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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웅변단체의 역사와 웅변운동
해방 이후 다시 타오르는 웅변운동
▶ 현대 웅변의 산실 청년웅변협회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자유를 되찾아주었고, 웅변에도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학생회와 청년회, 그리고 학우회나 언론사 등이 민족계몽과 사회운동을 주로 해왔으나 해방 이후에는 웅변이라는 이름으로 독립된 조직과 제도를 갖추면서 본격적인 웅변운동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해방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는 정치적 혼란과 이념적 갈등 속에서 민주주의와 시민의식을 일깨우기 위한 웅변교육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웅변교육과 더불어 웅변운동을 담당할 단체를 설립하게 되었으며, 그 단체가 바로 청년웅변협회이다.
청년웅변협회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청년웅변회와 학생웅변연맹 등의 웅변운동 정신을 계승하여 1949년 10월 20일 애국 웅변운동가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던 이기남과 이재갑 선생, 그리고 독립운동가였던 조만석 선생 등이 주축이 되어 설립되었다.
이는 해방 이후 한국 최초의 조직적 웅변단체로 초대회장은 이재갑 선생이 맡았으며, 이기남 선생은 명예회장에 추대되었다.
당시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인물로는 일제강점기부터 웅변운동을 해왔던 청년웅변가와 학생을 비롯하여 교육자, 언론인, 사회운동가 등이었으며, ‘총칼로 빼앗긴 나라, 말로 다시 세우자.’는 취지로 단체를 결성하게 되었다.
협회의 창립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해온 이기남 명예회장은 일제강점기부터 애국적 웅변운동가로 한국 웅변교육의 선구적인 지도자였으며, 협회 창립 이후 웅시민교육과 지도자 양성부터 시작하였다.
이기남 선생은 단순히 웅변 기술을 가르치는데 그치지 않고, ‘웅변은 반드시 민족의식과 시민의식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으며, 이는 독립운동에 헌신해 왔던 독립운동가들과 본인의 민족정신에서 나온 교육철학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이후 한국 웅변교육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이기남 선생을 중심으로 형성된 웅변교육 운동은 전국적인 학원으로 확대되었다. 학원에서는 학생과 일반인들에게 웅변원고의 논리적 구성법과 음성 표현법, 그리고 제스처 사용법 등을 체계적으로 지도하면서 많은 웅변 인재를 배출하였다.
청년웅변협회의 활동은 크게 3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웅변교육을 체계화하여 지도자를 양성하였고, 둘째, 조국의 광복을 이끌었던 민족정신 계승 전국웅변대회를 정례화하여 시민의식을 함양할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셋째, 웅변을 국민 정신교육과 시민의식 함양의 수단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청년웅변협회는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격동 속에서도 웅변운동을 이어왔으며, 오히려 국민정신을 일깨우는 역할에 충실하였다.
이어서 한국웅변협회가 조직되어 홍헌표 회장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뒤이어 화랑웅변협회가 황성수 회장을 중심으로 웅변운동을 펼쳤다. 두 단체가 각기 웅변교육과 웅변대회 개최, 그리고 웅변가 양성 등에 힘쓰다가 마침내 통합의 길을 선택했다.
두 단체의 통합으로 탄생한 것이 대한웅변협회였다. 조경규 회장을 중심으로 사회단체 등록을 하면서 전국적인 웅변운동을 펼칠 수 있는 조직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후 행정보고 등의 절차상 문제로 사회단체 등록이 취소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웅변운동은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중단되지 않았다. 1965년 다시 단체 명칭을 대한웅변인협회로 개칭하여 사회단체 등록을 하였으며, 초대회장은 김경진이었다. 이는 해방 이후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웅변단체가 다시 조직적 틀을 갖추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대한웅변인협회는 1949년 독립운동에 기여한 애국웅변가들이 설립한 청년웅변협회에 뿌리를 둔 역사성과 전통을 가진 단체이며, 오랜 세월을 거쳐오는 동안 무수한 곡절을 겪으면서도 웅변단체 본연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힘써왔다.
특히, 대한웅변인협회는 목적 사업 중의 하나인 민족정기의 회복과 국민정신 계도를 위하여 거의 매년 대통령상 웅변대회를 개최해 왔으며, 주제 역시 협회의 설립 취지와 목적에 따라 ‘충무정신 선양’과 ‘독립정신 선양’, 그리고 ‘독립 선열정신 계승’ 등으로 협회의 정통성을 유지하며 국민 계몽에 힘써왔다.
▶ 정부 주관 웅변대회와 웅변운동의 전성기
1960년대 들어서면서 웅변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정부가 국가재건과 국민 계몽, 그리고 민족정신 함양, 반공 통일, 경제개발 등의 시대적 과제를 국민에게 알리는 과정에서 전국 규모의 각종 웅변대회가 잇따라 개최되었기 때문이다.
웅변대회는 학교와 사회단체의 행사에서 정부와 공공 기관이 주관하는 전국적인 국민 행사로 확대 되었다. 대통령상이나 국무총리상 등을 내건 전국대회가 열리면서 웅변은 당시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자기표현 수단의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웅변단체들도 크게 성장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는 전국웅변협회가 박희웅 회장을 중심으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으며, 전국 기초자치단체 단위까지 지부를 설치할 정도로 전국적인 조직망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단체가 주관한 대통령상 웅변대회 등은 전국의 웅변인과 청소년들이 실력을 겨루는 대표적인 무대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이밖에도 전국웅변인협회(회장 권태오)와 한국웅변가협회(회장 고재갑), 그리고 대한웅변중앙회(회장 최병재)와 한국연사협회(회장 김충선) 등이 잇따라 활동하면서 웅변운동의 저변능 넓혔다. 대구에서는 한국웅변회(회장 류근수)가 문공부 등록 사회단체로 활동하는 등 지역을 기반으로 한 웅변조직도 발전하였다.
당시 웅변단체들은 전국웅변대회와 지방대회 개최뿐 아니라 웅변교육, 웅변지도자 양성, 웅변강좌 운영, 국가적 기념행사와 계몽 활동 등을 통해 웅변을 국민 문화의 한 영역으로 발전시켰다.
▶ 통합을 통한 새로운 출발
그러나 웅변단체가 늘어나면서 여러 단체가 각기 활동하는 가운데 따른 중복과 분산의 문제도 나타났다. 이를 극복하고 웅변계의 역량을 모으기 위한 통합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지도자는 전국웅변인협회 권태오 회장이었다.
그 결실이 1994년 5월 2일 사단법인 한국웅변인협회의 설립이었다. 사단법인 한국스피치웅변협회의 연혁에 따르면, 당시 전국웅변인협회 권태오 회장과 대한웅변중앙회 최병재 회장, 그리고 한국웅변가협회 고재갑 회장과 전국연사협회 김충선 회장 등 4개 단체가 통합하여 사단법인 한국웅변인협회를 설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통합은 단순히 단체 하나를 새로 만드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여러 갈래로 발전해온 한국웅변운동의 역량을 하나로 결집하고, 웅변교육과 웅변대회, 지도자 양성, 그리고 사회봉사와 공익 활동 등을 보다 체계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한국웅변인협회는 2017년도에 시대상을 반영하여 한국스피치웅변협회(회장 김경석)로 명칭을 변경하여 활동하고 있다. 이는 웅변의 전통을 버린 것이 아니라, 웅변을 새로운 시대에 맞게 계승하려는 변화라고 볼 수 있다.
김경석 회장이 이끌고 있는 한국스피치웅변협회는 교육부 등록 법인 단체로 그동안 세계한국어웅변대회를 비롯한 다양한 국내·외 대회를 꾸준히 개최해 왔다. 그리고 스피치와 웅변 전문가 양성을 비롯하여 각종 경연과 행사들을 통해 웅변과 스피치의 저변을 확대하고, 바른 언어 사용과 건강한 공론장 문화를 가꾸기 위해 힘써 오고 있다.
특히, 1996년 해외 5개국이 참가한 제1회 민족정기 선양 대통령기 전국남녀웅변대회를 시작으로 다음 해에는 제2회 우리 조국 알리기를 위한 대한민국 대통령상타기 세계 한민족 우리말웅변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런가 하면, 제3회 민족문화 창달을 위한 웅변대회에 이어 세계 한민족 우리말 웅변대회와 우리말 우리글 바로쓰기 및 지구촌 보급을 위한 세계 한국어웅변대회, 그리고 17개국이 참가한 한국어를 통한 지구촌 소통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세계 한국어웅변대회, 한국어소통과 세계평화를 위한 세계 한국어웅변대회 등 세계 여러 나라의 연사들이 참가하는 웅변대회를 거듭하며 한국어를 매개로 다양한 행사를 거듭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한국스피치웅변협회가 지향하는 한국어 세계화는 물론, 한국 문화의 셰계화에 기여하는 중요한 역할이 아닐 수 없다.
▶ 현대 웅변단체의 정통성 유지와 시대 정신
현대 웅변단체들은 저마다 역할과 사명에 충실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단체에 다라 성격은 달랐다.
사실, 해방 이후부터 우리 웅변운동의 성격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웅변이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외치는 저항의 웅변이었다면, 해방 이후의 웅변은 새롭게 세워진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갈 국민의식을 일깨우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
특히, 1950년대 이후의 웅변단체들은 국가의 주요 시책과 사회적 과제를 국민에게 알리고 이해시키는 데 앞장섰다. 전국 각지에서 개최된 웅변대회도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와 국가적 과제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계몽운동에 목적을 두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대한웅변인협회는 협회 설립의 취지와 전통에 따라 민족정신의 계승과 선양에 꾸준히 힘써왔다. 독립 선열의 정신과 민족혼을 되새기는 웅변대회를 비롯하여 역사적 인물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려는 여러 행사를 이어오면서 우리 웅변운동의 정통성을 지켜온 것은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오랜 전통을 이어오는 과정에서 급변하는 시대의 다양한 사회적 이슈와 국민의 새로운 요구를 보다 폭넓게 담아내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 전통을 지켜야 하지만, 전통만으로 시대를 이끌 수는 없다. 웅변이 살아있는 운동으로 존재하려면 시대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를 듣고, 그 질문에 자신의 목소리로 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스피치웅변협회의 활동은 주목할 만하다. 이 단체는전통적인 웅변의 틀에 머무르기보다 시대정신과 사회적 관심사를 웅변의 주제로 끌어들이고, 오늘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메시지를 담아내려는 웅변운동을 펼쳐왔다. 이는 사회와 소통하고 공동체의 가치를 일깨우는 실천적 웅변 정신을 펼쳐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웅변단체의 정통성은 이름이나 역사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목소리를 얼마나 진실하게 담아내고, 그 목소리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며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느냐.’에 달려있다.
따라서 웅변단체가 사명감을 가지고 웅변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시대의 변화를 읽을 수도 있어야 하겠다. 그리고 넓게, 멀리 볼 수 있어야 하겠다. 동굴 속에 갇혀있으면 동굴 속밖에 볼 수 없다.
▰ 웅변학원 전성시대
1980년대 중반 이후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사회는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개인의 표현 능력과 발표력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웅변교육은 제도적, 산업적 기반을 빠르게 확장해나갔다.
특히, 웅변 강사 연수를 통한 강사 양성과 웅변교재 보급에 따라 전국 각지에 설립된 수천 개의 웅변학원은 사회교육의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리고 강사교육원이나 교재 출판사에서 다양한 교재가 제작 보급되면서 청소년들은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발표력을 기를 수 있게 되었고, 각종 웅변대회는 실전 경험의 장을 제공하였다.
먼저,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 시기의 웅변교육 확산은 청소년들의 의사소통 능력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전까지는 일부 특정인 중심이었던 웅변이 대중화되면서 일반 학생들도 표현력 훈련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단순히 말하기 기술을 넘어 자신감과 사회성을 기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다양한 주제에 따른 발표 훈련은 사고의 깊이를 더하고,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지역 단위의 웅변대회와 더불어 전국 웅변발표대회는 청소년들에게 성취 경험을 제공하고, 자신의 꿈을 키우는 동기부여가 되기도 하였다.
교재의 다양화 역시 중요한 성과였다. 시대적 흐름에 맞춘 각종 주제와 체계적인 훈련 방법이 담긴 교재는 웅변교육의 질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리는데 기여하였다. 나아가 웅변대회는 실전에서 검증하는 장으로 참가자들에게 목표의식과 동기를 부여했다. 일부 학생들은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이처럼 웅변교육은 개인의 역량 개발과 사회적 인재 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웅변교육의 급속한 확산은 상업화와 형식주의를 동반하는 경향을 보였다. 많은 학원이 우후죽순처럼 설립되면서 교육의 질보다는 수익성이 우선되는 경우가 많았고, 획일화된 교육방식과 과장된 수사기법이 반복적으로 강조되었다. 이는 웅변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짜여진 각본에 따라 기계적으로 발표하는 문제를 낳았다. 일부 학원에서는 특정 패턴의 억양, 제스처, 감정표현을 기계적으로 주입하면서 개성과 창의성을 저해하기도 하였다.
또한 웅변대회의 운영방식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참가비를 받고 거의 모든 참가자에게 등급별로 상을 수여하는 방식은 성취감을 높인다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경쟁의 공정성과 상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상의 남발은 노력과 실력에 따른 정당한 평가를 흐리게 만들었고, 웅변대회 자체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대회 방식은 학원 홍보나 수익 창출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교육적 본질이 훼손되었다는 지적도 제기되었다.
일부 웅변인들은 이러한 문제점을 배제하기 위하여 웅변이 지녀야 할 자발성과 공정성, 그리고 진정성 있는 표현을 위하여
실력이 뛰어난 연사 일부에게만 시상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하였다.
이처럼 웅변학원 전성시대의 학원 교육과 웅변대회 방식을 볼 때, 1980년대 중반 이후 웅변교육은 청소년들의 표현력 향상과 교육기회의 확대라는 분명한 성과를 이루었다. 그러나 상업화와 형식주의 교육은 물론, 평가의 왜곡이라는 문제를 드러내며 웅변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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