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젼과 블로그
TV가 유포하는 획일적 거대담론의 극복을 위하여
1. 문화의 뽕, 텔레비젼
텔레비전은 이제 정보의 매체이기를 넘어 현대인의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우리 생활 영역 어디에서건 텔레비전을 만날 수 있고, 우리가 시청권을 갖고 있다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착각과는 달리 사실상 우리는 그것의 시청을 강요당하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텔레비젼의 강압적 편재성(ubiquity)은 현대인으로 하여금 그것을 과도하게 탐닉하게 하거나 그것에 중독되게 하는 사회적 병리현상을 광범위하게 확산시켰다.
드라마, 스포츠중계, 쇼, 광고, 뉴스... 텔레비전의 단골 메뉴인 이런 것들이 남녀노소 모두에게 강한 중독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일 것이다. 이미 대한민국 대다수의 주부들이 여타의 것에 비해 환각 작용이 강한 드라마라는 뽕(필로폰)에 중독된 지는 오래 되었고, 그나마 가장 중독성이 약한 것으로 간주되는 뉴스의 경우에도, 성인 남성 가운데 대다수가 눈을 뜨자마자 밤사이의 뉴스를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서 밤이 되면 9시 종합 뉴스라는 고용량의 뽕 주사를 재 주입 해야만 궁금증의 금단증상이 해소될 정도로 그것에 중독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허구의 드라마와는 달리 뉴스는 객관적 사실을 전달하고 있고, 실시간 전달되는 핫 뉴스(hot news)을 끊임없이 업데이트 해야만 정보화시대의 첨예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진실성이 검증된 생각일까. 텔레비전의 뉴스를 많이 시청 할수록 현실의 시사문제에 보다 더 경쟁력있는 정확하고 예리한 견해를 갖게 되는 것일까.
이런 근거 없는 생각을 왜 사람들은 맹신하는 것일까.
사실 뉴스라는 것도 특정한 사회 정치적 공간을 배경으로 특정 미디어 회사에서 제작되어 시청자의 구미에 맞게 포장된 하나의 상품임에 틀림없다.
객관적 사실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는 이 상품이 소비자에 의해 소비되기까지는 눈에 뛰지 않는 고도의 정치적 술책과 판매 전략이 개재되어 있다. 그래서 사실이라는 허울의 포장을 벗겨내고 나면 하얗게 뽕 가루 묻어있는 왜곡된 현실이나 날조된 거짓만이 남게 되는 경우도 자주 볼 수 있다.
2. 텔레비젼과 획일주의 담론 문화
사실 난 텔레비전 시청 일 세대이다. TV가 보급되던 초창기에나 있을 수 있었던 TV만화방을 우리 집에서 운영하였던 덕분으로 나는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사람들의 생활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소상히 관찰할 수 있었다.
1972년 [여로]라는 신파극적인 내용의 드라마는,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TV가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공동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해 주었다.
이 [여로]라는 드라마가 유행하기 전 다시 말해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전까지, 마을 사람들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난 후엔 어김없이 여름에는 모깃불 피운 널마루에, 겨울에는 군불 지핀 사랑방에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함께 잔손거리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들의 담론은 주로 현실의 생활상의 문제로 시작해서 친인척 이웃소식으로 이어지다가 화젯거리가 떨어지면 옛날부터 전승되어 오던 민담이나 신화로 채워졌다. 거기에 요즈음과 같은 연예인이나 스포츠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자연발생적인 담론 공동체를 통해 생활상의 문제를 공유하고 서로에 대한 공감대와 연대의식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러나 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사람들 사이의 대화는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었고 사람들은 티비 속의 가공의 인물들과 친해지고 그들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나마 점차 경제사정이 나아지고 집집마다 안방에 티비가 놓이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경향은 가속화되었고 그들이 모여 놀던 널마루와 사랑방엔 찬 냉기만이 감돌게 되었다. 결국 TV의 공중파를 타고 전국적으로 유포되는 거대 담론이 기존의 소규모 담론들을 해체하고 흡수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서커스로 대표되는 유랑극단과 소규모 동네극장도 타격을 받고 사라져 갔다. 시골에서 장마당이 설 때면 어김없이 찾아와 사람들을 즐겁게 하던 서커스, 유랑극단, 각설이, 약장수 등등 각종의 공연패들이 이 근대 수다쟁이 괴물에게 관객을 빼앗기게 되자 설자리를 잃고 점차 시들게 되었다.
조선후기의 사당패 굿당패, 일제 강점기의 신파극 만담과 같은 계열의 맥을 잇는 이런 전통적인 민중 공연이 텔레비전이라는 신매체가 유행하면서 사람들의 외면 속에서 소리 없이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3. TV의 골리앗 문화에 도전하는 다윗-블로그
텔레비전의 보급과 더불어 전국적으로 산재되어 있던 각양각색의 소규모 담론들은 텔레비전에서 전파하는 하나의 거대담론 속으로 통합되었고 사람들의 공동체적 놀이문화는 텔레비전 속의 가상의 극장과 쇼 그리고 스포츠중계에 의해 대체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프랑스의 철학자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사회를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감시체계가 작동하는 감옥으로 파악하였다. 여기에서는 노골적인 독재 권력이 아니라 권력과 지식이 결탁한 은밀한 감시와 처벌의 체계가 일상의 문화와 언어를 통해 자신들의 세련된 지배방식을 유지해 간다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60년대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보급된 우리나라 텔레비전의 역사는 그러한 근대적 독재체제의 설립에 주요한 수단으로 충실히 복무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은 물론 남한에서도 전후 냉전체제에 편승한 독재체제의 수립과 유지에 텔레비전의 기여도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현재에도 집권여당이 재벌의 방송장악을 목표로 하는 미디어법 개정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핵심적인 매스미디어 매체로서 티비가 갖는 영향력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세계 어느 독재체제에서이건 획일적인 통치이념과 근대적 환상을 대중들 사이에 널리 보급시키기 위한 가장 효율적 매체로 텔레비전이 널리 애용되어 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근대적 통제체제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환상과 획일적인 거대담론의 전파자로서 텔레비전은 ‘근대성’을 대변하는 기계라고도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근대의 중앙집권주의와 경제적 효율성 위주의 이데올로기를 극복해야 하는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이것을 문화적 관점에서 본다면 티비라는 획일주의와 상업주의의 전도사가 우리의 안방을 점거하고 우리의 정신세계를 유린하도록 방치하는 한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과제라 할 것이다.
나는 비현실적이다 못해 현실을 호도하는 드라마속의 담론이 우리의 거실을 어지럽히고, 또 그 폐해로부터 보호 받지 못한 우리 아이들이 획일적 가치관에 매몰된 몰개성적인 개체로 자라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을 획일적이고 상업주의에 오염된 텔레비전의 담론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을까.
나는 그에 대한 대안의 희망을 블로그에서 찾아본다. 모든 개인이 자신의 고유한 인생 경험과 가치를 표현하는 개인 방송국으로서의 블로그는 티비라는 거대한 문어발식 획일주의 괴물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다윗이 아닐까.
블로그는 그것이 출현한 이후로 우리의 담론 문화에 큰 긍정적인 혁명을 야기하고 있고, 앞으로 디지털기술이 발전 할수록 그 잠재적 힘은 더욱 확장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럴수록 자본과 권력은 블러그의 힘을 거세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요구에 순종하도록 길들이려는 공세를 강화할 것이다.
이 소중한 신생아가 새 희망을 창출할 또 다른 예수나 다윗으로 성장하기까지 이를 수호할 것인가 혹은 유아살해를 기획하는 마수의 손아귀로 넘겨주고 말 것인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행위 여하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훗날 지못미(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를 외치며 절규하기 보다는 보지자(보호하고 지켜서 자랑스러워) 를 외칠 수 있도록 우리의 뜻과 힘을 모아보는 것이 어떨까?(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