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언어"
1독서 : 사도 2:1-12
2독서 : 1고린 12:3하-13
복음 : 요한 20:19-23
파떼르 헤몬 호 엔 또이스 우라노이스, 하기아스쎄또 또 오노마 수.
엘쎄또 헤 바실레이아 수. 게네세또 또 쎄레마 수, 호스 엔 우라노이 까이 에피 테스 게스.
똔 아르똔 헤몬 똔 에피우시온 도스 헤민 세메론.
까이 아페스 헤민 따 오페이레마따 헤몬, 호스 까이 헤메이스 아피에멘 또이스 오페이레따이스 헤몬.
까이 메 에이세넹게이스 헤마스 에이스 페이라스몬, 알라 흐루사이 헤마스 아포 뚜 포네루.
호띠 수 에스틴 헤 바실레이아 까이 헤 두나미스 까이 헤 독사 에이스 뚜스 아이오나스.
아멘
여러분 방금 제가 말 한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신 분 혹시 계신지요? 주님의 기도를 헬라어 원어로 떠듬떠듬 읽어 본 것입니다.
어떤 개신교 전도사가 있었는데요, 교회에서 중고등부를 맡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특별히 성령은사주의 교회는 아니었지만, 어떻든 교사를 맡고 있는 집사님들 중에는 방언도 하고 통변도 하고 예언도 하는 분들이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개신교 교회는 그렇지요. 그런데 이 전도사님은 방언을 못했다고 합니다. 항상 이것을 스스로 약점이라 생각하고 자격지심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전도사님이 기도원에도 가보고 해봤지만 방언의 은사가 오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신학교에서 배운 헬라어 원어로 주기도문을 외워 가지고 교사들 기도회에서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집사님들이 깜짝 놀란거에요. 우리 전도사님이 방언도 못하고 성령의 능력도 없는 분인줄 알았는데, 이제보니 방언 중에서도 아주 세련된 방언을 구사하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회가 아주 은혜롭게 진행되고 있는데, 갑자기 한 집사님께서 “내가 전도사님의 방언을 한국말로 들었다”면서 통역을 해주겠다면서 다시 방언을 하라고 요구했답니다. 전도사님은 순간 당황했지만 할 수 없이 주기도문을 헬라어로 다시 외웠습니다. 그러자 그 집사님께서 통역을 해 주는데, “내가 너에게 힘을 주고 능력을 주어 수많은 양을 먹이게 하겠다.”라고 하더랍니다.
성공회 교회에서는 방언기도를 하는 것이 많이 낯선 일이지요. 이성적이고 생활 속에서 신앙을 실천하려는 모습이 좋아서 성공회 교회에 나오게 된 분들도 뜨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다른 임팩트가 없다보니 점점 갑갑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한국교회에 이런 방언기도가 일반적인 기도방법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전통은 아닙니다. 특히나 엄숙한 분위기의 경건을 중요하게 여기는 장로교에서는 한 때 방언기도를 이단시 한 적도 있었습니다. 한국교회에 방언기도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7-80년대 오순절파 계통의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이 은사주의 성령운동을 하면서부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에는 이 방언에 대해서 두 가지로 나옵니다. 첫째는 오늘 1독서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인데요, 말 그대로 방언, 즉 지역말입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세찬 바람처럼 불의 혀처럼 온 집안을 가득 채우자 신도들이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나라에서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 있던 유다인들이 각기 자기 고장의 말로 들리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엄밀하게 두가지입니다. 자기가 모르던 외국어를 말했다는 것과, 또 듣는 사람들도 자동으로 동시통역이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신학자들은 이 사건을 바벨탑으로 인해 흩어졌던 인류가 성령으로 하나되는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만큼 높아지고자 했던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언어가 달라지는 벌을 받고 흩어지게 되는 것이 바벨탑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된 신자들이 성령으로 바벨탑 사건 이전으로 돌아가게 된 사건이라는 것이지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류의 원죄라고 할 수 있는 바벨탑 범죄, 그리고 에덴동산의 범죄가 모두 소멸됨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외울 때 “모든 성도의 상통을 믿으며”라고 고백하는데요, 이 상통 혹은 교통하심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이고, 그 핵심은 너와 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이 사라지고 온전한 소통이 이루어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언어의 장벽이 무너지는 방언의 은사가 이후에도 일반적으로 계속 이루어진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성령님의 강하고 충만한 역사하심 속에서 상징적으로 드물게 일어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외국어를 잘하는 분들이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오해를 잘 풀어주는 분들은 특별히 이 사도행전 2장의 은사를 받은 분들이라 하겠습니다.
둘째로 성서에 많이 등장하는 방언은 오늘 2독서 바울로 사도가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째편지에 등장하는 “이상한 언어”입니다. 10절에 보면, “어떤 사람은 여러 가지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은 그 이상한 언어를 해석하는 힘을 받았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이상한 언어는 말하는 본인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는 말이지요. 그리고 해석하는 능력을 받은 사람이 있어야 본인과 공동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아마도 고린토 교회에는 방언이나 방언해석 그리고 예언 등 은사주의 운동이 아주 강하게 나타난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령의 은사가 강하게 나타나면 모두에게 좋을 것 같지만, 실은 무질서하게 보이기도 하고, 처음 믿음을 가진 초신자가 보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요. 그래서 바울로 사도는 이 방언,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것에 대해서 특별한 주의를 줍니다. 교회가 모여서 모두가 이상한 언어를 말하고 있는 것을 보통교인이나 신자가 아닌 사람이 보면 “모두 미쳤다고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14장에서 말합니다. 바울로 자신도 누구보다 방언을 많이 할 수 있고 이런 능력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지만, 방언으로 일만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 이성으로 다섯마디 말을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도움이 되지만 해석하는 사람 없이는 아무도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없고 결국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해석하는 능력을 받은 사람 없이는 방언기도는 혼자서 말하거나 하느님 하고만 말하라고 가르쳐줍니다.
2독서 12절에서 바울로 사도는 성령님께서 원하는 대로 많은 사람에게 여러 가지 은총의 선물을 주셨지만, 그 모두가 각기 제 잘났다고 하는 것은 성령님의 뜻이 아니라고 가르쳐줍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하나가 되는 것,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성령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 한국교회는 너무 방언의 은사에 집착하는 것은 여러 부작용을 가져온다는 바울로 사도의 말을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을 주셨고, 그것은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은총의 종류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능력, 기적행함,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직책, 성령의 활동을 식별하는 능력,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 이상한 언어를 해석하는 힘 등입니다. 바울로 사도는 이러한 성령의 선물중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사랑의 은사라고 가르쳐줍니다. 2독서 고린도전서 12장 다음장이 사랑장이라고 불리는 13장이지요. 사랑 없는 능력은 아무것도 아니고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우리교회 교우들이 “이상한 언어”를 말하고, 그것을 해석하고, 또한 예언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기를 소망합니다. 어떻게 보면 무질서해 보이지만, 그 속에 사랑이 작용하면 우리 교회 공동체를 튼튼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언어와 해석과 예언. 이 세가지는 서로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상한 언어. 우리 공동체가 이해할 수 없고, 이야기하는 본인도 이해할 수 없는 언어가 튀어 나올때가 있습니다. 언제일까요? 교회를 위해서 회의를 할 때, 모임을 할 때, 기도를 할 때, 이 이상한 언어가 필요합니다. 모두에게 공감을 받지 못하는 의견 말입니다. 갑자기 튀어 나온 의견 말입니다. 그런 말에 함부로 면박을 주거나 말하지 못하게 막지 마십시오. 성령님께서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 주시는 말씀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말이 나오거든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 공동체에 무슨 변화를 요구하는 것인지 힘써서 해석해야 합니다. 수용적인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설교 처음에 어떤 전도사님의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어떤 집사님께서 전도사님의 헬라어를 전혀 엉뚱하게 해석했잖습니까? 그런데 그 해석이 틀린 것일까요? 그 집사님의 은사는 잘못된 은사일까요? 공동체 이익에 반하는 해석이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집사님에게 내린 성령의 은사가 맞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어떤 기적적인 놀라움과 신기함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인 공동체의 성장에 목적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집사님의 해석은 교회의 리더십을 성장시키고, 세워주는 성령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통해서 하느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언은 무엇입니까? 우리 공동체를 향한 하느님의 심정을 대언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우리가 무언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을 때 그것으로 아파하실 하느님의 마음을 말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가야 할 길을 못 찾고 있을 때, 그것을 제안해 주도록 성령님께서는 우리 중에 누군가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말을 못할 정도로 우리 공동체가 수용적이지 못하다면 우리 교회는 하느님으로부터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기의 증상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 모임 중에서 이상한 언어를 많이 말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을 공동체에 이익이 되도록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해석을 찾도록 노력 하십시오. 다만 질서 있게 하시고 해석이 나오지 않는다면 잠시 침묵하며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15년전에 선교초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이끌어서 나눔의집을 만들게 하셨던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성령님께서 우리 중 누군가를 통하여 우리 교회의 나아갈 바를 예언케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원하시는 일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나눔의집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이제 또다른 비전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통해 말씀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상한 언어가 끊이지 않고 우리 교회 안에서 말하여지고, 온동네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하여 찾아왔다가 그 비전에 공감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살아있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숨결을 공급받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과 진실함과 신뢰가 있는 교회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