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 피어선(1837년 3월 6일 ~ 1911년 6월 3일)은 미국의 목회자, 선교사, 신학자이다. 그는 기독교 근본주의의 선두주자였으며 13,000개 이상의 설교를 집필하였으며 50개 이상의 책을 썼다. 특히 한국의 언더우드와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회사가 R. E. 스피어(R.E.Speer) 교수 등 수많은 선교사와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1887년 새문안 교회가 시작된 해에 언더우드가 A.T. 피어선 박사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예배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편지를 보낼 정도로 깊은 관계가 있었다. 후에 언더우드는 피어선성경기념학원의 제 2대 교장을 지냈다. 1910년 약한 몸을 가지고 일본을 거쳐서 한국을 방문하여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병세가 악화되어 1911년 미국 뉴욕으로 돌아간 후 1911년 6월 3일 74세로 소천하였다. 그는 한국의 피어선성경기념학원(현 평택대학교)을 세우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친구인 무디와 함께 미국의 복음주의 운동을 주도하며 1886년 미국 노스필드에서 학생자원운동 단체를 창설하여 수많은 젊은 학생들에게 선교의 비전을 심어 주었고, 여기에 힘입어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왔다. 평택대학교에서 수많은 신학계와 교계의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송창근박사,박연서목사, 박석현목사, 손재학(제헌 국회의원), 한상동목사, 조기흥박사, 지휘자 김생려(金生麗), 김삼환목사, 이필재목사, 조상열박사 등이 있다. 최근 평택대학교 교수들 가운데 이광희박사, 김문기박사, 유윤종박사, 안명준박사, 신현수박사등이 피어선의 신학에 대한 연구논문들을 활발하게 발표하고 있다. 법학박사출신인 고광국박사가 2009년에는 "피어선의 선교전략과 실제에 관한 연구(평택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로 최초의 신학박사학위 논문을 국내에서 출판하였다. 미국에서 피어선 연구의 권위자로 보스톤 대학교의 데나 로버트(Dana L. Robert)교수가 있다.
생애
아더 T. 피어선(Arthur T. Pierson 1837~1911)박사는 19세기 후반 미국이 낳은 외지 선교의 선구자이며 그 창시자다. 그는「세계선교 논편」지(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의 편집인으로「선교의 위기」(The Crisis of Mission)의 저자로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창시자로 “금세기 안의 세계복음화(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e Generation)”라는 기치아래 미국청년들에게 동기를 부여하였다. 그는 장로교의 목사로서 디트로이트, 인디애나폴리스, 필라델피아 등 주요 도시에서 목회를 하였다.
그러나 세례에 관한 의견차이로 장로교에서 탈퇴하였고 당시 세계제일의 침례교회였던 런던 메트로폴리탄 테버너클의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목사의 후계자가 되었다. 당대의 저명인사들인 드와이트 무디(Dwight Moody), 허드슨 테일러(J. Hudson Taylor), A. J. 고든(Gordon), 조지 윌리엄스(Sir George Williams), 및 조지뮐러(George Muller)등과 교제하였고 전후 미국의 여러 복음주의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70여권에 이르는 저술과 수많은 논문 및 팸플릿을 기록하였으며 13,000편에 달하는 설교와 강의를 하였다. 동시에 당시 유력한 교단들 이를테면, 장로교, 침례교 및 회중교회 강단에서 사역한 초교파주의자였다. 1910년 목회 50주년이 되던 해 허드슨 테일러의 초청으로 일본, 한국, 중국, 인도, 이집트 등의 극동지역 선교여행을 하였고 일본에 도착했을 때 질병을 앓았다. 한국에 와서(1910. 12. ~ 1911. 1.) 선교사들을 위한 성경강해를 하였으며, 매우 열악한 여건에서도 성경을 공부하는 모습에 크게 감동 받아서 성경학교 설립을 약속하였는데 질병이 심해져서 고국에 돌아간 뒤에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유족과 친구들 후원자들이 피어선 박사의 유언을 따라 한국 땅에 초교파적 성경학교를 설립한 것이 1912년 서울 신문로에 세워진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이다. 이 학원을 전신으로 하여 1980년 대학설립인가를 받았고 평택으로 학교를 옮겨 1991년 피어선 대학으로 새 출발을 하였으며 1996년에 평택대학교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녀들
피어선 목사 부부는 슬하에 2남 5녀를 두었다. 그의 일곱 자녀들이 모두 선교사가 되었다. 그의 장녀 헬렌은 프레드릭 커티스와 결혼해서 일생토록 일본에서 선교하였고 차녀 로라는 아메리칸 인디안들과 함께 일하였습니다. 안나와 에디스는 뉴욕시와 필라델피아에서 여성정착 사업에 종사하였고 훗날 안나는 파푸아 뉴기니아에서 1년간 일하였습니다. 장남 델러반은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한 후 부친과 함께 「세계선교 논평」지를 위해 일하였고, 차남 패런드는 의사로서 건강의 손상으로 일을 그만둘 때까지 중남미에서 선교사로 일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딸인 루이스는 인도에서 선교하다가 1903년에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또 루이스는 뉴욕주 포우시에 소재한 YMCA와 매사추세스주 로웰 YMCA에서 비서 일을 하다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여성선교회인 여성연합선교회 산하에서 자원봉사를 하였고 인도에서 빈민층 여성들과 소녀들을 위해 일하다가 장티푸스 열병으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피어선 가족들은 그녀를 기념해서 중부 인도 누공에 기념 예배당을 설립하였습니다.
출처 :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359684
첫댓글 이런 글은 이미 교파화 되어진 단체 소속의 사람이 쓴 글이므로, 피어슨의 내면적 성장까지를 정확히 설명하지는 못한다고 생각됩니다. 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피어슨이 형제모임의 허드슨 테일러와도 교제하엿음을 볼수 있습니다. 조지뮐러의 전기를 썼다는 것은 그에 관하여 아주 잘 알았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피어슨이 장로교에서 탈퇴하였다는 말만 있는데, 그가 과연 목사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다녔는지도 의문입니다. 스펄젼도 마찬가지이지요.
아예 장로교 목사라고 했네요....
무디 스펄젼이 목사 칭호를 사용했는지 여부는 연구 확인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제가 극동방송을 듣는데 성경의 디모데를 디모데 목사라고 부르는 목사도 있었습니다. 목사교에서는 괜찮은 사람들에게는 목사칭호를 붙여주는 것이 관례인듯 합니다. 예수 목사, 바울 목사, 베드로 목사, 요한 목사, ㅎㅎㅎㅎㅎㅎㅎ 아브라함 목사, 이삭목사, 노아 목사..ㅎㅎㅎㅎㅎ
조지뮬러 형제님한테도 조지뮬러목사, 무디형제님한테도 무디목사라고 부르더군요. 목사라는 직위를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런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스펄젼은 처음에는 Evangelist 로 많이 통했지만 나중에는 Pastor 호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써리 대음악당 사고로 여러 사람이 죽은 사건으로 몹시 괴로워했고 말년에는 우울증에 시달렸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스펄젼이 목사칭호를 사용했을 가능성은 그가 칼빈주의자였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는 자칭 칼빈주의자였지만 실제 설교에서는 제한 속죄를 부정하고 무한 속죄를 주장하엿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전도와 구령의 멧세지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한 무제한 예정을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무디는 목사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믿어집니다. 챨스 피니도 마찬가지이지요. 무디는 프리메이슨에 극력 반대했습니다. 기독교인이 그런 불신자와 한 단체를 형성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미국 남침례교 목사들의 14%가 프리메이슨이라고 합니다.
찰스피니는 좀 위험한 완전성화론을 주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