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2006] 중앙신인문학상::와인의 눈물-배명희

[아데라]

[중앙신인문학상] 소설 부문 당선작  

와인의 눈물

 

배명희

*와인이 담긴 잔을 흔든 다음에 그대로 두면, 얇은 막이 형성되어 눈물같이 밑으로 흘러내린다. 알코올 도수가 높을수록 눈물이 많이 흐른다.

와인 잔을 흔든 다음 그대로 두면 얇은 막이 여자 눈물처럼 흘러내린다

창 밖에 어둠이 내린 지 오래였다. 직원들이, 직원이라 해봤자 여자와 사장을 합쳐 네 명이었다, 여자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퇴근한 게 벌써 한 시간 전이었다. 여자는 출입문에 잠시 시선을 던졌다가 컴퓨터로 눈을 돌렸다.

여자는 일급 호텔의 와인 웨이터로 근무하는 남자의 원고를 보고 있었다. 경기가 좋을 때라면 이런 일거리는 외부에 넘겼다. 하지만 지금은 월급을 받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조차 미안할 정도의 불경기였다. 사장은 우울할 때일수록 사람들은 화려하고 고급스런 취미를 선호한다고 했다. 여자는 사장의 말에 수긍했다. 이십 년 넘게 출판업계에서 종사해 온 사장의 예측이 터무니없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와인의 세계'라고 가제가 붙은 책이 팔려야 하는 일도 없이 책상만 지키고 있는 게 덜 미안할 터였다.

여자의 눈이 나이 든 포도밭이라고 써진 문장에 한동안 머물렀다. 40년 이상이 된 포도나무, 뿌리가 깊은 나무는 건강해서 서리나 가뭄의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잘 견딘다 했다. 여자는 나무만큼 나이를 먹는다면 자신도 세상에 튼튼한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옆 사무실의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문틈으로 새어들었다. 여자는 두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쓸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층에 있는 사무실 창가에서 내려다보는 거리는 쓸쓸해 보였다. 길 건너 건물 일층의 초밥집에는 붉은색 종이 등이 걸려있었다. 종이 등은 옆의 노래방 간판 때문에 마치 한물간 퇴기의 낡은 치마처럼 스산해보였다. 중심지에서 비켜난 골목 안 식당에는 길 잃은 바람만 드나들었다. 키 낮은 빌딩 너머로 멀리 보이는 초고층 건물꼭대기에는 좌표를 잃은 비행기나 헬리콥터가 날아들지 않도록 점멸등이 깜박거렸다.

도심의 불빛은 점점 영롱해졌다. 어둠이 짙을수록 도시는 싱싱해지는 것 같았다. 유리창 너머로 가 있는 여자의 시선은 무심했다. 보석함을 쏟아놓은 것 같은 풍경 따위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창가에 서서 여자는 검지의 손톱으로 유리를 톡톡 두드렸다. 직원들과 회식을 하거나, 외부에서 손님을 만나는 날, 가끔 여자는 사장과 동행을 했다. 그렇게 치자면 일주일이나 이 주에 한 번 꼴로 사장과 함께 저녁식사나 술자리를 갖는 셈이었다. 몰두하고 있던 일에서 문득 고개를 들 때쯤이면 사장은 여자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정해둔 것은 아니지만 여자는 한 달에 한 번쯤 사장과 함께 모텔에 들었다. 사무실 직원들은 여자와 사장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 사장은 직원 모두와 격의 없이 지냈지만 여자는 사무실의 누구와도 친하지 않았다.

창가에서 서성이던 여자는 도로 자리에 돌아왔다. 여자의 시선이 책상 위에 놓아둔 핸드폰에 떨어졌다. 작고 네모난 액정화면은 검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핸드폰은 하루에 한 번도 울리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여자는 습관처럼 핸드폰을 확인해보곤 했다. 폴더를 열면 배경화면으로 지정해 놓은 별장이 햇살 쏟아지는 단풍 숲에 싸여있다. 집 앞에는 쪽빛 호수가 펼쳐져 있고, 수면 위로 벽돌색 집 그림자가 비치는 그림이다. 여자는 나무와 호수에 둘러싸인 유럽풍 이층집을 바라본다. 화면 아랫부분의 숫자가 여덟 시를 가리켰다.

여자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우둔함에 대한 자책이었다. 저녁식사 시간이 지나간 지금 사장의 전화를 기다리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사장이 식사를 건너뛰고 여자와 함께 모텔에 간 적은 없었다. 사장은 미식가였고, 맛집 기행 같은 책을 낸 적도 있었다. 식당의 간판과 출입문만 보고도 맛있는 음식점임을 알아낼 만큼 안목이 높았다. 사장과 동행을 할 때 여자는 새로운 탐험지에 발을 들여놓는 것 같은 약간의 흥분을 느끼곤 했다. 여자는 사장에게서 함께 오지에 들어선 동지와도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오 년 동안 여자는 사장과 함께 도시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녔고, 놀랍게도 사장은 헛다리를 짚은 적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한 번 간 집을 가까운 시간에 두 번 찾는 일도 없었다. 허름한 뒷골목에 간판도 없이 박혀있는 칼국수 집에서 도심지의 격조 있는 프랑스식 레스토랑까지 두루 돌아다녔다. 그것은 즐거움이라기보다는 경이에 가까웠다. 어느 날, 여자는 물어보았다.

"맛있는 집을 발견하면 혼자서도 오나요?"

사장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식사는 섹스와 같아서 혼자서는 아무 맛도 안나?"

여자는 약간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질문인지를 깨달았다는 듯이. 그리고는 약간의 질투를 느꼈다. 여자와 함께 오지 않는 날들은 누구와 함께 다닐까? 그 대상이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었다. 여자는 사장이 발라주는 레드 랍스터 살을 입에 넣으며, 여자가 느끼는 포만감과도 같은 즐거움을 다른 사람도 똑같이 느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온몸의 근육이 위축되는 것 같았다. 기둥에 등을 대고 있는 것 같던 정서적 안정감이 급속히 사라졌다. 그럴 때 여자는 조급하게 술잔을 들었다. 기분이 가라앉을 때는 술을 마시는 것이 좋은 해결책이었다. 머릿속이 안개가 낀 듯 몽롱해졌다. 여자는 웃음이 나왔다.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반성이었다. 그러면 이내 기분이 좋아졌다. 마치 오래전 아버지와 함께 중국집에 앉아 있던 때로 되돌아 간 것 같았다. 아버지는 여자의 입 언저리에 묻은 갈색 자장을 휴지로 닦아주었다. 자장에 국수 가닥을 비벼서 나무젓가락에 감아 여자의 입에 넣어주던 장면을 떠올렸다. 사실은 아버지와 자장면을 먹었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다만 여자는 그런 기억을 갖고 싶을 뿐이었다. 그건 뭐랄까, 하늘에 떠있는 별들이 여자의 앞으로 몰려들어, 여자를 위해서 반짝이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술이 취하면 여자는 생각했다. 사장과의 관계는 독점해야 만족할 수 있는 사랑 같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좀 더 취하면 여자는 머리를 좌우로 조용히 흔들었다. 사랑 또한 완벽하게 소유해 본 적이 없었다. 독점은커녕, 물러서기만 했을 뿐, 제대로 주장해본 적도 없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여자는 마음이 편해졌다. 어떤 경계가 여자의 가슴 속에 선명히 지어지고, 경계의 안쪽을 엿보지 않는 한 여자가 상처를 받을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책상 맨 아래쪽 서랍을 열었다. 서랍 속에서 메모리 스틱을 꺼내들었다. 여자는 잠시 망설였다. 일거리를 집으로 들고 가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지금 보고 있는 원고는 딱히 여자에게 떨어진 일은 아니었다.

'와인을 디캔팅한다는 건 다른 용기에 옮겨 담는 것을 말합니다. 와인은 오랜 숙성기간 중에 불투명한 이물질이 생길 수 있습니다. 디캔팅은 이 같은 불순물을 걸러주는 역할을 하지요. 그리고 디캔팅을 하는 동안 와인에 함유되어 있는 탄닌은 공기 중에 있는 산소와 접촉합니다. 와인을 용기에 옮겨 담을 때 공기가 활발하게 소통되며, 와인은 훨씬 부드러운 맛을 내게 됩니다.'

여자는 포도주를 다른 용기에 옮겨 담아 마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포도주라면 병에서 직접 잔에 따라 마시는 것으로만 알았던 것이다. 다른 것과 섞여서 순화되는 것 혹은 더 나아지는 것, 그것은 여자의 취약한 부분이었다.

여자는 자신이 포도주가 되어 바닥이 넓은, 목이 길고 좁은 유리병으로 흘러드는 모습을 상상했다. 발끝부터 떨어져 액체로 변한 종아리와 허벅지가 병 속으로 들어가고 엉덩이와 허리마저 서서히 붉은 액체로 변해서 이윽고 머리끝까지 완전히 잠긴다. 그리고 포도주로 변한 자신을 굽이 달린 둥근 잔에 반 정도 차게 부어서 음미하는 사장을 상상했다. 극히 정교한 미각을 가진 사장에게 자신의 몸은 어떤 느낌을 주는지 궁금했다. 여자는 잠깐 놀랐다. 왜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사장이 왜 여자를 만나는 것인지? 그리고 여자는 움찔했다. 자신은 왜 사장을 거부하지 않는지. 사장에게는 대학에 다니는 아들과 분홍색 연어살 같은 느낌을 주는 아내가 있었다. 여자는 사장이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능력 있는 아내가 생활을 책임지다시피 한다는 것이 불평이라면 다르지만.

여자는 메모리 스틱을 다시 서랍 안에 던져 넣었다. 벽에 걸린 네모난 시계가 아홉 시를 가리켰다. 집에 도착하면 열 시는 될 터이다. 집으로 일거리를 들고 가봐야 컴퓨터에 넣지도 않고, 가방 속에 넣어 두었다가 아침에 그대로 들고 출근할 확률이 더 높았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핸드폰은 돌덩이처럼 굳어있다. 여자는 손을 뻗어 핸드폰을 손에 넣고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전화가 올 시간은 지났다. 여자는 핸드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딱히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기다리는 게 아니라면 사무실을 나갈 시간이다. 여자는 멍하니 앉은 채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직원들의 책상이 벽을 따라 붙어있고, 칸막이가 쳐진 창가에 타원형의 회의용 탁자가 놓여있었다. 며칠 전에 새로 갈아 낀 천장의 형광등 불빛이 푸른 물처럼 사무실에 넘실거렸다.

출판사는 여자의 첫 직장이었다. 여자는 스물세 살이었고, 사장은 까다롭게 따지지 않고 이력서를 한 번 훑어 본 다음 여자를 채용했다. 그때 사장은 불혹의 나이에 막 접어들었고, 큰 키에 다소 강파른 인상이었다.

여자는 뛰어나게 유능하지도 않았고, 달리 실수를 저지르지도 않았다. 그저 무난한 직장인이었다. 여자가 입사할 무렵에는 규모에 비해 꽤 알찬 출판사였다. 그 후 몇 년 동안 직원이 줄 때마다 여자는 이력서를 다시 써야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여자가 잘리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사장은 직원을 불러 그만두라는 말을 한 적이 없는 듯했다. 이직이나 전직으로 자리가 비면 자연스럽게 감원이 되곤 했던 것이다. 다른 직장보다 이동이 많은 출판계에서 여자는 용케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와 복도를 지나 사무실 문을 여닫으며 지내는 세월에 익숙해진 것이었을까. 여자는 가끔 책상에 펼쳐진 서류나 책에 눈길이 가 있는 동안 딴생각을 했다. 술에 관한 한 신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별명이 붙은 사장이 초고층빌딩에 박혀있는 창처럼 많은 술자리에서 유쾌하게 마실 수 있는 비결이 뭘까? 옮겨가는 술집마다 염문을 뿌려대는 사장에게 정인이라 부를 수 있는 여자는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사랑일까, 혹은 놀이일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오후 시간이 후딱 지나 버린 적도 있었다.

그것은 여자가 스스로 알지 못하는 어떤 끌림일까. 여자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젓는다. 머릿속이 텅 비도록 강력한 중력이 작용한다면, 사장에 대한 여자의 사랑이 뭉쳐지고 작아져서 마침내 블랙홀로 사라질 정도로 무거운 질량을 가질 거라고 여자는 생각해 본다. 여자는 가끔 자신의 심장이 거센 격류처럼 거칠고 사납게, 쥐어짜듯 펄떡였으면 하고 바랐다.

여자는 자신의 피도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구나 하는 기분을 가진 적이 있었다. 어이없을 정도로 여자는 생애 최초로 맞닥뜨린 문 앞에서 맥없이 물러섰다. 만약 그때 좀 더 삶에 매달려 대롱거렸더라면 지금은 달라졌을까. 여자의 앞을 막아선 완강한 문을 두드리고 발로 집어 찼더라면 어땠을까. 여자는 잠시 가슴께로 손을 가져가 쓸어내린다. 지나가버린 일을 생각하는 것보다는 눈앞에 벌어지는 다른 세계를 엿보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여자는 자꾸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과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거리에 놓여있는 전화기를 흘끔거린다. 두 개의 전화중 하나는 이미 무심한 기계덩어리로 변해버렸다. 이런 시간에 회사로 전화를 할 사람은 없었다. 여자가 막연히 기다리고 있는 남자는 계획대로라면 네팔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포카라에 있을 것이다. 남자의 인생을 지배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뜬 후, 남자는 미움.절망.질투.분노 따위의 격랑이 자신에게 유산으로 남겨졌다는 것을 알았다. 남자의 어머니는 삶의 의미를 가져가 버린 대신 남자에게 고독하고 무거운 가방을 던져주었던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처럼 가장 준엄한 길을 올라가야 한다고 외친 후, 고독한 방랑이 시작되었다고 남자가 여자에게 말했다. 눈 덮인 히말라야에서 남자는 인생의 비밀을 찾기 위해 카메라를 들이댈 것이다.

기다리지마. 한마디만 해놓고 남자는 침묵했고, 이제는 여자가

발끝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남자는 여자가 처음으로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를 시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여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가버렸다. 군대와 결혼이 겉으로 드러난 이유였다. 결혼이라면 여자도 할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였고, 취직도 결정된 상태였다. 남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여자는 부모가 남겨 둔 약간의 돈을 신탁에서 꺼낼 생각도 해둔 터였다.

남자는 처음부터 여자의 왼쪽 다리가 약간 불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리는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불편하다는 사실을 알 수도 없을 정도였다. 부모가 없는 것은 여자의 잘못은 아니었다. 여자의 다리는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고, 결혼 생활에 여자의 부모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결혼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남자가 아닌 남자 어머니의 생각이라는 것이었다. 남자의 어머니는 두 사람 사이에 비집고 들어와 맞물렸다. 여자는 중간을 차고 들어온 톱니바퀴 때문에 백 년을 돈다 해도 남자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여자는 어떤 시도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결국은 남자의 의사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밤마다 젖은 버스표를 손에 들고 버스 뒤꽁무니를 바라보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나 손을 펴보면 땀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여자는 일어나 회의용 탁자를 지나 칸막이로 공간을 구분해 놓은 탕비실로 갔다. 저녁시간을 넘긴 뱃속이 허전했다. 여자는 인스턴트커피 두 개를 꺼내 가위로 잘랐다. 두 개 모두 설탕이 몰려들어 있는 부분을 엄지와 검지로 잡고 컵에 쏟았다. 여자는 봉지를 잡고 있던 손가락에서 약간 힘을 뺐다. 크림과 설탕 알갱이가 갈색의 커피 가루 위에 모자처럼 얹혔다.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눌러 잔에 넣고 자리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 커피 잔을 놓다가 여자는 짧게 비명을 질렀다. 핸드폰에 슬쩍 부딪친 잔이 넘어졌고, 엎질러진 갈색 액체가 책상 위를 가로질러 여자의 바지로 흘러내렸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어 발짝만 떼면 휴지를 집을 수 있었지만 여자는 망연히 서 있었다.

군대에 가기 전 날, 발끝만 내려다보던 남자를 바라보고 여자는 생각했다. 둘이서 보냈던 시간이 무엇이었던가를. 그때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꽃망울이 터지던 어느 봄날의 가슴 두근거리던 시간으로 되돌릴 수 없을까. 다시 시작한다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안다면 남자를 보내지 않을 텐데. 그런 생각만 팽이처럼 맴돌았다. 기다리지마. 한마디만 해놓고 남자는 침묵했고, 이제는 여자가 발끝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여자는 커피를 다 쏟아내 텅 비어버린 컵을 바라보다가, 느릿느릿 휴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프리카 오지 여행기를 기획한 것은 여자였다. 사장은 흔쾌히 승낙했고, 그 방면에 유명한 여행전문가를 접촉했다. 여행전문가이자 여행 작가는 자신과 작업을 한 적이 있던 남자를 데려왔다. 저녁을 겸한 술자리에서 여자는 평소와 다름없이 침착했다. 남자를 만나기 전, 사장에게서 남자의 이름을 들었을 때 여자는 사진작가가 옛 남자임을 단박 알았다.

버스를 타고 가버린 지 오 년이 지난 후에 남자는 사진작가가 되어 있었다. 놀란 것은 남자 쪽이었다. 덜렁대고 어딘가 허술한 듯 속내를 감추지 못하는 태도는 여전했다. 사장은 모든 것을 여행전문가와 남자에게 일임했다. 그것이 사장의 스타일이었다. 일에 관한 이야기는 몇 마디로 끝나버렸다. 남자와 여자가 같은 대학 출신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일과는 관계도 없는, 낡아서 폐기처분된 이유도 아닌 이유가 술자리를 고양시켰다. 그날은 흔히 출판사 측과 필자와 마주 앉으면 하는 의례적인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일에 대해 더 이상 할 말이 없던 여자는 침묵을 지켰고, 주는 대로 술을 받아마셨다.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마셨기 때문에 여자는 자신이 조금씩 취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몇 잔만 마시면 취해서 횡설수설하는 술버릇을 남자는 버리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 남자는 자신의 두 아이를 자랑했고, 조금 취하자 증권회사의 컨설턴트인 아내의 고단함을 동정했다. 그리고 머리끝까지 술이 들어차자 남자는 여자의 손목을 자꾸만 잡아끌었다. 여자는 손목을 잡힌 채 발음도 분명치 않는 남자의 말을 듣고 있었다. 여행 전문 작가는 취중에도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여행 작가는 남자의 겨드랑이를 자신의 어깨에 올려 걸치더니 비틀대며 술집을 빠져나갔다. 열두 시가 넘었고, 무려 다섯 시간째 자리를 옮겨가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남자가 사라지자 여자는 한꺼번에 취기가 올랐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졌고, 낮은 조도의 뿌연 등이 달린 술집 천장이 빙글 돌았다. 여자는 천천히 술병을 집어들고 자신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숨도 쉬지 않고 훌쩍 잔을 비웠고, 또 술을 채웠다. 석 잔째 술을 마시자 술병이 비었고, 사장은 주인여자에게 소주 한 병 더 라고 소리쳤다.

"너 하늘에서 낙하산 타고 세상에 뚝 떨어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구나"

술집에서 나오며 사장이 말했다. 여자는 사장의 팔에 매달려 걸었다. 발을 제자리에 놓을 수가 없어 여자는 끝없이 휘청거렸다.

"그 정도 술에 취하시다니. 실망이에요."

"인마. 나도 사람이야. 술 먹으면 취하고, 여잘 보면 안고 싶고."

"저는 여자로 안보여요?"

여자는 생애 처음으로 타인에게 대화라고 생각되는 말을 건 기분이었다. 어떻게 살아야하는 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사장님은 나보다 많이 살았으니 알지 않나요? 여자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사장은 여자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는 가만히 여자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덮었다. 젤리나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처럼 사장은 자신의 혀를 여자의 입술에 갖다대었다. 가로등이 켜진 길가에 서서 여자는 생각했다. 왜 온몸이 달아오르지 않을까? 사장은 자신을 보석 다루듯 만지고 있는데. 어째서 이만 볼트의 전류가 발끝을 뚫고 들어와서 심장을 관통한 뒤 머리를 치고 지나가지 않을까. 이럴 때는 무서운 속력으로 튀어나가 어딘가 부딪힌 몸뚱이가 산산조각이 나야 정상이라고 여자는 생각되었다. 여자는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혼미함이 걷혔다. 여자의 의식은 점점 명징해졌고, 여자는 그런 자신이 안타까웠다. 행인들이 늦은 밤거리에서 부둥켜안고 있는 두 사람 곁을 지나갔다.

여자는 갈색으로 젖은 휴지 뭉치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삼십 분 가량만 더 있다가 사무실을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기다릴 사람도 없는 집이었다.

오래전 연말, 알고 지내던 귀부인이 지인에게서 선물로 받은 고급 포도주를 한 병 들고 왔습니다. 그 와인은 프랑스 보르도에서도 특등급 와인으로 유명한 어느 샤또의 1945년산 최고급 와인이었습니다. 이렇게 오래된 와인은 처음 대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루었습니다. 스크루를 코르크에 넣었더니 의외로 쉽게 들어갔지만 촉감이 이상했습니다. 게다가 조심스럽게 코르크를 빼는데 통째 빠지지 않고 부스러지기 시작했습니다.

포도주의 마개인 코르크의 수명은 약 25년입니다. 그래서 와인의 경우 20년이 지나면 새것으로 갈아 끼워야 하는데 원래의 코르크를 그대로 두었기 때문에 삭은 것입니다. 맛을 보니 떫은맛이 조금 날뿐 싱거워서 와인 같지 않았습니다. 코르크라는 작은 도구 하나 때문에 최고급 와인의 맛이 변질된 것입니다.'

여자는 문장을 이어주는 접속사 때문에 글이 늘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딜리트 키를 누르려다 여자는 자판 위에서 손가락을 멈추었다. 접속사나 쓸데없이 붙은 부사를 삭제하면 글의 속도는 붙겠지만 글의 울림이나 생각이 머물 수 있는 틈새 같은 것은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이 정도 글이라면 그렇게 디테일하게 손을 대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글의 세련미보다는 글쓴이의 직업에 대한 진정성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한 자리에서 오랜 시간 동안 하는 일은 사람에게 내공을 길러주는 모양이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보졸레 누보 같은 와인은 수확하고 발효시킨 다음, 다시 말해 수확 후 두 달쯤 지나 바로 마실 수 있는 와인입니다. 우리나라 음식으로 치자면 익은 김치와는 다른 겉절이 김치라고 생각하면 되지요. 하지만 보르도나 부르고뉴, 미국의 나파 지역에서 생산되는 고급 와인들은 1년 6개월에서 2년가량 숙성시킨 후에야 마실 수 있습니다, 숙성하는 동안 와인 특유의 복잡한 향과 맛이 충분히 배어나기 때문입니다. 와인은 숙성되는 통에 따라 스타일이 결정됩니다. 이를테면 오크 통에 담가 둔 와인은 나뭇결 사이로 들어온 산소와 결합하여 탄닌 성분이 부드러워질 뿐만 아니라 오크의 각종 향과 성분이 스며들어 와인에서 나무향, 바닐라향, 구운 토스트 향 같은 여러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술을 만드는 과정들을 관통하는 것은 세월이었다. 잠시 여자는 자신이 양조업자라도 된듯한 착각 속에 빠져들었다. 오래 묵은 포도밭 위에 비가 내리고, 청명한 햇살이 내리쬐다가 물기를 거둬가는 바람이 불었다. 시간이 청록의 포도밭을 밟으며 지나갔고, 발자국을 찍은 곳마다 과일과 꽃과 풀냄새가 피어올랐다. 여자는 잠시 눈을 감았다. 언젠가 이런 향을 맡았던 기억이 났다. 여러 종류의 꽃으로 만든 커다란 꽃다발의 향기. 여자의 눅눅한 삶 속에 딱 한 번 가슴팍에 안겨질 뻔 했던 꽃다발. 여자의 코끝에 스칠 듯 다가오다가 사라져버린 향기. 여자는 과거의 한 지점을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시간을 거슬러, 공간을 가로질러 여자는 허겁지겁 과거로 달려갔다.

여자는 어디쯤에서 멈춰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큰아버지 집에서 손님처럼 겉돌던 시절, 고만고만한 사촌들 사이에 여자는 어디 쯤에 자신을 놓아야 할지 알지 못했다. 큰어머니나 큰아버지에 대한 나쁜 기억 같은 건 뇌리 속에 고여 있지 않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여자는 교복을 벗어놓고 곧장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다락방의 작은 창에서는 학원에서 돌아오는 동갑내기 사촌의 피곤한 어깨가 보였고, 두 살 위의 사촌의 공부를 봐주러 오는 아르바이트 대학생의 검정 색 가죽 가방도 볼 수 있었다. 누구도 여자가 틀어박혀 소설책을 뒤적이는 다락방의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부엌 식탁 위에 놓인 네 개의 도시락 중 한 개가 여자의 가방에 들어가는 한 여자의 행방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말썽부리는 일도,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일도 없이 여자는 그림자처럼 육 년을 보냈다. 여자가 지방대학의 합격통지서를 받고, 기숙사에 입사 신청을 한 뒤에야 큰아버지는 약간의 안도와 나무람이 뒤섞인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도시 대학의 합격점수를 훨씬 웃도는 성적으로 지방 대학을 가는 여자의 손을 움켜잡고 큰아버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의 짐은 작은 가방 두 개가 전부였다. 여자는 넘치게 물건을 사거나 소유하는 일이 없었다. 여자는 출판사에 취직을 하면서 그녀가 중 고등학교를 걸어다녔던 도시로 다시 돌아왔다. 교통사고로 죽은 여자의 부모가 남겨준 약간의 돈으로 여자는 독신자용 아파트 정도는 살 수 있었다. 여자는 큰아버지에게 간단한 안부 전화를 한 후, 부엌과 욕실과 거실이 딸린 반쯤 땅에 묻힌 지하의 집 한 칸을 얻었다. 장마 때는 곰팡이가 방바닥에서 벽을 타고 기어오르기도 했다. 그러면 여자는 천 조각에 락스를 적셔 문지르고 난방을 넣었다.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면 창문과 나란히 가슴 높이에 놓여있는 땅에서 빗방울이 튀어 올랐다. 창 옆에 붙어있는 가스보일러가 돌아가는 소리가 습기 가득한 공기를 뚫고 가만가만 들렸다. 맨발로 서 있는 여자의 발바닥에서 따뜻한 기운이 올라와 여자의 다리를 통해 몸 전체로 퍼졌다. 여자는 그런 느낌이 좋았다. 누군가 부드럽게 손바닥으로 종아리를 쓸어 줄 때처럼 마음이 편해졌다.

남자와 사장을 번갈아 오가는 동안 양심의 가책은 점점 무뎌져 갔다

여자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전화벨 우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수화기에 손을 얹고 여자는 숨을 멈췄다. 옆 사무실에서 나는 전화벨소리였다. 벽을 통해 전해오는 소리는 멀고 둔탁해서 아무리 해도 바로 곁에 있는 전화 소리로는 들리지 않았다. 여자는 그런 자신이 한심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천천히 손을 떼고 벽에 붙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이제 완전히 체념을 해야 하는 시각인 것을 깨달았고, 홀가분해졌다. 이제는 누구도 여자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밤새 여자가 심한 복통에 시달려, 고통스런 신음이 지상으로 새나간다 해도, 누군가 달려와 여자를 돌본다거나 하는 일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런 경계에서 여자는 마음의 안정을 찾곤 했다. 불과 몇 분전만 해도 여자는 환청을 들을 정도로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지만 시간은 단위가 높은 진정제나 명쾌한 해결사 같은 면이 있었다. 여자는 정말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전화를 걸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여자는 알고 있었다. 기다리는 것은 습관에 불과했다. 여자에게는 달리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것은 시간이 달군 인두로 여자의 몸에 찍어놓은 화인처럼 명백했다. 여자는 건성으로 컴퓨터를 들여다보았다. 여자의 손가락을 따라 화면이 화라락 넘어갔다.

오 년 만에 남자를 다시 만났던 날, 여자는 사장의 팔에 매달려 모텔로 들어갔다. 술에 마비된 손가락 끝이 나무껍질처럼 아무런 느낌도 감지할 수 없었지만 정신은 얼음 알처럼 말짱했다. 여자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그 무엇, 여자의 삶에서 빠져버린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대학에서 남자를 만났을 때 여자의 가슴속에 타오르던 불꽃의 정체가 궁금했다. 눅눅한 버스표를 손에 꼭 쥐고 달려가는 버스를 바라보던 망연함이, 남자를 처음 보았을 때 다른 무엇으로 바뀌려 했었다. 겁에 질린 작은 여자애를 바라보는 좀 더 자란 여자가 공중에 떠 있었다. 조금 큰 여자는 높은 곳으로 올라간 후,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작은 아이가 가여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나 남자가 떠났을 때 공중에 떠서 아이를 바라보던 여자는 땅으로 떨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버스표를 든 아이만 오롯이 남아있었다. 어디론가 가야하는데, 버스는 오지 않았다. 남자와 함께라면 여자는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손에 땀이 나 흥건하게 젖어들도록, 눅눅해진 버스표가 흐물흐물해지도록 남자는 오지 않았다. 여자의 코끝에 잠시 향기를 스치게 한 후, 버스를 탄 다른 사람들처럼 뒷모습만 보인 채 가버린 거였다. 여자의 발밑에는 모가지가 부러져 시들어가는 꽃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날, 남자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남자가 나타난 이후, 여자는 사장의 뒤를 따라 이 골목 저 골목, 모텔을 찾아들었다. 모텔은 대개 막다른 골목이나 길이 끝나는 곳, 아니면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산 밑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모텔은 어두운 물속에서 불쑥 솟아 오른 야광생물처럼 억제할 수 없는 불온한 빛을 발산했다. 여자는 낚싯바늘을 삼킨 물고기처럼 공중으로 떠올라 마구 흔들리면서 빠르게 진홍의 빛 속으로 빨려들었다.

그러나 무서운 속도로 날아올라 대기권을 돌파하고 우주로 진입한 물체가 폭발하고야 마는 그래서 더 이상 도달할 길 없는 절정에 다다르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비 내리고 낙엽이 구르고, 눈이 날려도 여자에게는 존재 전체가 송두리째 소멸해버리는 경험 같은 건 오지 않았다. 여자의 눈은 우물처럼 깊어졌다. 남자에게서 얼핏 느꼈던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은 착각이었던가? 여자는 날아가는 새가 던진 그림자 같은 환영에 집착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남자가 사무실로 전화를 해 왔을 때 여자는 잠시 망설였다. 극히 짧은 순간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여자는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남자가 부재하던 오 년의 세월 같은 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다. 골짝에 숨겨진 인생의 비밀. 그런 게 있다면 찾고 싶었다. 비밀을 푸는 열쇠가 누구에게 있는지는 상관없었다. 몸살기가 있어 조퇴했으면 한다고 하자 사장은 금방이라도 이마를 짚어줄 것 같은 눈길로 여자를 보았다. 남자가 아프리카로 떠났던 동안, 여자는 사장과 함께 세 번쯤 모텔에 갔었다. 여자는 양다리란, 낱말을 떠올렸다. 날카로운 꼬챙이로 가슴이 푹 찔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남자와 사장을 번갈아 오가는 동안 양심의 가책은 점점 무뎌져 갔다. 죄의식 같은 것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화려한 축제 같던 파티가 횟수를 거듭할수록 일상으로 변해버려 더 이상 흥분도 설렘도 생기지 않는 권태로운 모임으로 전락해 버린 것 같은 심정이었다. 여자에게 처음부터 윤리적인 무게는 불필요한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여자는 남자에게 흘러들어왔다가 빠져나간 시간 같은 건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지금 여자의 앞에 서 있는 남자였다. 따가운 태양에 검게 그을린 지친 얼굴에 두 눈만 침울하게 빛을 내는 남자가 보일 뿐이었다.

여자는 남자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갔다. 반쯤 땅에 묻힌 여자의 집에서 남자는 여자의 벌거벗은 등을 쓸어내렸다. 당신이 날 떠난 후 삶이 어땠느냐고 여자가 물었을 때 남자는 반쯤 눈을 감고 대답했다.

"카메라로 시간을 움켜잡으며 살았어. 날카로운 단도로 삶의 단면을 자르듯."

"당신이 발견한 것은 뭐야?"

여자는 남자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며 물었다.

"아무것도. 누구도 인생을 송두리째 볼 수는 없어."

남자는 잠에 빠져들며 중얼거렸다.

"어둡기 전에 깨워 줘. 저녁 비행기로 도착한다고 했거든."

남자의 말은 다른 사람의 옷을 걸쳐 입고 파티에 참석한 사람처럼, 타인의 말을 빌려와 웅얼거리는 것 같았다. 여자는 네가 정말 보고 싶었다. 너를 보내고 난 후 내 삶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라는 말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여자는 컴퓨터의 화면을 닫았다. 전화는 끝내 울리지 않았다. 여자가 불을 끄고 사무실을 나간 후에도 전화가 울리는 일 따위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컴퓨터의 전원을 끄고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벽에 붙은 전등 스위치를 내리기 전에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책상과 회의용 원탁, 컴퓨터와 프린터 등의 사무집기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전원 콘센트 때문에 자리 잡은 후부터 한 번도 공간을 새로 구성한 적이 없는 사무실 풍경. 여자는 책상이 창가 쪽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창 밖 풍경이 보고 싶을 때 굳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 쪽으로 가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좋도록 말이다. 벽을 따라 전선을 길게 연결한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보기가 흉할 것이고 어쩌면 전선에 걸려 비틀대는 일도 생길지 모른다. 이 건물은 너무 오래되었고, 낡았다. 여자는 스위치를 내렸다. 순식간에 어두운 장막이 쳐졌다. 여자는 익숙하게 문의 손잡이를 비틀었고, 복도로 나갔다. 좁고 긴 복도는 조용했다.

술이라는 게 시초에는 신과 만나기 위해 사용되었던 일종의 약물이 아니었을까. 여자는 고개를 약간 기울여 방금 떠오른 생각에 몰두했다. 현실에서 두발을 떠오르게 하기 위해, 혹은 무언가 만나기 위해 지금도 술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자는 전철 역 앞 네거리에 자줏빛 간판을 이마에 얹은 가게가 생각났다. 만약 아직 문이 열려있으면 힘차고 열정적인 이태리 와인이나 자연과 가장 흡사한 맛을 낸다는 부르고뉴 와인을 살까, 생각했다.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었다. 여자는 와인에 대해서는 무지했고, 다만 자신의 생일을 축하할 의식이 필요했다. 여자는 값비싼 최고급 와인이라도 사람에 따라 별로다고 느낄 수도 있다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 저 마다의 삶이 다르듯, 와인도 각기 독특한 맛과 향기가 있기 때문에 한 줄로 세워 가치를 매길 수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여자는 잘 알지도 못하는 와인에 갑자기 매달리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실소했다. 때로 이런 것도 삶에는 필요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여자는 코르크 마개를 딸 수 있는 오프너와 와인에 어울리는 굽이 달린 둥근 유리잔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서른 번째 맞는 생일에 이 정도의 사치는 당연하다고 여자는 최면을 걸었다.

뜨거운 햇볕과 말라버린 땅, 어두운 저장고와 침묵의 시간. 와인은 그런 세월을 견딘 후 비로소 새로운 빛깔과 향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했다. 여자는 자신도 어떤 빛깔과 향으로 거듭 태어나고 싶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송두리째 마셔주었으면 싶었다. 아침부터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경계의 시간이지만 여자는 서른을 지나는 중이었다. 혼자서는 느껴지지도, 알 수도 없는 자신의 빛깔과 향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그것을 알 수 있다면 여자는 좀 더 자신 있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코르크 마개를 따는 순간, 운 좋게도 여자는 자신과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여자는 손안에서 핸드폰을 한 바퀴 빙 돌려보았다. 진동으로 돌려놓은 핸드폰이 몸을 떠는 일 따위는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자는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 못했다. 여자는 자신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한 발 한 발 걸음을 내디뎠다. 텅 빈 복도에 여자의 발짝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끝>

중앙일보. 2006.09.20 16:17 입력

당선소감

내 인생의 동반자·이정표가 되어준 글쓰기  

낮과 밤이 바뀌는 시간, 어스름이 지상으로 막 내리는 그때를 나는 좋아한다. 멀리 뻗어있는 길이 보이고, 무작정 어디론가 가버려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가 닿고 싶은 곳이 어딘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생의 마지막까지 알 수 없을지 모른다. 나는 망설인다. 잠깐 사이에 어두워질 경계의 시간에 길 떠나는 게 두렵기 때문이다. 소심한 내 등을 밀어낸 것은 소설이었다. 어둠이 두렵다고 생각하지 마라. 먼길을 가면 지칠 뿐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길 끝에 무엇인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마라.

나는 두려웠고, 그래서 움츠렸고, 오래 멈춰 서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누군가 손을 잡아주었고, 또 누군가 함께 걸어주었다. 머뭇거릴 때마다 오래 기다려주었다.

소설을 쓰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편해졌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사람을 알지 못했을 테고, 길을 갈 수 없었을 것이다. 글 쓰는 게 편해진 걸 보면 몸 어딘가에서 힘이 조금쯤은 빠진 모양이다. 갈 길은 멀고, 여전히 그 길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이제 조금쯤은 자신을 믿으며 길을 나설 수 있을 것 같다.

굽이굽이 고개마다 내 손을 잡고 이끌어주신, 인생의 스승이자, 도반이자, 연인이기도 했던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 드린다. 그리고 미숙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머리 숙여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잘하는 거라고는 책을 읽고, 사는 재주밖에 없는 엄마를 참아준 두 딸아이와 남편에게 앞으로도 계속 봐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배명희

▶1956년 경북 의성 출생

▶한양대 식품영양학 대학원 졸업

심사평

상당한 습작기 거친 녹록하지 않은 작품들

인물과 주제 밀도있는 형상화에는 아쉬움  

 

 중앙 신인문학상 소설 부문 최종심사를 하고 있는 임철우.박범신.최원식씨(왼쪽부터). 김성룡 기자

최종심에 오른 15편의 작품들은 대체로 예년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저마다 상당한 습작기를 거친 녹록하지 않은 솜씨들이었으나, 아쉽게도 심사위원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작품은 드물었다. 의욕적으로 다양한 장치들을 펼쳐놓고도 막상 제대로 뒷감당을 못하고 만다든지, 나름대로 무리 없이 이야기를 풀어냈지만 형식과 발상의 진부함이랄까 안이함이 눈에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또 근래 우리 소설의 한 경향이랄까. 뭔가 색다르게 써야한다는 강박 때문인지 기발한 착상, 특이한 스토리 전개 방식 따위에 지나치게 의존하려는 작품도 있었다. 요컨대 전반적으로 인물과 주제를 밀도 있고 깊이 있게 형상화해 내는 능력이 아쉬웠다.

아내의 배신으로 감옥에 갇힌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고래'는 차분한 심리적 서술이 강점이다. 그러나 후반부 이후 짜임새의 허술함, 모호한 고래의 이미지, 또 군데군데 드러나는 작위적 설정이 흠이었다. 고래잡이의 기억과 현재의 모습을 대비시키고 있으나 일관성이 부족하고, 결말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모호하다. 열차사고 생존자의 트라우마(Trauma)를 다룬 '나비의 눈물'은 안정된 문장과 호흡이 돋보였으나, 아쉽게도 극적인 요소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소설의 핵심이라 할, 세상과 가정까지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 주인공의 내면적 동기가 충분한 설득력을 얻기엔 어딘가 미흡했다. '이룩과 조'는 두 남자를 대상으로 한 여주인공의 내적 진술로만 이루어진 작품이다. 극적 구조를 최대한 배제한 채 화자의 진술 만을 집요하게 뒤쫓는 형식인데, 구성의 단순함과 더불어 톡톡 끊어지는 단문으로 일관된 문체가 오히려 답답하게 느껴졌다.

'와인의 눈물'은 평생 '사랑을 한 번도 완벽하게 소유해 본 적이 없는' 고독한 여자의 이야기다. 밤 늦은 사무실에서 홀로 서른 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여자의 황량한 내면 풍경을 담담하고 절제된 톤으로 안정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두 남자 사이에 허망하게 떠있을 뿐인 여자. 황폐한 현실을 막연한 기다림 만으로 견뎌내고자 하는, 상처받은 여주인공은 물론 특별히 새롭지는 않다. 그러나 섬세한 심리묘사를 바탕으로 소설 전체를 안정감 있게 끌고나간 만만찮은 저력에 점수를 주어, 한동안의 조율 끝에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앞날의 건투를 바란다.

◆ 심사위원=박범신.최원식.임철우(대표집필 임철우)

◆ 예심위원=구효서.김형경.박상우.우찬제.신경숙

사진=김성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