 국내 정서에 맞게
개작되고 이런 시도가 성공을 거두자 슬그머니 수그러들었다.
신인 뮤지컬 배우들의 선전 역시 희망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한 몫을 했다. 배 곪으며 꿈 하나만으로 무대에 서던 뮤지컬
지망생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호시절이 왔다. 이제 어지간한
사람들의 입에서는 웨스트엔드나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캐스팅
정도의 단어는 자연스레 오르내리게 되었다. 영화가 뮤지컬의
유일한 창구이던 시절, 스크린을 통해서 느꼈던 할리우드식
낭만과 순수, 미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경은 모두 옛말이
되어버렸다.
국내에서 흥행에 성공하는 뮤지컬, 소위 '대박'을 터뜨리는
무대는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고전적인
뮤지컬이라는 점. '캣츠' '오페라의 유령' '레 미제라블' 같이
오래 전부터 검증된 대형 무대를 선호한다. 신작 뮤지컬은 뒤로
제쳐두고 '미스 사이공'에만 눈독을 들이는 대형 기획사가
속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둘째, 음악과 춤이 화려해야 한다.
스토리 텔링 위주보다는 신나는 음악과 현란한 춤으로 끊임없이
볼거리를 제공해야 관객에게 어필한다. 연강홀에서 장기 공연됐던
'풋 루스'나 앙코르 공연까지 이어졌던 '그리스' '토요일 밤의
열기'가 여기에 해당한다. 셋째, 에로틱하면서 시니컬한 유머가
있어야 한다. 순수하고 동화 같은 이야기는 지루하다. '록키
호러 픽쳐 쇼' '시카고' 같이 극 곳곳에 에로틱한 춤과 몸짓,
현대 사회를 비꼬는 듯한 유머가 담겨 있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이런 요소를 두고 '현대화했다'고 일컫는다.
일련의 무대들은 그 밖에도 또 하나의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
위에 나열한 작품 중 '캣츠'를 제외한 모든 작품들이 영화판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우리에게 뮤지컬보다는 영화로
먼저 다가왔다. 때로는 TV '주말의 명화'를 통해, 때로는 낡은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무심결에 익숙해져버린 뮤지컬의 고전들.
이들의 실연 무대는 그렇기에 우리에게 특별한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뮤지컬 영화가 극장용 뮤지컬로 오르는 모양새는 대부분 비슷하다.
영화에서 극장용 뮤지컬로 다시 태어나면서 줄거리는 상당 부분
간략화 되고, 갖가지 다양한 캐릭터들 역시 단순화된다. 영화가
인물의 내면이나 표정 연기, 사실감 같은 디테일에 충실하다면,
뮤지컬은 과장스러울 정도로 큰 동작과 높은 톤의 음색을 내지른다.
대신 오직 춤과 노래로 그 모든 것들을 대신한다. 이들은 모두
번쩍이는 조명과 화려한 색감의 옷을 입고 강렬하고 일사불란한
춤과 찌를 듯한 열기를 담은 노래로 관객을 흥분시킨다. 메시지의
전달이라는 측면 또한 영화는 극장용 뮤지컬과 사뭇 다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모두 당시의 환경이나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내며 감동을 유도하는 것에 반해 뮤지컬은 유머와 파격적인
제스처로 즉각적인 반응을 얻어내는 데 주력한다.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점은 음악의 쓰임새. 뮤지컬 영화 속
음악은 몇몇 주제가를 제외하곤 대부분 배경음악으로 쓰이거나,
인물의 심리를 드러낼 때, 하이라이트를 강조할 때 사용되는
반면 극장용 뮤지컬에서 음악은 극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역할을
담당한다. 노래를 통해 스토리를 진행시키고,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양한 편곡을 통해 무대의 긴장과
이완을 끌어낸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부르는 노래가 안정감 있고
세련되게 가다듬어져있다면, 무대 위에서 부르는 노래는 땀과
숨 가쁨, 긴장이 녹아들어있어 매력적이다.
날라리들의 성장 스토리, 그리스와 토요일 밤의 열기
‘그리스’ '토요일 밤의 열기' '싱잉 인 더 레인' 등 가장 최근
국내 공연장을 들썩케 한 일련의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이중
'그리스'와 '토요일 밤의 열기'는 작품의 유사성으로 인해 항상
비교의 대상이 되곤 했다. 미국의 베이비 붐 세대를 겨냥한,
'날라리들'의 성장 스토리를 담고 있는, 존 트라볼타 주연의
영화라는 점이 그러하고 명 프로듀서 로버트 스틱우드의 손을
거쳐 갔다는 점이 그러하다. 고등학생(그리스)으로 출연했던
존 트라볼타가 페인트 가게 직원으로 변신했으니(토요일 밤의 열기)
'토요일 밤의 열기'가'그리스'의 후편인 셈이다.
‘그리스’의 뜻이 1950년대 미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머리에 바르는 포마드 기름을 의미한다는 것쯤은 이제 많은 이들이
안다. 짐 제이콥스와 워렌 캐시가 만든 이 작품은 1971년 시카고의
한 실험 극장에서 첫 공연을 시작했다. 시카고에서 대성공을
거둔 이들의 무대는 뉴욕에서 이어졌고, 1978년에는 로버트
스틱우드에 의해 드디어 영화 '그리스'가 탄생하게 되었다.
1971년 미국과 캐나다 순회 공연에서 조연인 두디를 맡아 연기했던
17세의 존 트라볼타는 영화 속에선 당당히 주인공 대니 역을 맡았고,
이후 그는 최고의 아이돌 스타가 되었다.
'그리스'의 사운드 트랙 역시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발매 당시
77주 동안 빌보드 팝 앨범 차트에 오르는가 하면, 정식 앨범은
8백만 장, 복사판은 2천만 장이 팔리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특히 존 트라볼타와 올리비아 뉴튼 존이 함께 부른 'You're the
one I want'나 'Summer Nights', 프랭키 밸리의 '그리스' 같은
곡은 각종 CF나 TV 프로그램 배경 음악으로 쓰일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모았다. 영화의 성공에 힘입어 '그리스'는 1994년에 다시
극장용 뮤지컬로 리바이벌되었고, 현재까지도 미국과 영국에서
공연중이다.
대학로 폴리미디어시어터와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공연됐던
한국 공연 역시 리바이벌판이었다. 이번 무대에서 가장 돋보였던
것은 자연스러움. 번역 뮤지컬이기 때문에 야기되는 영어체
대사와 가사, 과장된 미국식 제스처, 어설픈 춤동작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국내 실정에 맞게 대사를 고치는데 정성을
다했다는 후문답게 지극히 한국적인 대화들도 자연스러웠고,
로큰롤 음악에 맞춘 열정적인 춤도 볼만했다. 훤칠한 신인
배우들의 선전도 이번 '그리스'를 한층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키포인트였다.
고영빈, 엄기준이라는 새로운 스타를 배출해낸 것도 이번
무대의 큰 수확이었다. 주인공 대니 역에서 보여준 호연으로
이들은 새로운 뮤지컬 스타가 되었다. 그간 ‘그리스’ 무대를
거쳐간 배우들로는 폴 니콜라스, 일레인 페이지, 리처드 기어,
스테이스 그레그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그리스'의
대니와 샌디를 맡으며 스타로 급부상했다. 뮤지컬 '그리스'는
스타 탄생의 길목 역할을 톡톡히 한 작품이고, 그 현상은
한국에서도 이어진 셈이다.
핑크 레이디파의 리조역을 맡은 정영주의 파워풀한 노래와 몸을
아끼지 않는 춤, 무대를 휘어잡는 카리스마도 압권이었다.
김소현의 노래와 올리비아 뉴튼 존의 노래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왔다. 성악가 출신인 김소현과 당시 신인 팝 가수였던
올리비아 뉴튼 존의 노래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다만 김소현이
연기한 샌디의 캐릭터가 다소 평면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쉬웠다.
처음부터 끝까지 수더분하기만 한 샌디의 캐릭터는 20여 년 전
영화 속 샌디보다도 더 고루해보였다. 검은 가죽 재킷에 짧은
미니스커트를 차려 입은 샌디가 대니와 함께 열창하는 마지막
곡 ‘You're the one that I want'를 부를 때도 김소현의 샌디는
어색하기만 했다.
‘그리스’에서 로큰롤을 만끽했다면 '토요일 밤의 열기'에서는
디스코에 취할 수 있다. 이 작품은 1977년 영화로 만들어진
이후 로버트 스틱우드에 의해 1998년 무대에 올려진 최신
뮤지컬이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리스’와 비슷하지만
‘토요일 밤의 열기’가 좀더 에로틱하고 도발적이다. 성인용
‘그리스’라고나 할까. 현대에 맞게 개작된 만큼 영화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테크노, 힙합이 첨가되어 있으며, 줄거리나
등장인물을 최대한 단순화시키고 그 자리에 노래와 춤을 채워
넣었다.
리틀엔젤스 회관에 이어 LG아트센터에서 앙코르 공연을 가진
‘토요일 밤의 열기’는 ‘건질 것’이 참 많은 무대였다.
주연에서부터 조연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실력을 갖춘 배우들의
현란한 춤사위에 넋을 잃었고, 1970년대와 2000년대가 묘하게
조화를 이룬 옷차림에 다시 한번 눈길이 갔다. ‘토요일 밤의 열기’
의 트레이드마크인 하늘을 향해 한번, 땅을 향해 한번 찔러대는
디스코 동작도 신선했다.
토니와 스테파니 역에는 박건형과 최정원, 주원성과 김선영이
더블캐스팅되었는데, 두 팀이 주는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매스컴의 주목을 받으며 떠오른 신예 박건형 팀이 풋풋한
느낌을 준다면 주원성은 노련미가 넘쳤다.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주원성의 카리스마는 왜소한 신체 조건에도 불구하고
시종 무대를 휘어잡았다.
‘토요일 밤의 열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바로
비지스의 음악. 이들의 노래는 영화나 무대에서 똑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다만 영화가 토니의 감정을 나타낼 때나
디스코 장면에서 배경으로 쓰였다면 뮤지컬에서는 이들의 노래가
전체적인 흐름을 이끌어간다. 비지스의 음악에 가사를 붙여
인물의 스토리를 진행시킬 뿐 아니라 편곡을 통해 영화보다 훨씬
다양한 변주를 들려준다. 비지스는 뮤지컬을 위해 새로이 두 곡을
더 작곡하기도 했다.
아메리칸 드림의 지나간 향수를 자극하는 ‘싱잉 인 더 레인’
지난 5월 30일부터 8월 31일까지계속되는 '싱잉 인 더 레인'은
우리나라 최초로 뮤지컬 전용 극장에서 선보이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매우 뜻 깊은 무대이다. '국내 1호' 뮤지컬 전용극장
팝콘 하우스의 개관 기념작. '오페라의 유령'이 국내에 뮤지컬을
퍼뜨리는 신호탄이었다면 '싱잉 인 더 레인'은 국내 뮤지컬 시장이
성숙기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전용 극장은 장기 공연을 가능하게 하고, 장기 공연은 대규모의
투자를 가능하게 한다. 한국 초연되는 '싱잉 인 더 레인'에
소요된 25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제작비도 3개월 이상의 장기
공연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국내 뮤지컬계도 점차
선진국형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싱잉
인 더 레인'은 여러모로 국내 뮤지컬계의 역할 모델을 자처하고
있다.
굳이 의미를 따지지 않더라도 '싱잉 인 더 레인'에는 볼거리,
들을 거리로 가득하다. 시어터 댄스, 재즈 발레, 고전 발레,
탭댄스, 볼룸 댄스, 보드빌 등 숨 돌릴 사이도 없이 현란하게
펼쳐지는 춤이 그러하고 'Make 'em Laugh’ 'You're my Lucky Star'
같은 명곡들이 그러하다. 1952년 MGM에 만들었던 뮤지컬 영화를
무대 위로 옮긴 작품이니 만큼 영화 속 명장면들도 그대로
재현된다. 특히 주인공 돈 록우드(진 켈리 분)가 장대비 속에서
우산을 돌리며 춤을 추고 주제곡 '싱잉 인 더 레인'을 부르는
장면은 50년이 흐른 지금도 대표적인 영화 속 명장면으로 손꼽힌다.
이번 무대에서도 이 장면을 재현하기 위해 5톤의 물을 이용한
특수효과를 선보이는 등 심혈을 기울였다.
이번 무대에서 인상적인 것은 12대의 콘테이너 분량으로 공수해온
대대적인 무대 장치이다. 물 순환 장치와 1920년대 고전의상을
재현한 350벌의 의상, 65개의 가발, 미니어쳐 형식으로 재현된
뉴욕시, 무성 영화를 화면으로 처리하는 센스, 화려한 의상이
돋보였다.
‘싱잉 인 더 레인'의 가장 큰 관심거리는 타이틀 롤이었다.
누가 진 켈리를 대신할 것인가. 국내 배우 중 누가 완벽한
탭댄스와 슬랩스틱을 비롯한 안무를 소화해낼 것이며 경쾌한
창법으로 관객을 사로잡을 것인가. 답은 남경주였다. 이외에
일본 뮤지컬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박동하가 더블 캐스팅
되었다.
이번 무대의 연출은 '싱잉 인 더 레인'의 미국 투어를 담당했던
연출가이자 안무가 댄 모지카가 맡았다. 외국인이 연출을
맡아서인지 국내 배우들에게 '싱잉 인 더 레인'은 어딘가
잘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했다. 어색한 번역체 대사와 과장된
표정, 할리우드식 순수함은 배우들의 땀이 베어있을 화려한
탭댄스마저 무색하게 만들었다. 뮤지컬이 아닌 한 편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너무 미국적이어서 촌스러운,
너무 미국적이어서 거북한 느낌.
이 작품은 가능하면 영화 속의 춤을 그대로 정확하게, 완벽하게
재현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도널드
오코너의 'Make 'em Laugh', 진 켈리와 오코너의 듀엣 'Moses
Supposes', 브로드웨이 발레 'Pas de Deux' 등이 영화와
비슷한 모양새로 무대 위에서 재현된다. 코스모 브라운 역을
맡은 방정식이 선보이는 'Make 'em Laugh'에서의 아크로바틱
댄스 또한 인상적이었다. 벽을 타고 올라가 한바퀴 돌아서
내리는 아찔한 묘기를 연속으로 두 번이나 시도하는 그의 모습에서
엄청난 연습이 뒷받침되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싱잉 인 더 레인'은 1920년대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바뀌는
시기의 할리우드를 그리고 있다. 영화 속 '싱잉 인 더 레인'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은 풍요와 낭만으로 대변되던 아메리칸 드림의
지나간 향수이다. 무대 위 '싱잉 인 더 레인'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라면 무조건적으로 수용했던 1970년대의 한국식
아메리칸 드림이었다.
금발의 미녀가 내뿜는 카리스마, ‘시카고’
지난 7월 2일부터 국립극장에서는 ‘시카고’가 무대에 오르고 있다.
이번 무대는 오리지널 런던 팀이 직접 연출, 공연한다는
입소문으로 공연 전부터 대단한 기대를 모았다.
‘금발이 주는 위압감.’ 첫 장면부터 떠오른 생각이다. 훤칠한
키에 조각 같은 이목구비, 관능적이면서 그로테스크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금발의 미녀들, 그네들이 속삭이는 ‘올 댓 재즈’,
이들을 뒤따르는 중절모를 쓴 근육질의 남성들… 우리는 아무리해도
그들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한 무대였다. 특히 벨마 켈리를
맡은 리사 돈말(Lisa Donmall)이 내뿜는 팜므 파탈의 이미지는
거부하기 힘들 만큼 매력적이었다.
밥 포시의 원작을 리바이벌한 월터 바비의 ‘시카고’는 오리지널
판보다 훨씬 음침하다. 무대 정 중앙에 거대하게 위치한 오케스트라
피트, 시종일관 어두컴컴한 조명, 검은 색 일색인 무대 의상은 으레
화려한 뮤지컬 무대를 기대했던 이를 당혹스럽게 한다. 너무나도
독창적인 월터 바비의 연출로 인해 이 무대는 출연진의 역량이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출연진의 노래
한 마디, 동작 하나 하나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이번 런던팀의
‘시카고’는 그러한 점을 십분 활용했고 그렇기에 더더욱 빛나는
무대였다.
얼마 전, 극장에는 로브 마샬 감독의 ‘시카고’가 개봉됐었다.
영화 ‘시카고’와 월터 바비의 ‘시카고’는 같은 듯 다르다.
우선 영화의 포문을 열던 ‘Overture and All That Jazz’, 록시
하트가 남편에게 바치는 노래 ‘Funny Honey', 교도소 여간수 마마
모튼이 노래하는 ‘When You're Good to Mama' 등은 두 작품 모두
비슷하다. 그러나 이 외에 영화 속에서는 새로운 곡들이 첨가되었다.
아카데미 주제가상에 노미네이트되었던, 캐서린 제타 존스와 르네
젤위거가 함께 노래하는 'I Move On'과 영화 음악 작곡가 대니
엘프먼(Danny Elfman)의 아기자기한 스코어가 그것이다.
영화와 뮤지컬의 공생관계는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다. '왕과 나'
'사운드 오브 뮤직'도 조만간 국내 무대 위에서 만날 수 있다하니
기대해봄직하다. 그 얼마나 꿈을 심어줬던 명작들인가. 어린 시절
우리는 '도레미 송'을 얼마나 불렀으며, '쉘 위 댄스’를 얼마나
읊어댔던가. 이들을 영상이 아닌 실연으로 볼 수 있다니. 영화보다
엉성하다 해도, 혹은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 팀보다 기량이
떨어지는 무대라 해도 좋다. 현장의 매력은 무시할 수 없다.
첫댓글 현장은 매력은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것이죠. 배우의 눈빛과 마추칠 수 있는 행운을 기대하는 것.. 그런데 때론 맥빠진 기분으로 돌아갈 때도 있죠. 무대에서 배우가 소품보다 빛나지 않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