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약속의 딜레마
낯 설지 않은 그 때(1624일 전) 그 방(2층) 그 자리에서 편안한
한 밤을 다시 보냈다.
그 때처럼 부지런을 떠는 늙은 이 때문에 이 번에는 김용원이
새벽 단잠을 물리쳐야 했다.
간 밤에 약속한 대학생들의 도움을 받으려면 7시 이전에 바람재
목장 입구 903번 도로상에 서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해인산장의 늙은 山나그네(상)와 莊主 김용원
7시 훨씬 전에 도착했는데도 김용원은 험한 목장길을 고집했다.
그런데 어찌 이런 일이?
저 앞에 가는 차들중 한 대가 간 밤의 그 학생들의 차가 아닌가.
자기네가 자진해서 제의한 약속이었건만.
산악부 학생들이라 해서 신뢰가 갔었는데.
혹시나가 역시나가 돼버린 이 아침이 허탈했다.
김용원의 선견지명이 아니었으면, 하마터면 낭패였을 뻔 했다.
험한 꼬부랑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가고 있는 김용원을 바람재
정상에서 내려다 보며 나는 잠시 상념에 잠겨 있었다.
저 학생들과의 약속을 믿었기에 간 밤에 기꺼이 하산했던 것인데,
내가 약속시간을 어긴 것도 아닌데, 스케줄이 변하면 내게 미리
연락하기로 했는데(내 표지기용 명함을 주었으니까) 그들은 일언
반구 없이 미리 올라와 버렸다.
그러고서도 모두 태연했다.
약속이란 상대를 전제로 하는 것인데 어찌 그들만의 일인가.
단지 그들의 동아리가 산악부라는 이유 하나에 신뢰의 터무니를
두었기에 더욱 실망스러운 것이리라.
상대가 젊은 이들이라 해서 약속을 기피할 수는 없다.
약속을 믿지 않을 수도 없다.
이것이 약속의 딜레마다.
그러나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무심코 남발하는 젊은 이들.
그 약속 때문에 입게 될 늙은 이의 피해는 안중에도 없는 것인가.
연못에 팔매질 하듯 내던지는 약속에 멍드는 개구리 같은 늙은
이는 어찌 하라고.
번번이 당하기만 했기에 <三思一言....>(지혜의 샘 41번 글 참조)
이라는 글까지 썼던 게 아닌가.
그러나 여유 만난한 대간 길
씁쓸한 기분을 털고, 중계소 도로도 버리고 대간길만을 고집하여
1.030m 여정봉에 올라 오른 쪽으로 눈을 돌렸다.
바람재 뒤로 가파른 형제봉과 황악산 비로봉 등 거의 일직선을
그으며 한 눈에 들어오는 대간이 참 예쁘게 느껴졌다.
그러나 소떼 없는 목장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목장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소들인데 주인이 없으니 어찌 아니
그러겠는가.
을씨년스런 바람재목장
공교로운 일이다.
이 구간을 통과하는 아침은 소위 등산인들로 인해 으례 언짢아야
하는 것인가.
북상 때는 어느 산악회의 새벽 등산으로 인해 그랬는데 이 번에도
산악부 동아리로 인해 그렇게 된 아침을 그 때처럼 청명하기 그지
없는 등산 날씨가 해결사 노릇을 하고 있으니.
무엇보다도 활짝 핀 한 다발의 진달래꽃이 요염한 자태를 뽑내며
웃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겠다는 듯 앞을 막고 기분을 풀어주었다.
기분전환 일등공신 진달래꼿
800m대의 바람재와 700m대의 질매재 사이에 자리한 여정봉과
삼성산이기 때문에 오르내림이 비교적 완만하다.
질매재에도 구룡령, 삽당령처럼 간이 터널이 새로 조성되었다.
야생동물들의 통로다.
이른 바 생태계 복원사업이란다.
늙은 이는 잠시 동물이 되어야 했다.
사람은 물입(勿入)이라니 그럴 수 밖에.
어차피 사람과 짐승이 공유하는 대간인데 이런 동물우대의 차별이
과연 필요한가.
(일부 종주자들이 질매재와 우두령을 동재이명으로 아는 듯 한데
우두령은 질매재에서 901번 지방도를 따라 북서진한 영동쪽에
따로 있다)
상.중 / 동물의 통로가 조성된 질매재
하 / 석교산 정상
경북 김천과 충북 영동을 가르는 대간이 질매재 이후 1.100m대로
가파르게 오르며 서남의 영동 삼도봉을 향해 힘을 주고 있다.
삼도봉보다 약간 높은 1.207m 화주봉은 그 사이 석교산으로 개명,
승격하였다고 정상 표석이 폼을 재고 있다.
밀목재를 해인산장으로 하산하는 삼마골재로 착각할 뻔 했을 뿐
실망스런 아침에 반해 온 종일 콧노래가 절로 나온 여유만만한
순항의 대간 길이었다.
삼마골재
외면 당하는 삼도봉의 염원
마감하기엔 너무 이른 시각이었다.
전화를 받은 김용원이 깜짝 놀랄만큼 빨리 도착했으니까.
좀 더 전진하려면 탈출과 진입이 편한 삼도봉 직전의 삼마골 대신
매우 불편해도 정상 너머의 머구막골을 택해야 했다.
삼도봉 정상에서 김용원과 막걸리 한 잔 마시는 것과 사진 한 컷
갖고 싶은 생각은 접어야 했다.
김용원은 초등학교 동창회에 갔고 삼도봉 일대에서는 단 한 명의
등산인도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데선가 말소리가 들리는 듯 해 마냥 기다렸으나 환청이었나.
영동 삼도봉 정상
4월 말일, 휴일 오후, 이 좋은 날씨에 삼도의 아무도 보이지 않은
삼도화합의 봉이 괴이쩍게 느껴질 만큼 적막했다.
삼도봉의 염원이 외면당하고 있는 듯 했다.
남북의 분단도 절통하거늘 동서가 편을 가르고 이 즈음엔 중부권
운운하며 또 한 편을 만들려 하는 판에 이 삼도봉이 갖는 의미는
각별한데....
10월 10일의 삼도화합의 날 행사가 참 화합을 이루려는 염원을
담고 있다면 형식적인, 일과성 연례행사에 그치지 말고 다양한
방식으로 간단 없이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나 저나 다음 해 10월 10일 삼도화합의 날에는 석기봉과 주봉
민주지산이 포함된 산행을 겸해 꼭 방문할 것을 기약했다.
해인산장으로의 또 하나의 탈출로 머구막골에 접어들어서는
후회 막급이었다.
삼마골에 비해 너무 험하고 지루했기 때문이다.
삼도하합의 날 행사용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중턱까지 차도가
조성되어 챠량을 이용하는 경우 일면 편하겠으나 계단으로 된
급경사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하나님, 부처님, 제 신들이어....
대간에서 내려와 바로 김용원의 부인과 재회의 인사를 나누다가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건강하고 부지런하던 선량한 모습 대신 차마 바로 보기 민망할
만큼 병색이 완연했기 때문이다.
거동마저 자유롭지 못한 몸이다.
간 밤부터 계속 궁금했으나 얼버무렸던 김용원이 털어놓았다.
4년 반에 걸친 혈액암 투병중이란다.
그러니까 내가 다녀 간 직후부터인 셈이다.
김용원(중)과 투병중인 부인(좌), 모친(우)
전화로 종종 안부를 확인했으나 그는 철저히 입을 봉해버렸던 것.
검사와 치료를 위해 지금도 월 1회 이상 한양대학교 부속병원을
찾는다는 말에 나는 미안하고 몸둘 바를 모르게 부끄러웠다.
이렇다 할 도움을 줄 힘은 없으나 초조하고 지루하게 보내야 하는
시간을 함께 하며 위로와 격려는 줄 수 있지 않았겠는가.
지난 6월부터 이 일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대학교 본병원으로 착각하여 헤매기 까지 했지만 매월
한 번 수요일에 경기도 구리의 한양대 부속병원과 그 주변에서
그 일을 반복하고 있다.
그들에게 의사는 재판을 받는 죄인의 판사에 다름 아니다.
의사의 한 마디에 희망과 절망, 희비가 엇갈리곤 했다.
그 동안 매번 많이 좋아졌다는 판정에 고무되곤 했다.
5개월의 시한 생명이 4년 반을 넘긴데다 날로 더욱 호전되고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반복되는 김천~서울의 왕복도 오히려 즐거운 여행이 되곤 했다.
본인의 투병 의지와 생명에 대한 강렬한 애착, 남편과 온 가족의
헌신적인 도움이 마침내 열매를 맺게 되는 중이라 믿고 싶었다.
남편의 표현대로 앞만 보고 매진해온 삶이었기에 이제는 옆도
살피며 더욱 보람찬 삶을 누리게 되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이번(12월 13일) 검사는 김용원에게 절망을 안겼다.
애간장을 태운 4년 반을 무위로 돌리겠다는 선고였기 때문이다.
매월 한 번씩 올라오는 것이 오히려 행복이었다는 그.
나는 그의 한 숨의 무게에 눌려 숨이 막히는 듯 했따.
김용원의 절대자가 하나님이건, 부처님이건, 아니면 다른 어느
신들이건 나는 그 분에게 간곡히 호소한 바 있다.
<목숨 건 투병중에도 그 때 일(백두대간 9회 참조)을 기억하고 늙은
山나그네를 반기며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처지를 안타까워 하는,
심성 고운 이 부인을 괴롭히는 병마를 징치(懲治)하고. 남편과 함께
산악인들을 위해, 그리고 고향을 위해 더욱 헌신할 수 있는 건강을
되돌려 주라고>(우리의 이야기들 209번 글 참조)
지금 나는 더욱 간절히 빌지 않을 수 없다.
할 수 있는 일이란 이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무력한 자신이
더 없이 밉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