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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도는 목포시에서 서북쪽으로 약 30㎞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지도와 임자도 그리고 자은도를 비롯하여 병풍도, 화도, 큰 기점, 작은 기점, 사옥도 등의 섬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섬 내의 최고봉은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200m 높이의 상정 봉이 있었으며 그밖에 대부분 지역은 100m 내외의 구릉지와 평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초리와 우전리, 대초도는 별개의 섬이었으나 1호방조제와 버지방조제, 그리고 태평염전이 개발되면서 연결되게 되었다.
해안은 곳곳에 소규모의 만과 곶이 많았으며 간석 지(개펄)가 발달해 있었다.
주민들의 대부분은 어업보다는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으며 연근해에서는 낙지나 민어, 송어, 숭어 등이 잡혀서 이지역의 높은 소득원이 되고 있었다.
또한 이 지역은 해제반도와 대교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아름다움은 경상남도 사천8경 중 하나로 불리는 창선삼천포대교와도 견줄 수 있을 만큼 주위 배경과 대교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대교를 걷다보면 파란 하늘이 유독 기분을 들뜨게 하였는데 바다를 사이에 두고 넓게 갯벌이 발달되어 있었으며 바다로부터 소금기가 짙은 갯바람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갈 때는 답답하였던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하였다.
그리고 이곳은 자연산 백합이나 굴, 꼬막 등의 집산지고 염전을 풀가동하고 있었으며 어느 지역보다 더 조용하고 아름다운 풍경과 운치가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러한 기분을 연장시키고 싶어서 대교를 승용차로 이동하지 않고 걸어가기로 하였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맞바람의 시원함을 가슴에 포용하며 걸어가고 있었는데 어디서부터 날아왔는지 갈매기 한 쌍이 사랑을 속삭이는 듯 고공에서 서로의 부리를 물고 하강하고 있었으며 갯벌에서 벌떡벌떡 뛰어다니며 장난을 치고 있던 짱뚱어 한 마리가 내가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보고 갑자기 눈을 부릅뜨더니 경계하는 표정을 하면서 돌발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하였던 이상한 외계인이 나타나 자신을 괴롭히며 협박하고 위협하지는 않을까하는 의심의 눈초리로 초롱초롱한 눈마울을 돌리더니 안전하다는 것을 확신하였던지 긴장되고 수축된 동작을 풀고 다시 친구들과 장난을 치고 있었다.
생명의 기원인 갯벌을 뒤로하고 도로를 따라 계속 걸어가고 있었는데 도로 오른쪽에 하얀 색깔로 단장된 독특한 모양의 집들이 눈에 띄었다.
염전은 여러 번 보아서 대충 알고는 있었으나 염전 옆에 들어선 건물의 용도가 궁금하였다.
태양의 뜨거운 해살은 받은 염전에서는 염부들이 바쁘게 일손을 놀리고 있었고 땀의 결실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느라 석양의 너울을 잊고 있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염전 주변이 깨끗하게 잘 정리 정돈되어 있었고 단장된 건물들이 늘어선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타 지역의 염전에 비하여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또한 주변은 휴지조각 하나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청결하였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섬이라는 조건을 최대한 극복해보려 노력하고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방문객들은 이곳을 놓치기 싫었던지 삼삼오오 걸어가면서 기웃거리기도 하고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나는 아름답게 단장되어있는 염전 주변의 건물들을 보고 필시 사람들이 거주하는 집일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너무 아름답게 단장되어있어서 펜션이나 모텔일 것이라고도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곳이 너무 비밀스럽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여 나도 모르게 발걸음은 그곳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건물 안을 바라보니 한 때 황금보다 더 귀했다고 하는 소금으로 가득 채워져있었다.
소금밭에서 갓 거둬들이는 소금은 햇볕에 반사되어 황금처럼 눈을 부시게 하였다.
소금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무기질 중 하나이며 음식의 맛을 돋우는 조미료로써 가장 오랫동안 이용되어 왔다.
인류가 소금을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000년 전 신석기시대로 보고 있다.
구석기시대나 신석기시대 유목민들은 가축의 젖이나 고기를 먹음으로써 그 속에 들어있는 소금 성분을 자연스럽게 섭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목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전이되면서 식생활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의 주식인 고기 대신 채소를 섭취함에 따라 소금을 별도로 섭취하여야 하였다.
또한 소금은 고대국가에서 종교의식의 중요한 제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변하지 않는 소금의 성질 때문에 계약을 맺거나 충성을 맹세하는 징표로 사용되는 등 여러 가지 사회적 필요성에 따라 널리 보급된에 따라 소금의 생산지인 해안이나 암염, 염호 등이 있던 장소는 수렵민이나 농경민이 모여들면서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점차 소금을 얻기 위한 국가 간의 교역로로 발달하게 되었다.
또한 중국, 이집트, 페르시아 등 여러 나라에서는 행정적으로 소금의 생산 및 공급을 정부에서 통제하였으며, 생활필수품인 소금을 화폐로도 사용하였는데, 로마에서는 군인이나 관리의 봉급을 소금으로 지급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소금을 생산하여 섭취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오래전부터 소금을 만들기 시작하였을 것이라는 추측만을 해볼 수 있을 뿐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려시대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 의하면 삼국시대부터 이미 소금이 있었으며 공물로 사용하였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삼국사기≫고구려 미천왕 조에 “왕이 젊었을 때 소금 장사를 하면서 망명생활을 하였다.”는 얘기가 나오는가 하면 “평양감사보다 소금장수”, “소금장수 사위 보았다.”는 속담 등으로 볼 때 소금이 얼마나 귀하게 여겨졌는지는 짐작이 가는 부문이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부터 소금을 국가에서 전매하였으나 우리나라에는 통일신라 때까지 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소금이 국가 재정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국가에 소금 생산권이 있었다.
또한 권세가들이나 사찰이 사적으로 염전을 소유하고 그 이익을 독점하기도 하였으나 고려 중엽 이후부터는 국가가 소금을 모두 관리하여 개인적으로 소금을 만들거나 비밀리에 무역하는 자가 없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바닷가에 인접한 주나 군마다 염전을 설치하고 관이 직접 관리하는 직영의 전매제도를 시행하였다.
소금은 인류가 이용해온 조미료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또한 음식의 기본적인 맛을 낼 뿐 아니라 단맛이나 신맛을 내는 감미료와는 달리 다른 물질과 대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일상 식생활의 조미료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증도 태평 염전을 뒤로하고 증도 내륙으로 이동하였다.
Slow City의 흔적을 여러 곳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Slow City란 공해 없는 자연 속에서 그 지역에서 생산된 음식을 먹고 그 지역의 문화를 공유하며 자유로운 원시시대의 여유 있는 생활로 돌아가 느림의 삶을 추구하고 실천해보자는 국제운동이다.
현대 사회는 자연 환경의 변화로 삶의 가치관이 변해가고 있으며 과학 기술 발전 등으로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어가고 있다.
고도의 산업화로 변화하여 직업이 세분화되고 문명화되어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것은 긍정적 측면이라 생각해 볼 수도 있겠으나 산업 시설의 자동화로 일자리를 잃어야하는 고통도 동시에 안아야 하였다.
이러한 변화의 속도는 21세기 현대사회에 들어서면서 더욱 가속화되고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더욱 빠르게 변해가는 사회의 물결에 동조하기 위하여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한해 한해를 보내야 하였다.
바뿐 생활의 일정이 반복되다보니 삶에 대한 여유를 잃어야 하였고 행복의 가치를 상실하여야 하였다.
뜻있는 인사들은 삶의 가치를 되찾고 행복의 가치를 회복해보자는 의미에서 세계 각처에서 Slow City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느림의 행동을 실천하기 위한 Slow City운동의 일환으로 주문을 하면 즉석에서 빨리 만들어 주는 패스트푸드 대신 국수 한 그릇을 식탁에 놓고서라도 담소하며 여유있는 시간을 보내며 행복의 가치를 찾아보자는 느리게 먹기 운동(Slow Food)이 이상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여유 있고 느리게 걷기 운동도 확대되면서 실천한 개념이 Slow City운동이었다.
2002년 7월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그레베의 시장으로 재직 중이었던 파울로사투르니씨가 마을 사람들과 세계를 향해 '느리게 살자'고 호소하면서부터 주위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얻게되었고 이것이 유럽 곳곳에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전 세계 10여 개국 93개 도시가 Slow City운동에 가입하였는데 아시아 지역은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전남 4곳(완도군 청산도, 신안군 증도, 담양군 창평면, 장흥군 유치면)이 슬로우 시티 국제연맹의 실사를 받아 2007년 12월 1일 Slow City운동에 동참하게 되었다.
완도군 청산도와 담양군 창평면, 장흥군 유치면 등은 내가 실제 여행을 다녀왔던 곳으로 여유 있게 천천히 음식을 먹어보기도 하고 느리게 트래킹을 해보면서 마을의 전통과 특색을 체험하기도 하였다.
이들 지역은 도시권과는 거리가 먼 지리적 오지이거나 낙후 지역이었다.
그러나 환경적으로는 아주 깨끗하고 청결하여 상쾌함을 주었으며 편안하고 행복감을 피부로 감지할 수도 있었다.
주민 모두가 아주 청결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하여 스스로가 솔선하고 있었으며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실제 이들 지역은 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Slow City 운동의 이념을 성실히 이행하고 있었으며 Slow City 운동을 통하여 지역 소득을 높여 경제를 살리고 있었다.
예컨대 연안지역은 김과 굴양식 사업을 벌여 가계소득을 올리고 있었으며 내륙지역은 산나물이나 버섯을 채취하여 판매함으로서 관광객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고 있었다.
이들 지역의 공통적인 특징은 끊임없이 마을의 전통과 특성을 찾아 개발하고 연구를 지속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이들 지역은 많은 변화를 거듭하고 있었으며 전혀 다른 방법으로 옛 모습을 재현하면서 사람들의 관심과 주의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지역들 중에서도 좀 더 역동적이고 저극적인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었던 지역이 있었는데 그곳은 바로 증도였다.
Slow City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통을 감내하여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성과 인내와 끈기로 실천운동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실패하고 마는 운동이었다.
실제 완도군 청산도 같은 경우는 섬이라는 악조건임에도 국제 Slow City 규정에 따라 둘레 길을 정비하고 주변을 청결하게 정리하여 많은 여행객들을 끌어들이는데 대체로 성공한 경우였다.
또한 영화 서편제를 촬영한 곳이기도 하여 유명세의 덕을 톡톡히 본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주민들의 자발적인 협조였다.
아무리 주민들의 헌신적인 봉사가 지속된다고 하더라도 볼거리가 없다면 한계에 다다를 것이다.
기왕이면 좀 더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 섬에서 오래 전부터 전래되어온 장례풍습을 상품화하였으면 하고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최근까지만 하여도 전통 장례풍습의 하나인 초분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한 초분은 우리나라 도서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례풍습으로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다가 불의의 사고로 자녀가 부모살아생전에 사망하였을 때는 부모님 먼저 땅속에 들어갈 수 없다는 풍습에 따라 땅속에 묻지 않은 채 밭 가장자리나 마을 어귀에 관을 놓고 솔가지로 덮어놓은 형태의 장례 풀습이었다.
나는 완도군 청산도를 방문하였을 때 밭 가장자리에 모셔져있는 초분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감정의 기복이 순간 복잡하였으나 청산도의 경제를 살리기 위한 최고의 이슈는 초분의 장례풍습을 복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시신이 안치되어 있지 않는 목관만이라도 마을 어귀나 산 어귀에 놓아둔다면 그 상품적 효과는 상상을 초월하리라 생각이 들었다.
옛날 장례 풍습인 초분의 장래풍습을 마을에서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재현하여 섬을 방문한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한다면 많은 도시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우리의 전통 장례풍습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의 세계적인 화장터 바라나시처럼 청산도 초분의 장례풍습을 재현하여 널리 소개한다면 많은 관광객들이 청산도를 찾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신안군 증도도 완도군 청산도와 마찬가지로 지리적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하여 바다와 갯벌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었다.
또한 섬 내의 환경 오염원을 원천적으로 제거하고 오염 요소들을 철저히 차단시키려는 민관의 노력이 현재 결실을 보이고 있었으며 그 결과 어느 지역보다 더 깨끗하고 청정한 자연 환경을 관광객들에게 자신 있게 제공하고 있었다.여기에 지역주민들의 헌신적인 협조와 지역사회 지도자들의 적극적인 홍보활동 등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나도 이러한 사실을 개인적으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증도 여행을 통해서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Slow City운동이 우리나라에서도 활성화된다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을 갖게 하였다.
다만 이러한 적극적인 사업이 전시적이고 한시적인 방법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실천 가능한 것부터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청정의 Slow City로 거듭 태어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 신안군 증도로 가려면 두 개의 다리를 건너야 하였다.
전남 무안의 해제반도에서 지도를 잇는 연륙교인 지도대교(660m)와 지도에서 증도를 잇는 증도대교가 그 것이었다.
몇 해 전까지만 하여도 증도를 가려면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무안읍에서 하차한 다음 다시 지도 행 버스를 갈아타야만 하는 무한 고통을 겪어야 하였으나 2010년 3월 말 개통된 1.9㎞의 증도대교 때문에 서울과 증도 사이를 3시간 40분대로 단축시켜놓았다.
공해가 없고 지천이 볼거리로 열려있는 공간, 증도의 아름다운 백사장이 자꾸만 나를 손짓하고 있었다.
또한 한반도 모양의 해송 림 속의 숲은 느림의 행복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걷다가 또 걸으면서 석양의 너울진 태양을 바라보다가 지치고 피곤하면 아무데서나 잠을 청할 수 있는 공간, 엘도라도 리조트를 찾아보리라 생각하고 증도를 방문하였다.
나는 역사가 재미있어서 역사를 전공하였다.
한때 한국의 미를 생각하다가 고려시대 상감청자의 색감에 매료되어 고려시대 대표적인 도요지 경기도 강화도와, 전라북도 부안, 전라남도 강진을 방문하였으나 도공이나 학예 사들의 일관되고 공통적인 주장이 많은 시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이 형상화한 상감청자의 비색을 재현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는 말을 하였을때 암울한 생각을 하며 현장을 돌아선 적이 있었다.
1976년 한 어부에 의하여 신안 증도 앞바다에서 중국 송·원대 해저유물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였으나 그 이후 한 번도 현장에 가본 적이 없었다.
여러 해가 지난 작금에서야 증도를 탐방하고 증도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감탄하고 말았다.
신안군 증도 앞바다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만큼 중국 송·원대 유물이 다량 발견된 곳이기도 하였다.
1976년 한 어부의 그물에 걸린 청자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리라고는 다들 상상하지도 못하였으나 계속해서 발견된 유물은 무려 2만3000점에 이르렀다.
방축리 도덕도 앞 송·원대 유물매장해역(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74호)은 600여 년간 바다 속에 고이 잠들어 있다가 중국 송·원대 도자기 등 23,024점의 유물들이 발굴되면서 국내는 물론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곳이었다.
도덕도 앞 해상은 목포에서 43km 떨어진 곳이었고 수심이 20~24m이며 조류가 세찬 지역이었다.
당시 이곳을 항해하던 중국의 선박들이 풍랑을 만나 침몰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침몰선박과 함께 주변에 흩어져 있었던 것을 1976년 인양해 냈는데 송·원대의 중국 도자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올레 길을 걷는다 생각하고 증도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관찰하려 하였는데 입간판에 붙어있는 설명들이 덕지덕지 떨어져서 흉물스럽게 보였다.
해저유물관에 전시되어 있어야 할 유물이 별로 볼만한 것이 없었고 내용이 너무 빈약하다는 말을 나는 수시로 들었던 터라 이러한 선입관을 가지고 이들 지역을 둘러보아서 그런지 유물 전시 내용이 빈약하다는 말이 헛소문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청정한 환경도 좋았지만 기왕이면 볼거리도 내실을 기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소문이 계속 확산된다면 지금까지 노력하였던 결실들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것은 증도를 너무 아끼고 사랑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관리인이나 자원봉사자를 상주시켜서 끊임없는 홍보와 사료를 근거로 역사적 사실을 발굴하게 하는 것이 증도를 개발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고 과거와 현재를 접목시켜 미래의 증도를 설계할 입간판으로 대체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증도 앞바다에서 발견된 중국 송·원대 유물은 내가 평소에 관심을 가졌던 분야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증도 앞바다는 고려의 대중국 교역로였다.
이 지역은 바람을 이용한 풍선의 왕래해역으로서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해역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으며 나의 추측이 맞다면 예성강 입구에서 흑산도를 거쳐 송나라의 양자강 하류의 남경을 경유하여 항주로 들어가는 교역로였을 것이다.
고려의 대송 교역은 육로로 사절단을 따라 북송시대 수도였던 개봉에 들어가 신학문을 받아들이고 물자의 교류를 통한 교역을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남송시대는 주로 해로를 통하여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려의 대표적인 대송 해상 교역로는 예성강 입구에서 옹진반도를 경유하여 중국의 산동 반도 등주로 가는 경우와 예성강 입구에서 흑산도를 거쳐 남경으로 가는 두 코스가 있었다.
북송시대는 전자의 교역로를 이용하는 것이 가능하였지만 남송시대는 주로 후자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증도 앞 바다에서 조금만 서쪽으로 이동하면 바람이 심해지고 풍랑이 높아져서 항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안전한 항해를 위하여 육지와 근접한 증도 앞바다를 경유하여 교역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바람이 불지 않거나 바다가 고요해지면 직선 코스의 교역로를 이용하여 왕래를 하였겠지만 바람이 불거나 풍랑이 높아져 항해를 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이 되었을 때는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좀 더 안전하고 쉽게 식량이나 식수를 공급 받을 수 있는 증도 앞 바다를 경유한 우회 항로를 이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증도 앞바다는 많은 선박들이 왕래하였던 중요 항로로 오늘날의 증기선과는 달리 바람을 이용한 풍선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풍랑으로 교역선이 침몰하거나 파손되어 가라앉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증도 앞 바다의 해저에서 중국의 송·원대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다고 하는 것은 고려나 송, 고려와 원나라 간의 대송 그리고 대원 교역이 활발한 지역이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예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중국 송·원대 해저유물을 관람하고 유적지를 관찰해보려는 것이 이번 증도 방문의 목적이었으나 시간의 흐름 때문이었는지 내가 생각하였던 것들이 빛이 바래서 실망이 컸다.
목표의 희석이 마음의 한곳을 아쉽게 하였으나 증도를 걷고 또 걸어보면서는 느림의 행복으로 대체해보리라 생각하였다.
짱뚱어다리를 건너 해송 숲을 거쳐 갯벌센터에 이르는 천년의 숲길을 걸었다.
갯벌과 연결된 우전해수욕장이 나타났다.
백사장 길이만도 4㎞가 넘는 우전해수욕장은 금빛 모래가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갯벌은 미네랄이 풍부한 게르마늄 성분이 함유되어 있어서 해수욕과 머드마사지를 겸할 수 있다고도 하였는데 보령의 머드축제가 생각나기도 하였다.
갯벌센터에서 대초리를 거쳐 화도를 한 바퀴 도는 갯벌공원 길은 증도를 상징할 만한 백미였으며 1.2㎞ 길이의 노두 길은 환상적이기도 하였다.
노두 길은 안좌도 천사의 다리를 방문하였을 때 걸었던 기억을 되살아나게 하였다.
노두란 갯벌 위에 돌을 놓아 사람들로 하여금 건널 수 있게 하였는데 밀물 때면 바닷물 속으로 사라지고 썰물 때면 드러나는 일종의 징검다리다.
노두 길에서 태양광발전소와 소금박물관을 거쳐 증도대교로 되돌아오는 ‘천일염 길’은 태평염전을 관통하고 있었다.
140만평 규모의 태평염전은 인공위성에서도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보여주고 있었으며 60여 채의 소금창고는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증도대교가 완공되기 전 철부선이 드나들었다는 버지선착장 주변의 갯벌에서 짱뚱어와 농게, 고둥 등이 눈에 많이 띄었다.
두
신경이 예민하다는 짱뚱어가 지느러미를 곤두세운 채 갯벌에서 펄떡펄떡 솟구쳐 뛰어다니고 있었는데도 소심한 농게는 갈매기의 날갯짓에 깜짝깜짝 놀라며 일제히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섬사람들에게 가장 귀중한 재산은 갯벌일 것이다.
수심 10~20m까지의 모래나 갯벌에서 서식하는 백합은 백가지의 색깔을 띄고 있다고 하여 백합이라 불리고 있었는데 전복에 버금가는 고급 어패류라고 하였다.
백합은 봄부터 가을까지가 제철이라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증도를 찾고 있는데 중도를 찾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백합을 맛보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증도의 명소 엘도라도 리조트로 가기전에 청정바다에서 건져 올린 멍게와 각종 채소를 함께 버무린 멍게 비빔밥 을 먹어보기로 하였다.
소주 한잔과 함께 먹었던 비빕밥은 환상적이었다.
입안에서 멍게 비빔밥이 씹히는 느낌은 약간 씁쓸하면서도 담백하여 미각을 자극하였다.
여기에 소주한잔이 금도상첨화가 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하였고 석양의 너울이 고향과 같은 포근함을 안겨주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