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미술
초기 기독교, 비잔틴, 로마네스크, 고딕미술 등 14세기까지 서양의화가들은 대부분 예수나 성인의 일생과 같은 기독교적인 주제를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종교화를 더욱 성스럽게 표현하기 위해 화가들은 풍부한색채와 금도금을 이용해 그림을 그렸는데, 오늘날에는 단조롭게 보일지도 모를 이들 그림들이 중세인들에게는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중세 시대는 다른 여러 시대하고는 달리 이질적이고 특색있는 미술을만들어 전개하였다. 그 특색은 당시의 미술이 모든 의미에 있어 기독교 미술이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중세 이후에 있어서도 기독교미술은 풍부한 전개를 다 하고 있다. 중세의 예술가들은 신앙과 교리란 틀 안에 있으면서 신의 지배와 교회의 권위 아래서 작품을 제작하였다.예술적 개성은 종교적 권위의 규범과 제약 아래서만 성립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중세 예술의 대부분은 '무명의 예술가'들의 작품이며, 때로는집단적인 협동 제작이었다. 그들 위에 있는 것은 교회이며 교리이며 또 민중의 신앙이었다. 이와 같은 기독교 미술로서의 조건이 중세미술과기타의 여러 성격을 대부분 규정짓는 것이었다 해도 무방하다.
이집트 미술이 왕을 위한 미술이었다면 그리스는 인간 개인을 위한 미술, 하지만 중세 미술은 신을 중심으로 하는 미술이었다. 천년 가까운 세월 동안 회화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하지만 이 천년 동안 서양 중세 미술을 하나로 요약할 수 있는 키워드는 신과 기독교 신앙이었다. 물론 예외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회화는 글을 읽지 못하는 일반인들에게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한 시각적 보조물로, 건축은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지상에 건설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달해 갔다. 그리고 이런 수단을 표현하는 방법은 시기별로 각각 차이가 있는 양식으로 변화했다.
초기 기독교의 미술은 우상 숭배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그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양치기나 동물들을 상징적으로 그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후 비잔틴 제국의 교회를 장식한 그림들은 주로 모자이크화로 돌, 유리, 조가비 등 각종 재료의 조그만 조각으로 무늬나 회화를 구성하여 건축물 또는 공예품 표면에 접착제로 붙인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 방법은 입체감이나 미세한 뉘앙스까지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비잔틴적인 추상 세계를 표현하는 데 적합했다. 특히 이 표현 양식은 무엇보다도 색채의 효과가 중시되어 3차원적인 표현에서 입체감이나 원근 표현은 되도록 피하려 하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로마네스크는 기원전 1000년경부터 1200년경 사이에 유럽 전역에 걸쳐 유행한 기독교 미술 양식이며, 12세기 중엽부터 14세기에 이르기까지는 고딕양식의 기독교 미술이 유행했다. 고딕 회화의 대표적인 것은 스테인드글라스로 여러 빛깔의 유리 조각이 창문 전체를 종교적 화상으로 메운 아름다움과 그것을 통해 들어오는 광선의 영롱함으로 성당 안을 종교적인 경건함으로 채우게 했다.
기독교가 박해를 받았던 시기로부터 비잔틴, 로마네스크, 고딕 양식에 이르기까지 미술양식은 많은 변화를 꾀했다. 그리고 이 모든 미술의 특징은 신 중심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개성이나 인간을 그린 것은 이 시대에 무의미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중세 말에 이런 양식에 대한 각성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났다. 그 후 지오토를 비롯한 화가들이 중세의 평면적인 회화를 현실을 실감나게 표현하는 표현 기법을 개발하기 시작했고, 소재나 주제에 대한 관심도 점차 인간적이고 주변 현실로 옮겨가는 움직임이 일었다.
중세 초기 미술: 카타콤
카타콤벽화
Cataconb 은 초기 기독교의 지하 공동묘지로 나폴리, 시라쿠사이, 말타, 아프리카, 소아시아 등의 여러 지방에서 볼 수 있는데 특히 로마 근교에 특히 많다.
카타콤있는 주변
카타콤 입구
카타콤 지하 입구
겨우 한 사람 통과할 폭
그 구조는 지하 10~15m의 깊이에 폭 1m 미만, 높이 2m 정도의 통로를 종횡으로 뚫고 계단을 만들어서 여러 층을 잇고 있다.
둥근 아치형 묘는 성인들의 묘
성녀 카트리나의 묘1
성녀카트리나의 묘2
사각 구멍은 잠자리겸 묘 역활
카타콤의 미로들
카타콤은 피장자를 묻는 동시에 기독교가 공인되기 이전에는 기독교도들간에 은밀하게 비밀리에 예배를 보고 기타 여러 가지 종교의식이 행해지던 장소이기도 했다. 여기에 남겨진 수많은 벽화는 고대 기독교 미술의 변천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고 예술사적인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카타콤의 벽화는 장식적인 동기로 만들어졌으나 동시에 신도들로 하여금 신앙심을 북돋우고 기독교적 도상에 의해 그 의식을 굳히는 몫으로도 그려졌다.
성 피에트로에 마첼리노의 카타콤 천장화(4C초, 로마)를 보게 되면 로마의 이교도 그림 양식을 답습한 것이 분명하다. 다만 인물상들의 자세가 경직되어 있고 약간 평평한 면에 그려져 있다는 것이 다른 점일 뿐이다. 이 카타콤에서는 현세에서의 행복보다는 구세주와 내세의 생활에 집중되어 있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사를 알아볼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화가들이 갑작스럽게 이와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상징, 다시 말해서 그 어떤 다른 존재세계에 속하는 것,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나타내는 형태 또는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그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림을 각 장면으로 구획하며 또 결합시키는 그림의 틀은 그 자체가 복잡한 상징적 구조이며 각 틀의 장면도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4세기 말(392)에 이르러서야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기에 이르렀고 이는 미술에 있어서도 혁신적인 계기를 만들어 이곳저곳에 거대한 성당이 세워지고 이에 따라 광대한 벽면에 그릴 그림의 필요성이 대두되게 된다. 이에 비해 카타콤은 상대적으로 너무 소박한 그림이었고, 이는 고도로 훈련된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계기를 창출하게 되었다. 바로 이들이 초기 그리스도교의 벽면 모자이크를 만들어낸 장본인들이었다. 이것이 주는 효과는 여지껏 카타콤이 주는 초라함을 한층 웅장함으로 변모시키는 것이었다.
비잔틴 미술
비잔티움(Byzantium, 콘스탄티노플, 이스탄블)을 중심으로동 로마 제국에서 5세기부터 약 1천년간 계속된 기독교 미술을 말한다. 초기 기독교 미술을 계승하고 여기에 소아시아. 시리아 등의요소가 가미되면서 5세기부터 발달하였다.
테살로니키 지역의 고대 그리스도교 및 비잔틴 기념물군 ( Paleochristian and Byzantine Monuments of Thessalonika ) 바실리카식 1988년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
교회당 건축은 원개(圓蓋)를 덮은 집중식 건축, 또는 원개 바실리카(Basilica)식이유행했고 내부는 모자이크로 장식됐다. 교회당 벽화는 처음에는 초기 기독교적인 주제가 그려졌지만,성상(聖像)파괴 운동(726~843년) 이후에는 교의(敎義, Dogma)의유형화된 묘사만 장식되어 도상학(圖像學, Iconog raphy)으로 통일된 상이 나왔다. 단 4세기 이전에도 준비 시기가 있었으며(예를 들면, 시리아의 두라 에우로포스 유적), 고대로부터의 탈피는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종교 교의(敎義)·정치·군사 상의 이유로 6세기 이후 제국(帝國)의 중심으로부터 점차 분리하여 자립한 여러 지역이 있다. 콥트(이집트)·누비아·에티오피아·시리아·팔레스타인·아르메니아·게오르기아·불가리아·세르비아·러시아 등이 그곳으로, 그 지역의 미술은 비잔틴미술과의 연결은 다소 있으나, 각각의 독창성이 차차 인식되어 갔다. 이러한 것들은 비잔틴미술의 틀에서 나온 것으로, 오히려 동방정교회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야 한다.
비잔틴미술은 그 시대적 지리적 위치로, 고대 헬레니즘 미술의 뒤를 이어 그 전통에 고대 아시아의 전통과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영향 등을 더하고, 신흥 그리스도교를 정신적 기초로 새로운 에너지를 가지고 흥륭하였다. 또한 이슬람 미술과도 어느 정도 교류하면서, 약간의 시대적 변화와 어떤 종류의 일관성을 가지고 10세기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이처럼 비잔틴미술은 고대 이집트 미술과 함께 생명력이 있는 미술로 평가되고 있다.
보통 이것을 3기로 나누며,전기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시대로부터 아이코노클래즘 [聖畵像破壞]의 마지막까지 (6∼9세기), 중기는 마케도니아 및 콤네노스 왕조(9∼12세기), 후기는 팔라이오로고스 왕조(13∼15세기)이다.
유물 및 유적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유스티니아누스 건립)
주두 장식이 화려하고, 터키의 칩략으로 회교성당이 되었다.(첨탑은 이때 세워졌다)
비잔틴제국이 가장 자랑할 수 있는 예술을 들 경우 의당 조형미술 분야이며 그 대표하는 것은 오늘날 이스탄불에 있는 성소피아성당이다. 유스티니아누스황제는 그 교회를 '그와 같이 훌륭한 것은 아담 이래 일찍이 없었고 또 앞으로도 없을 교회'로 짓기로 작정했다고 한다. 유스티니아누스시대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그 교회의 장엄함과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이 칭송한다.
"그 교회에 들어가면 당장에 그것이 사람의 노력이나 근면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신의 힘으로 이루어진 작품인 것을 느낀다. 그리고 정신은 하늘에라고 오른 듯하여 신이 바로 가까이 신 스스로 택하신 이 거처를 기뻐하심을 깨닫는다." 화려하면서도 신국(神國)에라고 온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하는 교회. 그것이 성소피아(Hagia Sophia) 성당 이었던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황제가 성소피아성당을 지은 후 "솔로몬이여, 나는 그대를 이겼노라"라고 외쳤다고 한다. 교회는 로마의 바실리카 양식과 페르시아의 둥근지붕 양식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걸작이었다. 게다가 눈부신. 색채 대리석과 에나멜. 금은보화와 견직물. 벽과 천장의 그림과 선명한 모자이크 등이 교회의 내부를 아름답게 꾸몄다.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스만 투르크족은 놀랍게도 성소피아성당을 파괴하지 않고 예찬했으며, 심지어 이슬람사원을 짓는 데 모방했다.
성 비탈레 성당 :라벤나에 있으며, 모자이크가 유명하다.
라벤나 비잔틴 박물관
성마르코 대성당
베네치아에 세워진 후기 비잔틴의 대표적 양식으로, 러시아에 영향을 주어 모스크바에 '성 바실리브라젠느' 성당이 세어지게 되었다.
726년 '성당예배금지칙령'이후 성상 파괴운동이 일어나, 미술의 발전은 843년까지 저해되었다. 조각은 별로 발달하지 못했고, 성당내벽에 모자이크로 장식된 그림과 패널화가 주종을 이루었다.
회화 작품 '데오도라황후와 시종들 '547년경 , 라벤나산비탈레
돔형식 건축의 특징은 둥근 지붕을 갖춘 동양적인 외관과 모자이크에 의한 풍부한 색채의 그림이다.여러 가지 색깔의돌이나 유리를 사용한 모자이크화는 종교적 효과를 내는데 도움이 되며 비잔틴 회화의 주류가 되었다.
다시 한 번 비잔틴 미술을 간략 정리해 본다.
-비잔틴 회화의 관련 화가-
Cavallini, Pietro c.1250∼1330 카발리니
이탈리아 화가. 체츠로니집안에서 태어나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초에 걸쳐 로마에서 활동한 화가들(로마파)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사료가 많지 않으며 로마에서 활동하였고, 14세기 초에 앙주집안의 초청으로 나폴리에 갔으며, 장수하였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그리스도 탄생 Nativity of the Virgin 카발리니(1291년)모자이크. 로마,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아기 예수를 돌보고 있는 사람과 편안한 자세의 성모마리아 그리고 주변의 시중드는 인물 구성이다.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광장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는 교회로 내부의 창, 성단의 아치를 장식하고 있는 모자이크는 카발리니의 걸작이다. 기원전 3세기 경에 설립된 후 12세기 경에 재건되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로 정면의 원주를 끼워넣은 아치와 종루 등이 중세의 분위기를 전해준다
카발리니의 작품은 당시 로마에 뿌리내리고 있었던 로마네스크양식과 비잔틴 회화기법을 기반으로, 고대 또는 초기 그리스도교미술에서 배웠다고 생각되는 신선한 조형요소가 발견된다. 인물 묘사에서는 양감(量感)을 가지고 견실하게 그렸으며, 인간성을 갖추고 있다.
대표작으로 로마 트라스테베레의 산타마리아성당의 후진(後陳)을 장식하는 모자이크화 《성모의 생애(1291)》와 산타 체칠리아성당의 프레스코화 《최후의 심판(1293)》 등이 있다.
-장식미술-
이 시기에 장식이란 단순한 벽면 미화가 아니라, 조형적 수단에 의하여 공간 내부를 성화(聖化)하여 거기에 초자연적인 세계를 현실에 나타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성스러운 것 또는 성스러운 공간은 현세 또는 물질계의 것처럼 나타내면 안되었다.
특히 건축 내부에 집중되었으며 십자가, 여러 종교 용구, 제단 등이 황금·보석 등으로 만들어졌으며, 비단 등을 사용한 호화로운 염직품이 귀하게 여겨졌고, 건축장식으로는 색유리를 많이 사용하는 모자이크 미술의 발달을 가져왔다. 그 전형적인 것으로는 이탈리아의 라벤나에 풍부하게 남아 있다.
-건축물 -
비잔틴 건축의 주요한 것으로는 성당이었다. 건축 양식은 초기 기독교 시대의 바실리카 형식과 동방의 전통적인 팔각당(원당) 형식의 두 종류가 있는데, 이것들은 소아시아 지방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바실리카 양식에서 집중형 돔형식으로 변화되고 돔 안에는 모자이크 벽화가 그려졌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성 소피아 성당, 모자이크로 유명한 성 비탈레 성당, 성 마르코 성당등이 있다.
그리스도나 성모를 판자 위에 예배의 대상으로 그린 이콘 (휴대 가능한 나무판에 그려진 그림), 즉 성상화가 그려졌는데 템페라나 납화법으로 나무에 그려진 호화로운 이콘들은 작은 모자이크 타일로 대체되면서 더욱 화려해졌다. 특히 황제의 선물로 사용되기 위해 디자인된 이콘들은 값비싼 금속과 애나멜을 사용함으로써 더욱 풍부해졌다.
-모자이크-
모자이크란 돌.유리.조가비 등 각종 재료의 조그만 조각으로 무늬나 회화를 구성하여 건축물 또는 공예품 표면에 접착제로 붙인 것을 말한다. 그리이스 , 로마 시대에는 대리석 모자이크로 마루 바닥이나 벽면 장식에 사용되다가 이것을 회화로서의 위치로 끌어올린 것이 비잔틴 미술이다.
모자이크는 입체감이나 미세한 뉘앙스까지 표현하기는 힘들지만,비잔틴적인 추상세계를 표현하는 데는 적합한 것이었는데 비잔틴에서는 유약 ( 釉藥).유리를 주로 하고 조가비와 금박 . 은박을 적당히 섞어 사용하여, 광선의 반사작용으로 신비로운 느낌과 함께 공간의 확대감을 주었다. 그러나 모자이크는 값비싼 예술이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프레스코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로마네스크 미술
로마네스크양식을 따른 서울 성공회 건물
로마네스크는 중세 유럽에서 11세기부터 12세기 중엽에 걸쳐 발달한 그리스도교 미술을 말한다.
9세기에 카롤루스대제의 제국이 분열·해체되고 이탈리아·독일·프랑스 등 새로운 왕공제후(王公諸侯)가 등장했다. 이들 하부구조는 많은 소영주로 세분되어 카롤루스왕조의 중앙집권적 문화와는 달리 지방 분권적인 문화활동의 태도를 가져왔다. 10세기 중엽부터는 비교적 혼란없이 서부 유럽 일대에 새로운 사회적·정치적 질서를 회복하려는 문화활동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비교적 좋은 조건이 갖춰진 정치·경제·정신의 안정 속에서 로마네스크 예술이 등장했다.
북으로는 스칸디나비아에서 남으로는 지중해 연안까지, 동으로는 폴란드, 헝가리, 발칸반도 북서부에서 서쪽으로는 아일랜드까지 전유럽적 규모를 가진 미술운동이 확산되었다. 프랑스·영국 등에서 로마네스크양식은 12세기 후반부터 고딕양식으로 바뀌었지만, 독일·동유럽·이탈리아·이베리아반도 등에서는 13세기에 들어서도 역시 로마네스크미술이 존속했다.
이 미술의 현저한 성격 중의 하나는 전시대 즉, 카롤링거왕조까지의 미술이 궁정 및 그 세력을 배경으로 한 수도원을 중심으로 해서 발달했고, 사회의 상류층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에 반해, 깊이 서민 사회에까지 미술이 침투해, 교회만이 아니라 벽지나 농촌의 교회, 수도원까지 창조 활동에 큰 의욕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 서민성은 특히 소재면에서 나타난다. 즉 전시대까지 즐겨 이용한 대리석(건축)과 모자이크(벽면장식), 귀금속(십자가·성모자상·제단 등) 등의 뛰어난 재료는 감히 사용할 수 없었고, 성당 등의 건축에는 조잡한 석재(석회암·사암 등)를 이용했다. 그 안벽은 값싼 안료를 이용해서 채색하고 그리스도교의 책형상, 성모자상이나 제단 등을 목조로 하였다. 그리고 성유물숭배(聖遺物崇拜)에 기초를 둔 성지순례의 유행(특히 에스파냐 북서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로마, 이탈리아 남동부의 바리 등)이 기술이나 양식의 전파 교류를 촉진해 통일적인 양식의 보급을 용이하게 했다. 성지 예루살렘의 십자군은 근동방면에까지 유럽의 로마네스크양식을 전파했다.
로마네스크미술은 정립과 발전과정에서 볼때 고대 로마의 미술을 계승하였을 뿐 아니라, 서유럽 특유의 켈트적·게르만적 예술 요소가 강하게 발휘되었다. 또한 비잔틴 미술, 이집트·시리아 등의 동방그리스도교, 이슬람의 영향을 수용했다. 10세기 말에서 12세기(지역에 따라서는 13세기)에 걸쳐서 서양각지에 발전한 미술양식이다.
건축
건축의 특징은 아치형의 석조 천장과 이것을 받쳐주는 창문없는 두꺼운 벽,그리고 굵은 기둥이다. 따라서 내부는 어둡지만 중후하고 신비적인 분위기를 내는데 도움이 되었다.조각으로서는 교회 출입문 정면이나 좌우에 있는 기둥에 성서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동물을 새긴 것이다.창이 작고 벽이 넓은 로마네스크 교회의 실내는 거의 모두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었다.
둥근 천장
이시기 교회의 커다란 특징은 천장 윗부분에 위치한 반원형 삼각형(팀파눔;앱스)에 있었다.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하늘로서 이 반원 속에 그려지는 내용은 우주의 지배자로서 의 그리스도, 성모마리아. 성자, 천사상 등을 권위적으로 표현하였다. <전능하신 그리스도 : 클레멘트 성당>
로마네스크 건축은 물론 종교적인 것으로 한정되지는 않으며 성(城)·민가·다리 등 세속적 성격을 가진 것도 있다. 그러나 당시는 수도회가 문화의 추진자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미술은 교회나 수도원에 의해서 대표되었다.
성당은 우선 평면구조를 보면 전시대부터 계속되는 동향(東向)의 바실리카식(式)을 원칙으로, 익랑(翼廊)을 남동쪽으로 달아낸 십자가형을 나타낸다. 제실(祭室)은 보통 반원형을 나타내며(단, 사트派 성당의 대부분은 方形제실), 그 주변에 주랑(周廊)을 두르고, 게다가 방사상(放射狀)에 소제실(小祭室)을 붙인 예가 특히 순례자가 모이는 성당에 많다.
내부 모습
수도원 성당이나 대성당 등 성직자(수도사·참선회원 등)를 많이 확보한 곳에서는 소제실의 수가 많고 또 내부가 발달해서 신랑(身廊)의 방향으로내어 단다. 신랑은 원칙으로는 좌우 열주(列柱)를 간격으로 해서 측랑(側廊)을 동반하는 3랑식(三廊式)인데 2중측랑을 가지는 5랑(五廊)을 나타내는 예도 있고, 반대로 측랑을 갖지 않는 단랑식(單廊式)도 있다.
신랑의 서단(西端)에 전실(前室)을 부속시키는 일도 많은데, 이 경우 그것이 점점 탑의 기초를 나타낸다. 수도원에서는 성당의 남쪽에 사각형의 정원을 두르고 있는 회랑(回廊)이 설치된다(남프랑스와 북부 에스파냐에 전형적인 것이 많다). 게다가 그것을 둘러싸고 집회실·침실·식당·거실 등 그밖의 방이 부착된다.
건축의 소재 및 기법에 있어서는 할석(割石)이 절석(切石)으로 변했고,특히 그때까지의 목조천장을 새롭게 석조반구형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이 필요했다. 독일·이탈리아 등에서는 목조천장도 공존했는데 석조천장이 활발히 만들어지게 된 것은 화재를 방지하고 음향효과를 좋게 하기 위한 실용적 목적과 영원한 신의 집에 어울리는 질 및 형태라는 상징적·시간적 목적 때문이었다.
구조적으로는 횡단면이 반원형을 나타내는 반원 둥근천장, 첨두형(尖頭形)을 나타내는 첨두반구형 천장, 반원 둥근천장을 직각으로 짜맞춰서 구성한 교차반구형 등이 있는데, 어떤 경우에도 둥근천장의 무게가 그것을 지탱하는 양쪽 벽의 위쪽 가장자리에 있고, 비스듬히 바깥쪽에도 작용하기 때문에 벽은 바깥쪽을 두껍고 견고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창은 작고 실내는 어둡게 된다.
그래서 채광도를 높이고 실내공간의 확대를 목적으로 구조상의 여러 가지 노력이 시행되었다. 내부에 횡단 아치를 설치해서 둥근천장을 견고하게 그것을 바깥에서 지벽(支壁)에 의해서 보강하는 방법이 시행되었다. 교차반구형 천장을 횡단아치로 보강한 것이 더욱 발전해 오지브반구형 천장으로 변했을 때 다가올 고딕건축이 예고되었다.
프와티에의 노트르.담.라.그랑드 성당 : 프랑스 서부의 프와투 지방의 도시, 건축 기독교시대에서 중세에 이르는 수많은 건조물이 있다. 특히 로마네스크의 제성당이 유명하다. <노트르담.라.그랑드성당>(성모 대성당)은 건립연대는 불명한 점이 많으나[할렌키르헤형]성당이며, 특히 서정면의 구성은 동지방의 대표적 건축양식을 나타내 좌우에 소탑이 있으며 전면을 덮는 구.신약의 제장면을 나타내는 조각군은 유명하다. 지하성당에<장엄한예수>, 제실에 성모와 그리스도상의 벽화가 남아 있다.
회화
로마네스크 회화는 고유의 도상을 발전시켰다. 여기에는 심원한 신학적 의미를 가지는데 형식적으로는 육체적인 미의 이미지를 추구하지 않고 정신적이고 영원한 미를 추구하였다. 내용적으로는 교훈적인 내용이 주류를 이루는데 로마네스크 벽화는 "무식한자들의 성서"역할을 했다.
벽화로서는 프레스코화.템페라화 등이 발달하였는데 그 힘찬 터치와 대담한 채색법은 현대 미술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또한 조각이나 회화는 모두 인물의 모습이 초현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이시기 양식의 특징이 되고 있다. 벽화는 그려진 형태들과 함께 전적으로 건축공간에 종속되었는데 그 형태들은 차지하는 공간에 따라 축소, 확대, 분리 결합된다. 인물들은 다양한 두께의 짙은 선으로 정확하게 윤곽선을 통해 강조되었으며 순색으로만 작업했다. 그리고 명암법은 존재치 않고 대신에 서로 다른 색조들을 나란히 배치하여 명암을 시사했다.
현명한 동정녀
현명한 동정녀 : 1100년경, 성 퀴르세 데르데트성당의 내부 벽면을 장식한 벽화도 카롤링거왕조의 벽화에 의해 그 기초가 마련되었다. 특징은 사실성이 결여된 선 중심의 평면적인 묘사로서 광선이나 음영을 인습적인 방법으로 구성한 형식이다. 색채는 평탄하고 강렬하며 색채 자체의 효과를 주장하고 있다. 인물이나 그 밖의 묘사대상의 형상은 일정하게 유형화하고 도식화되어 있으며, 선·색·형의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조형적 표현에 의해 보는 사람에게 커다란 감동을 준다. 그리스도교적인 관념내용을 직관적으로 포착하여 간결한 설화적 내용을 묘사하며 동시에 장식적 효과를 거두는 것이 특색이다.
조각
조각의 재료에 있어 커다란 특징은 서민적이라는 것이다. 중세 초기에는 서유럽에서도 고대의 조상예술이 쇠퇴하고, 대조각은 그 뒤 여러 세기 동안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문양(紋樣) 도형을 중심으로 하는 평면적인 장식부조(裝飾浮彫)로서 순전한 건축물의 장식조각이나, 특히 금속공예·상아조각 등의 공예작품이 주요한 조각의 분야였다.
로마네스크 조각은 당초에 그와 같은 부문에서 성장하여, 12세기 끝무렵에 이르러서는 고대 후기나 카롤링거왕조 미술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성당건축과 결부된 것으로 인간표현을 달성하는 대조각을 낳게 되었다.
<선악과를 따먹은 후의 아담과 이브>
도24 <성 미카엘 성당을 위한 청동문>, 1015년경, 힐데스하임, 대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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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네스크조각은 주로 성당 내부의 벽면과 주신(柱身)·궁륭 등에서 성상(聖像)이나 성경관계의 전기적(傳記的) 내용, 순교자 행적, 우의인물(寓意人物), 연중행사 등을 표현하는데, 그 기법은 로마네스크회화에서와 같이 일반적으로 사실(寫實)의 의도는 없고 고졸적(古拙的)인 엄격성과 경직된 형체 가운데에서 종교적인 정열과 흥분을 보여주고 있다. 후기에 이르러서는 건축 전반에 걸쳐 풍부한 공상적인 조각정신을 건축물의 프리즈나 벽면에서 볼 수 있다.
고딕 미술
노트르담대성당 서쪽 정면, 1163∼1250년, 파리 시테섬
12세기 중엽에 파리를 중심으로 일드프랑스지방에서 일어나, 영국·독일·에스파냐·이탈리아로 급속히 퍼져간 미술. 그에 앞선 로마네스크미술과 나란히 유럽 중세미술을 대표한다.
생드니 대수도원장 슈제르가 이 수도원 재건에 즈음하여, 전유럽에서 건축가·조각가·공예가를불러 모아 고딕양식의 종합적 완성을 이루었다(1144년 성당 祭室部 완성). 건축에 중점을 두었으며 로마네스크의 반원아치에 대하여 첨두(尖頭)아치, 복잡한 교차궁륭, 밖에서 건물을 지탱시켜 주는 버팀벽 등을 짜맞추어 벽체를 극도로 줄이고, 가볍게 하늘을 향해 뻗어나간 독특한 성당양식을 완성하였다. 두터운 벽 대신 찬란한 색채의 스테인드글라스가 건물을 둘러싸 성당 안을 빛으로 채웠다.
처음에는 건축에 종속되어 있던 조각도 차츰 벽체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스러운 3차원의 표현을 하게 되었다. 랭스대성당(1211년 기공)처럼 성 토머스의 신학체계와도 닮은, 정밀하고 광대한 도상학적(圖像學的)·시각적 체계 가운데 새로운 인간주의가 나타나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건축의 스콜라적 복잡성이 쇠퇴하고 대신에 벽면을 중심으로 한 회화가 1270년 무렵부터 급속히 발전하면서, 14세기 전반에는 플롯르네상스라고 불리는 근세미술로의 선구적 비약을 성취하였다. 조토 디 본도네가 그린 스크로배니가(家)의 예배당 벽화(1310년경) 등이 그것이다.
15세기에 들어서면 프랑스의 화염(火炎)양식과 영국의 수직양식 등 화려한 장식적 경향이 나타나, 조각·회화에도 말기로 갈수록 섬세한 정서적 요소가 강해졌다.
건축
시에나대성당, 12세기 무렵
고딕양식이 그 돌파구를 여는 것은 성당건축에서인데, 건축가들에게 최대의 난제가 된 것은 점차로 높이를 더해가는 석조궁륭(볼트)의 가구법(架構法)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구조상의 안정을 확보하면서 상승성(上昇性)을 유지하는 형태를 나타낸 것은 리브(늑골상아치)궁륭과 첨단(尖端)아치이다. 리브궁륭은 밀라노의 성암브로지오성당과 잉글랜드 북부 다람대성당의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최초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북프랑스로 전해져서 12세기 전반에 최초의 고딕식 성당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교차궁륭의 양선(梁線)에 이어서 대각선을 이루는 리브는 궁륭의 중량을 분산시켜 이것을 지주로 유도함으로써, 벽체에 가해지는 횡압(橫壓)을 줄이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또 리브의 채택으로 건축규모의 확대뿐만 아니라, 궁륭에서의 복잡한 역선(力線)을 명확하게 시각화하며, 합리적인 질서를 갖춘 건축구성을 실현시켜 갔다.
첨두아치를 사용한 건축디자인은 이슬람건축에서 그 원류(源流)를 찾을 수 있는데, 이슬람의 영향 아래 조영(造營)된 시칠리아섬과 남이탈리아의 성당건축이 매개가 된 것인지, 혹은 십자군이 가져온 것인지, 그 경로는 명확하지 않다. 리브궁륭이 발전결합된 첨두아치의 주제는 궁륭의 교차부는 물론, 입구·창 기타 모든 아치구조에 적용되었다. 첨두아치의 각도는 역학상의 해결법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하는데, 이것에 의해서 성당의 구조변경도 자유롭게 되었다.
샤르트르 대성당 : 플라잉 버트레스라고 하는 정교한 버팀 구조가 벽을 밖에서 지탱해 준다.
한편, 벽체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외벽에 이어서 만들어진 버팀벽[控壁]과 버팀도리는 스테인드글라스에 의한 채광면의 확대에 유익한 동시에 고딕건축상 외관구성면의 한 특징이 되었다. 이 여러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채택하여, 12세기 중기에 생드니수도원이 개축되었고 이어서 상스·랑·파리 등에 대규모의 성당이 잇따라 기공되면서 초기 고딕양식이 확립되었다.
랭스대성당 내부, 1211∼41년, 프랑스 랭스
이 12세기의 고딕성당에는 아직 로마네스크적 성격이 남아 있었는데, 고딕적 요소를 거의 완전히 구비한 것은 13세기 초기에 착공한 샤르트르·랭스·아미앵의 대성당이다.
프랑스 북부에서 발생한 고딕양식은 인접한 여러 나라로 전파되었는데, 각 지역에 따라 각각 독자적 양상을 보이면서 발달하였다. 영국에서는 13세기 초기부터 링컨·졸즈베리·요크 등의 대성당이 조영되었는데, 프랑스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명쾌한 비례와 단순한 비례로 얼리 잉글리시(초기 영국식)라는 독자적 양식을 확립하였다.
꼴로뉴, 퀼른 대성당
독일에서는 국경에 접한 프랑스 각지로부터 고딕양식을 받아 들였는데, 특히 퀼른과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서 프랑스양식이 두드러진다. 한편, 독일의 건축가들은 프라이부르크와 울름의 대성당에서 나타나듯이, 쌍탑형식을 배제하고 접면 중앙에 1기의 대탑을 두었고 또한 성당 안에 단일공간을 만드는 <할렌키르헤(Hallenkirche)>의 형식을 개발하였다.
이탈리아의 건축가는 프랑스 고딕양식이 달성한 수직성을 강조하는 구조체계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바실리카식에 가까운 양식을 고집하였다.
팔라초 푸블리코(시청사, 1289∼1342년)와 만저탑(1349년), 시에나
13세기 중기 이후 시에나·피렌체·오르비에토 등의 대성당이 고딕양식으로 건축되었는데, 리브궁륭은 도립에서는 구조적인 의도보다도 장식적 효과가 중시되었다.
밀라노대성당 파사드, 1386년
밀라노대성당에는 알프스를 경계로 한 남북유럽의 양식관(樣式觀)이 절충되었으며, 외관은 강한 인상을 준다.
조각
내부엔 성서의 내용으로 보이는 부조 작품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샤르트르대성당 정면의 원주인상군(圓柱人像群)은 원기둥 모양의 형태와 의복주름의 장식적인 선각(線刻)에서 로마네스크의 흔적을 남기고 있으나, 얼굴에는 인간적인 감정과 고딕양식의 흐름이 나타난다.
샤르트르 대성당: 서쪽 정면에 있는 ‘왕의 문’.
샤르트르 대성당: ‘왕의 문’을 장식하고 있는 인물상 원주.
샤르트르 대성당 :서쪽 정면에 있는 ‘왕의 문’ 남쪽 입구 위를 장식하고 있는 문설주 조각.
전형적인 고딕조각은 13세기 북프랑스에서 나타나며, 파리·샤르트르(남부정면)·랭스·아미앵 등의 대성당에는 여러 개의 입상,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과 동식물의 표현은 로마네스크의 추상적인 경향에서 벗어나서, 자연주의 내지 인간주의로 진전하였다.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조각
이 세기에는 또 신학이 융성하여, 성당을 장식하는 조상군(彫像群)은 <돌의 성서>라고 표현되듯이 명확한 종교적 질서에 의하여 통일되었다. 정면의 중앙입구에는 중심기둥을 뒤로 그리스도상을 놓고, 좌우의 벽면에 6명씩의 사도상을 둔 입구 양쪽에는 성모자와 여러 성자가 배치되며, 입구의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띠 모양의 아치에는 천사와 예언자의 상이 늘어서고, 그 주위의 벽면에는 미덕과 악덕을 표시하는 우의상(愚意像)과 <12개월의 행사>에 연유한 인간상이 끼워진다. 신으로부터 일반서민에 이르기까지의 인간상이 다양하게 표현되었으며, 중세적 인간주의를 반영하는 새로운 미술영역이 개척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조각에서도 독자적 양상을 보였는데, 선구자는 N. 피사노와 그 아들 지오반니다. 피사노가 1260년에 피사에서 최초로 제작한 설교단의 부조와 그 건축세부에는 남이탈리아에서 체득한 것으로 여겨지는 2양식이 명료하게 식별된다. 지오반니는 건축가로서 시에나대성당의 정면(하부), 기타 설계를 하였으며, 조각으로서는 피스토이아의 성안드레아성당의 설교단이 고딕양식에 정통했음을 보여준다.
회화
노트르담 대성당 장미의 창
노트르담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대표적인 것으로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를 들 수 있다. 초기 작품은 생드니대성당의 방사상제실군(放射狀祭室群)의 창문장식인데, 빨강·파랑·주황·녹색을 주조로 하는 그 수법은 파리(현재는 없음)·샤르트르(서쪽 정면)의 대성당에 전해지고, 또 서부 프랑스에서는 앙제·푸아티에의 대성당 등에 우수한 작품이 탄생되었다.
13세기가 되자 도상체계(圖像體系)도 풍부해지고 기술상으로도 자색을 주로 하는 배색이 세분화되어, 샤르트르대성당과 같이 넓은 공간이 천상적 분위기로 충만하게 되었다. 순수한 고딕건축의 도입이 적었던 이탈리아에서는 스테인드글라스 대신에 벽화가 발달하였다. 고딕풍의 줄무늬와 색채에 의하여 독자적 화풍을 확립한 시에나출신인 S. 마르티니는 시에나의 화풍과 파리의 고딕회화와의 매개자(媒介者)가 되어 이른바 <국제적 고딕양식>의 형성에 관여하였다.
또한 고딕의 전통에서 출발하여 유채화의 연구를 거듭하고 근세회화로의 길을 확립시킨 것은 플랑드르출신의 반 아이크형제이다. 유명한 《헨트제단화》로 대표되는 여러 작품의 박진감 넘치는 묘사는 근세회화의 탄생을 뚜렷이 보여주는 동시에 중세적인 상징주의에 대한 집착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하였다.
르네상스 미술
14세기 말엽부터 16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일어나서, 전유럽을 휩쓸었던 문예부흥(르네상스)시대의 미술양식을 말한다.
19세기 이후, 르네상스는 일반적으로 문예부흥이라고 번역되어, 널리 유럽의 문화현상을 파악하는 개념이 되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로마의 예술·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문학·미술·사상 등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려 했던 14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는 전유럽적인 운동을 가리킨다.
그러나 미술사의 통설로는 1420년 건축가 F. 브루넬레스코가 고대연구의 성과를 최초로 실현한 피렌체대성당의 원개(圓蓋;돔) 공사가 기공된 무렵부터 1520∼30년경에 고전적 미술이 마니에리슴으로 이행한 연대까지의 이탈리아미술에 한정시켜 좁은 범위에 사용한다. 그런 경우 특히 1500년을 경계로 1400년대를 전기르네상스, 1500년대를 전성기 르네상스라고 한다.
르네상스라고 하는 프랑스어는 <재생·부활>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리나시타(rinàscita)에서 유래한다. 14세기의 시인 F. 페트라르카와 G. 보카치오 등이 사라져가는 고대예술을 그들의 새 세대로 되실리는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한 이후,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적 역사만으로 계승되고 있다. 15세기의 미술가 L. 기베르티와 건축가 L.B. 알베르티, A.P.A. 필라레테 등의 저서에서 이것을 볼 수가 있다.
조토
특히 16세기의 미술가 G. 바사리는 그의 《미술가 열전(美術家列傳, 1550)》에서 여러 차례 리나시타라는 말을 사용하여 <고대미술의 좋은 양식이 야만민족의 침입과 중세 그리스도교에 의한 우상파괴운동 때문에 쇠퇴했으며, 또한 조잡한 마니에라 테데스카(maniera tedesca;독일양식)와 딱딱한 마니에라 그레카(maniera greca;비잔틴양식)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13세기 후반부터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지방에서 화가인 G. 치마부에와 B. 조토, 조각가인 N. 피사노와 아르눌포 디 캄비오 등이 나타나 고대의 뛰어난 예술정신이 부활했다>고 서술했다. 더구나 이 고대의 재생이 고전 연구와 자연모방에 입각한 자연주의의 추진에 의한다는 사실도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일찍이 19세기의 J. 미슐레와 J.C. 부르크하르트가 르네상스를 <인간과 세계의 발견>의 시대라고 말한 이후, 르네상스는 단순한 고대의 재생일 뿐만 아니라 중세와 결별한, 오히려 새로운 인간상과 세계관의 도래를 알리는 빛나는 문화사적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르네상스는 중세와의 관계를 둘러싸고 유럽문화 전체를 휩쓴 활발한 논의의 대상이 되었고, 또한 카롤링거왕조와 12세기의 문화에도 르네상스가 거론되어 복잡하고 많은 의미를 가진 개념이 되고 있다. 그러나 바사리가 본 것처럼 르네상스는 본래 이탈리아의 미술풍토에서 이루어졌으며, 이 시기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역사적 인식과 예술의지에서 생겨난 미술현상(美術現象)을 계기로 하여 형성된 개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원래 고전고대의 문화적 기반 위에 선 이탈리아에서는 고대의 재생은 15세기에 갑자기 자각한 것은 아니다. 이미 새로운 미술의 싹은 당시의 사람들이 대립시켜 취했던 중세의 고딕미술 가운데서 일찍부터 나타났다. 북방의 중세미술의 영향은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에도 미쳤다. 그러나 이 지방의 미술은 13세기경부터 차츰 독자적인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4세기에 피렌체화파(畵派)의 기초를 확립한 조토는 풍부한 자연감정에 의해 인물의 표정이나 자태에 생생한 현실감을 부여하고, 배후의 공간에 깊이와 명암을 묘출함과 동시에 화면에 합리적인 균형과 질서를 구성하여 지성과 감정의 융화를 형성했다. 시에나에도 미술의 새로운 태동(胎動)이 일었다.
수많은 성모자상을 그린 B. 두치오는 우아한 감수성과 감미로운 색채를 특색으로 하여 실화적인 도해력을 발휘했다. 그것을 계승한 S. 마르티니는 선의 리듬에 인간감정의 기복과 이국적인 정취를 표출시킨 장려한 세속적 화풍을 수립했다. 또한 로렌체티 형제는 종교화뿐만 아니라 애향적인 시민의식에 뿌리를 내린 우의적(寓意的)인 주제에도 인간의 생생한 정열과 시선을 주입하여 일상생활과 정경(情景)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한편, 공간묘사를 3차원적으로 진전시켰다. 14세기 전반까지의 이러한 토스카나 여러 도시의 미술동향을 15세기의 전기 르네상스에 선행하는 미술활동으로서 특히 플로트 르네상스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페스트(흑사병)의 내습을 전환기로 14세기 후반의 유럽사회는 극단적인 염세(厭勢)와 구원 사상에 뒤덮여서, 이탈리아미술도 그 무렵의 세속적인 사실주의와 금욕적인 초월주의의 대립이라는 상극을 반영했다. 한편으로는 르네상스의 방향을 정체 또는 역행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오히려 주변의 현실에 대한 진지한 사실적 태도와 장식적 경향을 강화하여, 마침내 1400년 전후 약 70년에 걸쳐 유럽 각 도시의 궁정을 중심으로 전개된 몽환적이면서 섬세하고 감미로운 후기 고딕 국제양식의 풍조에 합류해 나갔다.
조토가 재생을 예고한 새 시대의 예술이 명확하게 그 골격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한 것은 15세기의 피렌체였다. 이 도시는 정치적·경제적 번영을 배경으로, 인문주의 사조(思潮)를 기르고, 인간의 인격과 개성을 존중했다. 미술가들은 조합을 만들고 공방(工房)을 거점으로 고전작품의 연구와 사실적인 자연탐구를 추진해 나갔다. 시민들의 미술에 대한 높은 관심과 공사(公私)에 이르는 왕성한 주문에 따라 건축·조각·회화 등 모든 조형분야가 서로 호응하면서 활성화하고 있었다.
브루넬레스코는 로마에서 고대건축을 조사하여 각종 가구기술(架構技術)을 해명함과 동시에 고전적 구성미의 본질을 체득했다. 그 성과를 피렌체의 교회건축들에 적용하여 현실적으로 제한된 도시공간에 균형잡힌 명석한 각 부분의 비례와 통일을 달성함으로써 르네상스건축의 조화 미켈로초 디 바르톨로메오와 알베르티 등은 궁전이나 교회의 건축설계에 고대양식에 바탕을 둔 구상을 열심히 추구했다. 15세기 후반에 피렌체에서 이룩된 새 양식은 이탈리아 각지에 파급되어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더욱이 D. 브라만테·P. 롬바르도 등을 통해 15세기 말부터 16세기에 밀라노·베네치아·로마로 그 범위를 넓혀서 각각의 환경과 취미에 따라 독자적으로 전개해 갔다.
도나텔로 <수태고지 교회>
도나텔로 <참회하는 막달라>
조각은 건축과 함께 고대 작품과 관련이 깊고, 작풍과 기법 양면에서 그 당시의 조각가는 많은 암시를 받았다. 15세기 초의 난니 디 방코·L. 기베르티·브루넬레스코, 시에나의 J. 퀘르치아 등이 일찍부터 연구에 착수했으며, 앞다투어 인물의 조소적(彫塑的) 표현의 여러 문제에 몰두했다. 특히 도나텔로는 고대연구와 함께 인체의 사실적 추구를 거듭하여 고전정신과 자연주의의 융합을 시도했고 고딕의 영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혁을 가져왔다. 이 무렵, 조각은 차츰 건축에 종속된 위치에서 벗어나 조소예술 본래의 양괴적(量塊的)인 입체성과 자유로운 공간성, 그리고 독립된 기념비성을 확립해 나갔다. 종교적 주제 외에 초상이나 기마상, 이교적인 주제도 많이 등장했으며 나무·대리석·브론즈·테라코타 등 다양한 소재를 구사하여 다채로운 조형표현이 앞당겨졌다. 15세기 후반에는 진보적인 폴라이우올로 형제, A. 베로키오 등이 해부학적 탐구와 운동표현·심리묘사에 의해 사실주의를 한층 촉진시켰다.
마사초 <성삼위일체>
회화에서 르네상스의 개화는 국제고딕양식의 극복과 조토의 예술정신의 재흥을 의미했다. 그 획기적인 혁신자는 1420년대의 마사초였다. 브루넬레스코로부터 투시도법(透視圖法)을 배우고 도나텔로로부터 엄격한 사실주의를 배운 그는 현실의 생명감 넘치는 인체, 합리적인 명암법과 원근법에 의한 넓고 장엄한 통일된 구도로 새 시대의 인간존엄과 자연공간의 예술성을 실증했다.
F.안젤리코 <동방박사들의 경배>
그 후 종교화에 자연주의를 도입해서 청순하고도 평화로운 세계를 묘사한 F. 안젤리코, 투시도법의 기하학적 연구에 열중하여 몽환적(夢幻的)인 화경(畵境)을 구축한 P. 우첼로, 성모에게도 세속적인 인간감정을 이입한 F.F. 리피, 빛과 색채의 합리적 관계를 착안한 D. 베네치아노, 철저한 사실(寫實)에 예민한 감정을 불어넣은 A. 카스타뇨, 장려한 풍속화 두루마리를 그린 B. 고촐리, 정묘한 인체와 풍경을 그린 A. 발도비네티 등이 활약했다.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또한 15세기 후반에는 자연관찰을 인체해부 등의 과학연구에까지 추진시키고 있던 폴라이우올로 형제와 A. 베로키오, 초상과 풍속묘사에 객관적 사실주의를 관철시킨 D. 기를란다요가 있다. 그리고 격렬한 정념(情念)의 화가 S. 보티첼리는 르네상스예술의 형식과 이념을 내세우면서 화풍에 후기 고딕의 신비한 시적인 정취를 풍기게 하여 고대와 중세의 불가사의한 화해를 시도했다.
피렌체 이외 지역의 회화에서는 중부 이탈리아에 페루지노, 핀투리키오, 특히 원근법과 인체비례를 연구하고 세련된 색채를 사용하여 격조 높은 화풍을 형성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있다. 북이탈리아에서는 원근법을 구사한 견고한 인물묘사를 통해 독자적인 예술적 개성을 주장하는 A. 만테냐를 비롯하여 F. 코사가 주목을 끈다. 이 밖에 J. 벨리니 동문(同門) 안토넬로 다 메시나, C. 크리벨리 등이 있다.
전기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열성적인 고대작품의 연구, 치밀한 묘사대상의 관찰, 인체의 해부학적 연구, 빛과 명암의 광학적 추구, 공간에 대한 기하학적 법칙성의 해명 등에 대해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태도로 임했다. 이러한 자연모방, 즉 인간과 자연에 관한 객관적인 사실주의의 증대는 고대예술의 재생을 뜻하며 고전적인 이상주의에의 도달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고차원의 고전적 예술로 가는 길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의해 간신히 열렸다. 그는 회화·조각·건축의 조형예술은 물론, 다방면에 이르는 과학적 연구에도 뛰어나 르네상스 미술가로서 가장 전형적인 <만능의 천재>였다. 그는 우연적인 것을 배제하고 보편적인 것을 지향했으며 객관적인 묘사대상에 주관적인 깊은 정신내용을 통일시켰다.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미켈란젤로도 이 무렵 넘치는 정열과 왕성한 조형력을 구사하여 힘이 넘치는 영원한 인간상을 회화와 조각에 표현했다. 그는 오히려 사실(寫實)을 억제한 주관적인 이상형식(理想形式)에 치우쳤다.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S. 라파엘로는 전생애를 전성기 르네상스에 바쳤다고 해도 무방하며, 고대 연구에서 얻은 식견을 종합하여 이상적인 인간미의 형식을 수립했다. 그 밖의 화가로서는 피렌체의 바르톨로메오와 A. 사르토, 시에나의 G.A.B. 소도마, 에밀리아의 코레지오와 D. 도시, 그리고 특히 베네치아의 조르조네와 초기의 V. 티치아노 등이 있다.
사랑과 평화의샘 http://cafe.daum.net/lcg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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