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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순범 연세기획 대표 | ||
그런데 뜬금없이 지금 평택에서 ‘실크로드 메이어스(市長) 포럼’이라는 것을 개최한다고 법석이다. 유엔개발기구(UNDP), 유엔세계관광기구(UNWTO) 등 국제기구와 공동으로 개최한다고도 한다. 또한 듣기에도 생소한 ‘혜초’ 이야기가 나오고 평택호에 ‘혜초기념비’를 세운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을 평택시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단체장이나 정치하는 사람들이 무언가 생색내기 위한 한 건의 이벤트로 치부해버려야 하는 건가? 적지 않은 평택시의 예산을 들여가며 치러지는 이런 행사를 통해 과연 평택시에 어떤 기여가 조금이라도 있을 것인가? 평택과 실크로드와는 무슨 연관이 있기는 한 것인가?
귀동냥하거나 실크로드의 세계적 석학인 정수일교수의 약간의 글을 흩어 본 바에 의하면, 세계에 대한 앎을 추구하고 세계와 삶을 함께 하려는 세계인의 정신을 지닌 우리나라의 첫 세계인은 신라 고승 혜초라고 한다.
통일신라 전후시기에 구법(求法)를 위한 당나라 유학의 열기가 대단하였고 삼국 통일 후 신라는 당과의 관계강화를 위해 불승이나 유학생의 유학을 권장하였으며,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서기 704년에 태어난 혜초 스님은 16세(신라 성덕왕 18년)의 어린나이에 구법(求法)을 위해 당나라로 건너간다. 중국에 건너간 혜초는 천축(인도)에서 온 금강지라는 스승의 권유로 4년간 인도를 비롯한 서역의 여러 지역을 둘러보고 중국에 다시 돌아와 경전의 연구에 전념하다가 고향인 신라에 돌아오지 못하고 산시성 오대산의 한 절에서 780년 76세로 입적하였다.
혜초 스님은 서역에서 보고들은 것을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다섯 개의 인도국을 다녀온 이야기)”이라는 여행기를 엮었다. 1,300년 전에 쓰여진 이 왕오천축국전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등과 함께 세계 4대 여행기의 하나로서 그 중 가장 오래 된 것이다. 동서양학계에서 고대 문명을 밝히는데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받는 이 여행기는 1908년 프랑스의 ‘펠리오’라는 학자에 의해 중국의 돈황에 있는 천불동(참선이나 불상이 모셔진 수많은 동굴)에서 발견되었고, 이 여행기의 저자가 신라인, 즉 한국인이었다고 밝혀낸 이는 1915년 일본인 학자 ‘다카쿠스 준지로’라고 한다.
혜초의 서역기행은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아시아대륙 중심부를 해로와 육로로 일주하였으며, 더욱이 아시아대륙의 서쪽 끝까지 다녀와서 현지견문록을 남긴 사례는 아무도 없었다. 5개(동,서,남,북,중) 천축을 거쳐 대식(아랍)에 이르기까지 현지의 견문을 세상에 알려준 실크로드의 개척자인 것이다.
당시의 실크로드와 세계문명사를 밝히는 인류 공동의 문화유산인 혜초와 왕오천축국전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혜초의 고국인 우리나라에서 그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미진한 상황인 반면, 일본에서는 수십 명의 전문가로 이루어진 학회가 십 수 년 전부터 연구를 해 오고 있다고 한다.
이제라도 우리나라에서, 그것도 평택항이 있고 국제화중심도시를 지향하는 평택에서부터 천 년 전의 세계인인 혜초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평택시민신문 webmaster@pttimes.com
왜 지금 평택에서 ‘실크로드’란 말인가? (2)
이미 삼국시대 이래 중국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서역 간에는 교역과 내왕이 끊이지 않았던 수많은 역사적 사실은 실크로드의 동단(東端)은 한반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풍의 불교미술인 간다라미술의 전형인 석굴암 내부의 불상들, 한반도 주변에서서는 존재하지 않는 사자를 주제로 한 북청사자춤, 해상왕 장보고 등은 대표적이다. 동북아의 드넓은 해역을 주름잡던 해상왕 장보고의 해양경영은 당대의 동서문명교류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고, 특히 9세기 중엽부터 나타난 아랍문헌의 기록에는 많은 아랍 무슬림들이 신라에 내왕하거나 심지어 정착까지 하였고, 신라로부터 비단, 검, 말안장 등의 물품을 구입해갔다고 한다.
또한 해군대장 출신인 고려의 태조 왕건이 건국한 고려는 태생적으로 해양경영에 힘입어 일어 선 나라로서 고려의 활발한 대외교류활동을 통해 ‘꼬레아’란 이름으로 서구에 알려지게 된다.
수많은 역사적 기록과 사실에도 불구하고 중국을 포함하여 동양인 최초로 아시아대륙을 횡단한 실크로드의 개척자인 혜초와 왕오천축국전 하나만으로도 실크로드의 동단이 중국이니 한반도니 하는 말이 필요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경주 또는 경상북도의 어느 곳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혜초는 과연 어떤 경로를 거쳐 당나라에 건너갔을까 하는 것이다. 원래 젊은 나이(16세)에 유학을 떠난 이유로 혜초의 국내 행적에 관해 발견된 기록이 현재까지는 거의 없는 상황이다. 그런 이유로 당시 상황과 유사한 사례의 추적과 고증을 통한 추정과 연구가 필요하다.
혜초보다 약 1세기 전의 인물인 원효대사에 대한 행적은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고 한다. 원효와 의상대사는 당나라에 유학을 가기위해 압록강을 건너 요동까지 갔다가 고구려 병사에게 첩자로 몰려 갇혀 있다가 풀려나 신라로 되돌아온다. 10년 후 원효와 의상은 다시 육로가 아닌 해로를 통하여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다. 원효대사는 도중에 심한 비바람을 피해 한밤중에 무덤에서 자다가 목이 말라 물을 마셨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해골바가지의 물이었다는 것을 알고는 ‘마음밖에 법이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라며 득도하고 당나라로 가지 않고 신라로 되돌아간 곳이 ‘남양’이라고 한다.
백제 땅이었던 평택항 일대(고서에는 남양-현재의 포승지역도 예전에는 남양이라 불림)는 상당한 규모의 해상세력이 형성되어 항구로 활용되었는데 신라는 대중국교류가 가능한 서해의 항구를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여 6세기 중반에 이 지역을 장악하고 국제교역항으로 탈바꿈시켜 564년 신라가 독자적으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 한다.
즉 중국과 교역을 하기위해 평택항 일대를 신라가 차지한 6세기 중반이후 부터는 삼국간 분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힘들고 위험한 육로보다는 왕래와 교역이 발달한 해로와 국제교역항인 평택항 일대를 거쳐 이루지게 된다. 신라시대에는 서라벌(경주)에서 중국으로 가는 물자와 사람은 평택을 거쳐야만 했던 것이다.
약 1세기 후에 더구나 어린 나이의 혜초 역시 육로보다는 대중국교역이 활성화된 여기 평택항 일대를 거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평택 원효대사 오도성지 학술조사 보고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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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