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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 산치오(Raphael Sanzio, 1483~1520) / School of Athens(Scuola di Atene)
Apostolic Palace, Vatican City (500 cm × 770 cm)
라파엘로 사그라다 파밀리아 라파엘로 Raphael Sanzio 아테네 학당 Scuola di Atene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성질은 독특하였다지만 예술에 대한 관심은 커 성 베드로성당 건축가 브라멘테의 추천으로 잘 생기고 영리하고 성격 좋고 그림도 잘그리는 라파엘로를 총애한다. 그래서 2층 집무실 4개의 방 벽화 모두 나이 스물 여섯 밖에 안 된 라파엘로에게 맡긴다. 아테네 학당은 네 개의 방 중에 서명의 방에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다. 서명의 방에는 예술 신학 법학 철학을 주제로 네개의 벽화가 그려졌다. 라파엘로는 철학이라는 주제에 고대 헬라지방의 유명한 철학자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등 각 분야에서 유명한 54명의 과학자들을 담았다. 그림 속의 왼쪽 벽면에는 시와 예술의 신 아풀로 오른쪽 벽면에는 지혜의 여신 아테네를 새겨 이성과 지혜에 대한 신성을 드러낸다. 라파엘로의 명화 '아테네 학당' 정중앙에는 이데아를 상징한 보라색 옷과 붉은색 망토를 두른 플라톤이 한 손은 하늘을 가르키고 다른 한 손은 자기가 쓴 티마이오스 책을 들고 있다. 오른쪽에는 땅의 색깔을 상징하듯 갈색 옷에 푸른 외투른 두른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윤리학을 들고 이상세계보다 현실세계를 중시하여 땅을 가르키고 있다. 이 둘은 철학사의 쌍두마차로 플라톤은 형이상학적 이데아를 지향한 분으로 플라톤의 얼굴에는 자신이 배우고 가장 존경했던 레오나르도다빈치의 얼굴을 그려넣었다. 우측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으로서 아토스 아레테, 지적인 탁월성과 보이는 현상계를 다룬 현실 철학을 강조했다. 라파엘로가 플라톤을 정 중앙에 배치한 것은 그가 플라톤의 사상을 동경했음을 시사한다. 플라톤의 왼쪽에는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사람들 앞에서 물음을 던지고 답을 내라고 응에처럼 달라붙어 있으며 그 아래에는 신플라톤주의를 설계한 알렉산드리아 최고의 여성수학자 천문학자 히파티아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스케치 단계에서는 히파티아를 정 중앙에 배치했으나 그림에서 여자를 지우라는 요청이 밀려들었고 결국 라파엘로는 히파티아를 측면으로 옮겨 그렸다고 한다. 얼굴만 보이는 그리스 철학자 ' 고르기아스', 스스로 소피스트 학파로 여기지 않았으나 언어의 힘과 인간 사유가 상대적이고 불완전하다하여 소피스트 학파로 분류된다. 상체를 벗고있는 '디아고라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철학자로 최초의 무신론자로 알려져있다. 빨간 모자를 쓴 '크리티아스', 고대 아테네의 정치가·철학자. 플라톤의 친척이자 소크라테스의 제자. 30인 참주의 장이 되어 공포 정치를 행하다가 8개월만에 타도되었다. 누군가를 부르는 '아이스키네스', 고대그리스의 정치가 겸 웅변가로 아케도니아파의 우두머리. 소크라테스의 열성적인 제자이며 그의 재판과 임종도 함께했다. 투구를 쓴 '알키비아데스',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아테네의 영광과 오욕의 시기를 온몸으로 살았던 그는 아테네 시민의 사랑과 질시, 원망을 한 몸에 받았던 군인 겸 정치가. 알키비아데스 뒤의 작은 '크세노폰', 그리스 역사가로 소크라테스의 제자였지만 그의 진리를 이해하진 못했다.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한 <아나바시스>로 유명하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흘려듣는 '알렉산더대왕' , 마케도니아의 정복대왕. 완두콩색 옷을 입고 설명 중인 '소크라테스', 기원전 5세기 경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너 자신을 알라. 서양 철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악법도 법이다는 말은 무얼까? 이렇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게 낫다는 말이지 않을까? 죽음을 향한 대 항해가. 소크라테스! 하얀 하의를 입은 '크세노크라테스', 플라톤의 애제자로 존재론에 심취했다. 플라톤의 손가락 아래에 '사포' , 고대 그리스의 여류시인 사포다. 플라톤은 사포를 10번째 뮤즈(예술을 관장하는 9명의 신)라 불러야 한다고 했다. 황금색 옷을 입은 '테오프라스토스' , 그리스의 철학자 ·과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배웠다. 식물학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빨간 옷을 입은 사람 뒤에서 머리만 보이는 '아리스티포스' , 그리스의 소피스트계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며 소크라테스 학파의 하나인 퀴레네학파의 창시자이다. 팔짱을 낀 '플로티노스' , 유럽 고대 말기를 대표하는 그리스의 철학자 · 신비사상가. 신플라톤주의의 대표다. 초록모자를 쓴 '제논', 그리스의 철학자로 파르메니데스의 가르침을 이어 "존재자는 하나다"라는 설을 주장했다. 월계관을 쓴 '에피쿠로스', 육체의 쾌락을 정신적 쾌락보다 중시한 그리스 철학자 겸 유물론자. 흰 터번을 쓴 '아베로에즈', 이슬람 학자로 인간의 영혼을 인식하는 가능 오성에 대한 주장이 가장 유명하다. 구부린 '아낙시만드로스', 밀레토스학파의 유물론 철학자로 탈레스의 제자라고 알려져있다. 천문학의 연구로도 유명하며 천구의를 만들었다고 한다. 책을 든 '피타고라스', 그리스의 종교가, 정치가, 수학자, 철학자. 만물의 근원을 수로 보았다. 두말할 필요없이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유명하다. 피타고라스를 쳐다보는 '아낙사고라스', 그리스의 식민지인 소아시아 클라조메나이의 사람이다. 천체 현상을 비롯한 세상만물을 자연적 방법으로 이해하려했다. 짝다리를 집은 '파르메니데스', 고대그리스의 철학자. 엘레아 학파의 시조. 존재론 및 인식론에 영향을 주었다. 턱을 괸 '헤라클레이토스' , 고대 그리스에서 변증법 사상을 가장 잘 표현한 철학자. 에페소스의 귀족 출신으로 피타고라스학파와 대립하였다. 미켈란젤로를 모델로 그렸다. 비스듬히 누운 '디오게네스' , 시대의 기인이자 석학. 자신을 찾아온 알렉산더 대왕에게 “당신 때문에 햇볕이 들어오지 않으니 비켜서달라”고 말했던 일화가 유명하다. 컴퍼스를 돌리며 설명하는 기하학의 '유클리드', 그리스 수학자. '유클리드의 기하학'으로 유명하다. 천구를 손에 들고있는 '조로아스터(짜라투스트라)' , '아후라 마즈다'라는 최고신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으며,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가 되었다. 노란옷을 입고 천구를 든 '프톨레마이오스' , 2세기 중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그리스의 천문학자로서 천동설의 완성자이다. 흰 옷에 힌 모자 '소도마',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시대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페루지노, 라파엘로의 영향을 받았다. 관객들을 쳐다보는 '라파엘로' , 내가 과연 이 천재들 사이에 껴도 되는가 또는 오만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작품의 화가 라파엘로 그 옆에 턱을 괴고 있는 사람은 '만물은 유전한다.', '같은 강물에 발을 두번 담글 수 없다' 고 외친 헤라클레이토스가 고독 속에 홀로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얼굴은 라파엘로가 싫어한 미켈란젤로의 얼굴이다. 아무리 그를 싫어해도 미켈란젤로의 위대함을 제외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켈란젤로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듯 그를 외톨이로 그려 넣은 헤라클레이토스 말고 혼자 계단에서 만사 귀챦은 듯 널부러져 있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에게 햇빛을 가린다고 비키라고 했던 자유로운 영혼 디오게네스다. 그리고 바닥에 학생들을 데리고 뭔가 도형을 그리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그리스 수학자 유클리드(에우클레이토스). 유클리드의 얼굴은 자신을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소개해준 브라만테다. 라파엘로 자신의 얼굴 역시 그림의 서명 대신 자신의 얼굴을 삽입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이 외에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프톨레마이오스 제논 에피쿠루스 알렉산더대왕 아라비아의 수학자 이븐 루시드 플로티누스 조르아스터(짜라투스트라) 아낙사고라스 파르메니데스 아낙시만드러스 알키비아데스 안티스테네스 심지어 자기자신 까지 사내로 장식하는데 유일하게 이 그림에 등장하는 여성이 있으니 이는 여성 수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인 철학자 종교가 기피하여 과학의 종언을 알리고 죽음으로 이끈 히파티아 (Hypatia) 그녀는 신플라톤주의를 완성했으며 물리학에서는 비중이 다른 두 액체의 비중을 측정할 때 쓰는 하이드로미터와 수중투시경 하이드로스코프를 개발했다. 천문학에도 뛰어난 재능를 발휘 프톨레이마오스의 저서 알마게스트의 주석서를 썼다. 그녀는 아카데미아의 뛰어난 교수로 그녀가 강의하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아카데미아에는 과학자 수학 철학자를 비롯 일반 대중들로 넘쳤으며, 그리스 로마에서까지 그녀의 강의를 듣기위하여 여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고 로마의 알레산드리아 총독 오레스테스마저 그녀의 열렬한팬이었다. 더욱이 그년는 제자들로부터 플라톤의 두뇌와 아프로디테의 몸을 가진 사람이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이에 그녀를 향한 연모와 구혼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녀는 "나는 진리와 결혼하였다."고 청혼을 거절하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로마제국에 기독교 국수주의가 팽배하여 오직 예수와 창조론 외에는과학과 자연철학을 배척했고 급기야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키릴루스(370~444)는 광신도들을 선동하여 일신론에 관심없고 과학적으로 뛰어난 히파티아를 습격하기에 이른다. 415년 4월 당시 아카데미아에서 강의를 마치고 귀가하던 히파티아를 습격했다. 그녀는 심한 폭행을 당한 후 옷이 찢겨진 채 거의 나체로 알레산드리아 케라레움 교회로 끌려와 오스트라코이스(Ostrakois)라는날카로운 굴껍질 도구로 고문을 당했다. 오스트라코이스는 생굴의 껍집로 기독교인들은 날카롭게 잘려진 굴 껍질로 히파티아의 피부를 도려내었고 결국 이로 인하여 그녀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게다가 그들은 시신의 뼈와 살을 발라 수 킬로 먼 키나론까지 뿌리고 다녔고 나머지는 그곳에서 불태웠다. 이후 그년의 제자들과 과학자들은 학문의 자유를 억압하는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아테네 로마로 옮겨갔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아래 번성했던 알렉산드리아 대 도서관과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쇠퇴하고 만다. 종교가 이성을 지배했던 중세 암흑기 전주곡를 울린 것이다, 중세 마녀사냥의 악행이 이곳 히파티아가 죽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했다. 히파티아의 죽음은 자유로웠던 고대 학문의 꽃이 지고, 중세 암흑시대의 도래를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찰스 윌리엄 미첼, 〈히파티아〉, (1885년, 영국 뉴캐슬의 라잉 아트 갤러리)은 편협한 종교의 공격을 받아 채 피우지 못한 사상과 여성의 자유를 훗날 자신의 죽음을 발판으로 되살리게 된다. 그녀의 삶은 ‘가장 아름답고 순결하며, 탁월한 지성을 갖춘 여성’으로 인정받았으며, 페미니스트 철학계에서도 그녀의 이름이 다양한 방식으로 부활하고 있다. 여성이 인간 대접도 받지 못하던 시대에 역사에 이름을 새길 정도라면 그의 위치와 능력이 어느 정도일지는 짐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어서 서양사에서도 여성의 이름은 세기를 통틀어 고작 한두 명 정도 밖에는 언급되지 않는다.그 가운데서도 남성의 곁에서 활동한 인물이 아니라 독자적인 활동으로 이름을 남기고 있는여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 드문 여성 가운데 하나가 히파티아(Hypatia)다. 400년 무렵, 그러니까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된 후에 활동한 히파티아는 최초의 여성 수학자라고 할 만하다. 그의 부친인 테온은 수학자이자 철학자로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에 주석서를 붙일 정도. 히파티아는 개화된 부친 덕분에 철학자이자 수학자로 성장하게 된다. 그런데 고작 40여 년을 살다 간 그녀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 상황을 알아야 한다. 그무렵 로마제국에서는 철학과 기독교 사이에 갈등이 지속되고 있었다. 철학이 단순히 형이상학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이라는 신앙이 담당해야 할 분야에까지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학적이고 이교적인 신플라톤주의에 기울어 있는 히파티아 같은 철학자들은 기독교인들과 갈등을 조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편 수학과 철학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히파티아는 그 무렵 무세이온이 설립되어 학문의중심지로서 톡톡히 역할을 하고 있던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손꼽히는 학자였다. 그가 무세이온에서 수학 강의를 하는 날이면 온 귀족들의 마차가 무세이온을 향했고, 길에서 히파티아를 만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 젊고 아리따운 여성에게 고개를 숙여 존경을 표했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미모가 워낙 뛰어나 여러 사람의 구혼을 받았고 그때마다 “저는 이미 진리와 결혼했습니다.”라는 말로 비껴갔지만, 그녀가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은 비단 외모 덕분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현존하지는 않지만 디오판토스의 《수론(數論, Arithmetica)》, 아폴로니우스의 《기하(幾何, Conics)》, 프롤레마이오스의 천문학설에 대한 부친의 해설서를 편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디오판토스의 천문규칙에 관하여》라는 저서의 일부분은 지금까지 전해 온다. 그런데 학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412년 키릴로스라는 인물이 주교로 임명되면서 좋은 시절은 막을 내렸다. 새 주교 키릴로스는 이단에 강경한 태도를 취한 매파 성직자로서, 모든 철학은 기독교의 정통성에 장애가 되는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그리스도의 신성보다 인성(人性)을 강조한 네스토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공격했고, 지식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네스토리우스파는 박해를 피해 다른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사건은 단순히 네스토리우스파의 해체에 머문 것이 아니라 헬레니즘 문화의 학문적 전통이 무너지고우리가 암흑기라 부르는 중세 기독교 중심 세계의 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암흑 세계의 도래를 결정적으로 앞당긴 것이 히파티아 사건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중심인물이던 히파티아의 존재가 주교 키릴로스에게는 용납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는 사상의 자유를 설파하고 과학과 학습을 형상화하는 등 이교도로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물론 키릴로스가 부임하기 전 기독교 성직자들은 그녀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그는 그럴 의사가 추호도 없었다. 결국 참지 못한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415년 베드로라는 수도자가 이끄는키릴로스의 무리는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히파티아를 납치하여 마구 때린 후 머리카락을 마차에 묶어 케라레움이란 교회로 끌고 갔다. 그곳에서 옷이 벗겨진 히파티아의 피부는 굴 껍데기로 찢겨나갔고, 피투성이가 된 그녀의 몸은 불속으로 던져졌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수많은 학자들이 자유라는 학문의 연료가 사라진 알렉산드리아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로써 알렉산드리아는 예로부터 전해 오던 학문의 중심이라는 명칭을 다시는 찾지 못했다. 그러나 히파티아는 편협한 종교의 공격을 받아 채 피우지 못한 사상과 여성의 자유를 훗날 자신의 죽음을 발판으로 되살리게 된다. 근대 계몽사상가들에 의해 재조명되기 시작한 그녀의 삶은 ‘가장 아름답고 순결하며, 탁월한 지성을 갖춘 여성’으로 인정받았으며, 라파엘로는 여성 수학자 히말티아를 아테네 학당의 중요한 자리에 배치함으로 진리를 사랑한 위대한 인물로 그녀를 상기시키고 부활시켜 낸다. 뿐만 아니라 단테의 신곡에서 비기독교인으로서 받은 설움을 라파엘로는 아테네 학당의 위대한 54명의 인물로 대치함으로써 종교적 세게관의 아성을 무너 뜨리고 자연과 과학, 이성을 일깨운다. 그 'sial(2020. 6. 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