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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쌀 노래
나는 듣고 있네
내 안에 들어와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뼈가 되는
한 톨의 쌀의 노래
그가 춤추는 소리를
쌀의 고운 웃음
가득히 흔들리는
우리의 겸허한 들판은
꿈에서도 잊을 수 없네
하얀 쌀을 씻어
밥을 안치는 엄마의 마음으로
날마다 새롭게
희망을 안쳐야지
적은 양의 쌀이 불어
많은 양의 밥이 되듯
적은 분량의 사랑으로도
나눌수록 넘쳐나는 사랑의 기쁨
갈수록 살기 힘들어도
절망하지 말아야지
밥을 뜸 들이는 기다림으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희망으로
내일의 식탁을 준비해야지.
농촌진흥청에서 나오는 잡지에 이 시를 싣고 싶다고 연
락이 와서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예전처럼 쌀 소비가
되지 않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어떤 기사를 읽고 제가 나
름대로 쌀을 예찬해본 노래입니다. 어린 시절 어른들이 푸
른 논을 가리키며 "저기 보이는 게 쌀 나무란다. 저 안에 쌀
이 들어 있어" 하면 가녀린 풀잎 속에서 어떻게 딱딱한 쌀
이 숨어 있다는 것일까 한참을 신기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 2 } 어떤 고백
싫어
하고 네가
누군가에게 말하는 순간은
나도 네가 싫다
미워
하고 네가
누군가에게 말하는 순간은
나도 네가 밉다
절대로 용서 못해
하고 누군가에게
네가 말하는 순간은
나도 너를 용서할 수가 없다
우리를 아프고
병들게 하는 그런 말
습관적으로 자주
하는 게 아니었어
내가 아프고 병들어보니
제일 후회되는 그런 말
우리 다신 하지 말자
고운 말만 하는데도
시간이 모자라잖니
화가 나도 이왕이면
고운 말로 사랑하는 법을
우리 다시 배우자.
이 시는 어느 날 같은 자리에서 싫다, 밉다, 용서 못하겠
다는 말을 하도 많이 반복해서 하는 어떤 사람의 말을 듣고
떠오른 생각을 정리해본 것입니다.
{ 3 } 나무를 안고
길을 걷다가
하도 아파서
나무를 껴안고
잠시 기도하니
든든하고
편하고
좋았어요
괜찮아
곧 괜찮아질거야
나뭇잎들도
일제히 웃으며
나를 위로해주었어요
힘내라 힘내라
바람 속에 다 같이
노래해주니
나도 나무가 되었어요.
이 시는 어느 날 온몸이 중심을 못 잡고 아플 때
옆에 잠시 나무를 붙들고 서서 기도하며 떠오른 생각을
정리해본 것입니다.
저의 시 [나무의 연가]를 다시 읽어보며, 오늘도 나무
가 되어 나무에게 다시 한 번 사랑을 고백해봅니다.
{ 4 } 나무의 연가
당신을
보기만해도
그냥
웃음이 나요
이유 없이 행복해요
웬만한 아픔
견딜 수 있고
어떠한 모욕도
참을 수 있어요
바람 많이 불어도
뿌리가 깊어
버틸 수 있는
내 마음
모두 당신 덕분이지요
어느 날
열매를 많이 달고
당신과 함께
춤을 추고 싶어요.
{ 5 } 좀 어떠세요?
좀 어떠세요?
누군가 내게 묻는
이 평범한 인사에 담긴
사랑의 말이
새삼 따뜻하여
되새김하게 되네
좀 어떠세요?
내가 나에게 물으며
대답하는 말
----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평온하네요 ----
좀 어떠세요?
내가 다른 이에게
인사할 때에는
사랑을 많이 담아
이 말을 건네리라
다짐하고 연습하며
빙그레 웃어보는 오늘
살아서 주고받는
인사말 한마디에
큰 바다가 출렁이네.
"좀 어떠세요?"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눈만 뜨면 수없
이 많이 들어왔던 이 말이 요즘은 문득 그리울 때가 있습니
다.
일상의 길 위에서 각자의 몫을 다하며 수고가 많으실 여
러분께도 "오늘은 좀 어떠세요?"라고 묻고 싶습니다. "힘내
세요! 사랑합니다!"라는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 6 } 작은언니
동생이 나에게
작은언니!라고 부를 적마다
내 마음엔 색색의
패랭이꽃들이 돋아나네
왜 그래? 대답하며
착해지고 싶네
이슬 묻은 풀잎들도
오늘은 나에게
작은언니라고 부르는 것 같아
그래그래
웃으며 대답하니
행복하다
수녀(sister )는
언니( sister )라는 말도 된다지
작은 일에 감동을 잘하고
오직 사랑 때문에
눈물도 많은 언니
싸움이 나면
세상 끝까지 가서
중간 역할을 잘해
평화를 이루어내는
사랑받는
작은언니가 되고 싶네.
작은언니라는 말에 숨어 있는 다정함과 따뜻한 느낌을
새롭게 사랑하며 날마다 누군가의 작은언니, 작은누나 역할
을 하고 싶습니다.
{ 7 } 중심 잡기
오늘도 중심을 잘 잡아야지
결심하는 것이
내 하루의 첫 기도이다
걸어가는 일
글을 쓰는 일
사람을 대하는 일
기도하는 일에 있어서도
중심을 잘 잡아야 넘어지지 않는 법
한 번 흔들리면
계속 흔들린다
한 번 불안하면
계속 불안하다
중심을 잡으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잘 버티어 낸 것에 대한 감사가
내 하루의 아침기도이다
꿈속에서도
중심을 잘 잡는 법을 연습하여
웃어보는 나의 행복이여.
한 장의 사진이 잘 나오기 위해서도 중심과 각도를 잘 잡
아야 하듯이 인생 전반에 걸쳐서도 결국은 중심을 잘 잡는
일이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집니다. 하루하루를 잘 살
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도 정신 똑바
로 차리고 중심을 잘 잡는 일일 것입니다.
{ 8 } 단풍나무 아래서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다
문득 그가 보고 싶을 적엔
단풍나무 아래로 오세요
마음속에 가득 찬 말들이
잘 표현되지 않아
안타까울 때도
단풍나무 아래로 오세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세상과 사람을 향한 그리움이
저절로 기도가 되는
단풍나무 아래서
하늘을 보면 행복합니다
별을 닮은 단풍잎들이
황홀한 웃음에 취해
나의 남은 세월 모두가
사랑으로 물드는 기쁨이여.
반년 이상 하복인 흰 수도복을 입다가 검은 수도복으로
갈아입는 11월이 저는 참 좋습니다.
남쪽이라 단풍나무가 귀한 우리 집 정원에는 제가 눈여
겨보는 단풍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가을이 되면 자주 그
나무 아래 서 있길 좋아합니다.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면 조금씩 사라져가는 지상에서
의 남은 시간들이 떠올라 저절로 숙여해지는 마음입니다.
그동안 쓴 가을 시들이 꽤 많지만 독자들이 가장 많이 애송
해주는 시 [가을 편지]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 9 } 가을 편지
늦가을 산 위에 올라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봅니다
깊이 사랑할수록
죽음 또한 아름다운 것이라고
노래하며 사라지는 나뭇잎들
춤추며 사라지는 무희들의
마지막 공연을 보듯이
조금은 서운한 마음으로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봅니다
매일 조금씩 떨어져나가는
나의 시간들을 지켜보듯이.
{ 10 } 꿀잠
아무리 힘이 들어도
한숨 자고 나면
거짓말처럼 편하고
가벼워지는 몸
잠은 나에게
달콤한 꿈이고
살려주는 은인이고
만만한 친구이네
고마운 마음
잊고 있다가도
힘들 때면
몹시 그리운 잠
약이 되고 꿀이 되는 잠
잠이 있어
이만큼 살아왔네.
{ 11 } 잠 일기
잠을 자면서
나는
근심을 내려놓고
평화를 얻어주는
착한 엄마가 됩니다
슬픔을 위로하고
기쁨을 많게 하는
고운 천사가 됩니다
잠을 자면서
나는
꿈을 사랑하는
꿈이 됩니다.
진정 잠을 잘 자야만 마음이 조금은 넉넉해지고 성격도
좋아질 것 같습니다. 몸이 원하는 잠의 중요성을 깨우치고
잘 응답하고 노력하면 잠을 잘 잘수 있을 것입니다.
[ 출처 ] 그 사랑 놓치지 마라 ( 이해인 시 산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