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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성향토사연구회 3월 답사자료
1. 일시 : 2018년 3월 10일 08시 30분 의성군청마당
2. 장소 : 안동군 길안면, 안동군 임하면, 안동시 송천동
■ 龍潭寺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금곡리 83 [미내소일길 138]
건립연도 : 664년 창건자 화엄화상
안동시 길안면 금곡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 고운사의 말사.
용담사는 신라시대 창건 이후 크게 번성하였으나 임진왜란과 화재 등으로 인해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기도 하였다. 절이 번창할 당시에는 많은 승려들이 수도를 하여 쌀 씻는 물이 멀리 7㎞ 떨어진 묵계까지 이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그만큼 용담사에는 수도승과 불자들이 많았으며 부속 암자도 3개나 갖추고 있을 정도로 사찰의 규모가 상당히 컸다고 한다.
용담사가 자리한 곳은 황학산(黃鶴山)·화부산(花釜山)·연점산(鉛店山)·금학산(金鶴山) 그리고 천지갑산(天地甲山)이 모여 있는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골짜기 중에 골짜기이다. 겹겹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산은 높고 골이 깊으며,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청정 지역이다. 용담사에서 7㎞ 떨어진 곳에 1687년(숙종 13)에 세운 묵계서원(黙溪書院)이 있는데, 묵계서원과 만휴정(晩休亭)을 둘러본 후에 국도를 따라 가면 맑고 푸른 길안천과 더불어 경상북도 안동의 아름다운 자연을 두루 만날 수 있다.
용담사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681) 때 화엄화상(華嚴和尙)이 창건하였는데, 고대와 중세에 크게 번성하여 부속 암자가 3개나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 소실되어 1574년(선조 7) 송혜증 법사(松惠證法師)가 중건하였다. 이후 두 차례의 화재로 상당히 쇠퇴하였다.
용담사의 건물로는 무량전, 대웅전, 요사, 선원 등 모두 4동이 있다. 4동의 건물 중 용담사 무량전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0호로 지정되어 있다. 법당의 내부에는 아미타좌불이 있는데, 아미타불 주변에 「후불탱화」·「산신탱화」·「지장탱화」를 봉안해 두었다.
용담사 무량전에는 금정암과 락암이라는 두 개의 부속 암자가 딸려 있다. 금정암 입구 오른쪽 산허리에는 부도와 비석이 세워져 있고, 조금 위에 화엄강당이 지리 잡고 있다. 용담사 금정암 화엄강당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7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 터는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 또는 아름다운 여인이 비단을 짜고 있는 옥녀 직금형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금정암 좌측에는 의상대사가 도를 닦았다고 하는 의상바위가 있다.
용담사 무량전 석등은 두 개의 석등으로 오른쪽은 기둥이 갈라진 흔적이 있다. 전체 높이 약 164m의 팔각기둥이며, 석등 받침은 둘 다 자연석인 듯한데 거북의 형상을 하고 있다. 불이 놓여지는 곳은 연꽃으로 추정되는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국도 35호선을 따라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소재지 방면으로 가다 보면 천지갑산이 나온다. 천지갑산의 입구 미내[眉川]에서 오른쪽으로 신기와 소일마을로 가는 도로를 따라 2㎞쯤 가면 황학산(黃鶴山)이 나타나는데, 산줄기가 맞닿은 협곡에 용담사가 자리 잡고 있다.
용담사에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0호로 지정된 용담사 무량전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7호로 지정된 용담사 금정암 화엄강당이 자리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만휴정(晩休亭)
소 재 지 :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묵계 1리 1081
건 축 주 : 김계행(金係行, 1431~1517)
건축시기 : 15세기 말~16세기 초
문 화 재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3호, 1986년 12월 11일 지정, 1동
만휴정은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 보백당 김계행이 1500년(연산군 6)에 건립한 정자이다. 길안면 묵계서원에서 개울 건너 산골짜기에 들어서면 웅장한 계곡에 반석 위로 폭포를 동반한 계곡물이 흐르는데 정자는 이 절경을 이루는 곳에 동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김계행은 연산군 폭정을 만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땅으로 낙향했다. 그 후 현재 소산의 설못가에 조그마한 정자를 지었으나 길옆이어서 더욱 조용한 장소를 찾아 이 정자를 건립하게 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정자의 전면 쪽 3칸은 삼면이 개방된 누마루 형식으로 누각 주위 삼면에는 계자각난간을 돌렸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으로 처마앙곡과 안허리가 매우 날카로워 정자의 맛을 더욱 살리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중수를 거치면서 다소 변형된 듯 일부는 조선 후기 양식을 보이는 부분도 있다.
◆현판 : 만휴정(晩休亭), 만휴정중수기(晩休亭重修記)
◆시판(詩板) : 김양근(金養根), 김굉, 이돈우(李敦禹), 류도원(柳道源), 김도행
(金道行), 정박(鄭璞) 등의 시가 걸려있다.
◆보백당만휴정천석(寶白堂晩休亭泉石) 각자(刻字)이다.
◆ 기타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 선생당편 개취시의(先生堂扁 盖取是義),
지신근신 대인충후(持身謹身 待人忠厚) 등 선생의 유훈(遺訓)이 게판되어
있다.
◆누정 이야기
- 내 집에는 보물이 없으니, 보물이라면 오직 맑고 깨끗함이 있을 뿐이다
만휴정은 커다랗고 둥그런 바위를 등에 지고, 물길로부터 조금 안쪽으로 움푹 패여 들어간 공지 안에 서 있다.
만휴정이 등지고 있는 바위는 아래쪽은 상당한 단층면을 이루고 있으나, 위쪽은 밋밋한 곡선을 드러내고 있고, 그 위에는 여기저기 세력이 그리 왕성하지 못한 소나무들이 자리 잡고 있다. 만휴정은 물길 흘러가는 것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그 앞쪽 산허리의 중간쯤을 응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물길의 흐름, 산허리의 흐름과 직각으로 만나는 시선 방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앞쪽 산허리의 흐름을 따라 만들어져 있는 좁직한 소로와도 90°의 각도로 교차하는 시선 방향을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만휴정에 들어가려면, 오던 길을 버리고 계곡을 건너야 한다. 만휴정에서 길까지는 좁은 다리가 가설되어 있다. 다리는 만휴정의 축대 한끝과 이쪽 길 아래쪽의 솟아오른 바위의 한 면을 잇고 있었는데, 중간에 시멘트 기둥이 하나 있었고, 한 사람이 자유롭게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의 폭을 갖추고 있다. 노면은 양쪽에 옛날 전신주 같이 검게 기름 먹인 원통형 나무를 걸쳐 놓고 그 사이를 아스팔트로 채워놓은 것이다.
만휴정은 적절하게 차단되어 있는 공간이다. 앞쪽에 담이 없더라도, 만휴정의 아늑함에는 부족함이 없었으리라. 그러니 앞쪽 담의 가설은 사족에 불과하고, 오히려 만휴정이 갖고 있는 허물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만휴정의 가장 큰 자랑인, 앞쪽을 흐르는 투명한 물과의 만남을 심리적으로 차단하는 효과를 행사하기 때문이다.
만휴정 마루에서는 위쪽으로 계곡의 물이 너럭바위의 사면을 타고 지렁이 몸짓으로 내려와 이룬 소와, 그것이 또 태극의 형상을 지으며 짧은 유영을 한 끝에 아래쪽에 만들어 놓은 소가 내려다보인다.
아래쪽 소의 한쪽을 칼끝처럼 비집고 들어와 사선으로 차단하고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는 ‘보백당만휴정천석’, 그러니까 보백당의 만휴정이 있는 샘의 돌이라는 글자가 횡으로 새겨져 있다. 글자들은 세월에 의해 탁마되어, 끝의 석이라는 글자는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기도 하다.
마루 영역은 가장자리로 낮은 난간을 둘러쳤고, 마루 위 천장 서까래 아래쪽으로는 여기 저기 현판들이 달려 있다. 동쪽에 있는 방 앞에 달려 있는 나무판에는 “겸손하고 신중하게 몸을 지키고, 충실하고 돈후하게 사람을 대하라.”라는 뜻의 글자가 선생의 유훈이라는 설명을 달고 써 있다.
서쪽 방의 앞 나무판에는 “내 집에는 보물이 없으니, 보물이라면 오직 맑고 깨끗함이 있을 뿐이다.”라는 글씨가 선생의 집 마루 편액(보백당)은 이 뜻을 취한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써 있다.
현판들은 여럿 걸려 있지만, 여기서는 동쪽 끝에 걸려 있는 현판에 써 있는 시를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기로 한다. 후에 중수하면서 김양근이 지었다는 시이다.
층층이 급한 물 쏟아져 내리니
물 돌아가는 곳에 저절로 물가마가 생겼구나
십장 높이에 옥처럼 푸른 빛 떠오르니
그 속에 신의 손길이 담긴 물건이로다
폭포와 연못은 가끔씩 널려 있고
너럭바위는 넓게 펼쳐져 있구나
희디 흰 것이 갈아낸 돌과 같으니
가히 백 사람쯤은 앉을 수 있겠도다
앞을 보니 세 개 물가마가 어울려 있어
시흥이 날개 짓으로 솟구쳐 오르네
지천으로 피어난 꽃들은 웃음을 다투고
마치 산 전체가 물 속에 든 형국이로다
◆관련인물
- 김계행(金係行, 1431~1517)
김계행은 자가 취사(取斯)이고, 호는 보백당(寶白堂)이다. 그는 김선평으로부터 가계의 흐름을 시작하는 안동김씨, 그러니까 신 안동김씨로, 김선평을 1대로 할 때 세계상 11대에 속한다.
“명나라 선종 황제 선덕 6년(세종대왕 12), 신해년 2월 9일 신묘일 미시에 선생은 안동부 서쪽 풍산현 남쪽의 불정촌에 있는 집에서 출생하였다.”『연보』의 기록이다.
그는 향교에서 공부하였으며, 17세에 이천서씨를 첫 부인으로 맞았다가 23세에 사별하고, 24세 되던 해에 의령남씨를 둘째 부인으로 맞았다.
그가 묵계와 관계를 맺는 것은 30세 때의 일이다.『연보』에는 30세 때 거묵에 새로운 전장을 열었다는 기록 아래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거묵동은 안동부 길안에 있다. 숲과 골짜기가 깊고, 물과 바위가 절승을 이룬다. 선생은 항상 그곳을 왕래하며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져서 따로 전장을 두어 만년에 기거할 곳으로 삼았다.”
이 글은 원래 묵계가 거묵동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어졌으며, 김계행은 이곳의 자연이 깊고 아름다움을 좋아하여 전장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연보』에서는 묵계를 묵촌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앞부분에서는 주로 거묵, 또는 거묵동이라고 지칭한다.
김계행에게 있어서 묵계는 이렇게 일찍부터 만년을 위해 준비된 땅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김계행이 30세의 젊은 나이에 아주 묵계에 입향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32세에 성주교수를 시작으로 관리 생활을 시작하는데, 45세에 충주교수를 역임하면서 아들 김극인을 먼저 거묵촌에 거주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때 그의 본집은 풍산 사제에 있었다. 그는 50세에 과거에 급제하며, 이때로부터 홍문관 부제학, 대사간에 까지 이르는 그의 본격적인 벼슬살이가 시작되었다. 그의 벼슬살이는 67세까지 계속되지만, 말기에는 사직소를 올리기에 바빴다.
『연보』의 63세 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이 때부터 풍산과 묵촌 사이를 오가면서 즐기며 노닐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김계행의 만년이 시작되며, 이 시절 이후에는 그에게 있어서 벼슬살이보다는 산간에 묻혀 사는 삶이 더욱 중요하게 받아들여진다는 암시라고 하겠다. 그러나 아직 그의 삶은 묵촌보다는 사제에 더 무게 중심이 놓여 지는 것이었다.
그의 나이 68세 되던 해에 사제의 옛집 곁에 작은 집을 짓고, 보백당이라고 편액하는 것을 통하여서 이 점은 확인되었다. 그가 완전히 삶터를 묵계로 옮기는 것은 그의 나이 71세 되던 해의 일이다. 그러나 사제의 집과 보백당은 그대로 두고 이용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71세 이후 묵계로 삶터를 옮긴다는 것은 그때로부터 87세에 임종하기까지 그의 만년의 삶은 주로 묵계에서 펼쳐졌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묵계의 한 골짜기 속, 송암동 폭포 위에 위치하는 만휴정도 그의 만년의 삶에 있어서는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곳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만휴정이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앞에서 인용한 바 있는 만휴정 건립과 관계된 『연보』의 기록은 71세 때 일의 관계 기록으로 나오는데, 일찍이 만휴정을 지어 놓고 있었다는 이야기이지 그때 만휴정을 지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므로 만휴정은 그의 나이 71세가 되기 이전의 어느 때인가 건립되었다고 할 수 밖에 없겠다.
◆주변경관
- 화강암 바위를 가르는 폭포
길은 좁았으나 정성스럽게 포장되어 있었고, 산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는데도 평탄하다. 그러나 길은 걷는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산 중턱을 향하여 솟구친다.
어느 사이엔가 계곡의 바닥은 저 아래 쪽으로 물러나고, 길은 산 중턱에 올라붙었다. 그리고 촤르륵거리는 물소리가 귀를 후비며 파고든다. 물소리에 끌리 듯, 길을 버리고 한 걸음 아래로 내려서면 비탈의 끝은 계곡의 한 쪽을 이루고 있는 절벽이다.
거기 내려서면 시선 방향으로 폭포와 함께 그 위에 옆으로 비켜 서 있는 만휴정의 한옥 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사실, 거기서 만휴정은 거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폭포가 너무도 강력한 힘으로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휴정 보다는 폭포수가 주인인 공간인 것이다.
폭포는 화강암 바위는 계곡을 가로질러 버티고 서 있다. 갈라진 틈 하나 없는 한 덩어리의 거대한 바위이다. 그 거대한 바위의 중앙을 타고 물길이 열리고, 그리로 물이 쏟아져 내려 폭포를 이루었다.
바위는 위쪽이 조금 안으로 넘어 박혀 5° 쯤의 기울기를 이루며 버티고 서 있다. 바위 꼭대기에 한줄기 길을 낸 물은, 그 벽면을 타고 내려 아래쪽의 커다란 소로 떨어진다. 바위벽을 수직으로 낙하하거나, 바위 면의 단층 때문에 단숨에 허공을 낙하하여 그 아래쪽의 소에 이르는 모양이 아니었으므로, 폭포의 물소리는 생각만큼 그리 크지는 않다.
너무 빨리 흘러내리기 위해 게거품을 물은 탓인지, 아니면 너무 빨리 흘러내리지 않기 위해 발을 버틴 때문인지, 바위 면에는 물비늘 같은 흰 거품이 포도송이처럼 인다. 그것들은 수십 개로 나뉘어 일선, 이선, 삼선의 대오를 갖춰 아래 쪽 소를 끊임없이 침범한다.
이미 자신의 세상이 되어버린 소의 영역을 끊임없이 그 투명한 물빛으로 지배하기 위한 몸짓인지, 포도송이 형상의 물의 대군은 거듭하여 거칠게 소 속으로 뛰어들며 소리를 질러댄다. 그 소리에 복종하듯, 주변 산천은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다.
묵계마을 산골짝 깊은 곳, 바위산이 물에 의해 나뉘어져 있는 그곳 계곡 속에는 그렇게 폭포수가 지배하는 하나의 세상이 조용히 움을 틀고 있었다.
- 바위와 물과 인간의 건축물이 한데 어우러지는 화음의 공간
산기슭의 한켠에 쭈그리고 앉아 폭포를 보고 있노라면, 그 위 한쪽으로 만휴정이 비켜서 있는데도, 우리는 만휴정이 거기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폭포수가 온통 우리의 의식을 잡아매서 우리가 그것 외의 다른 것에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쯤에서 보는 만휴정은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의 건축물이 아무리 아름답게 지어졌기로서니, 자연의 건축물을 당해낼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적해야 할 상대가 거대한 바위를 타고 내리는 폭포임에 있어서랴!
그러니 만휴정이 폭포와 단층을 이루며 그 위쪽으로 올라서서 한켠으로 물러서 있는 것은 조금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하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만휴정은 폭포와 경쟁하고자 한다는 혐의를 벗을 수 있고, 폭포 위쪽에 자신의 영역을 따로 갖추어낼 수 있게 되는 때문이다.
만휴정의 주인인 보백당 김계행의 『연보』에 의하면, 폭포와 만휴정이 들어서 있는 이 계곡은 송암동이라 불리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은 일찍이 송암동 폭포 위에 정자를 짓고 만휴정이라 이름 하였으니, 만년에 휴식한다는 의미를 취한 것이다.” 이 계곡이 소나무와 바위의 골짜기로 이름 붙여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계곡 주변은 거대한 바위 형태를 드러내고 있는 산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바위 산은 어디 할 것 없이 소나무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폭포 위쪽, 만휴정 영역도 그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만휴정 영역에 이르려면, 우리는 폭포를 버리는 선택을 하여야 한다. 폭포가 바라보이는 지점에는 집을 앉히기에 마땅한 공간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굳이 폭포와 대결하는 위치를 차지하지 않고자 하는 주인의 의식이 투영된 결과라고도 하겠다. 사실 폭포는 가끔씩 감상하기에는 좋은 경관이지만, 매일같이, 매 순간마다 바라보며 살기에는 부담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그 거친 소음이 조금은 순화되어서 들려오고, 그 기세 좋은 물의 약진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지점에 만휴정이 앉아 있는 것은 편안한 쉼터를 찾고자 하는 의식의 소산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폭포를 썩 올라서면 정자 영역이다. 폭포 위쪽은 평탄한 계곡이다. 계곡은 마치 평지를 흐르듯이 수평의 선을 그으며 길게 흘러내리고, 그 끄트머리에서 폭포를 통하여 단숨에 낙차 큰 하향을 시작하기 직전의 자리에 정자가 들어차 앉아 있는 것이다.
수평의 선을 그어 내리는 골짜기는 아주 깊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만휴정 중수기」의 일절을 여기 인용하여 보도록 하자.
“상류는 전의곡으로, 이곳으로부터 계곡이 동쪽으로 멀리 치달려 오는데, 굽어지고 휘어진 것이 10여 리에 이르러 홀연 마당같이 넓은 바위가 나타나니,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것이 산과 계곡이 모여든 듯 하고 …….”
위의 일절에서 말하여지는 마당같이 넓은 바위가 있는 곳이 바로 만휴정 영역이다.
이 마당같이 넓은 바위는 만휴정 위쪽에서는 너럭바위의 형상을 이루는데, 그 너럭바위의 아래쪽은 아주 완만한 사면을 그으며 흘러내리고, 물은 그 사면을 타고 지렁이 몸짓으로 흘러내려 그 아래쪽 소에 이르고, 소로부터 바위가 깔린 평탄한 계곡을 따라 태극의 형상을 이루며 흘러서 다시 아래쪽의 바위로 차단되어 있는 작은 소에 이른다.
이 아래쪽의 소는 물이 폭포로 나아가기 전에 잠시 몸 추스르기를 하며 머물러 있는 곳이다. 위쪽의 소에서 아래쪽 소에 이르는 사이, 물이 10여 미터의 거리를 두고 평탄하게 태극의 형상을 지어내는 곳 한쪽에 만휴정은 서 있다.
이곳이 만휴정 영역, 바위와 물과 인간의 건축물이 한데 어울려 지어내는 작은 화음의 공간이다.
출처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사이트
■묵계서원(默溪書院)
소 재 지 :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705 (원소재지 : 안동부 길안)
건 축 주 : 사림(士林)
건축시기 : 1687년(숙종 13)
훼철시기 : 1869년(고종 6)
소 유 자 : 사유(관리자 : 김해동)
문 화 재 :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9호, 1980년 6월 17일 지정
◆건축 이야기
1925년에 강당 및 일부 건물을 건립하였으나 복향(復享)은 하지 못하였다.
1998년 5월 17일에 사림들에 의해 현 위치에 복원되었다.
서원 남쪽 언덕에는 보백당의 신도비와 비각이 있다.
◆ 건축 배경
묵계서원은 1687년(숙종 13)에 사림들의 발의로 창건되었다.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1431∼1521)의 위패는 그의 맑고 깨끗한 삶의 자세를 흠모하는 후대의 선비들에 의해 1706년(숙종 32)에 묘우인 청덕사(淸德祀)에 응계(凝溪) 옥고(玉沽, 1382~1436)와 같이 병향되었다.
◆ 건축 특징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3칸을 마루로 꾸미고, 좌우에 온돌을 들인 일반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서원 좌측에는 이를 관리하는 정면 6칸, 측면 5칸의 口자형 주사가 있다.
◆ 건축 구성
건물은 사당, 강당, 누, 재,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은 청덕사(淸德祀), 강당은 입교당(入敎堂), 누는 읍청루(挹淸樓), 재는 극기재(克己齋)이며, 문은 진덕문(進德門)이다.
◆현판
청덕사(淸德祠), 입교당(立敎堂), 읍청루(挹淸樓), 진덕문(進德門),
묵계서원창건기(黙溪書院創建記) 류극화(柳克和)가 지었다.
묵계서원중건기(黙溪書院重建記) 이상원(李家源)이 지었다.
묵계서원복원기(黙溪書院復元記) 이헌주(李憲柱)이 지었다.
묵계읍청루상량문(黙溪挹淸樓上樑文) 이상정(李象靖)이 지었다.
묵계재루상량문(黙溪齋樓上樑文) 이재(李栽)가 지었다.
극기재(克己齋)
『논어(論語)』「안연」편의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人) 에서 따온 말이다.
◆주향자
- 김계행(金係行, 1431∼1521)
조선시대 세종에서 중종대의 문신이다.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보백당’은 그의 시구인 「오가무보물(吾家無寶物)」, 「보물유청백(寶物惟淸白)」에서 따 온 것으로, “청백을 보물로 삼는다.”라는 의미이다. 부친은 현감을 지낸 김삼근(金三近)이다.
그는 다섯 살 무렵에 부친에게 가학으로 학문을 익혔는데, 매우 영민하여 문장을 금세 익히고 곧잘 암송하였다. 자라나면서 성질이 침착하고 과묵해서 같은 또래의 친구와 어울려도 남달랐기 때문에 집안의 어른들은 보백당이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고 예견하였다. 그리고 부친은 ‘집안을 일으킬 아이’라며 큰 기대를 걸었다.
10세(1440년)에 비로소 글을 익히게 되었는데, 문리를 통했으며, 배운 바를 부지런히 암송하였다. 이어 12세(1442년) 무렵에는 독서를 즐겨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아 이내 문예에 있어서 크게 성취한 바가 있었다. 보백당은 14세(1444년)가 되어 부친이 비안현감의 임소로 떠나자, 부친을 모시고 비안으로 가서 그곳 향교에서 수업을 받았다.
15세(1445년)에 사서(四書)를 모두 익혔으며, 16세(1446년)가 되던 가을에는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이어 17세(1447년) 되던 봄에는 생원회시에 합격하여 비안 관아에서 경사를 축하하는 잔치도 벌였다고 한다. 이어 22세가 되던 1452년에는 증광동당시(增廣東堂試)에서 제2인자로 뽑혔다.
보백당은 30세(1460년) 무렵에 지금의 묵계인 거묵(居黙)에 생활 근거지를 삼게 되었다. 31세(1461년) 가을에 동당초시(東堂初試)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어 32세(1462년) 되던 해 봄에 귀향했다가 6월에 성주교수로 임명되어 이듬해에 부임했다.
보백당과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과의 교유는 41세(1471년) 때에 비롯되는데, 점필재와 함께 『주역(周易)』과 『근사록(近思錄)』을 강론하면서 도의를 맺는다.
49세(1479년) 가을에는 식년동당초시(式年東堂初試)에 합격하였으며, 이듬해 3월에는 급제하여 6품직에 올랐다. 이 당시, 점필재가 서울에 우거(寓居)하던 보백당을 내방하였다. 이어 51세(1481년)에는 점필재 및 성희안(成希顔, 1461~1512)과 함께 여러 날 종유하였다.
그리고 희안의 동생인 희증(希曾)과는 교분이 각별하였다. 52세(1482)에 고령현감을 제수 받았는데, 외직에서 청렴하고 자애로운 선정을 베풀고, 매사를 신속히 처리하여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고령 고을에 교화가 이루어지며 기강도 세워지게 되었다.
이후, 보백당은 1484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지제교(知製敎)·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전임되어 천재(天災)와 시폐(時弊), 인사의 불공평 등을 논하다가 권신들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1489년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을 거쳐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으로 옮겨 승니(僧尼) 제도의 폐지를 청원하고는 여가를 얻어 귀성(歸省)하였다. 이 당시, 연산군의 생모 윤씨 폐위가 이루어지고 조정의 의견이 양분되어 어수선 하자, 보백당은 조정에서 물러 날 뜻을 확고히 정하였다.
1492년 모친상을 탈상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여 승정원(承政院)의 동부승지(同副承旨)·지제교(知製敎)·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이내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이임되었다.
그해 4월에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임명되어 세 번이나 사임해 끝내 직임이 바뀌어졌다. 이어 6월에는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임명되어 조정으로 돌아와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전임되어 굳이 사양했으나 주상의 윤허를 받지 못했다. 이어 9월에는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임명되어 네 번이나 사표하여 결국 교체되었다.
1493년에 낙향하여 선영에 참배하고 풍산과 묵계를 오가며 한가한 생활을 하였다.
1495년(연산군 원년) 2월에 국장(國葬)의 산역(山役)을 감독하였다. 이어 5월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여 해임되었다. 1497년 대사간(大司諫)으로 시정(時政)을 극력히 간쟁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가납되지 않자, 사표를 내고 이내 고향으로 돌아왔다.
1498년 작은 정자를 수축하고 「보백당」이라 편액하고는 날마다 사색하며 심성을 수양하는 한편 생도들의 훈육에 전념하였다. 이 당시, 무오사화가 발발하여 보백당도 이에 연루가 되었다고 하여 어세겸(魚世謙)·성희증(成希曾)·조호문(趙好問) 등 10여 인과 함께 체포되어 태형(笞刑)을 받고 석방되었다가 그해 7월에 다시 대사간으로 임명되었다.
1499년 첨중추(僉中樞)에 임명되었다. 당시 도승지 신수근(愼守勤)과 한치형(韓致亨) 등이 모의하여 보백당의 국문을 주청하였으나, 구원의 손길에 힘입어 무사하였다. 당시 보백당은 동학들이 모두 사화에 의해 희생되어 비참한 심정을 가눌 길 없었다. 이어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조참의(吏曹參議)·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
또한 연산군이 지난 일을 들추어 국문을 명하여, 보백당은 의금부에 5개월 동안 구금당하였다가 방면되어 환향하였다.
이렇듯 보백당은 수년 사이에 세 차례나 국청(鞠廳)에 들어가 신문을 받는 동안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속박과 고통을 받았지만, 태연자약하게 대처하여 연산도 더 이상 가해 행위를 하지 못했다.
1501년 묵계로 거주지를 옮겨 묵계하리 송암폭포 위에 ‘만휴정’을 짓고 소요 자적하였다. 1506년에 중종 반정이 일어났다. 보백당은 연산군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회한에 잠겼다. 이후, 그는 경학에 전력하여 성리(性理)를 탐구하고 사색하였다.
보백당은 1517년 87세를 일기로 운명하면서, 자손들에게 “청백을 가법으로 이어가고, 공근(恭謹)을 대대로 지켜가며, 효우(孝友)하며 돈목(敦睦)하라, 교만이나 경박한 행동으로 가성(家聲)을 떨어뜨리지 말라, 상제(喪制)는 정성과 경건을 다하고, 낭비나 허례를 말라.”고 유언하였다.
그는 입조한 수십 년 동안 충간(忠諫)을 다했으며, 「계(啓)」·「차(箚)」·「소(疏)」 등이 많이 전해졌을 것이지만 여러 차례의 변란 과정에서 대부분 산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시호(諡號)는 정헌(定獻)이다. 후일, 조정으로부터 이조판서(吏曹判書) 및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으로 증직되었으며, 부조전(不祧典)의 칙령(勅令)도 내려졌다.
- 옥고(玉沽, 1382~1436)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대수(待售), 호는 응계(凝溪)이다. 부친은 성균관 생원시 출신으로 진성감무(珍城監務)를 역임한 옥사미(玉斯美)이다.
응계가 태어나고 이내 부친 옥사미가 세상을 떠나게 되어 응계는 모친에게서 알뜰한 가르침을 받았다. 모친은 그에게 부지런히 학문을 익히도록 권장했을 뿐 아니라 응계 자신도 총명하여 문예가 조숙하였다. 이윽고 길재의 문하에 나아가 본격적인 학문을 익히게 되어 경학과 성리학에 치중하였다.
18세인 1389년(공양양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어린 나이에 급제한 탓에 일시에 화제가 되었으며, 재상가에서는 서로 사위를 맞으려고 다투었다. 이어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집현전교리(集賢殿校理) 등을 역임했다.
성균관의 교수로 재직할 때에는 제자들에게 훈육을 엄정히 하여 후학들 가운데 학문으로 성취한 자가 많았다. 이를테면,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 등이 그의 문하에서 공부했던 인물들이라고 한다.
벼슬길에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친상을 당했다. 모친상을 마치고 응계는 다시 벼슬길에 나갈 뜻을 접어 두고 산수 사이에서 거닐며 시를 읊고자 다짐하였다.
그러다가 33세 때인 1414년에 안동부통판(安東府通判)에 임명되어 상하로 예를 다하고 엄격함을 잃지 않았다. 사무를 처리함에 있어서 일일이 문건을 뒤척이지 않더라도 귀신처럼 적발해 내어 이속들과 백성들이 그의 신명한 송사척결에 탄복하여 감히 속이려고 하는 자가 없었다.
이어 외직인 대구 부사가 되어서 백성들을 어질게 대하고 만물에게 혜택이 미치도록 하였으며, 청렴결백하고 선한 목민관의 소임을 다하였다. 그런데 대구 고을 관아에는 배설(裵泄)이란 이속이 교활하고 민첩하여 이 고을에 부임해 오는 고을원을 자기 수완대로 능멸하기 일쑤였지만, 그는 응계의 어진 행적에 감화를 받았다고 술회하였다.
이외에 응계가 17~18세 무렵에 대구부에 응거하였을 때, 사인(舍人)이 초라한 그의 행색을 보고 능멸하였는데, 후일 그가 대구부사로 부임하자 몇 년 동안 겁을 먹고 피해 다니다가 급기야 죄를 청하자, 응계는 순순히 용서하는 미덕을 보여 주위 사람들을 감복시켰다고 한다.
또, 한번은 이웃집 아낙이 자기 남정네가 죽었다고 곡하는 소리를 듣고는 곡하는 소리에 슬픔이 담겨 있지 않다는 점에 유의하여 그녀가 사통하던 간부와 짜고 남편을 죽인 범인임을 밝혀내기도 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응계의 짐 보따리는 책 상자뿐이었으며, 어떤 자가 응계 부인에게 삼베 한 상자를 보냈더니 부인마저 그것을 받지 않고 되돌려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청렴결백한 목민관의 자세는 대구 고을의 백성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이후로 응계는 입조하여 여러 차례 언관(言官)을 역임하였다고 한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이조정랑(吏曹正郞) 및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응계는 55세(1436년)의 짧은 일기로 생을 마감하여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하였다. 당시, 세종은 신료들에게 청백리를 천거하라고 하교하였는데, 신료들은 응계를 천거했다고 한다. 뒤에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응계에 관한 자료는 실기가 유일하다. 「행장」에 의하면, 애당초 『행적(行蹟)』 1권과 『응계집(凝溪集)』 2권이 있었는데, 전란통에 유실되어 버렸다고 한다. 일부 남은 저작인 「선악상반지도(善惡相反之圖)」 및 「음양변역성괘지도(陰陽變易成卦之圖)」 등과 후인들의 기록 등을 중심으로 실기를 작성한 것이다.
출처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사이트
■ 사빈서원(泗濵書院)
소 재 지 :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226-1(원소재지 : 임하면 사의리)
건 축 주 : 사림과 자손들
건축시기 : 1676년(숙종 2)
중건시기 : 1882년(고종19)
이건시기 : 1710년(숙종 36), 1987년
훼철시기 : 1717년(숙종 43), 1868년(고종 5)
소 유 자 : 김시우(관리자 : 김시우)
문 화 재 : 문화재 자료 제39호, 1985년 8월 5일 지정, 2동
◆ 건축 이야기
1676년(숙종 2) 경산에 사빈영당(泗濱影堂)을 세우고 청계 김진선생을 봉안하였다. 1685년(숙종 11)에 청계의 다섯 아들인 약봉·귀봉·운암·학봉·남악을 배향하고 봉안례(奉安禮)를 거행하였다.
묘호를 경덕사(景德祠)로 정하였다. 1710년(숙종 36)에 사수변(泗水邊)으로 이건(移建), 경덕사를 서원으로 높여 사빈서원(泗濱書院)으로 하였다. 1717년(숙종 43)에 어사 이명언의 보고에 의해 훼철의 명이 내렸다. 사빈서원 편액을 내리고 사빈영당으로 환원하였다. 1882년(고종 19)에 흥교당(興敎堂)인 강당(講堂)과 주사(廚舍)를 차례로 복원하고 사빈서당이라 하였다.
◆ 건축 배경
1666년(현종 7)에 표은(瓢隱) 김시온(金是榲)과 야암(野庵) 김임(金恁)을 중심으로 한 사우들이 장육도(藏六島)에 묘우를 지어 청계유상(靑溪遺像)을 봉안하기로 하였다가 1675년(숙종 원년) 장육도의 지세가 궁벽하다 하여 청계의 산소가 있는 경산에 묘우의 창건을 결정하고 사빈영당을 10월에 착공하였다. 다음 해에 청계 김진을 사빈영당에 봉안하였다.
◆ 건축 특징
강당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제법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자연석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그 위에 원주와 각주를 혼용해서 세웠는데 중앙 대청은 정면 4칸으로 매우 넓게 하였다.
대청을 중심으로 해서 좌우에 통칸 온돌방이 드리워져 있어 일반적인 강당 평면 형식이다. 우물마루 상부는 5량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박공지붕이다. 건물 정면에는‘경덕사’라는 편액이 있는데 이것은 묘우의 현판을 강당에 옮긴 것으로 보인다.
주사는 정면 5칸, 측면 5칸의 口자형 와가로서 전체는 남서향하여 배치하였다. 대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이 되는데 대문칸이 중앙에 배치되지 않고 좌측으로 1칸 물려 배치시키고 있다.
정면 좌측 협칸은 위치와 출입문으로 보아 마구였던 것으로 생각되며, 우측 협칸도 좌측과 동일하게 판벽으로 처리하였으나 우물마루를 깔아 현재 수납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어 그 방의 위치가 특이하다.
안마당 뒤쪽에 안채에 상당하는 공간이 있는데 정면에 대청을 두고, 대청 좌우에 안방과 윗방을 모두 2통칸으로 하여 대칭으로 배열하였다. 안방 머리쪽에는 도장방인 듯 싶은 방을 설치하여 출입은 대청에서만 가능케 하였다.
안방과 윗방은 마당쪽으로 1칸 늘여 마당에서 직접 출입도 가능하게 하였고, 우측 윗방 아래에는 부엌을 두었고, 우측도 좌측과 동일하게 배치시키고 있다. 안채 대청 상부는 5량가로 종량 위에는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았다.
강당은 많은 변형과 중수 등의 흔적이 있으나, 주사는 안동지방의 평면 양식인 口자 평면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고 변형이나 개수의 흔적은 보이지 않아 원형 보존이 양호한 편이다.
◆ 건축 구성
강당(오량가구의 와가 박공집)과 주사(□자형 주택)로 이루어져 있다.
◆현판
흥교당(興敎堂), 존양재(存養齋), 진수재(進修齋), 사빈서원(泗濱書院)
◆주향자
- 김진(金璡, 1500~1580)
의성 김씨 문중의 중흥조이다. 자는 형중(瑩仲), 호는 청계(靑溪)이다. 임하 천전에 정착한 망계(望溪) 김만근(金萬謹)의 손자이며,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낸 김예범(金禮範)의 아들이다.
1525년(중종 20) 26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태학에서 공부하였으나, 나중에 과거보는 공부를 버리고 임하에 자리 잡고 집을 지어 후생을 가르치게 되었다. 서당을 열어 수십 년 동안 자제와 향중의 어린 선비들을 거기 모아 과목과 조리를 세워 가르쳤다. 아들 5형제가 모두 대·소과에 올라 훌륭히 입신하기에 이른 것은 청계 선생의 엄격한 가르침에 힘입은 바였다. 또한 버려져 있는 황무지를 농경지로 개간하는 일을 선구적으로 실천하였다.
서른이 갓 넘은 나이에 강원도 강릉 김광평(金光坪)의 광활한 황무지를 농경지로 개간하였다. 만년에는 청기현(靑杞縣)으로 옮겨 힘써 농사짓고 누에를 쳐서 자급하였다. 그 때 교육을 위해 영양 최초의 서당인 영산서당(英山書堂)을 세웠다. 학문장려의 큰 뜻으로 장학 제도를 마련하여 그 상품으로 문장검(文章劍:6·25 때 분실), 옥적(玉笛), 문장답(文章畓)을 두어 자손 중 학문이 뛰어난 이에게 전수하도록 하였다. 현재 운천종가에서 보관 관리 중이다.
사후 12년 뒤인 1592년(선조 25) 넷째 아들 학봉 김성일이 경상우도관찰사가 되어 가선대부 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고, 1605년(선조38)에 다시 학봉이 선무원종훈에 녹하여 자헌대부 이조판서겸지의금부사의 증직이 더하였다. 불천위(不遷位)로 모시고 있다.
- 김극일(金克一, 1522~1585)
청계의 장자이다. 자는 백순(伯純), 호는 약봉(藥峰)이다. 소수서원에서 공부하다가 퇴계 선생께 배웠는데, 문학이 일찍 성취되어 뛰어 나시니 선생이 그 그릇을 매우 중하게 여겼다. 1546년(명종 원년)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가 되었다. 모친 상을 마친 1552년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시작으로 다양한 내외직을 거쳐, 1581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올랐다.
- 김수일(金守一, 1528~1583)
청계의 둘째 아들이다. 자는 경순(敬純), 호는 귀봉(龜峯)이다. 퇴계 선생께 배웠는데 퇴계 선생이 칭찬하셨다고 한다. 1555년(명종 10) 28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향시(鄕試)에 여러 번 장원하였다. 1568년 42세 때 청계선생이 터를 정해준 전암 명승지에 백운정(白雲亭)을 짓고 그 곳에 거처하였다. 43세 때에 과거를 보기 위해 동생들과 성균관에 유학중 동생 운암 김명일이 질환으로 위독하여 김명일을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오던 중 김명일이 사망하자, 그 뒤로는 과거를 단념하고 백운정에서 지내며 자질과 후진을 가르침에 정성을 다 하였다. 1583년 천거에 의해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에 제수되어 상경 중 여사에서 별세하였다.
- 김명일(金明一, 1534~1570)
청계의 셋째 아들이다. 자는 언순(彦純), 호는 운암(雲巖)이다. 글 재주가 뛰어나 일찍이 청계 선생의 명으로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공부할 때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이 한번 보고 장래에 크게 이룰 그릇이라 여겼다고 한다. 이 때 퇴계 선생께서 도산에서 가르침을 베풀고 있었는데, 아우 문충공 김성일과 함께 경서를 가지고 문하에서 가르침을 청하였더니 손수 잠명(箴銘)을 써주었다고 한다. 1564년 31세에 아우 학봉과 남악과 함께 3형제가 일시에 진사회시에 동방급제하였다. 1569년(선조 2) 중형 귀봉, 아우 남악과 함께 향시(鄕試)에 합격, 이듬해 3형제가 같이 회시(會試)를 보러 상경했다가 병으로 과거를 포기하고, 귀봉 선생의 부축으로 하향하던 중 경기도 용인에서 별세하였다.
-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청계의 넷째 아들이다.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이다. 아우 남악과 퇴계 선생께 수업하였다. 1566년 퇴계 선생은 요순 이래 성현이 전한 심법을 차례로 적은 80자 병명(屛銘)을 써 주었다. 1563년 26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67년 4월에 증광향시에 합격하고, 6월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살이 동안 늘 강직하였고 직간에 과감하였다. 외직에 나아가서는 백성을 늘 잘 보살폈고, 학문의 진흥에 힘을 썼다. 1590년 4월 29일, 일본통신부사로 파견되어 국위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 사신으로 당당히 행동하여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온갖 간계와 위협에도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1592년 8월에 경상좌도관찰사를 배명하고, 9월 4일에는 우도관찰사를 배명하였다. 명을 받은 이래 전장에서 과로하여 1593년 4월에 진주공관에서 졸하였다. 1605년에 선무원종공일등(宣武原從功一等)에 녹하고 가의대부 이조참판을 추증하였다. 1676년 3월에 자헌대부 이조판서겸지경연판 의금부 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관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에 가증(加贈)되었다. 1679년(숙종 5)에 문충(文忠)의 시호가 내려졌다.
- 김복일(金復一, 1541~1591)
청계의 다섯째 아들이다. 자는 계순(季純), 호는 남악(南嶽)이다. 형 학봉과 백운동에서 독서하고 퇴계 선생 문하(門下)에서 학문의 요지를 깨치고 스스로 깊이 노력하여 공부하였다. 1564년 24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1570년(선조 3) 문과에 급제하였다. 성균관 박사, 전적을 거쳐 형조정랑을 역임하였고, 그 뒤 울산군수, 창원부사 등의 외직을 역임하였는데, 치적이 영남 여러 고을의 으뜸으로 칭송되었다. 예천 봉산서원(鳳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출처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사이트
■ 역동서원(易東書院)
소 재 지 : 경상북도 안동시 송천동 391(국립안동대학교 내)(원소재지 : 예안
부포리 오담)
건 축 주 : 유림
건축시기 : 1570년(선조 3)
이건시기 : 1969년
사액시기 : 1684년(숙종 10)
훼철시기 : 1868년(고종 5)
소 유 자 : 안동대학교(관리자 : 안동대학교)
문 화 재 : 경상북도 기념물 제146호, 2003년 9월 22일 지정, 2069㎡
안동지방에서 가장 먼저 창건된 역동서원은 1570년(선조 3)에 지방 유림의 공동의견으로 역동 우탁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곳이다.
1684년(숙종 10)에 ‘역동’이라는 현판이 나라에서 내려져 선현 제사와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9년 현 위치에 복원하였다.
서원의 옛터는 낙동강 상류의 예안면 부포리 오담이었으나 안동댐의 건설로 수몰되어 현재는 송천동 안동대학교 안에 옮겨져 있다.
대개 서원의 명칭은 지역명이나 그 명현의 호를 사용하는 것이 통례인데 이 경우에는 퇴계 이황이 우탁이 주역을 처음 연구하여 안동에서 가르친 것을 기념한 것이다.
경내의 건물로 상현사, 신문, 명교당, 동재, 서재, 장서각, 전사청, 주소 등이 남아 있다.
◆ 건축 이야기
대개 서원의 명칭은 서원 건립 지역의 명칭이나 혹은 봉향되는 그 명현의 호를 사용하는 것이 통례인데, 본 서원의 경우에는 지명이나 호와 관계없이 ‘역동’이라 붙여지고 있다.
이는 우탁(禹倬, 1263~1342)이 역을 해득하여 이 땅에서 강학하여 교수한 것을 따서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이름 붙였다고 한다.
원래 이 서원은 낙동강 상류인 ‘오담’에 창건하였으나 1868년에 훼철되었고, 1966년 지방 유림의 발기로 구계서원 당회와 도산서원의 당회에서 중건을 결의하고, 1969년 현 위치에 서원을 복원하였다. 서원의 옛터인 ‘지삼의’는 안동댐의 건설로 수몰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유허비만이 이건되어 남아 있다.
◆ 건축 배경
안동지방에서 가장 먼저 창건된 역동서원은 1570년(선조 3)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우탁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 건축 특징
경내의 건물로 묘우인 상현사에는 ‘고려성균관좨주단야우선생’이라 쓰인 위패가 모셔져 있다. 묘우의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 집이며, 지붕은 와가로 맞배지붕에 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묘우 앞에는 신문이 설치되어 있고, 묘우 내부에는 마루가 설치되어 있으며 제사, 교의, 향상이 놓여 있다.
서원의 강당으로 쓰이는 명교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동서 양쪽에는 1칸의 협실을 내고, 중앙 3칸은 대청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성지(宣城誌)』 기록에 의하면 명교당 서쪽의 큰 방은 직방재(直方齋)이고, 동쪽의 작은 방은 정일재(精一齋)라고 한다. 직방은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의 일을 바르게 처리한다.[경의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의 준말이고, 정일이란 “마음을 오직 정밀하게 하고 한결같이 한다[유정유일(惟精惟一)]”의 준말이다. 이곳에 역동서원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전사청은 제수를 장만하여 보관하는 곳으로 1칸 건물이며, 주소는 서원을 수호하는 고지기가 거처하는 곳이다. 동·서재는 원생들이 기숙하면서 강학하던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지붕의 형태는 맞배지붕이다. 동재는 사물재, 서재는 삼성재로 명명하고 있다.
◆ 건축 구성
내삼문(內三門), 상현사(尙賢祠), 명교당(明敎堂), 동서재(東西齋), 전사청(典祀廳), 외삼문(外三門), 주사(廚舍)
◆현판
명교당(明敎堂)
정일재(精一齋) : 『서경(書經)』 「인심도심(人心道心)」의 “순임금이 말하였다. 인심(人心)은 단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미묘하니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야 진실로 중도(中道)를 잡을 것이다.[帝曰人心惟危道心惟微惟精惟一允執厥中]”에서 따온 말이다.
직방재(直方齋) : 『주역(周易)』「문언전(文言傳)」의 “경건함으로 내 마음을 곧게 하고, 올바름으로 내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에서 따온 말이다.
삼성재(三省齋) :『논어(論語)』 「학이(學而)」편 “증자(曾子)가 하루에 세 번 반성(三省)했다.”는 구절을 따온 것이다.
광명실(光明室)
사물재(四勿齋) : 『논어(論語)』 「안연(顔淵)」편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도 말라[非禮勿視非禮勿聽非禮勿言非禮勿動]”에서 따온 말이다.
상현사(尙賢祠), 신문(神門), 역동서원기(易東書院記), 역동서원중수기(易東書院重修記), 역동서원이건기(易東書院移建記)
◆ 주향자
- 우탁(禹倬, 1263~1342)
자는 천장(天章) 또는 탁부(卓夫)이며, 호는 단암(丹岩) 또는 백운당(白雲堂)으로 세칭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 부른다.
단산현(丹山縣) 품달리(品達里) 신원(新院:지금의 충북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에서 출생한 역동은 본관이 단양(丹陽)이며, 시조 우현(禹玄)의 7대손이고, 남성전서문하시중(南省典書門下侍中)으로 추증(追贈)된 우천규(禹天珪)의 아들이다.
역동은 17세인 1278년(충렬왕 4)에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되었으며, 곧 발탁되어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되었다.
그 뒤 1290년(충렬왕 16)에 정가신(鄭可臣)이 주관한 과거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영해사록(寧海司錄:지금의 경북 영덕의 지방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팔령(八鈴)이라는 요괴한 신사(神祠)에 백성들이 현혹하여 많은 폐해가 자행되므로 사(祠)를 부수어 바다에 던져버림으로써 음사(淫祠)를 끊어버렸다.
그 뒤 여러 고을의 지방관을 역임하면서 미신을 타파하고 퇴폐적인 풍속을 개혁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특히 지나친 불사(佛事)의 폐단과 승려의 타락을 금지하는 등 척불운동에 앞장섰다.
1308년 8월에 충선왕이 즉위하여 10월 24일에 부왕인 충렬왕의 후궁이었던 숙창원비(淑昌院妃)를 범간(犯奸)하는 패륜을 자행하자, 감찰규정이었던 역동은 이튿날 도끼를 들고 임금 앞에 나아가 자신의 말이 잘못되었을 때는 목을 쳐도 좋다는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렸다.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군왕의 비행을 직간한 역동의 충의와 절개에 근신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고, 군왕은 부끄러운 빛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어서 벼슬을 포기하고 향리인 단양으로 돌아가 학문에 전념하였으나, 그 뒤 진현관(進賢館)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고 또한 성균관 좨주(종3품)로 승진하였다. 이때 역동은 관학(館學)의 확립을 의논하였으며, 성균관 유생들에게 정주(程朱)의 성리학을 강명하여 고려 말기에서 새로운 학풍으로서의 신유학 진흥에 매우 힘을 썼다.
고려는 말기에 이르러 인륜의 강상(綱常)이 무너지고 사회 질서가 해이해지고, 충렬왕 대에는 원(元)과의 예속적 관계에서 그 여폐가 우리의 의복 등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자 역동은 정주의 의리학을 정연(精硏)하여 통달하였던 학문적 바탕을 가지고 천도(天道)와 인륜을 밝히고 사회적 폐풍을 개혁하고자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다.
여러 번의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벼슬에 뜻이 없었던 역동은, 특히 당시 상황에서 정도 구현이 어려운 때임을 알고 벼슬을 그만둔 뒤에 복주(福州)의 예안현(禮安縣:지금의 안동군 와룡면 선양동)으로 퇴거하였다.
그 뒤 충숙왕(忠肅王)이 역동의 충의를 높여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오로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다가 1342년(충혜왕 3) 2월 7일, 81세로 생을 마쳤다.
공민왕 때에 성균관 대사성이었던 목은 이색이 청하여 문희공(文僖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조선조에 들어와 역동의 학문과 덕행을 흠모하였던 퇴계 이황이 주창하여 구택 근처에 역동서원(易東書院)을 창건하였다.
그 뒤 역도의 본향인 단양의 단암서원(丹岩書院), 최초의 사관지(仕官地)였던 영해(寧海)의 단산서원(丹山書院), 그리고 안동의 구계사원(龜溪書院), 대구의 낙동서원(洛東書院) 등에 향사(享祀)되었다.
역동은 어려서부터 당시 주자학을 전래하고 유교 중흥의 선도적 역할을 한 회헌 안향(1243~1306)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주자학의 전래와 보급에 힘썼던 안향에게 배웠으므로 당연히 그의 학문의 기본 성격은 주자학에 있다.
그는 그 중에서도 역학에 밝았다. 『고려사(高麗史)』 「본전(本傳)」에서 “우탁은 경서와 역사서에 통하였으며, 더욱 역학에 깊어 복서(卜筮)에 맞지 않음이 없었다. 정자의 역전(易傳)이 처음 우리나라에 건너왔을 때 능히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우탁이 문을 닫고 한 달 동안 연구하여 생도들에게 가르치니 이학이 비로소 행하여졌다.”라고 하였다.
정자의 역전은 역을 성리학적 의리론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를 받아들인 우탁의 역에 대한 의리학적 이해는 종래의 신비적이고 주술적인 점술의 입장을 지양하고 윤리적으로 합리적인 사유로 역을 이해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또한 그의 역학은 우리나라의 의리론적 역학 연구의 선하(先河)를 이루어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이색, 정몽주, 정도전, 권근 등의 역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도학파의 조종(祖宗)으로 추앙받는 정몽주는 1367년(공민왕 16)에 역동을 동방사림(東方士林)의 조종으로 받드는 상소를 올렸다.
조선 초기 유학자인 점필재 김종직은 예안(禮安)을 지나면서 지은 「추감시(追感詩)」에서 역동의 충절을 송의 당개(唐介)에, 학문은 후한의 정현(鄭玄)에 대비하여 그 학덕을 칭송하였다. 1591년(선조 24) 일본 사신이 내왕하자 지부상소를 올렸던 조헌(1544~1592)은 “우리나라가 군신과 부자의 도리를 알게 한 것은 우탁이 소학과 가례를 가르치고 밝혔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러나 우탁을 가장 존숭한 사람은 퇴계 이황이다. 그는 역동서원을 창건하고, 친필로 현판과 액자 등을 명명(命名)하여 적었다. 이황은 우탁을 경모하는 이유로 충의대절과 경학에 밝음과 진퇴의 정당함에 있었음을 그의 「역동서원기(易東書院記)」에서 밝히고 있다.
출처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사이트
■ 내앞마을
의성김씨 집안의 중시조는 청계 김진이다. 그는 자녀교육을 잘 한 인물로 유명한데,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청계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에 와 책을 보고 있는데 한 사람이 지나가다 그의 관상을 보면서, "살아서 참판 되는 것보다는 증판서가 후일을 위해 유리할 것"이라고 한다. 그는 즉시 과거를 포기하고 고향에 내려와 자녀 교육에 힘쓴다. 한 예로 큰 자식이 급제한 후 부인 없이 어린 8남매를 키우는데, 밤에 칭얼대는 자식들을 위해 자신의 젖을 물려 키웠다고 한다. 그렇게 장성한 자식들은 5형제 모두가 과거에 합격한다. 그래서 청계 집안을 '五龍之家'라고 한다고 한다.
그 중 넷째가 학봉 김성일 선생이다. 학봉 선생은 퇴계의 제자이다. 그는 임금 앞에서 바른 말을 서슴없이 하는 강직한 선비였다고 한다. "유가에는 3년마다 금부도사가 드나들어야 되고, 갯밭에는 3년마다 강물이 드나들어야 한다"는 안동 지역의 속담을 몸소 실천한 분이다. 그는 임진왜란이 나자 싸움터에 직접 나가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꼽히는 진주대첩을 이끌고 얼마 후 과로로 죽는다. 선생이 남긴 절구 한 편이 참으로 감동적이다.
촉석루에 오른 세 사나이
한잔 술 마시고 웃으며 남강 물 두고 맹서하네.
남강 물은 넘실대며 세차게 흐르노나.
저 물결 마르지 않듯 우리 혼도 죽지 않으리.
학봉 선생에 대한 영남 선비들의 존경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사건이 하나 있다. 그것은 중앙선 철도의 노선을 우회하게 만든 사건이다. 중앙선은 서울 청량리에서 경북 안동까지 가는 철도 노선이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중앙선을 처음 설계할 때, 그 노선이 학봉의 묘소가 있는 안동시 와룡면 이하동 가수천을 관통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설계대로라면 학봉 묘소의 풍수에 치명적인 상흔을 남기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학봉의 제자들과 후손을 포함한 영남 유림 수백 명이 들고 일어나 총독부에 진정서를 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설계를 맡았던 일본인 책임자 아라끼란 사람도 학봉이 영남에서 존경받는 큰 선비임을 알고 철도 노선을 수정했다고 한다. 이 설계 변경으로 원래 계획에 없던 터널을 다섯 개나 새로 뚫어야 했다.
학봉 선생은 또한 국어 상 8단원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소개된 '경명충렬'이라는 글의 주인공 고경명과도 친분을 나누었는데, 그 사연이 또한 기막히다. 고경명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 60세였다. 노구를 이끌고 전쟁터에 나갈 때, 첫째와 둘째 아들을 동행한다. 막내아들은 대를 잇기 위해 바로 학봉 선생댁으로 보낸다. 셋째 아들 용후는 50명이 넘는 가솔을 이끌고 안동의 학봉 집안으로 간다. 전쟁의 참혹한 상황 속에서 학봉의 부인과 아들들은 용후와 그 가솔들을 잘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이후 고용후는 생원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10년 후에 안동부사로 부임한다. 이에 고용후는 파발마를 보내 학봉 선생의 노부인과 장자 김집을 안동관아로 초대하여 크게 잔치를 베푼다. 잔치날 고용후는 "오늘날 소생의 영광이 있는 것은 후덕하신 태부인과 애경당의 20년 전 은혜 덕택입니다. 두 분의 은덕이 아니었더라면 어찌 오늘이 있겠습니까?하고 울면서 큰절을 올렸다고 한다.
이제 학봉선생의 자손 이야기를 하나 하고 마치자. 의성김씨 문중 가운데 독립운동을 해 훈장을 받은 이가 27명이고 학봉의 후손만 따져도 11명이나 된다고 한다. 학봉의 13대 종손 김용환에 관련된 다음의 이야기는 한국적 노블레스 오블리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그는 학봉종택에 대대로 내려오던 전 재산(현 시가로 180억 가량)을 팔아 모두 독립군 자금으로 보냈다. 그런데 당시 김용환은 안동 일대에 유명한 노름꾼이자 파락호로 소문났었다. 일제의 감시를 벗어나기 위해 철저하게 자신을 위장했던 것이다.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헌신했는지는 그의 외동딸인 김후웅 여사의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의 한 구절에서 드러난다.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 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 서씨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시냉 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탁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다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시행 날 늦추다가 큰어매 쓰던 헌농 신행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 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 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다 바쳤구나'
자료출처 ; http://blog.daum.net/kil0930/27
■ 김동삼
일송(一松), 김긍식(金肯植) (1878년(고종 15)-1937년) 본관 의성(義城) 원명은
김긍식(金肯植), 호는 일송(一松). 경상북도 안동 출신
생애 및 활동사항
1907년 고향에서 유인식(柳寅植)·김후병(金厚秉) 등과 젊은 일꾼의 양성을 위해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세웠으며, 1909년에는 서울양기탁(梁起鐸)의 집에서 신민회(新民會) 간부들과 독립운동의 기반 마련과 독립투사의 양성책을 협의하였다.
1910년 국권 침탈로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1911년 만주로 건너가 통화현삼원보(通化縣三源堡)에서 이상룡(李相龍)·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윤기섭(尹琦燮)·김창환(金昌煥) 등과 함께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여 재만 동포의 농지개혁과 생활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하여 교육에 힘썼다.
1911년 경학사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1912년 여준(呂準)·이탁(李沰) 등과 남만주의 동포 자치기관으로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여, 민생 교육과 군사 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 합니하(哈泥河)로 이전하여 온 신흥강습소를 통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으며 신흥학우단을 조직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1914년 이탁·김창환 등과 유하현(柳河縣)의 밀림지대에 독립운동기지인 백서농장(白西農莊)을 개설하였다.
1919년 4월 이상룡·이탁 등 남만주 각지의 지도자들과 유하현 삼원보에서 부민단을 확대, 개편하여 한족회(韓族會)를 발족시켰으며, 서무 부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무장 독립운동을 위해 조직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1920년 지청천(池靑天)과 함께 소속 부대를 안도현(安圖縣) 밀림 속으로 옮겨 제2의 군사기지를 구축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11월 일제의 대병력이 간도를 침략하여 소위 불령선인(不逞鮮人) 토벌(討伐)이란 명목으로 서북간도 전역에 걸쳐 한인들을 무참히 학살을 자행하던 당시, 북로군정서군 및 홍범도(洪範圖)의 군과 합세하여 밀산(密山) 및 러시아 등지로 이동하여 독립군의 희생을 줄였다.
1922년 연해주(沿海州) 각지 등을 순회하면서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던 끝에, 봉천성 흥경현(興京縣)에서 각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통의부(統義府)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피선되었다.
1923년 북경(北京)에서 열린 국민대표대회에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석하고 의장으로 선임되어 회의를 이끌었다. 이때 개조파(改造派)와 창조파(創造派)로 갈려 대립을 보이자 이를 조정하여 독립운동기구를 일원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실패하였다.
1925년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자 참모장 및 행정 위원에 취임하여 화순(樺旬)·유하(柳河) 등지를 돌며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일본 경찰의 파출소를 습격하여 타격을 주었다. 1926년에는 두 차례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원에 임명되었으나,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을 위해 취임하지 않았다.
1928년 길림(吉林)에서 정의부 대표로 김좌진(金佐鎭)·지청천·현정경(玄正卿)·이규동(李奎東) 등과 두 차례나 만나 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 등과 삼부통합회의(三府統合會議)를 진행하였다.
그 해 12월 혁신의회(革新議會) 의장,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民族唯一黨在滿策進會) 중앙집행위원장 등을 맡아 만주 지역 독립운동의 내적인 모순점인 계파간의 갈등을 없애고 유일당을 결성하는데 주력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때 하얼빈정인호(鄭寅浩) 집에 투숙 중 동지 이원일(李源一)과 함께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신의주를 거쳐 서울로 이감된 뒤,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7년 3월 3일 순국하였다.
“내가 조국에 끼친 바 없으나 죽은 뒤 유해나마 적 치하에 매장하지 말고 화장하여 강산에 뿌려 달라.”는 옥중 유언에 따라 유골은 한강에 뿌려졌다.
상훈과 추모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 http://people.aks.ac.kr/front/search/totalSearch.aks
■ 김대락(金大洛)
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의성(義成), 자는 중언(中彦), 호는 비서(賁西)이다. 만주에 들어가 백두산 기슭에 산다는 뜻에서 백하(白下)라는 별호(別號)를 사용하기도 했다. 1845년(헌종 11)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서 우파(愚坡) 김진린(金鎭麟)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활동사항]
김대락은 1845년 안동에서 세가 좋았던 천전(川前: 내앞) 마을에서 태어나 퇴계학맥을 계승한 정재 류치명의 문하에서 수학한 조부 김헌수, 숙부 김진기, 족숙 김흥락의 문하에서 성장하였다. 이들은 모두 안동의 대유학자였으며, 특히 김진기는 개항기 안동의 대표적인 위정척사 운동가였고, 서산 김흥락은 안동의 전기 의병을 지휘하였던 인물이다. 이렇게 김대락은 좋은 집안의 장자로서 집안의 대소사를 돌보며, 구학문으로 일가를 이루는 수구적 삶을 66년 동안 살아왔다.
그러나 그의 인생 여정 후반기는 변화의 시기였고, 지식인으로서 향당의 안정된 삶에만 안주할 수는 없었다. 변화의 바람은 가까이에서 불었다. 1907년 마을에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가 설립되었고, 상투를 자른 젊은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이들은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며 신학문의 필요성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처음에는 이들을 강하게 비판하던 김대락은 1909년 초 노유(老儒)로서는 하기 힘든 일대 전환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는 협동학교의 신교육이야말로 ‘시조지의(時措之宜)’ ‘시중지도(時中之道)’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곧 실천으로 연결되어 자신의 집을 협동학교 교실로 제공하고, 협동학교의 확장에 노력하였다. 그의 이러한 변화는 안동의 향중은 물론 영남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김대락은 1910년 나라가 멸망하자 또 한 번 고된 길을 선택하였다. 일가를 이끌고 만주 망명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의 만주 망명은 자정적(自靖的) 성격이 강한 망명길이었다. 일본이 지배하는 조선, 즉 도(道)가 무너진 세상으로부터 멀리 떠나 자정의 삶을 지향하겠다는 의리론적(義理論的) 대응이었다. 김대락은 망명 후 다시 한 번 사상적 진화를 보여주었다.
1911년 윤6월 12일에 작성한 신흥학교 「권유문」에서는 사상적으로 한층 진일보한 김대락의 인식을 읽을 수 있다. 서양의 문명과 새로운 조류에 대해 ‘사회진화론’에 입각하여 강자인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서양을 배우되 나라를 빼앗긴 특수한 상황에서 유가의 정신인 ‘사생취의(捨生取義)’의 도리 정신으로 국혼은 지켜야 한다는 유가(儒家)로서의 본질적 취지는 변함없이 고수하고 있었다.
이러한 성격은 1913년 「공리회 취지서」에도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김대락은 삼원포의 한인 단체였던 경학사가 무너지고, 갖가지 생활고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삼원포 사회에 새로운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공리회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김대락이 지향했던 자치단체는 ‘도와 덕’이 중심이 된 유교적 이상 사회이면서 ‘새로운 자유와 평등’의 시대관이 담긴 대동 사회였다. 이것이 바로 김대락이 꿈꾸었던 ‘만주 망명 한인 사회’의 모습이었다. 이처럼 김대락은 만주 망명 후 줄곧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고, 이주 한인들의 안정된 정착을 위해 노력하다가, 1914년 12월 10일 삼원포 남산에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백하일기(白下日記)』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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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답사 자료 준비하느라 너무 수고 많았군요 감사합니다. ^*^
답사 자료 잘 봤습니다. 15부 정도 출력하시면 될 것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김국장님 수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