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왕도라는 충남 부여는 백제의 도읍이 아니다.
인기가수 주현미가‘쌍쌍파티’로 가요계에 데뷔하면서 불러 히트한 노래가 있는데 제목이 <백마강>이다. 그 가사는 아래와 같다.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의 종소리가 들리어 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 꿈이 그립구나.
아~ 달빛어린 낙화암의 그늘 속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백마강의 고요한 달밤아 철갑옷에 맺은 이별 목메어 울면
계백장군 삼척님은 임 사랑도 끊었구나
아~ 오천결사 피를 흘린 황산벌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백마강의 고요한 달밤아 칠백년의 한이 맺힌 물새가 날면
일편단심 목숨 끊은 남치마가 애닯구나
아~ 낙화삼천 몸을 던진 백마강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위 노래는 나당연합군에게 마지막 수도 사비성에서 패망하는 백제를 그린 노래로 애절함이 서려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항상 심금을 울리게 만든다. 그것이 주현미라는 가수의 노래솜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라 잃은 망국의 아픔이 절절이 서려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과연 백제가 패망한 사비성은 과연 충남 부여가 맞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이 노래 가사에는 백제 패망시의 중요한 지명이 나온다. 그것은 바로 백마강과 황산벌이다. 그 곳이 어디인지 하나하나 검토해 보기로 하자.
전 문화재청장과 일본인이 답사한 부여는 백제의 왕도인가?
아래는 전 문화재청장인 유홍준씨의 베스트셀러였던 기행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 329쪽에 나와 있는 문장이다.
(인용) 부여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원 세상에, 부여가 이렇게 작을 수 있어요?”
“아니, 부여가 아직까지 읍이었단 말예요?”
“아직도 관광호텔 하나 없다고요?”
부여는 정말로 작은 읍이다. 인구 3만 명에 시가지라고 해야 사방 1km도 안되는 소읍이다. 그래서 가람 이병도선생도 <낙화암>이라는 기행문에서 부여의 첫 인상을 “이것이 과연 고도(古都) 부여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 허망부터 말했다.
부여에 대한 이런 허망은 어쩌면 우리 머리 속에 은연중 들어앉은 부여에 대한 환상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부여는 백제의 123년간 도읍지로 백제 왕도의 유적이 있으리라 기대해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부여에 당도해 보면 왕도의 위용은커녕 조그만 시골 읍내의 퇴락한 풍광뿐인 것이다. (인용 끝)
일본인들은 백제가 일본의 원천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백제의 고도였다고 하는 한성(서울), 웅진(공주), 사비(부여)에 관심이 아주 많다. 그런데 막상 가보면 전부 실망한다. 해양대제국 백제의 고도가 너무 형편없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적 느낌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풍납토성, 공주, 부여가 백제의 왕도로 조작된 도시이기 때문이다. 일제 때인 1937년 일본인이 쓴 기행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인용)“정작 부여에 도착하니 시가지라고 하는 것이 함석지붕과 나무판자집들이 두 블럭 정도 줄지어 있는 것이 전부였고 그 안쪽으로는 울타리도 없는 초가지붕에 박이 널려있는 평범한 시골풍경뿐이어서 도저히 자신이 생각한 부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부여를 다녀온 뒤 그가 다시 친구들을 만나서 부여를 가본 적이 있느냐 물으니 모두들 아직 못 가봤다고 대답해서 또 한 번 놀랐다고 했다. 부여는 이처럼 가보지 않은 자에게는 환상을, 가본 자게는 실망을 주는 곳으로 어떤 답사객은 “꼭 네다바이 당한 것 같다.”고 까지 했다.”
현재 부여에 가서 백제 유적으로 만나는 것은 오직 정림사 오층석탑 하나뿐이다. 또 있다면 반은 뭉개진 해발 100m의 부소산과 가난한 물줄기의 백마강가의 낙화암이 있을 뿐이다. (중략) 그래서 부여에 오면 우선 부소산에 올라 낙화암에서 삼천궁녀가 떨어졌다는 거지같은 전설의 절벽과 백마강을 내려다보고, 고란사에 가서 고란초라도 봐야 부여에 다녀왔다 소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을 갖게 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부소산에 오르는 사람은 또다시 부여를 욕되게 말할 지도 모른다. 엉겹결에 보는 낙화암은 그 스케일이 전설에 어림없고, 고란사는 초라한 암자로 절 맛이 전혀 없으며, 부소산성이라는 것은 말이 산성이지 뒷동산 언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게 잔망스러워서 무슨 전설과 역사를 여기다 갖다 붙인 것이 가당치 않다는 생각이 절로 날 것이다. (인용 끝)
유홍준씨의 <나의 문화유적답사기>란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세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문화유적을 관광하는 사람들의 손에는 꼭 이 책이 들려 있었을 정도였다. 그런 전문가의 눈에도 “부여는 과연 백제의 왕도인가?”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고 했다
그렇다. 그의 느낌은 정확했다. 그의 느낌대로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왕도가 아니다. 일제는 고대 삼국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반도사관을 정착시키기 위해, 백제의 수도로 한성(서울) 웅진(공주) 사비(부여)로 조작하고, 논산을 황산벌이라 했고 금강을 백마강으로 조작해 버렸다.
그리고 노랫말로 허구의 삼천궁녀와 낙화암이라는 전설을 만들어 냈다. 게다가 백제 부흥운동의 주역인 흑치상지가 활동했던 임존성(任存城), 주류성(周留城)도 한반도 안에 있었다고 조작해 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반도사관의 이론이 아직도 고쳐지지 않고 그대로 전해져, 백제가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 신라는 경상도 일대에 있었다고 사학계는 국민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은 신라사관 일제의 식민사관으로 생겨난 엉터리 사학이론이 정치인들에게 이용되어 전라도 백제, 경상도 신라로 나뉘어 대립을 하는 지역주의로까지 발전한다. 그런 지역주의가 얼마나 허황되고 창피스럽고 무지한 것인지 사서의 기록을 더듬어 보기로 하자.
백제가 산동성에 있었다는 증거
현 국사책에 나오는 백제의 줄거리는 백제는 b.c 18년 온조대왕이 하남 위례성(서울)에 개국했고, 전성기인 13대 근초고왕 때 마한을 병합하고 대륙에 진출해 요서/진평에 무역기지를 두었으며, 21대 개로왕 때 한강변에 제방을 쌓았으며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죽자, 아들 문주왕이 웅진(공주)로 천도하고, 26대 성왕 때 사비(부여)로 천도했다가 660년 나당연합군에게 망했다고 되어 있다.
물론 교과서 내용은 사실(史實)과 많이 다르다. 백제의 본거지는 대륙의 산동성이고, 패망도 역시 산동성에서 했다. 백제가 대륙에 있었던 증거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핵심은 한반도에 있던 백제가 잠시 대륙으로 진출한건지, 아니면 백제는 아예 대륙에 있었는지가 논쟁의 관건이다. 우선 아래는 백제의 수도가 한반도에 없었다는 증거들이다.
(1) 근초고왕 때 한반도에서 대륙으로 진출하였다고 하는데, 백제의 역사기록은 원래 대륙이다.
(2) 북위와 5차례 큰 전쟁을 치룬 백제 동성대왕의 무대는 대륙이고, 동성대왕의 궁전인 임류각은 산동성에 있었고 또 거기서 대왕이 죽었다.
(3) 당나라가 한반도백제를 멸하려면 중국 땅에서 대륙백제와 먼저 전쟁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이 없고, 황해를 건너왔다면 당나라와 해상강국 백제와의 해전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은 없다.
(5)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일식기록을 분석한 결과 최적관측지가 발해만으로 나온다.
(6) 만약 한반도 백제가 본토라면, 본토의 20배 크기의 땅을 수백 년간 다스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7) 인구의 역사로 보아도 백제의 수도는 산동성 일대에 있어야 합리적이다.
(8) 백제의 8대 성씨가 반도에는 없고 대륙에 있다.
(9) 그 외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증거가 많다. (향도,조공,제방,기상,특산물, ...)
나중에 하나하나 자세히 언급하기로 하고 지금은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성이 한반도에 있었는지 대륙에 있었는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부여박물관에 가면 부여에서 발견된 비문 탁본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분명 내지성(奈祗城)으로 되어 있다. 이 탁본만 봐도 부여는 사비성이 아니라 내지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경기도 시흥시는 관내의 소래(蘇來)포구를 소정방이 왔기 때문에 소래포구라 한다고 시민들에게 자랑스럽게 홍보하고 있다. 제주도 정방폭포의 이름은 소정방이 제주도에 온 적이 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 정방폭포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다.
또 부여를 흐르는 강이 백마강으로 불리게 된 것은 당나라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하여 나라를 지키고자 호국의 용이 된 무왕을 낚았다는 엉터리 같은 전설에 바탕을 둔 것이다. 소정방이 백말을 미끼로 용을 낚았다는 바위가 백마강에 조룡대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남아있다고 자랑스럽게 떠들고 있다.
참으로 엄청난 무지의 소치라 아니할 수 없다. 신라 사관과 일제가 만든 식민사관의 약발이 아직까지 듣고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소정방은 한반도에 온 적이 없다. 왜냐하면 백제가 한반도에 없었기 때문이다. 소정방이 왔다는 것은 백제 패망지이므로 소정방의 위치를 추적해 보면 백제의 위치를 저절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부여의 옆을 휘감아 도는 강 이름을 백마강이라 하나, <삼국사기>와 <신.구 당서> 등 모든 역사기록에는 "백강"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서>에 보면 소정방은 백제패망 전에도 백강에서 낚시를 가끔 했다고 적혀있다. 그럼 소정방은 한반도 백마강까지 바다건너 낚시하러 왔단 말인가? 이 이야기는 백강이 당나라의 영역이든가 국경선이었고, 백제와 당나라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는 근거이기도 하다.
최후를 맞는 백제의 수도는 어디?
아래는 <삼국사기 신라국본기> 기록에 의한 것이다.
< 백제의 마지막 왕은 무왕의 아들인 31대 의자왕이다. 의자왕은 대외적으로는 영토를 많이 넓히고 대내적으로 정치를 잘해 당시에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릴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의자왕이 술과 여자에 빠져 정치를 게을리하고 충신을 멀리하고 간신을 가까이 두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렇게 기록된 것은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만일 백제가 천하통일을 했다면 의자왕은 아마 명군으로 기록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의자왕은 고구려와 합세하여 신라와 당나라와의 통로인 당항성(黨項城)을 빼앗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김춘추의 딸과 사위의 머리를 베어 수도로 보낸다. 사학계는 대야성을 합천으로 비정했다. 과연 그럴까? 여하튼 국가가 총체적인 위기로 몰리고 자체적으로 딸과 사위의 복수를 하려 했으나 군사력이 없던 신라의 김춘추는 고구려 연개소문을 찾아 갔으나 거절당하자 당나라에 들어가 원병을 요청한다. >
여기서 이상한 기록이 있다. 백제가 당항성을 빼앗자 신라와 당나라와의 통로가 끊겼다는 기록이다. 현 역사이론이라면 육지에 있는 당항성과 신라와 당나라와의 통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신라는 바닷길이 당나라와의 통로이지 않은가! 그런데 왜 육지에 있는 당항성을 잃자 통로가 끊겨졌을까? 즉 이 이야기는 백제와 신라가 한반도에 있지 않고 당나라와는 육지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인 것이다.
신라는 진덕왕 때부터 중국의 의관을 착용하고, 자체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의 연호인 영휘(永徽)를 쓰는 속국이 된다. 국가의 위기도 하나의 이유지만 개인적으로 딸의 복수를 위한 적개심 때문에 외세를 끌어들이고 스스로 속국임을 자청한 신라의 모습을 보면 이성계의 조선이 명나라의 힘을 빌기 위해 스스로 속국이 된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당나라는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신라 김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임명하여 13만 대군을 동원한다. 이 때 신라왕이 된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지원케 한다. 보통 군을 동원하여 직책을 내릴 때 정벌할 지방의 명을 따는 것이 상례이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이세적장군에게 내린 직책이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이다. 요동은 하북성에 있는 고구려를 의미한다.
백제를 정벌하는 김춘추의 직책인 우이(嵎夷)는 바로 산동성을 의미한다. 즉 당나라는 산동성에 있는 백제를 정벌하러 간 것이다. 자고로 중국의 고지도에는 북경 이동과 한반도의 지도와 지명이 없다. 송나라 때 만든 지도인 우적도에도 만주와 한반도는 아예 안 그려져 있다. 그러므로 만일 당나라가 한반도에 있는 백제를 정벌하러 갔다면 지명부터 새로 만들었을 것이다.
아래는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여름 5월 무열왕이 김유신을 대동하고 군대를 이끌고 서울을 떠나 6월에 남천정에 주둔하였고, 당나라는 협주를 떠나 전선을 거느리고 동(백제)을 향하여 물길을 따라 내려왔다. 무열왕이 병선 100척과 함께 태자를 보내 덕물도에서 소정방을 영접하게 하였다." 이 덕물도를 사학계에서는 한반도의 옹진 앞바다 덕적도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이 때 소정방이 태자에게 말하기를 “나는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당도하여 군사와 회합하여 의자왕의 도성을 무너뜨리려 하오.”하니 태자가 말하기를 “우리 대왕이 지금 대군을 고대하고 계시는 터이라 만약 대장군이 오셨다는 말을 들으시면 반드시 잠자리에서 식사를 하고 오시리라”하였다.
여기서 이 장면은 분명 대륙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무열왕이 5월에 수도를 떠나 6월에 남천정에 주둔했다고 기록했는데, 한반도라면 경상도 경주에서 출발하여 백제 국경까지 가는데 한달씩이나 걸릴 정도로 그렇게 넓었는지? (5월말에 떠나 6월초에 도착했다고 억지를 부릴 수도 있다. 그러나 계속되는 상황을 보라)
당나라가 출발하는 같은 달에 이미 무열왕이 군대를 이끌고 기다리고 있었고 태자를 보내 덕물도에서 영접케 한 것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분명 당나라는 물길을 타고 동으로 내려왔고, 내려오니 신라 태자가 기다렸다고 기록하였다. 바다를 건넜다는 기록은 물론 없다.
또 소정방은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도착한다고 말했다. 무열왕이 5월에 먼저 출발했으니 무열왕의 금성 출발은 소정방의 백제 도착 최단40일 ~ 최장70일 전이다. 한반도 경주에서 백제까지는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는다. 그렇게 40~70일이나 신라가 왕이 직접 나서서 군사행동을 먼저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래서 이건 분명 대륙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바다를 건넜다는 기록도 없고, 백제는 22개 담로를 건설한 해양제국이었는데 당나라가 황해를 건너려면 백제와 해전을 해야 하는데 그런 기록도 없다. 해양강국 백제의 앞 바다에 신라 배 100척이 나타나 소정방을 영접했는데도 아무런 저항을 안 받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신라 태자가 배 100척을 거느리고 영접한 곳인 덕물도는 한반도의 덕적도가 아니라 바로 대륙 어딘가에 있는 지명으로 보는 것이다.
당나라가 한반도백제로 떠나기 전에 산동백제와 전투한 기록도 없다. 그럼 그 때 산동성엔 대륙백제가 없었을까? 160년 전인 동성대왕 시대에도 대륙의 동부 평야지대를 전부 차지한 백제였는데, 그 사이에 대륙백제는 명맥이 끊어졌을까?
백제는 대륙에 없었고 한반도 서부에만 있었다고 보는 것이 식민사학계의 이론이다. 대륙 산동성에 백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하자.
7월 김유신이 황산의 평야로 나가 백제의 계백장군과 전투를 벌여 4번을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다. 그러나 관창의 희생으로 사기충천한 신라는 백제군을 격파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같은 날 소정방이 기벌포에 도착해 백제군과 싸워 이겼다는 기록이다. 한반도 덕적도에 6월에 도착한 소정방이 왜 이리도 늦게 기벌포에 도착한 것일까? 기벌포까지 최단 10일 ~ 최장 40일 걸렸다.
위의 상황을 종합해 보면, 5월 무열왕의 출발에서부터 6월 소정방과 신라태자가 만나고 7월 10일 경 소정방이 기벌포에 오기까지는 최단 40일 ~ 최장 70일 걸렸다. 소정방이 6월말에 덕적도에 도착했다면 기벌포까지는 최소 10일 이상 걸린 것이고, 그렇다면 5월말에 무열왕이 금성을 떠났으면 최단 30일간 ~ 5월 초면 최장 60일간 신라의 무열왕은 어디에서 뭘 했단 말인가?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도 마찬가지이다. 5월말에 무열왕이 떠나고 소정방이 6월 초에 덕물도에 도착했으면, 이 건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덕물도에 도착한 소정방이 기벌포에 나타나는 7월 10일까지 40일간 그는 어디에 있었는가?
덕물도와 기벌포는 같은 한반도라면 한반도 내에서 소정방이 이동하는데 40일이 걸렸단 말인가? 한반도 백제가 그렇게 큰가?
여하튼 무열왕 출발에서부터 기벌포에 소정방이 나타나기까지 40일 ~ 70일 걸렸다는 것은 땅덩어리가 큰 곳에서 벌어진 상황이지 좁은 한반도에서는 상식적으로 날자 계산이 맞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대륙이 아니면 잘 설명이 안 되는 싱황인 것이다. 이 날자 계산에는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다.
사학계에서는 당나라가 중국에서 떠나 한반도까지 오려면 그 정도는 걸린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그렇다면 뭐 하러 무열왕이 김유신과 함께 5월에 소정방을 맞으러 먼저 출발한단 말인가? 그럴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3~4일이면 경주에서 백제 국경까지 가고도 남음이 있는데 40~70일 전에 움직인 이유는 무엇으로 설명하려는가?
기록과 같이 무열왕과 김유신이 소정방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도착 후 모든 작전계획이 실행된 것을 보면, 무열왕과 김유신과 소정방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그런 스토리가 엮이지 않는다. 다들 대륙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기록이 남은 것이다.
현 국사책의 이론은 당나라는 서쪽 바다 건너고, 백제는 한반도 서남부이고, 신라는 동남부이다. 기록에는 당나라가 신라를 먼저 만난 후 백제로 간다. 그렇다면 소정방의 배가 신라바다까지 가야 하는데 백제 앞바다를 거쳐야 하므로, 당연히 신라가 황해바다 어딘가에서 영접을 했을 것이다.
현재 사학계는 신라태자가 덕적도(옹진 앞바다)로 영접을 갔다 하는데, 거긴 백제 또는 고구려 지역으로 해상강국 백제와 고구려 수군이 신라 배 100척을 가만 놔둘 리가 없고, 또 해전이 벌어졌다면 태자와 소정방이 참전한 해전이므로 당연히 기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해전 기록이 그 어디에도 없다. 고구려/백제는 수군이 전혀 없었단 말인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이 상황은 대륙에서 발생한 전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신라는 당연히 당나라가 도착한 것을 확인한 후 백제와 전투를 시작한다. 첫 전투가 황산전투라고 치고 다음의 상황을 보자. 김유신과 계백의 5번의 전투가 얼마나 소요되었는지 몰라도 최소한 10일 이상이다. (하루 전투해 져서 다음날 재정비해서 그 다음날 또 도전했다 하더라도 최소 10일은 걸린다.)
덕적도와 기벌포가 같은 한반도 내에 있었으면 이렇게 늦게 소정방이 도착할 리가 없다. 덕적도에서 신라 태자를 만난 후 출발한 소정방의 첫 전투지인 기벌포까지 그렇게 오래 (최단 10일 ~ 최장 40일) 걸린 것은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이라고 봐야 한다.
이후 7월 13일 의자왕이 웅진성(熊津城)으로 달아나고, 18일 드디어 웅진성에서 나와 의자왕이 항복한다. 해양대제국 백제의 31대 700년 사직이 쓰러지는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의자왕은 온갖 수모를 당하고, 9월 3일 소정방은 백성 12,000명과 함께 의자왕을 끌고 사비성으로부터 배를 타고 당으로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신라사관에 의한 의자왕과 백제는 삼천궁녀와 국가가 썩어서 망한 것이 아니라
백제의 귀족 좌평 예식진의 배반으로 망했다.
즉 국가 실력으로 볼 때 패망할 정도가 아니었는데 공교롭게도 측근이라는 좌평 예식진이 당에 의자왕을 받치고
당에서 출세 가도를 달린다. 그건 1300년 전에 있던 기록이 공교롭게도 비문에서 발견 되면서 잘못 되어 온 역사를 현후손 들에게 방대영토와 놀라운 역사를 이야기 하고 있다.그리고 흑치상지가 벌인 부흥운동도 잘 대변해주고 있다.
[장개석 총통과 대륙 백제 이야기]
일찍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중국의 역사왜곡과 날조를 통렬하게 비판한 바 있거니와 이러한 비판은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유효하다고 강조되어야 마땅하다.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해서는 주은래(周恩來) 전수상도 지적한 바 있다.
주 전수상은 동북 지역의 역사가 조선인에게 귀속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인식 또한 시대상황에 따른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중국 지도층의 역사인식과 관련해서 백범 김구 선생의 일화가 문득 머리에 떠오른다. 일제의 대륙침략에 따라 중칭(重慶)으로 후퇴한 장개석(蔣介石) 총통은 함께 피난 온 상해임시정부의 김구 주석 일행을 위로하기 위해 만찬에 초대했었다고 한다.
이때 장 총통은 자기 고향이 옛 백제 땅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우의를 다졌다고 한다. 장 총통은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동지적 입장에서 이런 역사인식을 말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들은 김구 주석은 충격과 함께 자괴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고 뒷날 술회한 바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백제가 중국 땅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김구 주석은 전혀 알지 못했었다고 한다. 장개석의 고향은 양자강(揚子江) 남쪽 절강성(浙江省)이므로 옛 백제는 양자강 이남지역까지 지배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서량지나 임혜상 같은 양심있는 중국사학자들은 중국역사의 상고사는 한민족의 역사라 말한다.
그리하여 가시마 노보루같은 일인학자는 한(漢)족은 기껏해야 한(韓)을 흉내내어 이름붙인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상고사는 밝혀져야 한다. 중국의 식자층은 양자강 유역이 전통적으로 동이 9족의 것임을 너무도 잘 안다.
장개석은 이 사실을 너무 잘알고 있어서 임정의 이시영 전 부통령에게 역사는 제대로 알고 독립운동하시는가 하고 물었던 것이다. 한데 오늘날의 우리나라 역사교과서에는 어느 한구석에도 이런 기록이 없다. 오늘날의 역사교과서 뿐만 아니라 김구 주석이 듣고 배웠던 당시의 역사책에도 이런 기록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 기록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하게 왜곡되었음을 반증해 주는 하나의 예증에 불과하다.
일부 편집
라당연합군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 사비에서 웅진으로 옮긴 의자대왕...(이후 부흥운동으로 볼 때 백제는 멸망하지않았을 것이다.) 좌평 예식의 반란에 의하여 당에 끌려가지만 않았다면 우리 한민족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신라의 원조를 얻은 당에 의한 고구려 멸망, 이후 동아시아는 당나라의 독무대가 되었고 결국 동아시아 동북지역을 장악한 우리 한민족의 방계역사인 거란, 몽고, 여진 등이 CHINA 를 지배하였고 오늘의 중국이 되었다. | [제5회] 1300년 만에 밝혀진 의자왕 항복의 비밀 |
▣방송 : 2008. 12. 20 (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연출.글 : 류지열 PD
의자왕,
그는 역사에서 삼천궁녀로 유명하다. 그러나 1300년 만에 발견된 예식진 묘지명. 의자왕 항복의 비밀을 말하는데. | | ▲ 예식진 묘지명 | 백제 멸망에 관한 비밀을 간직한 예식진 묘지명. 그‘진실’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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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역사추적팀이 최초로 발굴한 예식진 묘지명. |
중국 낙양의 고 미술가에서 백제와 관련된 주요 유물 한 점이 발견된다. 비의 주인공은 예식진.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백제 웅진 출신의 최고 직위인 좌평을 지낸 백제의 유력가문 출신이다. 또한 백제 금석문의 경우, ‘숫자’가 귀한데 그 정보가 대단히 구체적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금석문의 발견인 것이다. 묘비에 새겨진 대당좌위위대장군, 백제웅천인, 좌평 집안이라는 예식진에 대해 알려주는 몇 가지 글자. KBS 취재진은 직접 중국에 가서 예식진 묘지명을 수소문 끝에 취재하고 이 탁본을 국내 최초로 입수했다. | | | ▲ 예식진 묘지명의 탁본 | |
| 예식진은 누구인가? |
백제는 부여, 사, 진, 해, 협, 목, 국, 백씨 등 백제 8대성이 백제의 최고 지배층이라고 역사서에 적혀있다. 그러나 대대로 좌평을 지냈다는 예씨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비는 예씨가 대당좌위위대장군이란 정삼품의 고위직을 지낸 백제의 유력 가문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 말은 즉 이 비가 백제 지배층을 연구하는데 큰 가치가 있는 유물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역사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예식진이라는 이름. 그러나 우리는 ‘예식’에 관한 유일한 역사적 기록을 볼 수 있다. | | | ▲ 신당서 | | “웅진성에서 그 장군 예식이 의자와 함께 항복하였다.”-<신당서 소정방전> | | 예식진과 예식. 이 둘은 가문 출신지 직위 활동기간 등이 동일인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일치한다. 약간씩 다른 이름은 단지 표기상의 문제일 뿐이라는 사실이 사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즉, 예식진은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과 함께 있었던 웅진의 예식 장군임을 알 수 있다. | |
| 예식진. 그의 공적은? |
| | ▲예식진 묘지명의 뚜껑 탁본 | | 최고귀족층이면서 역사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예씨 가문의 비밀! 이것은 뭘 의미하는 것일까? 흑치상지. 백제 패망 후 당에 들어와 예식진과 비슷한 좌위위대장군을 지낸 당나라 명장이다. 그의 묘지명에도 증조부부터 집안 내력이 적혀있다. 그런데 예식진 묘지명의 경우 그의 조부부터 시작했다. 왜 그런 것일까? 그것은 예씨 집안이 조부 예다 때부터 중앙관직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예식진은 백제에서 웅진성의 예씨 집안 고위 장군 출신이었지만, 당나라의 무장으로 출세하게 된다. 그 비결은 과연 무엇인가? |
| 예식진 출세의 비결은 하극상? |
| | ▲백제오천결사대출정상(황산벌 전투) | | 其大將?植 又將義慈來降(기대장예식 우장의자래항)-구당서 : 그 대장 예식이 의자왕을 거느리고 항복하게 하였다. | -將(장):데리고 가다. 체포해 가다. 즉, 부하인 예식이 왕을 잡아서 투항했다는 의미이다. 부하의 쿠데타, 즉 하극상인 것이다. | 예식진 묘지명에 나타나 있는 내용은, 백제 멸망과 관련해 격동의 시대 민첩하게 주군을 바꾸는 예식진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 | | ▲점풍이역 취일장안 | | 위에 있는 모든 사료는 바로 의자왕의 충복, ‘예식진’이 출세한 내력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의 당나라에서의 출세는 백제의 멸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쿠데타를 통해 주군을 배신하고 당을 등에 업은 예식진의 행적이 묘지명에 암호처럼 새겨져 있다. 1300년 만에 발굴된 묘지명은 그래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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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예식진 일가의 묘지 발굴
백제의 멸망은 의자왕의 항복 때문이 아니라 신하들의 배신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김영관 제주대 교수(한국사)는 660년 나·당연합군에 백제가 멸망할 때
사비성에서 웅진성으로 피신한 의자왕을 당나라에 넘기고 그 공으로 중국에서 황실 호위무관까지 오른
예식진(예 < 示+爾 > 寔進) 일가의 묘지 발굴로 이 같은 주장이 사실로 확인됐다고 27일 밝혔다.
백제부흥운동사 전공인 김 교수는 2010년 4월 시안시 문물보호고고연구소가 당나라 고관대작들이 묻혔던
시안시 창안구(長安區) 궈두난촌(郭杜南村)에서 발굴한 3기의 고분이
백제 유민인 예식진과 그의 아들 예소사(素士), 손자 예인수(仁秀)의 가족묘지임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예인수묘에서 출토된 조각상
이번에 확인된 예씨 일가의 묘지명은 백제 멸망과 관련된 기록을 담고 있다.
예인수의 묘지명에는 "선조의 어진 덕을 본받은 예식진은 당이 동쪽을 토벌할 때 명을 받아 그 왕을 끌고
고종황제에 귀의하게 되니, 좌위위대장군으로 내원부 개국공의 훈작을 받았다"고 적혀있다.
**여기에 동쪽은 대륙의 동쪽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바다의 동쪽이 아님 사비성 웅진성이 이 공주나 부여쪽이 아닌
중국 대륙의 동쪽에 위치 한 산동성 라고 봐야 함**
이는 예식진이 < 구당서 > '소정방 열전'에 나오는 예식과 동일인임을 뒷받침한다.
소정방 열전에는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할 당시 백제의 장군이었던 예식이 의자왕을 데리고 와서 항복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소정방은 660년 11월6일 뤄양에서 당 고종에게 의자왕을 포로로 바치는 의식을 치른다.
예인수 묘에서 출도된 짐승 조각상
예씨 가문이 서기 410년에서 420년 사이 중국 산둥반도에서 웅진(공주)으로 건너온 중국계 백제인 집단임도 밝혀졌다.
지난해 7월 지린대 고전연구소가 학계에 보고한 예식진의 형 예군의 묘지명에도 "선조는 중화와 조상을 같이한다"고
나와 있어 예씨 가문이 중국 이주민임을 알려준다.
김 교수는 공주 수촌리 고분에서 중국계 도자기, 금동관, 금제장식 칼이 나오는 이유를 예씨 가문과 관련지었다.
김 교수는 예씨 집안 4명의 묘지명에 대한 분석결과를 28일 서강대에서 열리는 신라사학회 발표회에서 공개한다.
끝으로 당 태종이 중국에서 왜 가장 위대한 사건이 나당연합 승리로 동북아 영토 역사중심에
지금의 CHINA를 만들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백제가 패망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동북아 국제 정세는 많이 달라 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