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07. 6. 22) 두번째 시간 이름 : 서경수
[맛보기] 교인들이 복음을 싫어해서 목사가 복음 전하는 것을 반대한다면 그것 목사 실패 아닙니다. 제 책 [기독교의 허상]에 보면 나와요. “목사가 목회 실패 안 하면 희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목사가 목회 실패 안 하면 그리스도를 안 바라봐요. 만날 잘 되고 있는 교회만 바라보지. 그런데 목사가 목회 실패하니까 그때부터 그리스도만 바라보지요. 이게 얼마나 목사에게 다행스런 일입니까. ---------------------------------- 광주 강의(07. 6. 22) 27-2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에서는 아직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야기 안 드렸습니다. 진리 안에서 영혼의 잘 됨이 나온다는 거죠. 이것이 이 세상에서 수월하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사도요한이 예수님 만나야 가능했듯이, 사도바울이 주님을 만나야 가능했듯이 진리 안에서 교제한다는 것은 이런 기적을 받은 사람이 누구냐 하는 식으로 교제하는 거예요.
그러면 진리가 무엇이냐? 그 진리는 바로 요한 1서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지요. 예수님이 진리란 말입니다.
그럼 여기서 예수님이 진리란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를 한 번 적어볼게요.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했잖아요. 이것이 힘을 발휘합니다. 이 힘이 어떤 힘이냐 하면 이단, 적그리스도, 사단 이것을 밝히는, 까발리는 힘이 작용해요.
어디에 근거해서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예수님은 진리잖아요. 예수님이 가신 곳마다 숨어있던 적들이 튀어나옵니다. 그런 관점에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보시면 해석이 수월합니다.
예수님이 떴다 하면 적들이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병자가 나았다 하면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와락 달려들지요. 그리고 요한복음 9장에도 나오지요. 실로암 못가에서 소경이 눈을 떴다.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이 용서 받았다. 그 때 뒤에 누가 붙습니까? 바리새인들과 붙지요. 이것은 요한복음뿐만 아니고 마태, 마가, 누가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끝까지 붙지요. 심지어 십자가 밑에 까지 달려들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 때 모든 것을 차단시켜서 예수님만 달랑 믿는다고 하는데, 예수님과 결부되어 있고 얼기설기 얽혀있는 예수님의 적들을 같이 알려고 생각지 않아요. 왜 그런 잘못된 생각이 있는가 하면, 자기는 진리에 속하지도 않았지만 악마에도 안 속해 있는 중립 지대에 있다고 생각하고, ‘내가 예수님을 믿을 것이냐, 사단을 믿을 것인가는 내가 선택하기 나름’이라고 이렇게 오해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보지를 않고 우리는 이미 우리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사단의 정신으로 완전 무장되어 있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하나의 부닥침이에요. “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처나 자식이나 아내를 미워해야 된다. 심지어 너 목숨도 미워하지 않으면 나를 따를 수 없다.” 이렇게 부딪힘이지요.
“아버지를 장사 치러야 되겠습니다.”고 하니까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이렇게, 예수님은 예수님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적들과 덩어리째로 우리에게 다가와서 예수님과 적들의 차이점을 우리에게 알게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나 사단이나 양쪽 다 우리에게 힘으로 들이닥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이 두 노선밖에 없지요. 거기에 어느 노선도 사람은 주도적으로 들어갈 수 없고, 사람은 다만 그 양쪽 세력에서 당해야하는 피동적인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두 번째 시간에는 예수님의 진리를 인하여 밝혀지는 것이 무엇이냐? 이 점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8절을 봅시다. “이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함이니라”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한다.’는 것을 달리 말하면 ‘예수님을 위하여 함께 수고한다.’
제가 왜 ‘진리’를 ‘예수’로 바꾸느냐 하면, 철학하는 사람들, 학문께나 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진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가 진리를 이야기한다는 것만 인정해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가 전하는 그 진리를 내가 지식으로 받아들이겠다.’ 혹은 ‘이해하겠다.’ 이렇게 나옵니다.
‘나도 인간인데 나라는 인간이 나 아닌 다른 인간에게 굴복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이 좋은 소리 하는 것은 내가 수용하겠다.’ 이것이 좀 배웠다는 사람들, 물론 마귀의 사고방식이죠.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렇지 않지요? 바울은 그냥 주 예수 자체를 증거하지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한다.” 세상의 모든 철학들아 십자가 앞에서 모든 것은 다 굴복해야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세상 모든 철학들은 다 헛된 학문들이다. 이렇게 나오지요.
어떤 인물에게 완전히 매이지 그 인물이 전하는 고상한 지식을 내가 ‘아이고 존경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지는 않지요.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는 말씀이 있지만, 소녀들을 보면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들 앞에서는 그가 무슨 짓을 해도 “오빠!” 하고 좋아해요. 무슨 짓을 해도. 그것은 그 인간 자체를 좋아해요. ‘노래가 좋다.’ 별로 안 좋아요. 그 사람 자체가 좋은 거예요.
남자들 입장에서 여자들 이야기하는 가운데 가끔 이해 안되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50대 중년들이 ‘나는 젊은 꽃미남 좋아한다.’고 할 때에 울꺽 부화가 쏟아요. 아니 어른이면 어른답게 지적으로 놀아야지. 감각적으로 예쁘다고 그것을 흠모한다는 것이 성립이 되냐는 것입니다. 울컥 부아가 치밀어 오르지요.
여러분, 인물(외모) 그거 얼마 안 갑니다. 적어도 나이가 무르익으면 사람을 외모로, 감각적으로 보지 않고 품위나 인격이나 세상을 보는 넓은 눈, 배울 것이 있다는 그런 차원에서 봐야 하는데, 젊은 꽃미남한테 배울 것이 뭐 있습니까? 철딱서니 없고 배울 것이 아무것도 없거든요. 그런데 그 자체가 좋다고 하거든요. 까불기만 하지 별 좋은 것도 없는데, ‘아이고 이 철없는 인간아, 너 언제 시건(철)이 날까?’ 이렇게 측은해 보이지.
어떤 사람은 장동건이 좋다고 하는데, 뭐 잘났다고? 사람이 은근한 품위가 있어야지. 장동건이 품위 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일본 아줌마들 이병헌, 배용준. 마후라 두르고 머리만 더부룩하면 다 좋아해요.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아주 근사한 말씀을 해서 좋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체가 좋아지지 아니하면 산상설교고 성경 전체가 다 의미가 없어요. 안 좋아한다는 증거가 지키려고 한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 당신 훌륭하지만 내가 언젠가는 따라 붙이겠다.’ 이 말이거든요. ‘당신만 훌륭하냐? 나도 훌륭하다.’ 이게 뭐냐 하면, 이현래, 워치만 리 계통, 지방교회.
‘너희들 아직까지 예수 믿나? 이 바보들아!’ 예수는 하나의 모범자고 우리가 예수고 우리가 신인데 왜 자꾸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를 사랑 하냐고 합니다. 내가 나를 사랑해야지.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지. ‘네가 예수다.’
요새 이말 공공연하게 많이 나옵니다. ‘너 자신이 예수다. 너 자신이 예순데 무슨 예수를 믿어? 네가 신인데 무슨 신을 믿나?’ 이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많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그 단체가 무지하게 커졌어요. 수십만이 넘어요. 그 단체가. 그 신도 수가.
한국교회가 워낙 개판이니까 이런 이야기만 해도 사람들이 왁 몰려가서 거기서 못 빠져나옵니다. 그만큼 그 사람들은 예수가 좋은 것이 아니고 내가 좋은 거지요. 내 안에 나밖에 없지요. 예수님과 부닥쳐서 받은 피가 없어요. 예수님의 그 아픔도 없고, 피 흘리심, 살 찢으심이 그 안에 없어요. 예수님이 나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다는 것도 없어요. 다만 예수 이용해서 천당이나 챙기면 ‘나 이익 봤다.’ 그런 심보밖에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바로 사도요한이 말한 진리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지요. 제가 왜 이렇게 자꾸 9-10절 이야기하면서 떡을 던지는가 하면, 바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심보를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잠깐 지난 주일 낮 설교의 예를 들겠습니다. 낮 설교에서 애굽의 홍해바다 성격을 이야기하면서 천국 갈 사람만 살려주고 천국 못갈 사람은 물에 빠뜨려 죽여 버리는 아주 희한한 성질을 홍해바다가 간직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뒤따라온 애굽 군사들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뒤따라 왔는가를 우리가 이해를 해야 돼요. 이것을 충분히 이해할 때, 지금 내가 예수님을 따를 때 마음가짐과 애굽 사람의 마음가짐과 어떤 유사점이 있는가가 밝혀집니다.
애굽 군사들은, 자기 앞에 어린애들도 건너가는데 튼튼한 말을 타고 어른이 똑같은 흙인데 못 건널 이유가 없지요. 앞의 사람들은 건넜는데 우리는 못 건넌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결국 우리가 애굽 군사 같은 마음 가지면, 본인이 나는 천국에 못 갈 인간이라는 생각은 없고, 남들 가니까 나도 갈 수 있다는 의식만 갖고 있다면 그 사람은 탈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은 무슨 노래를 부르는가? 어린양의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에요. 모세의 노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진짜 구원 받은 사람은 ‘우리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어린양 때문에 구원 받았습니다.’ 하고 힘차게 어린양의 공로만 높이면서 노래 부르고 바다를 건너와서 노래 부르고 했는데, 그 뒤따라 간 사람들은 ‘노래 부를 것 뭐 있나? 어린양 같은 소리하고 있네. 우리 힘으로 건너가는데. 너도 너 힘으로 건너가잖아. 나도 내 힘으로 건너간다. 다를 게 뭐가 있는데? 차이가 없잖아.’ 하면서 건너다가 바닷물이 합류해서 다 죽었어요.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을 의미합니다. 진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를 본인이 알게 되어 있어요.
자, 으뜸이 되고자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으뜸’은 최고(엄지손가락 들고)라는 말입니다. 으뜸이 된다는 말은, 맨 꼭데기 자리가 두 개가 될 수 없습니다. 둘이 되면 서로 싸워서 으뜸이 아니지요. 으뜸이란 것은 최고의 자리는 이미 내 차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손님이 와서 피자나 치킨을 주문해서 상에 차려놓으면 꼬마들(2~3세쯤)이 제일 가운데 앉아서 제일 살점이 많은 뒷다리를 쳐다봅니다. 이게 으뜸이 되고자 하는 거예요. 제일 좋은 자리는 나에게 적합하다. 왜? 내가 제일 좋아하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속에 있는 나의 욕구는 나를 으뜸으로 봉사하는데 내 욕망은 지체 없이 나에게 발휘하더라. 이것을 솔직하게 다 보여주는 것이 어린아이의 행동입니다. 어른들은 안 그런 척 하고 겸양의 미덕을 펴지만 ---
그러니까 으뜸이 되고자 하는 것은 나무랄 것이 아니고, 이것이 예수 안 믿는 애굽 군사들, 보통 사람들, 악마에 속한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현상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특별히 나무랄 사항이 아니고 서로서로 인정해야 될 사항이죠.
광주로 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TV를 봤는데 뭐가 나오는가 하면 축구선수 ‘앙리’가 나왔어요. 전 세계 축구 선수가 몇 명입니까? 아마 수십만 명이 넘을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이 영국 프리미어리그 득점 왕을 했어요. 최고 선수죠. 이 사람을 축구의 최고 선수로 인정할 때, 다른 사람은 그것을 인정할까요, 안 할까요? 인정했어요. 그러면 사람들은 다 자존심이 있는데 그 사람을 최고 축구 선수로 인정하느냐?
세상은 서로가 으뜸이 되고자 하는데, 으뜸이 되고자 할 때, 진짜 으뜸 될 만한 사람이 으뜸 될 때는 그 으뜸을 인정해 줍니다. ‘역시 당신은 축구에 대해서는 나보다 낫습니다.’ 인정을 해 준다는 말은 나의 으뜸도 언젠가는 그 수준이 되면 인정해 달라는 서로의 으뜸을 서로 존중한다는 그런 관계 속에 놓여 있습니다.
으뜸을 박살내는 것이 아니고 ‘당신 으뜸이 내 으뜸보다 나은 것을 내가 인정해 드리겠습니다.’ 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 으뜸을 포기할 필요는 없지요. 나보다 수가 높으니까. 내가 축구할 줄 압니까? 축구 잘 못하거든요. ‘앙리’가 공을 차니까 스티로폼 9개가 갈라졌어요. 그런데 박명수가 차니까 1개 갈라졌어요. [무한도전]이란 프로에서.
그럼 박명수가 앙리를 붙들고 시기를 해야 됩니까? 아닙니다. ‘역시 당신은 최고입니다.’ 라고 인정한다고요. 그렇다고 박명수가 ‘나는 죽을 놈이야.’ 하고 자살합니까? 그것 아니라니까. ‘앙리’를 존중하는 그 재미로 헤헤거리면서 같이 기뻐하더란 말이지요.
제가 길게 복잡하게 이야기한 것이 뭐냐 하면, 세상에는 으뜸을 모독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역시 으뜸이 될 놈은 으뜸이 되어야 해.’ 라고 상호 인정하는(헤겔이 이야기한) 그러한 분위기 속에 연결되는 거예요. 이게 뭐가 나쁩니까?
서울 법대 시험 쳤다. 나는 수능 200점, 저쪽은 398점. 그래놓고 ‘나는 서울 법대 합격해야 해.’ 이런 것은 자기 양심이 있으면 용납을 안 하지요. ‘네가 들어가라. 나는 자격 안 된다.’ 이렇게 나오는 것이 정상이잖아요. 그런다고 걔가 자살합니까? ‘아 나는 으뜸이 못돼.’ 그게 아니고 ‘나는 다른 학교 가지 뭐.’ 이러고 만단 말이지요.
서로의 으뜸을 마음껏 존중해주는 세계가 이 세상입니다. 이게 뭐가 문제예요? 뭐가 나쁜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서 목사를 교인들이 존중하는 이유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결국은 천국의 집단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냥 세상의 한 부분을 무작위로 딱 끊어 놓은 거예요. 이것은 세상이지 천국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옛날에, 옛날뿐 아니라 지금도 그렇지만, 나이 70이 넘은 분이, 남편은 만날 노름하고, 술 먹고 와서 폭행하고, 돈도 안 벌어주고. 그런데 여자는 평생 시장에 나가서 노전에서 장사하면서 파출부 노릇하고 하면서 50~60년 살아도 자기 남편이 최고래요. 요새 젊은 사람 같으면 이해가 안 되지만 연세 많은 사람은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엄마는 아빠한테 그렇게 당해도 아직도 아빠를 사랑하나?’ ‘사랑하지.’ ‘왜?’ ‘하늘같은 남편을 섬기는 것이 당연하지. 남편이 모자라면 나라도 받쳐주는 것이 당연하지.’
김을수 집사님 주의 깊게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 하 하. 이게 뭐냐 하면, 옛날 교육이 뭐냐 하면, 여자가 시집가면 남편을 하늘처럼 받들 때 너의 으뜸은 으뜸으로 주위에서 인정받게 되어 있어요. 남편을 나보다 낫다고 받쳐주는 그런 착함, 천사표 아내, 그런 아내가 나 나름대로의 으뜸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였습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남편이 노름해서 집 다 날리고 계집질 하고 해도 그것을 참아낼 때 그 모든 업적들이 쌓여서 그 아내로 하여금 더욱 더 훌륭한 아내로 으뜸 되게 하는 업적으로 누적이 되는 겁니다. 훌륭한 아내로.
이것이 오래 되면 습관화 되고, 습관화 되면 그것이 진리가 되죠. ‘진리 안에서 교제한다.’는 말은 결국 예수님 안에서 교제하는 것이 아니고 으뜸과 으뜸의 만남 안에서 교제하는 것이 되지요. 으뜸의 만남은 서로 싸운다는 말이 아닙니다. ‘당신은 나보다 더 위대한 으뜸이고 나는 그 밑에서 눌리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으뜸.’
어쨌든 간에, 질서의 격차가 있든 간에, 계층이 있든 간에 내 으뜸을 스스로 부인하기 싫다는 것이 기존 세상의 구조고, 그것이 요한 3서에 보면 교회 안까지 침투한 겁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책 다 읽었지요? 거기에 뭐가 있는가 하면, 제가 불교 이야기했잖아요. 불교의 석가모니는 출가했지요. 집을 나갔잖아요. 그런데 불교를 받아들인 삼국시대 사람들이 다 집을 나갔습니까? 불교를 믿던 삼국시대, 신라시대 사람들이 다 집을 나갔던가요? 안 나갔지요.
석가모니는 출가했잖아요. 출가한 석가모니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출가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출가 안 했어요. 이것을 어떤 식으로 변명했는가 하면, 효의 개념을 가지고 재가를 이야기해요. 재가는 집에 있는 거고, 출가는 집을 나가는 거죠.
불교에서 부모를 섬겨야 한다는 효도관념을 가지고, 효도를 해야 불교에서 말하는 죽어서 가는 극락이냐 지옥이냐 할 때 그 기준이 뭐가 됩니까? 얼마나 부모에게 효도 했는가, 효심을 가지고 평가를 하는 거예요. 삼국시대부터 그래요. 불교가 뭐가 들어왔던 관계없어요. 어떤 종교가 들어와도 관계없어요. 우리나라 종교는 뭐냐? 효 종교입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들어오고 천주교가 들어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천주교는 다 제사 지내잖아요. 그래야 교인 수를 확보할 수 있으니까.
[회심곡]의 배경이 뭡니까? 나중에 죽어서 극락 갈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효심이 지극한 사람. 첫 번째가 효심입니다.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남편에게 순종. 세 번째가 자식 교육. 네 번째가 국가에 충성. 그 다음은 친구 사이. 이게 뭐냐 하면 유교의 삼강오륜 아닙니까.
우리나라의 조상숭배 +불교 +유교 이것이 안 깨지고 그대로 이어 온데서 기독교가 덮쳤어요. 햄버거입니다. 햄버거에 배추 깔지요. 케찹 뿌리지요. 고기 넣지요. 겉에 빵이 덮치지요.
그러니까 교회 나오는 이유가 뭡니까? 집안 대대로 복 받기 위해서 교회 나와요. 우리 집안이 남의 집안보다 더 잘 되기 위해서 오는 거예요. 금요 철야기도도 그렇고 뭐든지 내가 벌인 일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잘되기 위해서 한다는 말은 뭐가 있다는 겁니까? 잘 안 되었다. 잘 안 된 것의 기준이 있잖아요. 다른 말로 실패. 이미 실패한 것이 있잖아요. 실패가 있으니까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기 위해서 교회 간다 이 말이죠.
제가 보기에 뭐가 문제인가 하면, 이미 실패란 것이 뭐란 것을 못 버리죠. 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예수님은 실패입니까, 성공입니까? 그보다 더 실패할 수 없지요. 나이 33살에 죽었어요.
석가모니는 출가했잖아요. 실패 아닙니까. 그러니까 석가모니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석가모니는 죽어서 효도 잘했다고 천당 보내는 석가모니라고 하면 그것으로 끝나고, 예수는 뭐냐 하면, 이 땅에서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한 복 받아서 이 땅의 복 받은 그것이 신의 축복 받은 것으로 확인해 주는 하나의 공무원으로 하면 된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실패의 두려움에서 못 벗어나니까. 실패라는 의식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어떻게 합니까? ‘에라, 더 실패해라.’ 만나서 봉사되게 하고 완전히 실패하게 했지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뭐냐 하면, 먼저 큰 실패를 당했기 때문에 어지간한 실패는 실패 값도 안 되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큰 실패. 이것을 사도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나는 죽은 자이기 때문에 더 이상 실패가 의미가 없지요. 죽은 사람한테 실패란 것이 없잖아요.
[그 남자의 여자]라는 드라마가 35%의 시청률을 올렸고, [쩐의 전쟁]이 벌써 35%를 넘었어요. 35%를 넘었다는 말은 국민의 70%가 보고 있다는 말이에요. 심지어 김희애라는 탤런트가 하는 말이 [그 남자의 여자]를 초등학교 다니는 자기 아들에게 못 보도록 하는데 “엄마 과자 먹었나? 친구들이 엄마 과자 먹었다고 하던데.” “그건 애들 보는 프로 아니야.” “친구들 다 봐.” 하거든요. “너는 왜 묻는데?” “엄마, 어떤 과잔데 그렇게 맛있어?” 이걸 묻는 거예요.
[그 남자의 여자]나 [쩐의 전쟁]에서 사람들에게 세뇌를 주는 것이 뭐냐 하면, 절대로 실패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절대로 가정 파단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어떻게 하든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절대로 돈 없는 그런 설움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실패를 실패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 가지고 있는 실패 의식은 절대로 실패에 말려들면 안 돼. 더욱 더 자기 실패 안 되기를 두려워하는 것을 조장하는 드라마가 인기가 높아요.
목사님은 설교 시간에 드라마 이야기 하지 말라고 하는데, 내가 왜 드라마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습니까? 이미 사람들은 실패란 기준이 있는 자체가 사람을 죽이는 건데. 실패가 없어요. 이 세상에서 실패란 없는데 남들이 실패라고 하는 거예요. 드라마에서 실패라고 하는 거예요.
남편 바람 피웠다. 바람피우면 피우는 거지 뭐. 들어왔다. 들어오면 들어 온 거지 뭐. 그게 무슨 실패입니까? 그런데 그 드라마를 보면요, 다시 남자가 들어와도 나가라도 해요. “너, 김희애하고 잘 놀데. 가서 계속 놀아라. 나는 다시 너희가 같이 안 산다.” 이렇게 나와요. 그럴 필요 뭐 있어요? “오셨군요. 밥 드릴까요?” 이러면 돼지.
그래서 이것을 강제로 하기 위해서 ‘남편은 바람 피워도 된다. 하늘같은 남편을 섬겨라.’ 이것이 유교입니다. 남편이 노름하고 무슨 짓을 해도 하늘같이 받들면 으뜸이 되고, 남편 개가천선(개가천선 안 하는데) 되고, 자기는 천사표 아내가 되어서 오순도순 이혼 없이 잘 살지.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뻑하면 이혼이라. 아예 요즘은 이혼하는 것도 귀찮아서 결혼 후에도 혼인신고를 안 해요. 이혼하는 것이 귀찮아서 혼인신고를 안 한다니까.
그런데 딸 가진 부모들, 저도 딸이 있는데, 결혼 생각하면 걱정이 앞섭니다.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 그런데 성도는 무슨 사태가 벌어져도 실패 아닙니다. 왜? 으뜸 자체가 주님 진리 안에서 용납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진리 안에서 교제해야 되지 으뜸과 으뜸의 만남에서 교제하면 안 됩니다.
화평교회도 마찬가지고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으뜸이 못 돼서 으뜸 되려는 노림수가 있다면 그것은 교회 못 나옵니다. 나와서는 안 되지요. “두고 봐라. 언젠가는 내가 반드시 장로 되고 말거야.” 이렇게 되면 그 사람 곤란합니다. 그리스도께 받은 피 때문에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 감격과 환희가지고 만나야 될 건데, “아이고 목사님 최곱니다.” 이게 뭡니까? 이것은 목사님이 최고라는 것이 아니고, ‘목사 으뜸으로 잘 섬기면 나도 으뜸으로 인정해 주세요.’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으뜸으로 교제하는 것이지 진리 안에서 교제하는 게 아닙니다.
한국교회는 목사를 어버이로 받들고 효도 시스템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자식이 어버이를 함부로 험담 합니까? 저주 받으려고. 그러니까 목사들이 무슨 짓을 해도 교인들이 아무 소리 못해요. 이게 뭐냐, 햄버거가 돼가지고 엎친데 덮쳤어요. 효도에다가 불교에다가 온갖 무속신앙에다가 기독교를 엎쳐 놓으니까 그 안에서 으뜸은 계속 살아 있는 겁니다.
사도바울에게 으뜸이란 게 도저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를 보겠습니다. 4장 11-13절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어도다”
도대체 여기에 으뜸의식이 어디 있습니까? 욕을 해도 축복하고, 핍박을 당해도 참고, 비방을 당해도 권면하고, 우리가(사도 무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찌끼, 쓰레기 같이 살았어요.
8절에 보면 나오지요. “너희의 왕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소비자가 왕이라는 말이 있지요.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한다. 우리는 너희를 섬기는 하인 되기를 원한다.
9절에 보면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어떻게 목사가 ‘내가 목회 성공했으니까 퇴직금 내 놓아라.’ 어떻게 이런 소리가 나옵니까. 도대체. 회사도 아니고. 그동안 목사라고 인정해 준 것만 해도 고맙습니다. 해야지. 자기가 주식 지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교인들이 이렇게 만들었어요. 교인들이 성경이 안 보여요. 고린도전서 4장 이런 말씀을 안 봐요. 목사가 자기 친구들끼리 헌신예배 와서 골라잡아 하는 설교, “선지자에게 잘못하면 저주 받는다.” 뭐 이런 소리만 들어서 이런 본문이 있는 줄도 모르지요.
로마서 16장을 봅시다. 이 대목 말하면 흥분하지 않을 수 없어요. 18절에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교인 한 사람 오면 ‘저건 십일조 얼마짜리지?’
그리스도에 관심이 없으면 반드시 다른데 관심을 두게 되어 있어요. 그리스도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은 반드시 다른 곳에 관심 두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들이 그리스도에 관심이 없어요. 어디 관심 있는 줄 알아요? 크게 썰게요. 내가 이것 때문에 욕 많이 먹었는데, 뭡니까? ‘교회’입니다.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해서 결국 교회입니다. 관심이. 그리스도 반대해도 이단 안 돼요. 그러나 교회 반대하면 이단 됩니다. 교회 반대해도 이단 안 돼요. 그러나 나(목사)를 반대하면 이단 돼요.
교인들이 복음을 싫어해서 목사가 복음 전하는 것을 반대한다면 그것 목사 실패 아닙니다. 제 책 [기독교의 허상]에 보면 나와요. “목사가 목회 실패 안 하면 희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목사가 목회 실패 안 하면 그리스도를 안 바라봐요. 만날 잘 되고 있는 교회만 바라보지. 그런데 목사가 목회 실패하니까 그때부터 그리스도만 바라보지요. 이게 얼마나 목사에게 다행스런 일입니까.
오늘 본문 ‘으뜸이 되고자 하는’ 이 말이 장난이 아닙니다. 이게 인간들의 본성이에요. 으뜸이 되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고, 오늘날 한국교회 같으면 이 이야기가 이상해요. ‘아니, 이근호 목사님. 교회 질서가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있어야 되지요.’ ‘교회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누군가 권위를 쥐어야 한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니 목사가 교회 질서를 위해 권위를 가지고 다스리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지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답변하지요. ‘제가 질서라고 말한 것은 교회 조직으로 질서를 잡는 것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복음의 기쁨으로 사랑 안에서 질선데요. 서로 사랑하고 서로 존경하고 서로 봉사하는 것이 질서인데요. 누구 한 사람 쳐다보는 것이 질서가 아니고’
‘성경에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물어요. 그러면 제가 답변하지요. ‘요한 1서 2장 27절에 있습니다.’ -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그러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지요.
할 말 없다고 해서 동의하는 것은 아니고 잠잠하지요. ‘그런 말은 우리(목사)끼리만 하고 교인들 있을 때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도대체 우리끼리라니. 주님은 우리끼리에 없는 분입니까?
예수님만 사랑하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예수님이 안 죽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죽어서 옛날 사람 같으면 억지로 사랑해야 되지만 지금 엄연히 살아 계신데, 살아 계서서 일을 하시는데 그 일을 어떻게 하시느냐 하는 것이 관심이지, 살아있는 내가 죽은 예수를 어떻게 믿을 것이냐 이것은 기독교도 아니고 믿음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살아 계신 주님이 지금 이 진리 안에서 일을 어떻게 하시는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를 용납하지 말라.’ 이런 식으로 일한단 말이지요. 그러면 으뜸 되려는 것을 용납 안 해야지요.
저는 혼자 가만히 생각해요. 이단을 이단이라고 하는 게 나쁩니까? 말 안 하는 게 나쁘지요. 그런데 이단을 이단이라고 하면 욕이 그렇게 들어와요. ‘교만하다. 너밖에 모른다. 네가 최고냐?’ 온갖 소리 다 들어와요. 그런데 이단이면 이단이란 말을 해야 돼요. 나머지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이게 수박입니까?’ ‘수박입니다.’ 그런데 욕을 먹어요. ‘수박 맞네.’ 그러면 욕 더 얻어먹지. 지금 사도요한이 으뜸 되고자 하는 것은 이단이라 이 말이거든요. 이 사도요한이 만약에 당회장 돼 보세요. 교회에서 당장 쫓겨납니다. 정석훈 목사뿐만 아니고 사도요한도 쫓겨나요.
교회는 으뜸이 필요치 않습니다. 왜 필요치 않을까요? 이미 으뜸의 자리에 누가 앉았습니까? 보이지 않는 분이 자리에 앉았어요.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이 으뜸의 자리에 보이는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분이 있어서, 보이지 않는 분에 대해서 보이는 사람들이 자력으로 접근이 안 됩니다. 접근 안 되면 끝났네. 천만의 말씀. 보이지 않는 분이 능력을 행해요. 그 능력이 뭐냐? 진리 안에서 네 영혼이 어떻게 구원 받았는가를 복음, 이 성경 말씀으로 교제가 가능한 것, 이것이 인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됩니다.
우리 광주모임이요, 이게 인력으로 되지를 않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그러나 차츰 지나면 이게 인력이 아니라는 것을 다 아실 겁니다. 이게 사람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어떤 경우에 사람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내가 안 오고 싶은데 억지로 와줬다.’ 할 때는 그 사람에게만 사람의 능력으로 보이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능력이냐 하면 ‘나도 안 오고 싶은데 오게 되었다.’고 믿을 질 때 이것이 능력입니다. 아, 오늘 너무 심한 말 한다.
보이지 않는 분의 능력이 뭐냐 하면, 이 땅에 으뜸을 작살냅니다. 으뜸을 깨버려요. 누구나 으뜸 되고 싶어요. 누구나 자기 자의식을 포기할 생각 없습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할 사람 전혀 없어요. 따라서 스스로 자기를 미워한다는 그 자체가 거짓말입니다. 나는 미워했다는 것도 거짓말이고, 내 힘으로 미움을 자제했다는 것도 다 거짓말이에요. 이것은 스스로 믿음이 없어서 위장하는 겁니다. 으뜸 되고 싶으면 그냥 으뜸 되세요. 되시고 진짜 믿는 자 같으면 보이지 않는 분이 그 으뜸을 깨 주시는 그런 일들이 생겨납니다. 어디서? 교회에서 모임을 통해서 생겨납니다.
제가 쓴 글이 있어요. 뭐냐 하면, “도사 될래, 걸레 될래” 라는 글이 있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도사는 유유자적합니다. 혼자 칩거해서 도를 닦는 사람이 도사지요. 그런데 걸레는 더러운 곳에 가서 만물의 찌기같이 온데 다 간섭해서 얻어터지고, 저쪽 더러운 것 다 묻어서 빨아도 걸레. 실컷 일하고 욕은 욕대로 다 먹는 것이 걸레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도사 되지 말고 걸레 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걸레 되도 구원 받으니까. 그런데 도사는 도사 돼야 구원 받아요. 이게 문제라니까. 도사에서 탈락해서 덜 도사되면 이건 불안합니다. 왜? 유유자적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걸레는 이미 걸레에서 피 묻어서 구원 받았기 때문에 걸레 아니라고 해도 걸레 맞아요. 주께서 우리를 걸레 되게 하십니다. 최 걸레. 김 걸레, 박 걸레, 오 걸레. 걸레를 걸레 되게 하십니다. “이 걸레.” “예”
걸레의 특징은 자기를 치장하지 않는다는 것. 자기를 예쁘게 보일 생각을 포기한다는 것. 자기의 훌륭함을 내세울 엄두가 안 난다는 것. 한 마디로 으뜸이 되고자 하지를 않는다는 것.
자기 마음을 낮추지 않으면 망합니다. 역대기, 열왕기를 쭉 보면 정답 방정식이 이래요. 고대 왕들이, 이스라엘이나 유다 왕이 좀 잘 했다 싶으면, 좀 교만하다 싶으면 작살납니다. 그 대목을 한 번 볼까요. 역대하 32장 25절을 보면,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저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었더니”
으뜸이 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수억의 재산을 주지 않고 수십억의 재산을 주지 않고, 오 목사님께 수십억의 재산이 없는, 아마 없을 걸요? 없고, 수천명의 교인이 없는 것은 으뜸이 돼서 깨지는 수고를 미리 덜어주시는 거예요.
이번에 올린 욥기 교재 봤습니까? [사막에서의 대화] 십자가마을에 올렸는데. 욥기를 공부하면서 욥의 친구들과 욥의 차이점, 뒤에 욥을 책망하는 엘리후의 차이점, 그리고 엘리후와 하나님과의 차이점. 그 차이점을 파악하면 욥기 다 뗐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 아브라함 언약과 관련되어 있어요.
아브라함 언약을 보면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욥을 아브라함 언약 속에, 욥과 그 친구들은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에 자기 착함이 하나님께 도달될 수 있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언약대로 다뤄요. 언약은 뭡니까? 언약은 깨는 사건이죠. 있는 것을 없게 만들고, 살아 있는 것을 죽게 만드는데 욥이 모르는 것은 ‘왜 하필이면 나냐?’는 것이지요. 여기서 누가 해답을 안 줘요. 해답을 줄 사람이 없어요. 여러분 한 번 읽어보세요. 읽어보시면 알겁니다.
친구들은 뭐냐, ‘네가 죄를 지어서 벌 받았다.’고 하는데, 욥은 지금 그것이 궁금한 것이 아니고, ‘왜, 내가 그래야 되는가? 왜 나에게 고난이 왔는가?’ 누가 이야기 해 봐라. 아무도 이야기 못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만약 욥이 재산 500억 된다고 합시다. 500억 될 때 욥이 죽으려고 합니까? ‘하나님 아버지. 왜 하필이면 저에게 500억 주셨습니까? 빨리 내 생명을 취하소서. 죽고 싶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안 하지요. ‘왜 하필이면 나입니까? 왜 내가 대통령 되어야 합니까? 주여, 이건 문제 있습니다. 이건 잘못된 겁니다.’ 이런 소리를 아무도 안 하지요. 그런데 자기가 있는 것이 망해질 때 ‘왜 하필이면 --’ 이 나왔다 이 말입니다. 이 말은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마귀 말대로 뭐가 됐어요? 이미 신이 되어서 그래요. 내가 으뜸 되는 것을 당연지사로 여기는 겁니다. 이런 인간에게 착한 일, 나쁜 일 따져봐야 그것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거든요.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그것을 허물어버립니다. 욥은 뭐냐?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는, 장차 올 십자가를 보여주는 중심 센터로 만들어버리지요. 야고보서에 보면 ‘네가 욥의 인내를 배워라.’는 것이 나옵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욥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작용해서 욥으로 하여금 아브라함 언약, 없는 것 있게 하고 죽은 자 살리는, 이삭이죠. 아브라함 언약과 이삭, 야곱의 언약을 보여주는 센터로 삼았다 이 말입니다. 너를 하나님의 일을 보여주는 센터로 삼았으면 ‘왜 나에게 이렇게 합니까?’라고 따지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해야 돼요. ‘주여, 왜 저같은 죄인을 구원했습니까?’ 그러면 신약에서 답변이 뭡니까? ‘창세전에 네가 사랑받기로 예정되었다.’ 이것이 정답이잖아요.
그런데 욥기는 아직 새언약 시대가 아니고 아브라함 언약 시대기 때문에 그걸 몰라요. 모르기 때문에 ‘왜 하필 --, 왜 하필 --’하고 자꾸 묻는 거예요. 답답한 친구들은 답변도 못하고. ‘네 죄 빨리 회개해라.’고 하는데, ‘이 녀석아, 네가 나처럼 고난 받아 봤나? 내가 너희들 보다 죄를 더 많이 지어서 고난 받나? 만약 그렇다면 너는 내보다 더 심한 고난 받아야 해. 네가 나보다 더 멀쩡하게 있다는 말은 너는 죄를 덜 짓고 나는 죄를 더 지었다는 뜻인데, 어디 그런 논리가 있어? 대답해 봐. 나는 분명 너보다는 더 의로워.’
욥의 고난은 ‘왜 하필이면--’(불평하는 투)에서 나중에는 뭐로 바뀌는가 하면 ‘왜 하필이면(감사하는 심정으로) 저를 구원했습니까? 왜 제가 제사 드려서 친구들이 죄 용서 받게 하십니까?’ 라고 나오지요. 하나님의 대답은 ‘내 마음대로 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 사실 정답이 더 있어요. ‘내가 바로 잘난 너로 인하여 피해자가 되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계기가 된 거예요.
욥 때문에 누가 피해자다? 하나님 자신이 피해자고 욥이 가해자. 둘의 하는 언약적 역할이 너를 통해서 이뤄진 것 때문에 너는 내 사람이다. 그래서 욥은 선지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 이야기는 뭐냐 하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의 어떤 인간도, 간 내놓고, 신장 내 놓고 다 주지만 마지막 내 놓지 않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나의 잘남. 나의 존재 의미. 이것은 그 누구한테도 절대로 내 놓을 수 없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 타고난 욕망이 나를 못 놓도록 막아요. 어떤 경우라도, 어떤 비참한 경우라도 나를 포기 못하지요. 욥이 그랬어요. 나를 절대 포기 안 합니다. 포기 못해요.
따라서 포기 안 되는 걸 포기 안 된 상태에서 예수 믿는다. 믿어봐야 그 예수는 누구를 위한 예수인가? 나 잘되기 위한 예수. 내가 하나님을 믿어도 그 하나님은 나의 자존심 높여주는 하나님, 내 으뜸 되는데 도움 되는 하나님뿐이에요. 이거 다 내가 만든 우상입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 요한 1서에 “네 영혼이 잘 됐다”고 하거든요. 영혼이 잘 됐다는 이 말은 사도요한 자신의 경험에 비춰서 이야기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와서 내가 사도되었다. 나처럼 가이오 너도 예수님의 기적을 받았구나. 그렇다면 우리 서로 진리 안에서 교제하자. 그런데 너희 교회에 으뜸 되고자 하는 놈이 있다며? 그놈은 쫓아내라. 용서가 안 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로마서 16장에 보면,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고 자기 배만 섬긴다.’ 이거 정상입니다. 이게 정상이에요. 어느 목사고 다 마찬가지입니다. 집사도 장로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안 된다는 게, 자기 배만 챙기고 싶은데 그렇게 안 되도록 그리스도가 항상 관리하고, 침범하고, 나무란다는 것. 복 받은 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잘난 것 없습니다. 저희들이 남보다 착하게 산 것도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십자가 피로 찾아오셔서 우리 죄를 몽땅 가져가셨다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기에 우리는 이제 걸레 같은 사람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실패가 아니고 성공적인 삶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공적인 삶이기에 남을 위해 봉사하면서 으뜸 되고자 하지 않고 주님만 높일 수 있는 저희들 삼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7. 7. 6. 13:26 녹취 마침)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