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 충주 문학기행(2)신경림과 한명희 시비
그 곳을 떠나 물어 물어서 찾아간 곳이 주덕읍사무소인데
그 곳에서 우리를 안내해 줄 충주의 문인을 만나기로 했기에 제일 먼저 그 곳에 들렸다. 참으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은 바로 민예총 충주지부장님인 '정제현'님과 민예총 회원인 '오태수'님 그리고 연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인 '허현화'님을 만난 후 였다. 광복절이라 바쁜 일이 많을 텐데 모든 것을 멀리하고 오직 우리들을 위해서 하루 시간을 내서 안내해 주셨는데 충주지역의 거의 모든 문학비와 문화유적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 문인들의 덕분이라고 생각을 한다.
읍사무소 뜰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들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한명희 노래비에 대해서 설명을 들었다.
비목의 작사자인 韓明熙교수는 1939년 충북 중원 출생으로 ROTC 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수색중대 DMZ 초소장으로
화천 북방의 백암산 즉, 평화의 댐을 지나 북한강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면 또하나의 지류인 금성천이 합류하는 지점이 있는데 이 일대의 고지들에서 군생활을 했다. 백암산 주변이 바로 비목이 잉태된 온상이었다고 한다.
비목
초연히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척은 애달파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바로 '비목'에 대한 노랫말에 얽힌 사연이 전해 오는데
1960년대 중반 평화의 댐에서 북쪽으로 14km 떨어진 백암산 계곡 비무장지대에 배속된 그는 잡초가 우거진 곳에서
무명용사의 녹슨 철모와 돌무덤 하나를 발견하였다. 한명희는 돌무덤의 주인이 전쟁 당시 자기 또래의 젊은이였을
것이라는 생각에 '비목'의 노랫말을 지었고 그 후 장일남이
곡을 붙여 1970년대 중반부터 가곡으로 널리 애창되었다고 한다. 우리들은 버스 안에서 그 노래를 함께 불렀었고
그 곳에서는 내내 그 노래를 읊조리고 있었다. 그 곳에서
기념촬영을 하였다.
'비목'의 작사가인데 아직 생전에 있지만 지역주민들의 한결같은 노력으로 읍사무소 앞에 비목 노래비가 서 있었다고 하니 참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을 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처럼 뱃속에서 터진 삼차대전의 불길을 끄는 방법은 또 다른 불을 놓는 것이라 생각되어
충주의 문인들의 안내를 받아 민물회 전문점인 'J가든'에
갔는데 그 곳에서의 맛있는 식사는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 없으리라 생각이 된다. '향어회'를 먹게 되었는데 처음 먹는 회원들이 있는 것 같아서 걱정이 되었는데
그것은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온갖 야채(오이, 깻잎, 상추, 양파, 양배추, 당근 그리고 나머지는 기억이 안남)와 콩가루 그리고 마늘과 향어 회를 넣은 후 초고추장으로 비벼먹었는데 맛이 정말 좋았다. 전에 동생이 충주에 살 때 한번 먹어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 꼭 한번 더
먹고싶었는데 참 잘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앞으로
충주에 가면 다시 한번 먹을 예정이다. 놀라운 것은 그 곳에서 소주 열병을 마셨다는 일인데 우리 문협 역사상 소주를 한 자리에서 그렇게 많이 마신 적은 없었답니다. 여 회원들도 향어회는 먹으면 먹을 수록 더 맛있다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향어회를 먹은 다음 나온 매운탕 역시
너무 맛이 있어서 위가 좁은 것을 탓해야만 했다.
식사를 마친 후에 3시에 그 곳을 출발해서 목계나루에 닿았는데 그 곳에서 신경림선생님의 시비를 만날 수 있었는데 끝없이 펼쳐지는 남한강에 빠진 회원들의 얼굴에선 일상을 털어 낸 흔적을 찾을 수 있었고 참 좋은 곳이라는 것을 모두 말하고 있었다. 그 시비는 충주시에서 세웠는데 처음에는 신경림 시인께서 심한 반대를 했다고 하니 그의 올
곳은 모습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의 시비를
세우는 일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씀을 했지만 충주시에서는
충주 아니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인인 신경림 선생님의
시비를 세워 널리 알리고 관광사업에도 도움을 준다고 말로 허락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건너편에 서 있는 솔밭은 데이트 코스가 되었는데 지금은 많이 없어지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설명을 듣고 그 곳이 배가 들어와 소금이나
해산물이 거래되어 전국에서 가장 많은 기생들이 머물었다는 얘기를 들으며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답니다
신경림 시인을 내가 만난 것은 참 우연한 일이었다. 한번은
내가 근무하는 직장에 들린 적이 있었는데 사모님께서 우리 학교에 근무한 적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1936년 4월 6일 충청북도 중원에서 태어났고 1960년 동국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후 1955∼1956년 《문학예술》에 이한직의 추천을 받아 시 《낮달》 《갈대》 《석상》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그의 작품세계는 주로 농촌 현실을 바탕으로 농민의 한과
울분을 노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론가 백낙청은 1973년 발표한 시집 《농무》의 발문에서 ‘민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받아 마땅한 문학’이라는 점에서 이 시집의 의의가 있다고 하였다. 이후부터 그는 우리 민족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는 농촌 현실을 바탕으로 민중들과 공감대를 이루려는 시도를 꾸준히 하고 있다. 1973년 제1회 만해문학상, 1981년 제8회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MBC 느낌표에 '시인을 찾아서'가 선정되어 많은 국민들이 읽고 감동을 받았다고 생각이 된다. 나도
그 책을 구입해서 읽어보았는데 정지용부터 천상병까지
22명의 시인의 삶과 시에 대해서 읽어보면서 그들의 문학과 삶에 대해서 단편적이지만 이해 할 수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의 시비는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 남한경 변에 세워져 있었는데 지방자치 단체에서 세운 것이라 하니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다음은 그 시비에서 만난 신경림 시인의
'목계장터'라는 시이다.
목계 장터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박가분 : 여자들의 화장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