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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찬사
창세기41장38~41절
⦿바로가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을, 이 사람 말고, 어디에서 또 찾을 수 있겠느냐?" ⦿바로가 요셉에게 말하였다. "하나님이 너에게 이 모든 것을 알리셨는데, 너처럼 명철하고 슬기로운 사람이 어디에 또 있겠느냐? ⦿네가 나의 집을 다스리는 책임자가 되어라. 나의 모든 백성은 너의 명령을 따를 것이다. 내가 너보다 높다는 것은,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뿐이다." ⦿바로가 또 요셉에게 말하였다. "내가 너를 온 이집트 땅의 총리로 세운다."
❙ 하늘의 불을 훔친 토끼 ❙
옛날에 땅에는 불이 없었고 불은 하늘사람들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겨울 추위가 닥쳐오자 동물들이 다 모여 회의를 합니다. 누가 하늘사람들이 가진 불을 훔쳐올 것이냐를 의논하다-동물 가운데 가장 꾀가 많은 토끼에게 불을 훔쳐오는 임무를 맡기기로 합니다. 토끼는 송진을 잔뜩 바른 날개 모자를 만들어 쓰고는 하늘나라로 갑니다.
하늘나라 사람들은-늘 속임수에 능한 토끼에게 당해왔던지라-갑자기 나타난 토끼를 보자 긴장을 합니다. 그러나 꾀가 많은 토끼는 능한 언변으로 하늘나라 사람들을 설득하여 그들이 사는 동네에 들어가게 됩니다. 토끼는 하늘사람들에게 풍요를 가져오는 춤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면서 춤사위를 하면서 모닥불로 다가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쓰고 온 송진을 바른 날개모자에 얼른 불을 붙여 잽싸게 도망을 갑니다.
그제야 하늘나라 사람들은 또 토끼에게 당한 줄 알고-불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비, 바람, 눈보라를 보내어 불을 끄고 토끼를 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토끼는 사력을 다해서 산을 뛰어 내려왔습니다. 토끼는 지치게 되었고, 마침 다람쥐를 만나 다람쥐에게 불을 전해주고, 다람쥐는 까마귀에게, 까마귀는 너구리에게, 너구리는 칠면조에게 칠면조는 사슴에게 불을 릴레이로 넘겨줍니다. 사슴은 마지막으로 숲에게 가서 훔친 불을 받아 감춰주라고 부탁했더니 숲이 그 불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땅에도 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토끼에게 불을 받을 때 다람쥐는 꼬리로 받아서 동그랗게 굽어졌습니다. 날개로 불을 받은 까마귀는 시커멓게 타서 검어졌으며 너구리도 눈과 꼬리에 동그란 원이 생겼습니다. 머리로 불을 받은 칠면조는 불에 목 위 부분 털이 다 탔습니다. 꼬리로 불을 받았던 사슴은 꼬리가 다 타서 짧아졌습니다.
❙ 동화⦁신화⦁복음 그리고 우리 ❙
이 이야기는 아동센터에서 읽은 <하늘의 불을 훔친 토끼>라는 제목의 일본 동화입니다. 임진왜란이 있었던 임진년 벽두부터 일본 동화이야기를 꺼내 좀 머쓱합니다만 그냥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땅의 동물들이 하늘나라 사람에게서 불을 훔쳐 와서 불을 가지게 되었다는 이 동화는 마치 그리스신화의 프로메테우스와 설정이 비슷합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신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 준 것 때문에 제우스의 미움을 받아서 날마다 새롭게 반복되는 형벌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일본 동화와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무얼 생각하십니까? 저는 변화된 삶을 생각합니다. 일본 동화든지 그리스신화든지 인류에게 불은 질적으로 달라진 새로운 삶을 여는 시작이었습니다.
현실 삶에서는 이런 동화와 신화는 객쩍은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복음의 말씀도 어떤 점에서는 동화나 신화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자리를 버리시고 인간이 되셨다는 복음서 이야기는 어찌보면 동화나 신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의 복음은 동화와 다를 바 없습니다.
동화처럼-하늘의 천사는 요셉을 찾아와서 약혼녀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를 성령으로 잉태(마1:20)했다고 전합니다. 천사는 여기에 더하여서-남자와 상관없는-성령으로 임신한 아기가 인류를 구원하실 구세주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는 상식이나 지성적 사고는 낄 자리가 없습니다. 전혀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동화 같은 이 이야기가 온 세상에 미칠 큰 기쁜 소식-복음이었습니다.
왜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현실에서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꿈에서나 있을 법한-일이 정말로 현실에서 기적 같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소식보다 복음은 더 기쁜 소식이 되는 겁니다. 동화 같은 일이 현실에서 실제로 이루어 졌을 때-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격-이것이 복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모든 동화와 신화에는 오랫동안 인류가 꿈꾸어 온 꿈이 거기 오롯하게 녹아있습니다. 인류의 오랜 이 꿈이 이루어진 그 날-이 땅에서는 희망을 잃고 살아가던 이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의 삶이 시작됩니다. <하늘의 불을 훔친 토끼>이야기처럼 말입니다. 이 희망의 자리가 동화와 신화와 복음이 같이 만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왕자를 만나야만 깨어날 수 있었습니다. 공주에게 복음은 왕자의 키스였습니다. 왕자의 그 키스로 공주는 오랫동안 자신을 묶어놓은 마법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로워집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왕자의 입맞춤으로 공주는 잠자던 그의 꿈과 영혼이 깨어나고-새 생명의 삶으로 소생했습니다.
왕자의 키스는 공주에게 구원의 사건이나 진배없었습니다. 이래서 동화는 오늘 주님의 사람으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말씀과 서로 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우리들 역시도 잠자는 공주와 같았습니다. 주님의 키스(만남)가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삶과 신앙생활에서-주님을 만나기 이전과 이후는-잠자던 공주에게 왕자를 만나기 이전과 왕자를 만난 다음으로 나눠 말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깨어날 수 없었던 공주에게 왕자는 어느 날 찾아온 구원이었습니다. 이 동화처럼-복음은 하늘의 자리에서 우리 가운데로 임마누엘하신 하나님이야기입니다.
그 하나님의 키스(만남)으로 우리 모두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마법(魔法)의 잠에서 깨어나고-예전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나로-거듭난 생명으로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로-그리스도인은 동화를 현실의 삶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잠자는 공주와 같았던 내 삶에 왕자로 오신 주님-그리하여 내 삶을 바닥에서부터 완전히 변화시켜주신 주님의 신비한 능력은-마치 키스로 공주를 깨운 동화 속 왕자의 능력이었습니다.
왕자의 키스로 되살아난 공주의 감격처럼-그리스도인 된 우리에게도 주님의 구속의 은총에 대한 동화 같은 신앙의 고백이 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오늘을 동화 같은 기적으로 맑게 살아가는 영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 삶에 임마누엘하신 하나님 이야기 ❙
우리는 오늘 온전하게 그리 살았던 한 사람을 만나고자 합니다. 그 사람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꿈과 맺히고 얽힌 게 많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꿈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했지만-꿈 때문에 형들의 미움을 받았습니다. 꿈 때문에 죽을 위험에 처했고 꿈 때문에 아라비안의 노예가 되어 이집트에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바로왕의 꿈 해몽을 잘해서 국무총리가 되고 결국 그는 자신의 꿈을 다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 꿈으로 인하여 그의 삶은 파란만장이었고-그 꿈을 붙잡고 살아온 삶의 결과는 전화위복이었습니다. 그는 꿈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마법에 걸린 공주처럼-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스스로의 힘으로 헤어 나올 수 없었던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꿈을 다 이루었습니다. 요셉이 꿈을 다 이루고 난 다음에-꿈 때문에 요셉을 미워하여 노예로 팔았던 형들을 만나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창45:7~8)⦿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이 고백의 결론과 핵심은 [하나님이십니다]라는 한 문장입니다. 이 말씀으로 보면 그의 꿈을 이루어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고 대단히 성공한 인생이 되었다는 시각은 요셉의 꿈을 천박하게 해석한 겁니다. 이것은 세상의 눈으로 본 요셉이야기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요셉을 보지 않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이 요셉을 어떻게 해석했을까요. 요셉의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창세기의 기자가 일관되게 가지고 있었던 시각이 있습니다. 그 시각은 전혀 성공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습니다.
⦿(39:2)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셔서, 앞길이 잘 열리도록 그를 돌보셨다.
⦿(39:3)그 주인은,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며, 요셉이 하는 일마다 잘 되도록, 주님께서 돌보신다는 것을 알았다.
⦿(39:20)요셉이 감옥에 갇혔으나-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면서 돌보아 주시고, 그를 한결같이 사랑하셔서, 간수장의 눈에 들게 하셨다.
⦿(39:23)간수장은 요셉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아무것도 간섭하지 않았다. 그렇게 된 것은, 주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며, 주님께서 요셉을 돌보셔서,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나 다 잘 되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창세기의 증언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다는 증언입니다. 창세기는 요셉의 삶에 임마누엘하신 하나님을 증언하십니다. 이 증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요셉을 들어서-그의 꿈을 통하여 당신의 언약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었습니다. 그 언약의 축복은 사실 아브라함 당대에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대에 와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그 약속을 구체적으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창12:2-3)⦿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실제로 요셉의 때에 큰 민족이 되는 토대가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민족까지도 복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요셉이야기의 결론입니다. 요셉이 이집트의 국무총리라는 대단한 성공을 이루었다는 것은 창세기의 주요한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요셉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임마누엘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요셉의 꿈과 함께 임마누엘하신 하나님-그 임마누엘의 결과가 요셉의 인생에서 국무총리였고-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셨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셨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세상의 안목은 천신만고 끝에 성공한 사람으로 요셉을 보지만-창세기의 기자는 요셉을 보는 눈이 다릅니다. 그 눈은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을 봅니다. 요셉과 임마누엘하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 오늘, 요셉은 누구인가? ❙
무엇을 축복이라 할까요? 요셉이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되고-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가 된 이것이 축복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축복이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이것이 요셉을 통해서 증언하는 축복의 주제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은 누구든지 축복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 요셉이야기의 핵심입니다.
그 밖에 그가 이룬 모든 것들이나 그가 당대 세상에서 거둔 모든 성공은 사족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마이스토리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삶이라면 나도 요셉이 되는 겁니다. 요셉처럼 축복의 사람이 되게 됩니다.
마법에 걸려 잠에 곯아떨어진 숲속의 공주처럼-꿈을 가진 사람 요셉에게도 수렁의 날들이 있었습니다.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져 스스로 자신을 주체할 수 없어 숱하게 아픔을 헤아리며 버텨야 했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그의 꿈으로 절통한 삶을 붙잡아 주셨습니다. 요셉은 시종 하나님께서 함께 동행해주신 임마누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요셉을 보면서 바로는 오늘 본문에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을, 이 사람 말고, 어디에서 또 찾을 수 있겠느냐?"] 사실 바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믿는 신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라는 이름은 원래 <파라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태양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집트의 왕은 스스로 신의 아들이라 자처했습니다. 신의 아들인 자신도 없는 능력을 가진 요셉이었습니다.
그 요셉을 보면서 바로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고 치켜세웁니다. 바로의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람 요셉에 대한 당대 사회의 평가이고-그 평가는 하나님의 사람 요셉이 받은 최고의 명예였습니다.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된 것도, 바로의 아버지가 된 것도,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된 것도,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가 된 것도-이 찬사 앞에서는 다 껍데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셉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예는 오늘 본문에서 바로가 고백한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평가입니다. 이 바로의 고백은 임마누엘의 사람 요셉에 대한 최고의 찬사였습니다. 요셉이 축복의 사람이 된 건-사실 그의 꿈도 아니었고, 최고의 자리에 올라선 세상적인 출세나 성공도 아니었습니다. 요셉이 축복의 사람이 된 건-그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자연인 요셉이 하나님 축복의 사람 요셉이 될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다 같이 해야 할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요셉이 누구냐?>는 겁니다. 창세기의 요셉은 야곱의 아들이요, 꿈꾸는 자요, 팔려간 노예요,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성공한 인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요셉이 오늘 <요셉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약 4천 년 전 고대 근동지역에서 살다 사라진 과거의 인물-요셉에 관한 신상명세는 <요셉이 누구냐?>는 우리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 할 수도 없고-또 오늘 우리 삶의 관심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있는 <요셉이 누구냐>는 것이 우리의 관심입니다. 우리가 찾는 요셉은 지금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바로 이 사람입니다.
창세기에서 만나는 그 사람 요셉에게서 <요셉이 누구냐?>는 오늘 우리 질문의 답이 없습니다. 요셉은 창세기 말씀을 읽는 내 믿음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 믿음이 창세기의 요셉으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요셉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한 해답입니다. 그럴 때 요셉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My-story)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요셉의 축복이 내 축복이 되는 겁니다. 요셉은 오늘 제가 요셉입니다. 또 요셉은 장로님이고 빈들의 권사들입니다. 집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요셉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믿음 안에서는 요셉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내 삶이 임마누엘의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 있다면 바로 내가 요셉이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요셉의 축복은 바로 내 축복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내 삶의 새로운 장을 여는 축복이 됩니다.
❙ 참 믿음의 길을 가는 2012년 되길 ❙
우리 삶은 언제 넉넉해집니까? 하나님 없이 내 힘으로 세상과 씨름할 때 우리 인생은 늘 허기집니다. 세상을 이길 힘이 내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임마누엘 하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면-[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면-내 대신 내 삶을 지어가시는 주님으로 우리 삶이 넉넉해지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축복의 가장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면-때로는 억장이 무너지는 좌절과 절망이 생겨도 그 절망을 통하여 요셉의 꿈을 이루어 가신 하나님이시기에-좌절과 절망도 내 삶에는 변장을 하고 찾아온 축복이 됩니다.
요셉이 가는 길을 묵상하면 사는 날 편한 자리-내 눈에 보이기에 아름다운 자리만 찾아다니는 걸음은-하나님의 영이 떠나버린 사람들이나 가는 길입니다. 삶이란 길을 가는 겁니다. 임마누엘에 정주(定住)하여-세상의 길을 가는 겁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길이면-누가 뭐래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라도 가는 길이 온전한 믿음의 사람-참사람의 길입니다. 요셉의 길은 그런 길이었습니다.
어느 길을 가든지 그 길에서 사람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환경을 쳐다보지 마십시오. 오로지 여러분 안에 임마누엘 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들이 가는 길은 바로 그 길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칭찬하는 길도 있습니다. 보기에는 아름다운 길 같으나 하나님의 사람에게 그 길은 길이 아닙니다. 내 존재를 사로잡으신 하나님의 영이 가라하시는 길이 유일한 나의 관심이 될 때-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박수 받는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요셉처럼 축복의 사람으로 지어가시게 됩니다.
창세기는 수도 없이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읽으면서 조심해야할 것은 그 축복에 초점을 맞추지 말아야 합니다. 함선(艦船)에서 임마누엘이 배의 머리라면 축복은 배꼬리와 같습니다. 머리가 나아가면 꼬리는 그냥 따라오듯이-축복은 그냥 그렇게 따라오는 겁니다. 창세기에서 우리가 초점을 맞추어야할 주제는 <임마누엘>이지 <축복>이 아닙니다.
주님을 향하는 우리 향심(向心)이 흐트러지지 않으면-그리하여 이미 내 안에 임마누엘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해주시면-모든 축복은 그냥 덤으로 따라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 안에서 살아가면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신다-이것이 요셉이야기의 동화 같은 결론이요 창세기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사람들에 관한 신화 같은 말씀의 핵심입니다.
이 축복을 위하여 올 한해는 참 믿음의 길을 가서 최고의 찬사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최고의 찬사는 바로 [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을, 이 사람 말고, 어디에서 또 찾을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온전한 믿음의 참사람에게는 세상도 이렇게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내 삶을 주님께 내어 드린 사람만이 그 칭찬을 받게 됩니다.
그런 칭찬을 듣기 위하여 하루에도 수없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임마누엘의 주님 앞에서 내 존재를 통째로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2012년 한해 내내-우리가 세상으로부터도 최고의 찬사를 받으면서-우리의 참 믿음이 세상 앞에 쫄지 않고 당당하게 요셉처럼 축복의 길을 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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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민되는 일이 있으면 강단의 말씀을 붙잡고 묵상해서 해답을 얻는다"는 친구의 말에 다시 한번 설교말씀을 읽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뭐라고 하시는지.. 말씀붙잡고 기도해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