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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 스크랩 일본장교 출신 김수환
하토브. 추천 0 조회 1,293 13.09.03 21:20 댓글 61
게시글 본문내용

일본장교 출신 김수환



사진설명 ▲


학병시절 일본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옆에 앉은 이는 전석재 신부. 1944년 졸업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사관후보생으로 입대. 동경 남쪽의 섬 후시마에서 사관 후보생 훈련 받음. 같은 하느님을 믿던 카톨릭 교도 윤동주 시인은 사상범으로 후쿠호카 형무소에 수감되어 마루타로 생체실험에 시달리다 28세로 생을 마감하셨죠.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우리사회 원로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일제 때 뭐하셨나요? 그 시절에는 어쩔 수 없었다..한 마디로 다 넘어가실건가요? 17대 국회 구성되면 누더기 된 친일진상규명법 다시 손보고 친일청산이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

(펌)

 


 김수환에 관한 또 다른 의문들 조회수:157 , 추천:2, 반대:0  
 물방개(marung), 2004/09/14 오후 10:41:57 


 김수환은 44년에 사관후보생으로 "징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사관생도 제도는 장교로 키우기 위한 제도이므로
당연히 사상무장 정도가 검증되어야 들어갈 수 있는 자리다.
또한 장교로 복무하게 되면 일본군 사병들을 지휘할 수도 있는 자리다.
그런 사관생도 자리에 사상성에서 항상 의심의 대상이 되었던 조선인이
"강제징집"되었다고 주장하는 건 무척 이상한 이야기다.
사관학교 말아먹으려고 작정하지 않은 다음에야
독립투사를 꿈꾸었던 김수환을 강제징집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사상무장 정도를 검증받은 후 자진지원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사관생도를 '징집'했다는 얘기는 김수환에게서 처음 접하는 얘기다.

그리고 김수환이 44년부터 45년까지 사관후보생으로서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에 대해서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분명하게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참고로, 천주교계는 일제 36년 동안
독립운동에 기여한 바가 없다.
오히려 일제에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군용기 헌납에 앞장 섰던 것은 물론이고
일제 말기로 갈수록 징용과 징집을 독려하는 등
친일에 매진하는 철저히 반민족적 행태를 보였다.
대대로 천주교 집안이었던 김수환의 행적과 직접적 상관성은 없겠으나
당시의 정황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단서를 제공할 수는 있겠다.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김수환이 한 일은
그저 회색지대에 머물면서 이미지 관리나 한 게 전부다.
실질적인 민주화 운동과 인권운동에 매진했던 사람들은
함세웅 신부 같은 젊은 신부들과 문익환 목사 같은 분들이었다.

김수환이 오늘날 보여주고 있는 알쏭달쏭한 꼴통질은
어쩌면 뿌리가 깊은 것일 수 있다는 정황증거들이 이제 드러나고 있다. 
   ---
 이 사람 누구죠? 조회수:242 , 추천:9, 반대:1  
 종교 장사꾼(sa2sa), 2004/09/14 오후 8:12:16  
 친일 민족반역자 짓을 하고 반민족행위를 하고

반인권의 삶을 사는 미친 놈들입니다

낮은자가 아니라 높은자의 편에서서

예수와 부처의 말씀에 정반대로 사는 사탄과 마귀 21 개 입니다

기억하시고 방뻡합시다 !!!!!!!!!!!!!!!!

(펌)

 


 

 


추기경님! 왜 말이 다르신가요?


3년 전은 '개혁입법', 지금은 '남남분열' ?...'논쟁'과 '남남분열'은 구분해야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이태경(red1917) 기자    
 


김수환 추기경이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서 반대의사를 표시했다고 한다. 한나라당이 밝힌 바에 따르면 김수환 추기경은 지난 13일 "국보법 폐지는 아직 시기상조지만 개정은 필요하다"고 국보법 폐지 반대 의사를 밝혔다는 것이다.

김 추기경은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 위와 같이 밝히고 "일부 언론에서 내가 국보법 폐지를 지지한다고 보도했는데 이것은 본인의 뜻과 달리 전달된 것"이라며 "젊은 신부들이 국보법 폐지에 힘이 돼달라고 할 때 폐지는 시기상조라고 말했고 명단에 고문으로 넣겠다고 했을 때 빼라고 했는데 의지와는 달리 그대로 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추기경은 또 "(국보법 논란으로) 나라가 분열되고 편가르기가 되는 '남남분열'이 큰 걱정"이라며 "북한이 원하는 게 남남분열이 아닌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추기경의 말을 들어보면 국가보안법 폐지 논쟁을 바라보는 추기경의 시선은 균형을 잃은 듯이 보인다. 국가보안법 자체에 대한 추기경의 생각이 어떤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추기경은 국보법 폐지를 둘러싼 논쟁을 나라가 분열되고 편가르기가 되는 '남남분열'로 인식하고 있다.

추기경의 현실 인식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추기경은 "북한이 원하는 게 남남분열이 아닌가"라고 갈파하여 국보법 폐지와 관련한 일체의 논란을 이적행위로 둔갑시키는 신통력을 보여준다. 추기경이 국가보안법 폐지에 반대할 수는 있다. 그러나 왜 폐지 논쟁 자체를 '남남분열'로 몰아가는지는 이해할 수 없다.

더욱이 국보법 폐지에 반대한다는 김수환 추기경의 발언은 불과 몇 해전 '국민의 정부' 시기에 국보법 폐지를 촉구했던 본인의 행동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국민의 정부 출범 3년을 맞아 각계 인사 1만3,610명이 3대 개혁입법 이행을 촉구했다. 교육, 노동, 농민, 종교, 예술, 법조 등 각계 인사들은 21일 서울 중구 성공회 대성당에서 '개혁쟁취를 위한 1만인 시국선언'행사를 갖고 부패방지법과 인권위원회법 제정, 국가보안법 폐지 등 3대 개혁입법의 조속한 제·개정을 요구했다. 홍근수(洪根秀) 목사는 시국선언문을 통해 "당리당략에만 매달리는 야당과 소수정권의 한계만 내세우는 여당은 비생산적인 정쟁을 중단하고 개혁입법을 2월 국회 회기 내에 통과시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내년 지자체선거와 대선 등에서 총선연대 활동에 버금가는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시국선언에는 김수환(金壽煥) 추기경, 참여연대 김중배(金重培) 공동대표와 민주노총 단병호(段炳浩) 위원장, 한국 YMCA전국연맹 이남주(李南柱) 사무총장, 한국여성단체연합 지은희(池銀熙) 대표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박록삼 기자>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2001년 2월 22일자 기사-

현 남북관계를 고려할 때 국보법 폐지에 대한 추기경의 생각이 수년 사이에 급변한 이유를 도무지 찾을 길이 없다.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국민의 정부 시기와 비교하여 현재 남북관계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거나 북한의 대남적화 야욕이 노골화되고 있다는 소식은 들어 본 기억이 없다.

추기경은 당시 국보법 폐지를 촉구하는 자리에 직접 참석한 만큼 당시와 지금 왜 생각이 달라졌는지 밝힐 필요가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에 관해서는 찬반 양론이 있을 수 있으며 폐지에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이 추기경의 염려처럼 '국론 분열'이나 '혼란'으로 치부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논쟁은 다양성을 존중하고 토론과 대화를 통해서 합의점을 도출해 나가는 민주주의의 본령에도 부합하는 것이라 권장할 만한 일이다. 따라서 추기경의 염려는 단지 기우(杞憂)에 불과하다.

추기경의 정치적 지향과 특정정당에 대한 호불호(好不好)에 대해서는 추기경의 전적인 자유일 뿐만 아니라 알고 싶지도 않다. 그렇지만 국보법 폐지를 바라보는 추기경의 인식은 최소한의 객관성과 균형감각도 상실한 듯싶어 안타깝다.

혹시 추기경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과거의 냉전의식과 남북대결 의식에 갇혀 박제(剝製)화 된 현실인식을 갖고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3년 전은 '개혁입법', 지금은 '남남분열' ?...'논쟁'과 '남남분열'은 구분해야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이태경(red1917)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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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한추기경의 진실
제주도푸른밤 / 2004-09-18 오후 11:59:48
추천 0,    반대 0  
 
 
아래는 퍼온글입니다.

민주화 운동의 상징성을 왜곡하는 명동성당과 김추기경.
요즘 한국천주교회의 실질적인 수장이시며 절대적 권위를 가지신 김추기경님의 정치적 발언 하나 하나가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것에 대해 착잡함과 더불어 카톨릭 성직자들의 정치적 판단의 가치중립성을 상실되어 가고 있는 것에 우려하지 않을수가 없다. 김수환추기경께서는 현 정치권 전체에 대한 근심이 아니라 참여정부와 노대통령에게만 촛점을 맞춘 현실 정치에 대한 인식은 과연 편향적이지 않다라고 할수 있을까 하는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수가 없다. 참여정부가 탄생되기 이전부터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개혁과 변혁의 희망을 꿈꾸는 국민들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민주당 경선과정과 대선과정에서 보여준 김추기경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 대해서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것 부터 잘못되었다는 식의 우리 사회구조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수가 없다. 정교일치사회가 아님에도 정교일치 사회보다 더 엄격하게 종교와 종교인에 대한 비판을 금기시하는 우리사회의 종교계 자체가 폐쇄성과 배타성에 매몰되어 있고 종교인에 대한 비판을 불경시하는 자체가 "종교의 자유", "믿음의 자유"와는 관계없이 있을수 없는 것이다. 흔히들 "낮은데로 임하소서"라는 경구처럼 과연 종교계의 성직자들과 종교인들은 낮은데로 임하고 있는지 되새겨 보지 않을수 없다.

오마이뉴스에 실린 손석춘씨의 김추기경에 관한 칼럼중 "실제 민주화운동에서 김 추기경의 모습이 과대 평가된 대목이 많다는 사실을 알 사람은 다 알면서도 침묵해왔다"는 지적은 "낮은 데"로 임하는 종교인들이 적어서였다라는 사실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 것이다. 지난 70년대, 80년대의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김추기경의 역할은 상식이 있는 성직자라면 당연히 독재의 총칼에 식음하는 국민들속에서 부대껴야 하는 것이 성직자들과 종교인들에게 주어진 의무임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김추기경의 역할이 돋보인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서슬이 퍼런 시대에 성직자로서의 자기 희생적 모습으로 시대와 이 땅의 고통받는 수많은 어린 양들을 위한 목자의 길을 걸어간 종교계 지도자들이 많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국천주교회의 "정의구현 사제단"의 눈물겨운 자기희생적 노력은 가히 존경할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의구현 사제단"의 활동을 탐탐치 여기지 않는 천주교회의 주교단에 의해서 수많은 제재와 간섭을 받을수 밖에 없었다. 정의구현 사제단에서 활동한 많은 일반 사제들이 천주교회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는 주교단에 의해서 보복성의 인사조치나 불이익을 당할때 김추기경께서는 외면하고 주교단의 보수적 판단에 손을 들어준 것은 결코 잊을수 없는 일이었다.

김추기경께서 자신의 정치적 관점이나 인식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막을수 없으며 이를 비난할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정치적 판단이나 인식이 우리 사회의 본질적인 모순을 정확히 집어내고 이를 비판하는 비판의 가치중립성이 지켜지고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선 비판하지 않을수가 없다. 조선을 비롯한 수구언론들이 김추기경의 말씀을 얼씨구나 좋구나 하면서 대서특필하면서 위기에 처한 보수를 가장한 수구세력들에게 기사회생할 기회로서 삼는 아이러니한 상황들이 연출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 김추기경은 과연 낮은데로 임함에 있어서 누굴 위해 낮은데로 임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지 않을수가 없다. 한국천주교회내의 권위주의가 우리 사회에 만연된 권위주의적 시스템보다 더 강고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컨데, 추기경의 본말이 전도된 참여정부에 대한 비판과 편향적이고 왜곡된 인식은 이율배반적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한국천주교회가 그 어느 나라의 카톨릭 교회보다 수구보수적이라는 것은 우리 국민들은 모르고 있다. 독재정권시절 정의구현사제단과 일단의 양심적이고 진보적 성향의 사제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인해서 한국천주교회가 국민들로부터 과도한 찬사와 존경을 받거나, 민주화의 크나큰 공헌을 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서, 우리 사회의 약자들을 위해서,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한국천주교회 차원에서 한 일은 없다. 한국천주교회와 정의구현 사제단은 분리를 해서 봐야 한다. 정의구현 사제단은 한국천주교회내에선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한국천주교회의 실질적인 의사결정기관인 한국천주교회 주교단이 군사정권의 압력에 순수히 동조하여 정의구현 사제단을 해체시키기 위한 공작을 수없이 자행되었다는 것을 일반인들은 알턱이 없을 것이다.

한국천주교회는 서울, 광주, 대구 3개 대교구와 돌아가신 지학순 주교가 교구장으로 있던 원주교구를 비롯한 12개 교구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1980년대에 연평균 7.54%의 높은 신자 증가율을 지속해 오고 있다. 그리하여 1981년 140여 만 명이던 신자수가 1986년 초에 200만 명, 1992년에 300만 명을 넘어섰고 현재 약 400만명을 넘어서고 있다. 1980년대의 우리 사회는 고착화된 남북 분단 체제 아래서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로 말미암아 인간 소외의 현상이 심화되고 인간 존엄성이 말살되는 상황에서 반독재와 민주화 쟁취를 위한 의지와 노력이 다른 종교 집단보다 상대적으로 강했다고 볼 수 있다. 광주 민중 항쟁에 대한 참여와 지원으로부터 민주화 운동을 시작하였다. 1987년에는 정의구현사제단의 ‘민주 개헌’ 촉구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이른바 6월 항쟁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또한 이 해에는 ‘민주쟁취공동위원회’가 결성되었고, 1988년 ‘정의구현전국연합’이 발족하게 되었다.1980년대 전반에 걸친 노동 운동 탄압 과정에서 교회의 노동 운동도 상당히 위축되었으나, 교회의 노동 운동가들은 ‘노동법 개정 청원 운동’(1985) 등 대중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노동상담소 활동 등을 통해 노동자의 권익 신장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반면에, 이 시기 농민 운동은 비교적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가톨릭농민회는 전국농민회의 결성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민족의 화해와 재일치를 지향하며 이 시기에 한국천주교회 안에서 일어난 일 가운데, 이른바 ‘통일 열사’ 조성만 군의 죽음(1988), 임수경 양과 문규현 신부의 북한 방문(1989)은 한국천주교교회내의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주교단과 사제들에게 거센 반발을 하였다. 이 당시 한국천주교 주교단회의는 문규현신부에 대해 강한 비판과 사문난적으로 규정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한국천주교회의 사회참여 운동은 일반 사제와 수도자들 중심으로 이루어지다가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기점으로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현실참여 운동으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였지만, 한국천주교회의 보수성과 폐쇄성을 깨뜨릴순 없었다. 교회내부의 문제보다는 교회외부의 사회참여 운동이 우선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였지만, 군사독재시절이라는 시대적 상황은 교회내부의 보수성과 폐쇄성, 이로 인한 교회의 권위주의에 대한 문제는 논의될 계재가 되지 못한 것이다.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로 불리울 수 있었던 것은 김수환추기경이라는 한국천주교회의 수장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암울한 시대의 횃불을 밝히고자 한 수많은 평사제들가 수도자, 신도들이 이 땅의 민중들과 함께 낮은 곳에 임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였던 것이다.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라는 상징성과 더불어 서울대교구청의 대주교였던 김수환추기경의 상징성이 계속 존속되고 이어지기 위해선 과거와 같은 민주화 운동을 위해 헌신하는 그런 상징적인 노력들이 계속 될때에 존중되어지고 존경받을수 있는 것이다.

한국천주교회는 성직자들과 신자들 양 축으로 움직여지고 있다. 성직자들의 최고의사 결정기관은 "한국천주교회 주교회의"이고 신자들의 의사결정의 대표적 기관은 한국천주교회 평신도사도직협의회가 있다. 주교회의는 사실상 한국천주교회의 모든 정책과 활동에 대해 결정하는 최고위 결정기관으로서 한국천주교회는 바로 주교회의에서 움직여지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잘 알고 있는 "정의구현 사제단"은 한국천주교회내에서 공인되지 않는 비공식 단체이다. 한국천주교회의 현실참여 활동과 운동의 정신은 바로 정의구현 사제단에서 주도해 왔고 형성해 온 것이지 한국천주교회의 공식대표기구인 주교회의에서 이끌어 온 것이 아니다. 교회의 수구보수화를 사수하는데 양축이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주교단과 평신도사도직협의회이다. 한국천주교회는 이들 양날개로 날고 있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보기엔 정의구현 사제단이 한국천주교회의 공식 기구로서 한국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로 오해하는 경우가 태반인데, 죄송한 애기이지만 아직도 정의구현 사제단은 주교단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평신도사도직 협의회등 각 교구청 산하의 성당에서 활동하는 사목위원회등 신도들의 사목활동은 대다수가 사회적 약자들이 아니라 사회적 강자들내지 이들 사회적 강자들이 인정한 신심이 강한 신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한국천주교회의 수구보수성에 불구하고도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하기 위해 저 낮은곳으로 임하려는 깨어 있는 평사제들과 신도들에 의해서 한국천주교회는 필요이상으로 과대평가 받고있고 사회적 강자들의 사회적, 정치적 논리를 수용하면서 교회의 수구보수화를 재촉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김수환 추기경이며 각 교구청의 교구장인 대주교나 주교들, 그리고 각 교구청에서 목자의 길보다는 행정관료성에 젖어 있는 권력지향적인 사제들이 한국천주교회의 수구보수화를 재촉하는 핵심들로서 이들의 각 교구청의 경제적 정치적 힘을 가진 신도들과의 밀월관계는 새로운 사회를 나아가는데 걸림돌로서 작용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최대표가 국회 대표연설에서 "대통령 한 사람이 바로서면 다른 것은 저절로 된다라고 김수환 추기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라는 말을 통해서, 상징성이 가득한 성직자와 신자로서 사회적 강자를 대표하는 최병렬로 대변되는 한국천주교회의 현주소를 가늠하는 바로미터라 하지 않을수 없다. 폭압적인 인권유린,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반민주적 정치구조, 부패와 부정의 먹이사슬구조, 민주적 절차를 파괴시키고 민주적 정치소양을 억압하는 권위주의 사회구조를 공고하게 만들어 온 군사정권에서 기생해온 수구세력들에 대해선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화해와 관용을 베푸는 아량을 한껏 보여주었다. 그러나 저들이 저질러온 온갖 사회부조리와 부패구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하는 이들과 이를 지지하는 지지자들을 나라를 혼란시키는 주범으로 몰아가는 현실인식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임해야 할 성직자로서의 기본 역할을 스스로 내던짐으로써 자신에게 가지게 된 시대의 양심이라는 상징성은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땅의 주류는 해방후 친일세력들이 사라지지 않고 부정,부패, 타락, 억압을 일삼은 이승만, 박정희정권, 전두환-노태우 신군부정권, 김영삼 정권까지 단한번도 권력의 쓴맛을 모른채 권력에 기생하면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려온 "친미-반북"세력들이. 이들은 여전히 우리사회의 주류이며 가공할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겐 면죄부를 그렇게 쉽사리 주면서 온갖 사회의 쓰레기와 권력의 부패물을 청소하려는 정부와 그 지지세력을 도리어 우리사회의 총체적 부패구조와 사회악을 만들어 낸 주범으로 몰고가는 지난날 민주화의 등불로 상징된 종교지도자 김추기경의 모습은 볼수가 없다. 이젠 그분에게서 과거의 등불을 보고자 하는 것은 일찍감치 접고 새로운 사회에 맞는 사회의 등불을 찾아야 하는 것이 시대의 소명이자 과제일 것이다. 무릇 세상의 모든 만물의 그 쓰임은 시기에 달라질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과거에 희망의 불꽃이었다고 하더라도 바뀌어 가는 사회에서도 여전히 희망의 불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과거의 명성을 통해 이루어진 상징성의 권위가 영원하기 위해선 부단한 자기 성찰과 자기 노력을 통해 올바른 시대의 눈과 귀를 갖고서 진정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낮은 곳으로 임할려고 할때에 우리 사회의 원로로서 지도자로서 추앙을 받을수 있는 것이다. 이라크파병에 찬성을 표한 김추기경의 모습에서 결코 평화주의자의 모습을 볼수 없음이요, 하나님의 이름을 내걸고 이루어진 성스러운 기독교의 십자군이 자행한 다른 종교민족의 살륙, 다른 종교문명의 파괴와 그들의 재물을 약탈한 중세의 교황의 모습과 오버랩되는게 비애감만이 남겨질 뿐이다.

종교는 영혼을 구한다면서도 영혼이 깃들어져 있는 수많은 육체를 파괴한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미국을 반대하고 이라크 파병반대하는 것이 과연 우리의 영혼을 멍들게 하는 것인가. 적어도 종교지도자라면 자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타 종교국가의 국민들의 육체를 파괴하여 영혼을 죽게 하는 전쟁에 우리의 젊은이들을 보내는 것에 반대를 해야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가. 김추기경의 이율배반적이고 자기모순성에서 벗어나긴 힘들 것이다. 바뀌어 가는 사회에 맞지 않은 종교관과 현실인식이기에 김추기경의 시대적 역할의 소임은 더 이상 주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시몬느 베이유는 전쟁에 대한 고찰이란 글을 통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정면에 있는 적만이 진정한 적이 아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한다면서 우리를 수단으로 밖에 보지 않는 자가 바로 진짜 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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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9.15 15:07

    성상숭배가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동양에는 성상이 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만.

  • 13.09.15 16:15

    초기 성물 존경은 2세기 초반에 역사적으로 증명됩니다. 성화의 경우는 카타콤베 시절부터 보편화되어 갔지요.
    부조를 벗어나 환조의 형태로서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4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입니다.

  • 13.09.15 22:21

    그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방향으로 바뀌어진 것은 아니지요. 서산 마애 석불에서도 그것이 도마의 상이라는 해석이 나오므로 성상숭배가 일찌기 동방으로도 전래된 것으로 보입니다. 순례하는 교회사 ( 브로드벤트)는 동방에 들어온 전도자들이 성상을 갖고 들어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인생들과 우상숭배는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인것같습니다.

  • 13.09.15 22:49

    님이 좋아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도 성상반대를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오히려 도나티스트의 경우
    자체 성물을 놓고서 북아프리카 지역 가톨릭교회에 대한 우월성을 주장하였다는 기록은 존재하지요. ^^+

  • 13.09.15 23:20

    도나티스트가 성상 숭배를 했다고요? 잘도 창작하십니다!@ 역시 로마 카톨릭의 뒤집어 씌우기와 엎어치기 실력은 탁월합니다!

  • 13.09.15 23:21

    어떤 이유로든 로마 카톨릭이 서양의 대표적 우상교라는 진실은 피할수 없을 것입니다. 동양의 대표적 우상교는 불교라고 하지요.

  • 13.09.15 23:31

    인정하기 싫겠지만, 도나티스트의 카르타고 주교가 실제로 5대 성물을 자랑하며 북아프리카 가톨릭에 대한
    우월성을 과시했습니다.^^+ 도나티스트에게 카르타고 주교가 가지는 위치는 잘 알텐데요..? ^^+

  • 13.09.16 23:52

    도나티스트의 감독 (개톨들과 분리되기 이전의) 멘수리우스를 말씀하시는 것같은데 그 당시에 성경을 중시하여 일종의 성물처험 생각하였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일반 물품들과 달리 소중하게 다룰 필요가 있었고 당시에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것을 황제에게 반납하던 개톨들보다야 나았지요. 또 만일 일부 도나티스트들에게서 성물숭배가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극히 미미했을 수도 있고, 그 것자체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 13.09.16 22:23

    멘수리우스가 언제부터 도나티스트 측의 감독이었습니까? ^^? 그는 도나티스트에게 있어서 '배교자'였고,
    도나투스파가 분파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습니다. 님의 그런 부정확한 지식이 님 주장의 신뢰도를
    떨어뜨립니다.

    참고로, 내가 지적한 그 주교는 도나티스트에게 있어서는 전성기를 이끌어 낸 위대한 주교로 평가됩니다.

  • 13.09.17 00:06

    멘수리우스는 개톨들이 떨어져 나가기 이전의 감독이므로 편의상 도나티스트라 한 것입니다. 님이 만들어놓은 기준에 따르면 개톨이 아니면 모두 이단이든지 나머지는 병신 머저리일 것입니다. 역사는 개톨들이 저를 가현설 주장자로 이단으로 제조해내듯이 얼마든지 멘수리우스는 이단이고 또 배교자로 보일 것입니다. 심지어 도나티스트들도 그에 대하여 오해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성경을 넘겨주었다고 오해되었지만 그는 이단 서적들만 전시해놓고 성경은 숨기고 있었습니다.

  • 13.09.17 00:19

    ㅎㅎㅎ.. 멘수리우스의 입장을 도나티스트가 계승했나 보네요? ^^+ 님의 지식에 대한 신뢰성이 의심가기
    시작합니다.^^+ 님 말마따나, 멘수리우스가 도나티스트 감독이면, 왜 그는 펠릭스라는 그의 사제가 지닌
    반란 혐의를 구명하기 위해 로마에 방문하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으면서, '배교자'인 케실리아누스를 그의
    부제로서 거느렸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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