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트남을 다녀와서
기우현
2011년 1월 27일(목)부터 1월 31일(월)까지 3박 5일로 베트남을 다녀왔다. 크게 말해서 베트남을 다녀왔지만, 정확히 말하면 하노이, 짱안, 하롱베이를 다녀왔다. 이번 모임은 당곡고 부장 해외 연수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작년 당곡고 근무 시 중국 서안, 화산으로 이어지는 부장 해외 연수에 참여했다. 그 연수에서 재미와 보람을 느꼈다. 그래서 다음 해외연수 기회가 있으면 나도 참여하겠다고 여러 번 공언했다. 또 내 제안이 받아들여져서 이번 연수에 참여하게 되었다.
양승구 선생님이 전화로 이번 겨울 연수에 참여 의사를 물었을 때 나는 흔쾌히 참여한다고 했다. 다음 전화에서 여행 날짜가 1월 25일(화)부터 3박 5일이라고 했을 때도 그 날짜에 동의했다. 또 다음 전화에서 27일(목)로 연기한다고 했을 때, 무슨 사정이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날짜에도 동의했다. 그리고 이정희 선생님과 통화했다. 이번에 신청한 여행 사이트에 대해 여쭈어 보았다. 이 선생님이 이메일로 이번에 신청한 롯데 관광 사이트와 참석자 명단을 보내왔다.
사이트에 들어가 검색해보니, 이번 베트남 연수가 100만원의 적지 않은 경비에도 날짜는 3박 5일이고, 여행 지역도 제한적이고, 게다가 상품명도 ‘알뜰’로 되어 있었다. 여러 면에서 의아했지만 모든 이유가 성수기라는 특성 때문일 것으로 이해했다. 또 이번에 참여하는 당곡고 선생님은 오승모 교감 선생님, 양승구, 이혜성, 곽노일, 김종민, 이현철, 이한승, 이정희 선생님 8분이었다. 다른 선생님은 그간 친분으로 잘 알고 있지만, 오 교감 선생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그때는 잘 몰랐다. 다만 풍문으로 좋으신 분으로 알고 있었다. 당곡고에 부임하신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이렇게 해외 연수에 동참하시는 것으로 보아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이번 겨울 방학은 한파로 인해서 여행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서초고에서 필리핀 연수에 동참하겠느냐는 제의도 이번 연수 건으로 참여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간 여행을 제대로 하지 못한 아쉬움 반 아직 가보지 않은 베트남 연수에 대한 설렘 반으로 출발 날짜를 기다렸다.
1월 27일(목)
전번 서안 화산의 부장 연수 시 내가 공항에 꼴찌로 도착한 경험이 있어서 조금 이른 시간에 집에서 나섰다. 평일인데도 교통이 다소 혼잡했다. 그런데 인천 공항의 모임 장소에 가니 아무도 안 보였다. 작년과 반대 상황이었다. 내가 전달 받은 메시지가 잘못 되었나 다시 확인하고 있는데, 마침 이정희 선생님이 오셨다. 이정희 선생님과 이번 연수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잠시 기다리니 선생님들이 오시기 시작했다. 반갑게 악수했다. 교감 선생님께도 인사를 드렸다. 교감 선생님은 작년 용인에서 서울시 교육청 주관 연구부장 연수가 있을 때 독산고 연구부장 대리로 참석하셨다고 했다. 나의 흰 머리가 인상적이셨다며. 나는 그때 선생님의 얼굴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인연이란 이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발 시간은 7시 20분. 그때까지 아시아나의 카드를 만들었다. 구내에 들어서서는 쇼핑도 하고 요기도 했다. 김종민, 곽노일, 이정희 선생님과 함께 김밥을 먹었다. 양승구 선생님은 아디다스 선글라스를 구입하시느라고 뒤늦게 합류했다. 그 선글라스는 베트남 날씨가 햇볕이 나지 않고 추운 날씨 탓에 빛을 바랬다. 수면용 선글라스라고 여행 내내 선생님 입에서 오르내렸다. 나는 면세점에서 선물로 줄 담배 한 보루를 구입했다.
비행기 출발 시간이 20분 늦어져서 7시 40분에 탑승했다. 나는 기내에서 안사람이 부탁한 영양제와 안사람에게 줄 화장품을 구입했다. 서울에서 하노이까지 시차가 2시간이어서 시계 바늘을 앞으로 돌려놓았다. 10시 30분에 하노이의 ‘노이바이’ 공항에 도착했다. 4시간 50분간 비행한 것이다. 비행장 규모는 인천 공항에 비하면 지극히 협소하고 초라했다. 짐 찾는 곳이 두 군데뿐이었다. 당연히 짐 찾는데도 1시간이나 걸렸다. 다행히 휴대폰이 로밍이 되어서 집에 안부 전화를 했다.
출구로 나오니 11시 반. 한국 시간으로는 1시 반의 심야 시간이다. 현지 가이드인 박종성 부장을 만났다. 가이드는 지금 이 때가 설날이 가까워 진행상의 어려움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우리가 머물 숙소가 ‘닌빈’에 있는데 공항에서 차로 2시간을 타고 가야한다고 했다. 이러면 여행이 첫날부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 밖을 나오니 비가 내렸는지 길바닥이 축축하고, 예상 외로 추웠다. 베트남 하노이 날씨가 가을 날씨일 것이라고 생각해서 가을 옷을 준비했는데, 우리가 서울에서 입고 온 옷차림 그대로 입고 여행을 다녀도 될 것 같은 추위였다.
우리가 타는 차는 대형 버스가 아니었다. 국산 현대차인데 우리 탑승 인원에 맞는 크기의 승합차였다. 세차를 하지 않아서 더러워 보였다. 나는 가이드 뒤 맨 앞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앞좌석이 흔들림이 적고 차 밖 관광도 용이하다고 생각해서 그랬다. 앞에서 보니 심야여서 아무래도 도로에 차량은 적은데, 도로 사정도 썩 좋지 않고 트럭과 오토바이의 질주와 추월 때문에 운전하기에 어려움이 많아 보였다.
가이드는 우리나라 70년대 상황에 견주면서, 베트남 국민이 운전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 교통 상황이 열악하다고 말했다. 차는 하노이 시 신시가지 쪽으로 해서 ‘닌빈’으로 가고 있다. 신시가지 외곽을 지나가는 길은 그래도 괜찮았는데, ‘닌빈’으로 가는 길은 좁고 나빴다. 그러거나 말거나 뒤에 앉은 선생님들은 여행을 떠나는 즐거움을 만끽하시려는지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환담을 나누셨다. 사실 여행의 즐거움은 마음에 맞는 사람과의 사귐에도 뜻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나는 술을 안 마시는 편이어서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나는 선생님들의 대화 내용을 귓가로 들으며 볼 것 없는 밤 풍경을 응시했다. 그리고 가이드가 베트남에 대해서 몇 가지 설명하는 말에 귀 기울였다.
그러나 가이드는 달변가도 아니었고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전문가도 아니었다. 여행서에 나와 있는 상식적인 수준의 지식만 갖고 있을 뿐이었다. 간혹 해외여행을 하다 보면 선생님들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는 가이드를 만나게 될 때가 있다. 그러면 여행하는 기분이 언짢다. 그런데 이 가이드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 점만으로 만족해야 할 듯하다
들을 만한 내용은 이곳 날씨에 관한 것이었다. 이곳 날씨는 계절 변화가 뚜렷하다. 여름은 지극히 덥고 길다. 모기도 알이 터져 죽고 없다. 그래서 여름방학이 3달이나 된다. 봄, 가을은 기간이 짧으며 추운 날씨를 보인다. 겨울은 없으므로 겨울 방학은 없다고 했다. .
베트남에 내비게이션은 당연히 없고, 교통 표지판도 열악해서인지 운전기사가 우리가 숙박하는 호텔로 들어가는 길을 찾지 못했다. 길을 잘못 알고 미리 좁은 길로 들어갔다가 다시 후진해서 돌아 나왔다. 가이드는 이런 사실을 들어 선생님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듯 베트남 사람의 성격에 대해 말을 꺼내었다. 이 사람들이 순박하긴 하지만 성깔이 있어서 차 속에 쇠파이프를 가지고 다니기도 하고 불만을 함부로 토하면 불시에 뒷목을 치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을 면전에서 나무라기보다는 참고 있으면 제대로 일을 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고.
기사가 길을 모르는 것도 문제이긴 하다. 하지만 더 놀란 것은 대로변에 나와서 역주행하는 것이었다. 관광객을 상대로 운전하는 기사로서는 정말 상식 밖의 운전행태였다. 이번에는 제대로 길을 찾아 호텔에 들어섰다. ‘닌빈 레전드 호텔’. 새로 지은 건물이어서 깨끗하긴 하지만 논 가운데에 세워진 호텔이었다. 주변에 아무런 건물이 없었다. 1시 반이었다.
가이드가 방 배정을 하기 전에 여권을 전부 거두어 갔다.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으레 거두어 보관한다고 했다. 이것도 이해가 안 되었지만, 공산주의 국가라서 그런 것인가 했다. 그 여권은 출국하기 전에야 돌려받았다. 방 배정은 다음과 같이 했다. 이정희 선생님은 독실. 나머지 분은 두 분씩 한 실을 썼다. 이정희 선생님은 여행사와 교섭해서 독실 쓰는 차지는 내지 않았다고 했다. 교감과 이혜성, 양승구와 이현철, 곽노일과 김종민, 기우현과 이한승 선생님이 같은 실을 썼다. 사흘 내내 그렇게 투숙했다. 우리는 가이드와 9시에 현관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정희 선생님이 3일 동안 호텔 팁으로 쓰라고 3달러를 주고 갔다. 그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여성다운 섬세함이다. 밤이 너무 늦었기에 간단히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1월 28일(금)
날이 밝았다. 나는 7시 모닝콜이 울리기 전에 일어났다. 오히려 모닝콜을 기다렸다. 식당에 내려오니 내가 제일 먼저였다. 사흘 내내 그리했다. 방학 중 집에 있으면 마냥 늘어져 8시 넘어서 일어나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왜 내가 이번 여행 중에 그런 모습을 보이는가. 이한승 선생님은 내가 긴장해서 그렇다고 말했다. 나는 과연 그럴까 내심 동의하지 않았지만,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딱히 내 행동이 잘못되었다기보다 적당히 긴장하며 사는 것이 삶을 좀 더 탄력 있게 만든다는 뭐 그런 것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여럿이 같이 앉으려고 좀 넓은 테이블에 앉아서 식사했다. 메뉴가 풍성하지는 않지만 그런 대로 먹을 만했다. 선생님들이 어제 4시까지 술을 드셨다고 했다. 첫날부터 대단한 주량을 보이신다. 많은 선생님들이 베트남 국수를 드시는데 나는 조심스러워서 국수를 먹지 않고 밥, 돼지고기와 빵으로 식사를 마쳤다. 커피는 미지근하고 진했다.
나는 호실에 있는 귤 1개를 간식으로 가지고 나왔다. 9시에 현관에서 가이드를 기다렸다. 선생님들의 행동은 한결같았다. 규칙과 약속을 지키는 일에 익숙해져서 나온 행동들이다. 9시 20분에 출발했다. 어제 앉았던 자리는 가이드가 앉는 자리라고 해서 뒤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늘은 짱안으로 해서 하롱베이로 가는 일정이다. 그래서 먼저 옛 ‘쩐’왕조의 수도인 ‘짱안’으로 갔다. 가이드는 ‘짱안’을 ‘논 위의 하롱베이’, ‘육지 위의 하롱베이’로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비경이라고 소개한다. 가는 길에 논가에 있는 공동묘지도 보았고, 기기묘묘한 산들의 형세도 주의 깊게 감상했다.
한 시간이 걸려 ‘짱안’의 사원에 도착했다. 그런데 사원에 불상이 없는 것이 이상했다. 가이드가 지금은 배 탈 때 대기 장소나 집회의 장소로 쓴다고 했다. 여기서 전통적인 대나무 배인 ‘삼판 배’를 이용하여 2시간 정도 관광한다고 했다. 날씨는 싸늘해서 오랜 시간 바람을 쐬면 추울 것 같은 생각에 1시간이 어떻겠느냐고 이정희 선생님이 말했다. 그러나 가이드는 2시간 정도 다녀야 비경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승합차로 도로 가서 옷을 더 여며 입고 배를 탔다. 배 한 척당 3명씩 탔다. 우리 배는 김종민, 기우현, 곽노일 선생님, 다음 배는 이한승, 양승구, 이정희 선생님, 마지막 배는 이현철, 교감, 이혜성 선생님이 승선했다. 세 뱃사공은 다 여자였다. 수심이 깊은 곳은 키 이상 되는 곳도 있었으나 대부분 허리 정도 이하의 수심이어서 만일의 사태에 수영을 못 한다는 두려움은 없었다. 잔잔하고 맑은 물결, 수초가 깔린 모습이 꽃이 없어도 정결하고 아름다웠다. 물고기도 산다고 하나 눈에 띄지는 아니했다. 물 위를 스쳐 지나가다가 보니 저편에 새로운 사원이 나타났다. 가보고 싶었지만 뱃사공은 말 한 마디 아니하고 묵묵히 앞으로만 나아갔다. 그 사원을 지나서 수직 절벽 위에 사원인 듯한 건물도 보였다.
우리가 먼저 배를 탔지만 양 선생님이 탄 배가 앞서 가기도 했다. 곽노일 선생님이 꾸준히 노를 저어 뱃사공을 도와주기도 하고 속도를 내서 다시 추월하기도 했다. 김종민 선생님은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다. 수직절벽의 기암괴석도 절경이었지만 수중동굴 통과하면서 본 기암괴석과 느낀 약간의 스릴감은 우리를 더 즐겁게 해 주었다. 멀리서 수로동굴을 볼 때는 어떻게 들어갈 수 있나 싶어도 가까이 가면 다 배가 통과할 수 있는 동굴이었다. 그래도 경우에 따라서는 고개를 숙여야했고, 뺨을 스칠 정도로 가깝게 바위가 스쳐지나가는 때도 있었다. 김종민 선생님이 사진을 찍는데 정신을 쓰다 보면 자칫 다칠 위험이 있어서 나는 수차례 조심하시라는 말씀을 드려야 했다. 수중 동굴의 기암괴석도 좋았지만 우리가 다치지 않도록 배를 안전한 곳으로 모는 뱃사공의 솜씨도 훌륭했다. 첫 동굴을 통과할 때는 10분 이상 걸리지 않았나 생각했지만 시간을 재보니 7분 정도였다. 그렇게 통과하면 또 넓은 호수 같은 공간이 나오고 또 수로 동굴을 통과하게 된다. 이번에는 3분, 그 다음에는 2분. 그러더니 배가 돌아 나와 다서 첫 수로동굴로 나왔다.
쌀쌀했던 처음 날씨와 달리 잔잔하고 온화한 바람이 분다. 햇볕이 나지 않았지만 은은하게 흐린 날씨. 이런 날이 오히려 사진발이 잘 받는다고 김종민 선생님이 한 말씀하신다.
출발지에 가까워져 다소 아쉽다고 생각한 순간. 해프닝이 일어났다. 이혜성 선생님이 양승구 선생님이 탄 배에 호텔방에서 간식으로 가져온 귤을 드시라고 던져 주었다. 그런데 던진 거리가 짧아서 양승구 선생님이 그 귤을 잡으려고 몸을 반쯤 일으켜 팔을 뻗어 손을 내밀었다. 귤은 잡지 못하고 물에 빠뜨렸다. 문제는 바로 반대편에 이정희 선생님이 앉아 있었다. 순간 배가 균형을 잃으면서 배가 크게 흔들렸다. 다들 놀란 마음을 웃음으로 다스렸다. 간혹 가다 이런 해프닝이 삶에 재미를 더해 주긴 한다.
전체 1시간 20분간을 탔다. 그냥 ‘2시간을 타자고 할 것을’ 하는 아쉬운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마중 나와야 할 가이드가 안 보였다. 우리는 아무튼 수고한 뱃사공에게 팁을 주자고 했다. 그래서 공동경비로 이정희 선생님이 한 뱃사공 당 1달러씩 주었다.
나중에 나타난 가이드에게 개인당 뱃삯을 물어보니 8달러라고 했다. 뱃사공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뱃사공은 유공자 부인들로 국가로부터 최소 월급을 받지만 팁으로 생활한다고 했다. 그리고 뱃사공으로 활동하는 것도 생활에 보탬이 되어 서로 하려고 하고 추첨을 통해서 일을 하게 된다고 덧붙여 설명해 주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우리가 뱃사공에게 너무 팁을 적게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12시가 다 되어 하롱베이로 출발했다. 가는 길에 길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가이드가 베트남 건물이 도로가에 좁고 높은 건물 형태를 지니고 있는 이유를 설명했다. 베트남은 공산주의 국가라서 토지 분배를 똑같이 했다. 세금을 부과할 때 도로가에 접한 면적으로 세금을 부과했다. 베트남의 고온과 세금부과 방식, 그리고 조상 숭배의 신앙으로 제단을 모시는 관계로 그런 모습을 띠게 되었다. 주로 1층은 오토바이 주차나 부엌으로, 2층 3층의 한 방은 제단으로 쓰고 있다고 했다. 또한 여러 식구가 살고 있어 넓게 공간을 사용하는 편은 아니라고 했다.
전반적인 특성인데 집들이 길가에 따라 벌여져 있었다. 그들에게 길은 차만의 통행로가 아니었다. 그들의 생활로였다. 우기는 어떨지 모르지만 건기에는 지나가는 버스, 자동차, 트럭, 오토바이가 먼지를 일으키고 그 먼지를 사람이나 집들이 다 뒤집어쓰고 있다. 베트남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고 건물들이 꾀죄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땅이 넓고 많은 나라에서 이렇게 사람과 건물이 먼지 구덩이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인지. 이런 것은 국가의 정책이 만든 산물인데 좀 더 미래를 바라보고 국민들이 윤기 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비전 있는 지도자는 없는 것인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가다가 휴게소를 들렀다. 양승구 선생님이 특산품 과자를 사왔다. 포장 속에 또 포장이 되어 있다. 나는 이것이 초콜릿이 아닌가 싶었으나 콩가루가 들어있었다. 베트남 사람들이 즐겨 먹는다고 하는데, 이는 과자도 빵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 과자 이름을 빵과자로 붙여 버렸다.
이번에는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렀다. 이번에는 쌀국수가 주 메뉴. 국수치고는 돼지고기가 많이 올려 있다. 맛을 보니 괜찮았다. 베트남 국수가 향이 많이 나서 먹기 힘들 것이라는 거부감이 사라졌다. 선생님들이 식사 때마다 그랬지만 술 한 잔 했다. ‘하노이’라는 상표가 붙어 있는 베트남 술 2병을 시켜 마셨다. 도수는 29.5도였다.
길에는 어른들이나 학생들이나 오토바이,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경우는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탄 아이가 손 붙잡고 가는 경우도 보았다. 전반적으로 헬멧을 많이 쓰고 다니고 있었다. 법으로 그리 정했다고는 하지만, 잘 지켜주는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오토바이를 타지 않고 있다고 하더라도 모자를 쓰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날씨가 추운지 털모자 쓴 사람도 많이 보였다.
그리고 금귤 나무를 실어 나르는 오토바이도 많이 보였다. 베트남에는 새 해 선물로 금귤나무를 선물하는 풍습이 있다고 했다. 금귤의 색깔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발복해준다는 속신을 믿는 데서 나왔다고 한다. 선글라스를 파는 길거리 상인들도 있었고, 파인애플 등 과일을 파는 노변의 가게도 많았다. 일정에는 전통 농가를 방문한다는 옵션이 있는데, 가이드는 노변 가게에서 과일 사는 것으로 때웠다. 사실 이곳에 전통 농원이라고 볼 만한 곳도 보이지 않긴 했다. 우리는 상인이 ‘애플’이라고 쉽게 소개하는 과일과 파일애플 조각을 사서 나눠 먹었다. 가게에서 제공하는 차도 한 잔 얻어 마셨다.
하롱베이로 가는 길 옆 저 멀리 오른쪽에는 기기묘묘한 산도 많이 있었지만, 왼쪽 저편에는 한국의 산같이 편안한 능선을 보여주는 산들도 많이 있었다. 내가 오히려 후자 쪽을 더 많이 바라보게 되는 것은 역시 한국의 산하에서 자라온 국민이라서인가. 심정적으로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도 있었다. 채석 산업 때문이었다. 사업을 장려하는 입장에서 자연산하를 무작정 보존만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만 산 정상까지 심하게 깎아내린 곳이 여럿 보였다. 산이 허연 배를 드러내는 모습도 흉물스럽지만 온 산 자체가 깎여 나가거나 산 자체가 아예 없어지는 것도 있었다. 무슨 대책을 정부에서 세워줘야 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하롱베이에 도착했다. 일정대로 발 마사지하는 곳으로 들어갔다. 우선 겉옷을 벗고 팬티 위에 파자마 바지를 입으라고 했다. 나를 담당하고 있는 아가씨는 나에게 러닝셔츠도 벗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얼굴도 머리도 만진다. 나는 어제 샤워도 안했고, 머리도 안 감았는데, 속으로 더럽다고 했을 것 같다. 전체적으로 중국에서 받던 마사지 방법과 다른데 이곳의 안마사가 그다지 숙련되지 못했다는 것이 중평이었다.
여기서 해프닝이 일어났다. 다들 마사지를 끝내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데 교감 선생님이 파자마 바지를 입은 채 겉옷을 입으려고 했다. 그 모습의 어색함에 다들 웃음으로 그 순간을 넘겼다. 나중에 양승구 선생님이 고백을 했지만, 양승구 선생님은 그런 사실도 느끼지 못하고 겉옷을 입어버렸고 호텔에서 샤워하다가 알았다고 한다. 나이 들어가면서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할까. 나중에 그 집에서 바지 값 청구서가 날아 올 것이라고 한 마디씩 했다.
우리는 호텔에 들어가기 전에 야시장에 먼저 들렀다. 보통 야시장이라고 하면 밤에 여는 옷, 장신구, 과자, 과일, 고기 등 볼거리, 먹을거리가 많은 시장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곳은 시장을 오후에 연다는 점만 같을 뿐 보통 관광지에서 관광 상품들을 파는 시장이었다. 곽노일 선생님이 보석함을, 교감, 이정희 선생님이 컵받침을 사셨다. 그게 끝이었다. 눈요기만 했다.
시각은 어느 새 6시 40분. ‘하롱 드림 호텔’. 로비가 크고 최대 규모의 객실을 가진 대형호텔이다. 우리는 짐을 객실에 올려놓고 호텔 식당에 모였다. 놀랍게도 그 큰 식당에 우리 식구만이 있었다. 우리는 원탁의 테이블에 둘러 앉아 식사를 했다. 당연히 술도 마셨다. 교감 선생님이 교장 선생님 인사말을 대신 전달했다. 우리는 보드카 대병을 주문해서 마셨다. 식사 후 가이드가 합석했다.
이 자리에서도 안주 해프닝이 일어났다. 가이드가 우리 모임 분위기가 너무 좋고 술도 잘 드신다면서 홍일점 여 선생님도 참여하시고 무슨 모임이냐고 관심을 표했다. 이정희 선생님을 사모하는 모임이라는 ‘희사모’라는 말이 나왔다. 이정희 선생님은 이동희 선생님을 언급하면서 우리학교에 ‘희’가 두 사람이 있다고 대꾸하고. 분위기가 한층 업 되면서 술 한 병을 더 시켰다. 그런데 안주가 부족해서 가이드를 시켜 비프가스 안주를 주문했다. 가이드와 식당 지배인의 영어 대화가 우리가 듣기에도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된 듯했다. 서비스라는 개념도 우리와 베트남이 다르듯이. 가이드가 떠난 후 우리는 결국 비프가스 안주를 먹지도 못하고 서비스로 나온 안주 값을 우리가 다 치러야 했다. 직원들이 우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 일어섰다. 8시 20분이었다.
우리는 객실에 들어갔다가 다시 9시에 이정희 선생님 호실에 모였다. 나는 김종민 선생님이 나에게 맡겼던 소주를 가지고 갔다. 그런데 술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상점에서 사온 맥주와 안주가 풍성하게 쌓여 있었다. 나는 맥주 1캔을 마셨다. 나도 분위기에 쌓여 상당히 마신 것이다. 노는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는 것인가. 앞으로 학교에서 이루어질 한 주의 모임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리고 선생님 씹는 이야기가 재밌다. 그 이야기도 한 동안 마치 진지한 토의 자리처럼 오갔다. 11시 20분에 나는 이한승 선생님과 함께 우리 호실로 돌아왔다. 아시안게임 3위 다툼 축구경기를 중계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와 우즈베키스탄의 후반전 경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행히도 우리나라가 3대1로 이기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개인 돌파를 당해 1골을 먹어 3대2가 되었다. 그 점수를 끝까지 지켜 우리나라가 승리했다. 경기를 마친 후 우리나라 선수들이 환호하고 있다. ‘왕의 귀환’을 목표로 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가 3위라도 해서 다행이었다. 선수들은 은메달보다 동메달을 따는 것에 더 좋은 기분을 느낀다고 하지 않는가. 경기를 본 후 샤워하고 잠에 들었다.
1월 29일(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시간을 확인하려고 시계를 보니 죽어 있다. 전지가 나간 것이다. 휴대폰도 전원이 끊겨 있다. 기행문을 쓰려면 시간에 따른 일정이 중요한데, 이제 시간을 알 수 없게 되었으니 난감해졌다.
7 시에 문을 두드려 나가보니 김종민 선생님이 식권을 주신다. 우리는 준비하고 8시에 식사했다. 어제 묵은 호텔보다 음식물이 많았다.
오늘은 하롱베이에서 하루를 보내는 날이다. ‘하롱베이’는 베트남어로는 ‘하롱’, 한자로는 ‘下龍’에 영어로 만(灣)을 뜻하는 ‘베이(bay)’의 합성어다. 용이 내려온 자리라는 뜻이다. 옛날 외적의 침입으로 고통 받고 있을 때 용 부자가 하늘에서 내려와 적에게 여의주를 쏴서 침략을 막았으며, 그 여의주가 크고 작은 기암괴석으로 변해 그 뒤에도 외적의 침입을 막아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세계 8대 절경의 하나로 1994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며 영화 ‘인도차이나’의 주 촬영지이기도 하다.
오늘도 여기서 숙박하기에 간단한 차림으로 나섰다. 선글라스를 써 볼까 했는데 선글라스 나사가 어디 달아나고 없어 쓰지 못하겠다. 하는 수 없다. 날씨는 어제보다 온화해졌지만 혹시 바람이 불까 해서 어제 차림으로 나섰다.
오늘은 9시 30분에 만나는 날. 오늘도 선생님들이 먼저 나와 가이드를 기다렸다. 양승구 선생님께 휴대폰 이야기를 했더니 곽노일 선생님이 충전기를 가져 왔다며 내 휴대폰을 갖다 맡기는 친절을 베푸셨다.
우리는 차를 타고 가까운 선착장으로 갔다. ‘Enjoy the Trip'이라는 게시판이 보인다. 우리는 거기서 단체 및 개인 사진을 찍었다. 저 건너편에 크루즈 선착장이 보이는데, 교감 선생님이 거기까지 산책하자고 했다. 우리는 동의하고 걸었다. 아침에 몇 분은 반대편 쪽으로 산책했었다고 했다. 가이드가 나에게 어제 진행 상황을 물어 보았다. 자기도 우리가 비프가스를 못 먹고 안주 값을 새로 냈을 것이라는 짐작은 하고 있는 듯했다. 교감과도 대화를 나누었다. 서초고 교장과의 인연을 말씀해 주셨다.
크루즈 선착장에 수많은 배들이 떠 있었다. 우리는 입장권을 내고 들어갔다. 표를 보니 4만동으로 쓰여 있다, 참고로 2만동이 1달러다. 나중에 가이드가 설명해 주었지만 베트남이 통일 후 세 차례에 걸친 화폐개혁을 했다. 그 과정에서 돈의 단위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정치적 목적이었겠지만 인플레에 실패한 정책의 후유증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가 탄 배의 이름이 ‘Vinh Kanh18’이었다. 큰 배인데 관광객으로 우리만 타는 배여서 좋았다. 10시에 출발하는데 배에 사람이 올라와서 창가에서 새우 사라고 한다. 그 뒤에 또 노인이 올라오고, 아이도 올라와서 바나나와 파인애플을 사라고 한다. 조그만 배를 타고 다니면서 크루즈 배에 가깝게 붙이고 올라와서 장사하는 것이었다.
처음 도착한 곳은 ‘천궁 동굴’이 있는 섬이었다. 각국의 관광객이 한꺼번에 몰려 혼잡했다. 동굴 안의 길이는 짧지만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 동굴이었다. 가이드는 옛날 농부가 지나다가 굴러 떨어져서 발견한 동굴이라고 했다. 그 지점에서는 뚫린 공간에 하늘이 비쳤다. 전쟁 중 무기로 사용한 말뚝을 감춰두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다른 동굴은 개방하고 있지 않지만 이 동굴은 물이 떨어지지 않아 더 이상 진화하지 않는 마른동굴로 이 동굴만 관광객에게 개방한다고 말했다.
다시 승선했다. 배가 일명 ‘키스바위’로 향한다. 사진사가 우리말로 ‘뽀뽀바위’라고 말했는데, 그 말이 오히려 정겹다. 내가 보기에는 남자 쪽 바위가 털 많이 달린 강아지, 여자 쪽 바위가 볏과 꽁지가 있는 닭으로 보였다. 앞모습은 그럴 듯했는데 뒷모습은 앞모습보다 덜했다.
잔잔한 물결, 온화한 바람. 처음에는 흐린 물이었지만 물빛은 점점 비취색으로 바뀌었다. 3,000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그 기기묘묘함과 끝도 없이 둘러싼 섬들의 모습. 마치 거대한 호수 속에서 떠다니는 듯한 느낌. 모처럼 그림 같은 풍경을 보아서인지 절로 흐뭇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물론 사진에서 그 절경을 본 적은 있다. 그러나 선상에서 바람을 느끼며 이어지는 섬들의 합창을 듣는 흐뭇함은 영화 속의 어느 장면이나 심포니에서도 제대로 잡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 속에서 환담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교감 선생님이 이번 연수의 테마는 ‘여유와 웃음’이라고 한 마디 하셨다. 다들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가끔 2층에 올라가 절경도 구경하고 사진도 찍고 했다. 12시에 배가 수상가옥 앞에서 멈추었다. 나는 이한승 선생님과 2층에 있다가 수상가옥으로 내려왔다. 거기서 가둬 기르는 물고기, 조개들을 보고 있는데, 선생님들이 내려오시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승선했다. 가이드와 선생님들의 협상이 매듭지어가고 있었다. 다금바리 회, 스피드 보트 사용료 등의 가격 협상이었다. 우리는 다시 하선해서 4만동 그림에 나온다는 섬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고 올라왔다. 이정희 선생님이 앞으로 쓸 돈까지 계산해서 20달러 추가 경비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각자 20달러씩 추가 부담했다. 가이드는 아까 과일 팔던 아이들도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배에서 내려보니 과연 여기 저기 수상가옥이 모여 한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은행도 보이고. 여기에 학교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점심 식사가 시작되었다. 풍성하게 식탁이 차려졌다. 다금바리 회, 찐 게, 조개, 두부 김치, 매운탕, 밥, 그리고 넵 모이(Nep Moi) 술. 트로트 노래도 흘러나오고. 우리가 식사를 한다고 배는 거의 정지 상태다. 사진사도 음식 시중을 드는데, 다 이 배의 직원이나 다름없나 보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배가 출발한다. 이번에는 구명조끼를 입고 스피드 보트를 탔다. 그리고 이내 나룻배에 옮겨 탔다. 굴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입구처럼 짧은 굴이었다. 놀랍게도 그 안에 호수가 있었다. 그리고 절벽에 매달린 새끼 원숭이 떼. 그 원숭이들이 놀랍게도 수직 절벽도 잘 오르내린다. 사람 팔뚝만한 크기. 애완용으로 키우고 싶을 정도의 작은 원숭이들이었다. 우리는 바나나를 사서 던져 주었다. 가이드는 울림이 있다고 야호! 하고 외쳐 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나와서 스피드 보트로 갈아탔다.
이번에 내린 곳은 ‘다오 티톱(Dao TiTop)’ 섬이었다. 기념비도 세워 있었다. 가이드는 이 섬의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다오 티톱은 소련 첫 우주비행사 가가린 다음의 우주비행사다. 호치민이 소련에 방문해서 친분을 쌓은 분이다. 스탈린에게 물자 지원을 받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 비행사가 베트남을 방문하면서 이 섬에 들렀다. 그 비행사는 이 섬에 반해서 이 섬을 달라고 했다. 그렇지만 호치민이 이 섬은 인민의 것이라고 거절했다. 그 대신에 그 비행사의 이름을 붙여 주었다고 한다.
우리는 정상의 전망대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가파른 계단의 연속. 중간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니 꼭 우리나라 도담 삼봉 같은 섬도 보였다. 정상에 올라보니 사방에 둘러 싼 섬들. 섬들. 그리고 배들. 배들. 심심풀이로 떠 있는 배들을 세어 보니 25척이었다. 잠시 풍광을 즐기고 내려오다가 계단 수를 세어보니 350계단쯤 되었다. 다 내려와서 사탕수수, 옥수수를 사다 먹으며 쉬고 다시 크루즈 배에 승선했다. 오다가 보니 모래사장도 있었다. 이 섬이 규모가 컸더라면 휴양지로도 좋은 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귀항하는 길. 이번에는 아가씨들이 물건을 사달라고 한다. 관심을 가지고 쳐다보면 매달리다시피 한다. 나는 엽서와 붙이는 스티커 인형을 각각 1달러에 샀다. 팔찌는 4달러라고 해서 사지 않았다. 양승구 선생님은 안마기를 3달러를 주고 샀다. 내릴 때쯤 교감은 2달러에 샀다. 가격은 흥정하기 달린 듯. 아무튼 장사치들은 기회가 되면 장사하려고 달려든다. 그게 사는 방법이기도 하고.
4시 반에 하선했다. 6시간 크루즈 여행한 셈이다. 베트남 여행은 오늘 하루로 만족이었다. 내리니 아가씨들이 선상에서 찍은 사진 값을 달라고 한다. 한 장에 1달러씩 5달러를 주었다. 우리는 승합차를 타고 호텔로 왔다. 씻고 6시에 호텔에서 다시 만나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6시에 로비로 내려왔다. 이번에는 ‘토담식당’이라는 한국 식당. 약정대로 삼겹살을 먹었다. 된장찌개도 부탁해서 같이 식사했다. 양승구 선생님이 팩소주를 가져 오셨다. 우리는 그 소주를 마셨다. 베트남 여종업원이 시중들었다. 그런데 한국말을 잘하는 종업원도 있었다. 한국에 구직 신청을 했다고 한다. 모습은 한국 사람과 구별이 안 되었다. 교감 선생님은 박영한의 소설 ‘머나먼 송바강’을 읽고 소설 속의 베트남 여인 ‘딕 두이’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받았나 보다. 그 여인을 생각해서인지 그 종업원에게 1달러를 팁으로 주신다. 나는 형평성을 생각해서 다른 두 종업원에게도 1달러씩 주었다. 우리는 또 ‘넵모이’ 술을 시켰다. 이것은 책에서 소개된 대로 39.5도짜리다. 가이드가 또 술 한 병을 서비스하겠다고 한다. 술은 이제 그만 됐는데 서비스 하겠다는 것을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다. 그 술도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소주와 ‘넵모이’ 술 합쳐 이미 5잔째다. 나 스스로도 놀랄 만큼 술을 즐기는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는지 모른다.
이제 충분히 음식과 술로 배를 채웠다. 더 이상 조개구이 집으로 갈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카페에 내려달라고 했다. 우리는 분위기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져 오는데 신문지 같이 크다. 우리는 카페라테, 카푸치노, 아이스크림을 시켜 먹었다. 은은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김종민 선생님이 앰프에 관심을 가진다. ‘탄노이’라는 값비싼 앰프였다. 그런데 교감 선생님이 더 고가인 ‘메킨토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방과후 학교 일과에 테니스, 배드민턴, 댄스에 음악 감상까지 추가된다면서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서구 음악 기행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오고. 1시간 정도 환담한 후 우리는 해변 가를 걸었다. 그리고 야시장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눈요기에서 시작했다. 나는 팔찌 1개에 4달러 달라던 것을 여기서는 2개에 1달러를 주었다. 세상에 8배 차이가 난다. 나는 4개나 샀다. 아까 교감 선생님이 깎아 사던 안마기도 여기서는 반값이었다. 차츰 선생님들이 흥정에 재미를 붙였다. 그러면서 선생님들이 물건을 많이 샀다. 양승구 선생님은 10달러짜리 옷을 8달러에 샀다, 김종민 선생님은 45달러 달라던 목제 필통을 18달러에 샀다. 나도 재미 붙여 손거울, 등긁이를 샀다. 야시장에서 나와서 노점상에서도 샀다. 곽노일, 김종민 선생님은 커피와 커피 잔을 흥정해서 샀다. 나도 내려 먹는 커피 잔을 1달러에 샀다. 호텔로 돌아오니 9시 반이었다.
내일 귀국하니 오늘이 호텔에서 지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다시 이정희 선생님 호실에 모여서 평가회 겸 환담이 이루어졌다. 역시 주 메뉴는 술이었다. 오늘 밤에는 호주와 일본의 결승전 경기. 팽팽한 경기였다. 후반전이 끝날 때까지 0대0 무승부였다. 연장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호실에서 나왔다. 이미 12시를 넘긴 시각. 곽노일 호실에 들어가서 충전해달라고 맡긴 휴대폰 전지를 가지고 나왔다. 우리 호실에 와서 보니 1대0으로 일본이 이기고 있었다. 아시안 게임이니 호주보다 일본이 우승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너무 늦어서 간단히 씻고 잤다.
1월 30일(일)
오늘도 7시에 기상했다. 시간이 남아서 가방도 챙겨 놓고 그간 여정에 대해서도 메모를 했다. 8시에 식사를 했다. 이혜성 선생에게 어제 경기 결과를 물어보니 1대0으로 일본이 이겼다고 했다. 누가 넣었느냐고 물어보니 ‘리’라고 했다. 그러면 재일교포 3세인 귀화 선수 이충성이 넣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이번 아시안 게임이 멋진 데뷔 무대가 되었으리라.
오늘도 우리는 9시에 로비에서 기다렸다. 9시 20분에 출발했다. 오늘은 하롱베이에서 떠나 하노이로 간다. 하노이에서 관광하고 밤중에 비행기를 타고 귀국한다.
어제 하롱베이로 올 때는 호기심에 차창에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지만 지금 하노이로 가는 길은 아니다. 지루한 풍경의 연속일 뿐이었다. 풍경도 풍경이지만 어제 양 선생님 과음하신 듯. 선글라스가 수면안경으로 바뀌었다.
10시 50분에 휴게소에서 내렸다. ‘Stop Over'라는 휴게소인데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한다. 가이드는 무려 40분을 준다. 종업원은 베트남인인데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듯 손님은 온통 한국사람 뿐이었다. 화장실에 다녀온 뒤 상품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물품 가격을 비교하니 살 수가 없다. 야시장 가격과 비교해서 터무니없이 비싸다. 서비스로 주는 커피와 연잎 차만 마시고 나왔다. 나와서 이혜성 선생님 뒤따라 야외에 석조 조각상을 전시하는 곳으로 갔다. 예술품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상당히 세련된 기법의 다양한 조각상들이 많이 있었다. 부처님 상도 우리나라 부처님 상과 비슷하고. 이 조각상이 세계 각국에 팔리고 있는 듯 각국의 운임표가 큰 게시판에 쓰여 있었다. 한창 감상하고 있는데 선생님들이 승차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버스로 향하다가 다른 건물 안을 들여다보았다. 거기도 상품 판매하는 곳인데 손님은 한 분도 안 보인다. 아마 여행사와 계약을 맺지 않은 곳이거나 다른 나라 손님을 호객하는 상점인 듯했다.
다시 출발해서 하노이 시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구시가지쪽이다. 한강처럼 강도 보인다. 구시가지로 들어오니 교통 혼잡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가이드 말로는 설날에 가깝고 일요일인데도 이렇다면서 평일에는 더하다고 했다.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오토바이. 운전기사가 급브레이크를 밟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고가 나는 현장도 목격하기도 했다. 신기한 것은 운전기사가 욕 한 번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혹시 늘 있는 일이라서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꽃 시장 옆길을 지나갈 때는 길가에 주차하는 차가 많아서 길은 더 좁아지고 혼잡도는 더 심했다. 어제보다는 더운 날씨. 이게 우리가 생각한 베트남 날씨가 아닌가 싶은데 덥고 탁한 공기에 혼잡한 교통 문화를 대하다 보니 긴 버스 여행에 피곤도가 더 심해졌다.
1시 10분에 ‘SEN'이라는 뷔페에 왔다. 하노이에서는 규모가 큰 뷔페식당이라고 한다. 1시간 정도 식사를 했다. 오전에 한 일이라고는 약 4시간 차 타고 온 것밖에 없다. 그리 식욕도 나지 않았지만 이것저것 챙겨 먹었다.
우리는 나와서 약정대로 시클로 타는 곳으로 갔다. 가이드는 팁으로 2달러를 주라고 했는데 그게 팁이 아니라 요금이 아닌가 생각했다. 혼잡 도로에 볼 만한 풍경도 없고 공기는 혼탁하고. 한적한 호숫가에서 여유와 운치를 느끼며 여유를 누릴 수 있겠다는 기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시클로 기사들의 생계를 위해서, 그냥 기념으로 한 번 타 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30분 탔는데, 의자에 앉았다가 그냥 선 기분이었다. 2달러를 주었지만 고마워하는 기색이 한 점도 없는 것으로 보아 그런 생각이 더 들었다. 출발할 때 어떤 사내 녀석이 사진을 찍으려고 한다. 그래서 찍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내릴 때 사진을 내민다. 사진 값으로 1달러를 주었다.
차는 ‘되돌려 준 칼의 호수’로 유명한 ‘호암끼엔 호수’를 돌아서 호치민 광장으로 왔다. 3시 반이었다. 가이드가 대나무로 엮은 베트남 모자 ‘논’을 한 개씩 배부했다. ‘논’도 남녀용이 달랐다. 여자용은 가파르게 내려오고, 남자용은 상투처럼 한 번 구부러진 후 내려오는 모습이었다. 나중에 이 모자는 농장을 한다는 양승구, 이한승 선생님에게 몰아주었다.
호치민 묘에는 시신이 방부제 처리가 되어 전시되어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러시아에서 방부제 처리하느라고 없다고 한다. 그래서 들어가지 못했다. 우리는 주석궁에 있는 호치민 유적지에 갔다. 먼저 예전에 프랑스 인도차이나 총독부 건물이었던 주석부 건물을 보고, 다음에 생전에 호치민이 탔던 차 (‘푸조’ 등 3대)를 전시한 전시관을 보고, 마지막으로 호치민이 15년 동안(1958-1969) 거주하며 집무했던 2층 건물의 내부를 돌아보았다. 간단한 집기와 침대 모습에서 검소했던 호치민의 면모가 보였다.
그리고 일주사(一株寺)로 불리는 불교 사찰로 갔다. 하나의 커다란 기둥 위에 세워진 절인데 국보 제1호라고 한다. 우리나라 암자의 작은 전각 같은데 네모 난 호수 위에 세워져 있다. 물 위로 떠오르는 연꽃 모습이다. 이 절은 리 타이 통 왕이 태몽을 꾸고 기념으로 만들 절(1049년)이라고 한다. 프랑스 군이 패퇴하면서 불을 질러 목조 기둥이 지금은 시멘트 기둥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문제는 왜 국보인데 원형대로 복구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국력의 수준인지 기술의 문제인지 문화 수준이 낮아서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 계단에 올라가서 안을 들여다보니 천수관음보살이 꽃으로 둘러싸인 화려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가이드는 더 둘러보라고 하였지만 특별히 볼 것이 없어 바로 나왔다.
이번에는 베트남 수상 인형극 극장으로 갔다. 베트남의 대표적인 공연으로 물이 고인 무대 뒤에서 인형을 조정하는 연극이다. 여행사마다 이 공연은 다 보게 되어 있는데 좁은 주차장에 한국 여행객으로 가득 찼다.
연극은 5시에서 5시 50분까지 50분간 공연한다. 무대 왼쪽에는 연주자가 등장해서 연주한다. 주무대인 공연장은 흐린 물로 채워져 있다. 그 뒤로는 인형이 나오고 들어가는 대나무 천막이 쳐 있다. 전체 무대 배경은 집 형상을 취하고 있다.
극의 순서는 대체로 어릿광대가 나오고, 불과 물을 뿜어내는 용이 등장하고, 물고기들이 신나게 놀고, 물 위에서 꼬마들이 즐겁게 놀고, 어릿광대가 고기 잡느라고 애쓰고, 각 인형들이 악기를 하나씩 들고 나와 연주하고, 선녀들이 춤추는 그런 내용이다. 마지막에는 인형을 조종한 연기자들이 인사하는 것으로 끝맺었다.
이 수상인형극은 베트남의 홍강 평야지대에서 유래된 독특한 민간전통예술이다. 베트남 농민의 실제 생활모습을 반영하고 있으며 궁정에 들어가 왕의 장수 잔치에서 연주된 바 있다고 한다.
인형극을 보고 나온 뒤 선생님들은 이 인형극이 인형 조종 기술은 그렇다치고 줄거리도 없고 볼만한 내용도 없다고 불평했다. 나도 이 인형극을 보면서 그냥 기대 수준을 낮추어 어린이들이 보았다면 흥미가 있었겠다. 그리고 베트남 당국도 이를 국가예술로 발전시키려면 전통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스토리가 있는 극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저녁 식사하러 갔다. ‘대장금’이라는 샤브샤브 전문의 한국 식당이다. 그런데 김종민 선생님이 식사를 하지 않겠다고 한다. 점심 때 체하셨느냐고 물었는데 점심때도 안 좋았는데 억지로 드셨다고 한다. 아마도 주체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김종민 선생님은 차에 남아 계시고 우리만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후 가이드는 집에 일이 있어서 가야한다고 했다. 상식적으로 가이드의 행위가 이해가 안 되지마는 여기 현지가이드가 대신 공항에서 티케팅을 해 준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가이드와 작별 인사를 하고 공항으로 갔다.
공항에 7시 반에 도착했다. 비행기는 11시 20분에 출발한다. 우리는 원래 옵션에 라텍스 등 쇼핑센터를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가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었다. 그래서 특별한 일정 없다. 그냥 공항 대기실에서 대기했다. 그냥 있기 무료해서 커피를 마시자고 했고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었다. 8시 반에 가이드에게 여권을 돌려받고 짐을 부쳤다. 그리고 현지 가이드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검색대에서 인천 공항에서 나올 때는 등산화를 벗으라고 했는데 여기는 그냥 통과했다. 면세점에서 다시 쇼핑했다. 나는 다시 선물로 줄 담배 1보루와 초콜릿 2개를 샀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는다. 선생님들은 책을 보거나 대화를 나누었다. 드디어 귀국하는 비행기를 탔다. 이번에는 지연 출발하지 않았다.
김종민 선생님은 여전히 속이 좋지 않은 듯. 승무원에게 약을 달라고 해서 드시고 식사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기내에서 아내에게 줄 영양크림 1개를 샀다. 시계 바늘을 2시간 앞으로 당겨 놓았다. 예정 도착 시각인 5시 20분에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역시 인천 공항은 세계적인 공항이다. 규모가 다르다. 통행로 벽에 붙여 있는 우리나라 풍경사진도 아름답다. 설악산, 다도해, 불국사 등. 여권 심사를 마치고 나오니 19번에서 짐 찾으라는 신호가 떴다. 우리나라는 짐 찾는데 몇 분이나 걸리나 보았더니 하노이 공항의 절반인 30분 걸렸다.
짐 찾은 뒤 출국장에서 모임을 잠시 가졌다. 기내에서 식사한 지도 얼마 안 되고 김종민 선생님도 식사할 수 없다. 그래서 공항에서 식사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일부는 집에 가기로 하고 일부는 서울에 가서 해장국하고 헤어지기로 했다. 나는 곽노일 선생님과 집으로 가는 리무진을 탔다.
이번 베트남 연수가 사실상 3일의 코스였지만 재미있었고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이정희 선생님이 여 선생님으로 혼자 오시고 총무로서 애를 많이 쓰셨다. 선생님들은 이번 연수가 한편으로 재미있었고 또 한편으로 베트남 일부만 여행해서 아쉬웠던지, 다음 여행에는 호치민 시로 해서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여행을 생각해 보자고 했었다. 나는 시간만 맞으면 참여하겠다고 했다. 하롱베이만 온다면 다시 베트남에 가족을 데리고 다시 오고 싶다고 생각했다.
차는 공항 길을 미끄러지듯 달린다. 안전벨트를 매었지만, 더 이상 하노이 같이 교통 불안에 머리 아프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나는 새벽 풍경을 평화로운 눈으로 새 풍경을 쳐다보듯 바라보았다. (2011. 2.1)
첫댓글 신기한 베트남 여행기 잘 읽었습니다. 세부적으로 잘 소개해주셔서 마치 제가 여행을 다니는 듯 하였습니다. 노고많으셨습니다^^*
다시 읽어 보니 오자도 있고 하노이를 착각해서 사이공으로 쓴 곳이 있었네요. 퇴고해서 다시 실었습니다. 상세하게 쓴다고 했지만 너무 자질구레한 일도 쓴 것 같군요.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보람있는 여행을 하셨군요, 아침 기상은 산행 때와 같이 부지런하시고, 옛 동료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어 더욱 보람있는 여행이 되었군요,김석 선생님 이름이 없는 건 금강산 유점사에 도 닦으러 가신 모양인데 다음에 만나면 모든 추억들이 기대됩니다.,
개인적으로도 메일을 보냈는데 카페 글이 더 퇴고된 글입니다. 방학 중 한번도 만나뵙지도 못하고 아쉽게 개학이 임박했군요. 새해에도 복되고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마다 잘 되기 바랍니다. 근간에 한번 만나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