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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와 같은 인생에는 도무지 설명하기 힘든 기막힌 상황들이 정말로 많이 있습니다.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닥친 재난, 어린아이의 죽음, 낙태와 유산, 끔찍한 사고로 인한 죽음, 아까운 사람들의 요절, 가장의 죽음, 살인, 학대, 장애, 사업의 실패, 자살, 기득권자들로부터 당하게 되는 보이지 않는 압력, 각종 착취와 수탈 등 참으로 다양한 어려움이 존재합니다. 각종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질병과 재난이 만연합니다. 뜻하지 않은 죽음과 불행을 겪습니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너무나 안타깝고, 참담하고, 감당하기 힘든 슬픔과 고난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과 공의와 위로는커녕 악한 자들의 전횡으로만 가득 찬 현실 속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을 때도 정말 많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해서 이 상황들로부터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인생들은 누구나, 허물과 죄로 죽은 인생들은 누구나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다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할지라도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이 문제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한없이 무기력하고 불가항력적인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이런 상황 속에 있는 영혼들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요?
상실과 고통으로 인해 폭포수 같은 눈물을 쏟고 있는 이들에게, 그런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아픔을 당한 이들에게 어떤 답을 줄 수 있을까요? 고난과 역경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에 갇힌 상태에서 출구를 전혀 찾지 못하고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이들을 어떻게 권면할 수 있을까요? 사방이 꽉 막혀 버린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통곡하며 신음하고 있는, 천근만근처럼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들어와 버린 가슴을 움켜쥔 채 치를 떨고 있는,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믿음을 지키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이들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욕망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전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그들은 거친 땅의 들 나귀 같아서 나가서 일하며 먹을 것을 부지런히 구하니”(욥24:5a)라고 시작됩니다. 여기서 “그들”은 부와 명예와 권세를 독점하고 있던 기득권자들로부터 불의하게 억압을 받고 있던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한편,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넓고 풍성한 초원 지대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대신 거대한 사막의 언저리에 겨울에는 풀이 자라지만, 여름이 되면 곧 시들어 버리는 스텝(steppe)이 작은 규모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 스텝은 유목민들이 짐승들을 방목(放牧)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습니다.
사막의 주인이라고 불리는 베두인(Bedouin)들은 오늘날에도 이 스텝을 중심으로 유목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욥에게 비춰진 가난한 사람들의 상황은, 메마른 스텝 지역에서 지극히 소량의 먹이를 찾기 위해 헤매고 다니던 들 나귀의 모습을 연상시켰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속해 있던 공동체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광야가 그 자식을 위하여 그에게 식물을 내는구나.”(욥24:5b)라는 지적대로,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음식조차 구할 수 없었습니다. 이른 시간부터 늦은 밤까지 수고해도 가족을 먹일 수 있는 음식조차 구할 수 없었습니다.
배가 고파 연신 칭얼거리는 아이들에게 먹일 음식을 구하기 위해 메마른 광야 말고는 찾아 나설 곳도 없었습니다.(They are sent into the desert to search for food for their children, LB) 일상적인 생활공간은 불의한 욕망에 사로잡힌 악인들의 지배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고 의지할만한 혈연도, 지연도, 학연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비참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밭에서 남의 곡식을 베며 악인의 남겨 둔 포도를 따며”(욥24:6)라는 욥의 외침에 따르면, 도무지 허기를 이기지 못했던 그들은 남의 곡식을 도둑질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혼합된 가축 사료(mixed fodder)로나마 배를 채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불의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착취를 일삼았던 사악한 자들의 밭에 버려진 쓰레기 같은 음식 정도로 허기진 배를 달래야할 정도로 비참했습니다. 착취와 수탈을 당하지만 않았다면, 풍요롭지는 않을지라도 얼마든지 배를 곯지는 않아도 되었던 그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고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욥은 계속해서 “의복이 없어 벗은 몸으로 밤을 지내며 추위에 덮을 것이 없으며 산중 소나기에 젖으며 가리 울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욥24:7-8)라고 외쳤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먹을 음식뿐 아니라 의복도 없었습니다. 몸에 걸칠 옷조차 재대로 없었습니다. 거의 맨몸으로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했습니다. 이불 조각 하나 없이 추운 밤을 지새워야할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워낙 가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 궁극적인 이유는 악인들에게 저당 잡힌 것을 돌려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또 거할만한 마땅한 처소도 없었습니다. 바위 밑이나 동굴이 있는 산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위와 동굴만으로는 쏟아 붓듯 맹렬하게 내리는 폭풍우를 다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흠뻑 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혹한을 견뎌내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달리 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현실은 그야말로 참혹했습니다. 모진 목숨 끊어지지 않아서, 아니 스스로 끊을 수 없어서 헐떡이고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하루하루를 지독한 황당함 속에서, 이를 악물고 견디며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욥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무 이유도 모른 채, 모든 소유를 빼앗기듯 약탈당했습니다. 극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아픔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비참한 상황을 사악한 자들이 압제한 결과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힘없는 사람들을 무지막지한 권세로 압제하고 있던 악한 기득권자들을 하나님께 고발했습니다. 부르짖듯 “성에서 사람들이 신음하고 병자가 부르짖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신음에 대답하지 않으시는 구나”(욥24:12)라고 외쳤습니다. 폭력과 억압이 계속되고 정의가 완전히 짓밟히는 불의한 상황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척, 방치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은가? 내 말이 거짓말인가? 내가 헛말을 하는가?”(욥24:25)라는 외침에 따르면, 그는 지금까지 표명한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자신을 공박할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의 외침과 호소가 친구들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계시는, 엄밀하게 말하면 자신은 도무지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고통이 임하고 있는 불의한 현실을 그저 지켜보고만 계시는 것 같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그는 “높은 자들까지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누가 가르칠 수 있겠나?”(욥21:22)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무죄를 변호해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견디기 힘든 고난의 신비를 깨달아 알게 해 주실 수 있는 분도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당장의 소원은 무지막지한 고난으로부터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드러나는 순간, 자신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도 증명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지긋지긋한 고난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하나님을 만난 그는 “이제 제 자신을 경멸합니다. 그리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합니다.”(욥42:6)라고 고백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고집스럽게 순전함을 주장했던 자신을 경멸했습니다.
자신의 순전함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섭리를 불의하고 주장했던 어리석음을 경멸했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당신의 선하고 아름다운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도전한 자신을 경멸했습니다. 비록 고난 속에서 죽을지언정,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섭리를 끝까지 믿고 의지하지 못했던 자신의 우둔함을 경멸했습니다. 스스로 티끌과 재를 뒤집어썼습니다. 슬픔을 고백했습니다. 자신을 철저히 낮췄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뉘우쳤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성급하게 판단하고 지껄였던 죄를 회개했습니다.
이는 그가 여전히 아무것도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인격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절대 주권으로 섭리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욥의 관계가 바르게 정립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자신으로 하여금 도무지 견디기 힘든 혹독한 고난을 받게 하셨던 하나님의 목적이 과연 무엇인지 알아야 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억울하다고 통곡하며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이 어떤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든, 비록 죽음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더 이상 자신의 어떤 뜻도 더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변화된 욥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다 잡혀 견디기 힘든 고문을 받고 비참하게 죽어가는 순간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던, 아니 하나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다는 사실 앞에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던 믿음의 선배들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로마의 총독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종교 문제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성난 유대인들은 그런 그를 향해 주님을 죽여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죽일 죄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함성을 잠재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더욱 성난 유대인들은 주님을 죽이라고 외쳤습니다. 정치적으로 압박했습니다. 자신의 안위를 생각한 그는 주님을 사정없이 채찍질했습니다. 숨만 간신히 몰아쉴 수 있을 만큼,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을 정도까지 때렸습니다. 그 지경의 주님을 다시 유대인들 앞으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이 정도면 되지 않았나?”라고 말했습니다. 채찍질로 유대인의 분을 풀어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더 큰 소리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라고 외쳤습니다.
결국 예수께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운 십자가 가로 기둥을 어깨에 짊어지셨습니다.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걸음조차 옮길 수 없을 만큼 지쳐 있으셨습니다. 로마군병은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십자가 가로 기둥을 구레네 시몬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바로 그때, 주님은 당신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고 있던 여인들을 보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신과 자녀들을 위해 울어라”(눅23:28b)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구원사적인 의미에서 반드시 가야만 할 길을 가시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죽음은 필연적인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애통해야할 대상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정작 가슴을 치고 아파해야할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눅23:34b)라는 주님의 기도대로, 참으로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에 대한 무지(無知)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관심은 제대로 가누기조차 힘겨운 몸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계시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당신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남겨 놓으신 이 땅의 영혼들을 향하고 있으셨습니다. 무엇보다 당신 스스로를 비참하고 슬프고 불행한 인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에게는 저주받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나는 초라한 인생으로 보일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에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드릴 수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또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공포, 멸망과 파괴가 우리를 덮쳤습니다. 제 백성이 멸망하였으므로 제 눈에서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릅니다. 제 눈물이 그치지 않고 쉼 없이 흐릅니다. 여호와께서 살피시고 하늘에서 돌아보시기를 기다립니다.”(애3:47-50)라는 애가를 불렀습니다. 자신의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있던 나라와 민족에 두려운 일이 임했습니다. 공포에 떨 수밖에 없는 일이 임했습니다. 철저한 파괴였습니다. 처참한 죽음이었습니다. 어디서도 희망이라는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는 절망이었습니다. 무기력한 멸망이었습니다.
미리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마음의 준비를 철저히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사지가 떨렸습니다. 눈물이 빗물처럼 쉬지 않고 쏟아졌습니다. 손가락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불가항력적인 순간에도 슬퍼하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야수처럼 부르짖지도, 맹목적인 동요와 자포자기에 빠지지도 않았습니다. 극한 슬픔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자비를 기다렸습니다. “너희를 위해 세운 나의 계획을 내가 알고 있으니 내가 너희에게 재앙이 아닌 희망이 넘치는 미래를 주려 한다.”(렘29:11)라는 약속에 집중했습니다.
여기서 “희망과 미래”는 동의어입니다. 강조입니다. 간절히 바라고 바라던 미래, 대망하던 미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루실 희망으로 가득 찬 미래입니다. 그는 바로 그 하나님에게 집중했습니다. 눈이 짓무르고 뼈가 마르는 것 같은 지독한 고통까지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평안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한편, 어느 날, 한 기자는 영국의 대문호인 찰스 디킨스(Charles J. H. Dickens)에게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는 무엇일까요?”라고 물었습니다. 디킨스는 전혀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눅15장의 탕자 이야기라고 대답했습니다.
탕자 이야기보다 더 완벽한 단편은 없을 것이라고 극찬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탕자 이야기를 높이 평가한 이유는 문학적인 우수함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소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천 년 전에 남기신 이 짧은 비유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감동을 주는 근본적인 이유는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철학자들이 수천 년간 고민해 보았지만 끝내 답을 찾지 못했던 인간이 처한 실존과 고통의 이유와 영혼 구원에 대한 난제에 대해서 정확하고 분명한 답을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인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의 죄를 깨달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막상 회개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큰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들을 “이에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간지라. 그런데 아직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아버지가 그를 보았다. 아버지는 그를 측은히 여겼다. 아들을 향해 뛰어갔다. 목을 얼싸안고 입 맞추었더라.”(눅15:20)라는 말로 안심시키십니다.
여기서 “뛰어갔다.”(δραμὼν)는 “빨리 달리다, 빨리 걷다, 경기장을 달리다, 달음질하다, 분투하다” 등의 뜻입니다. 아들은 죄인이었습니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한순간도 조바심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의 두려움은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죄인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죄인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습니다. 멀리 모습이 나타나자마자 뛰기 시작했습니다.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울리기만 기다리고 있던 선수처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누구에게도 질 수 없다는, 반드시 다른 누구보다 먼저 도착해야 된다고 다짐한 사람처럼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지 않았다면 절대로 보일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The Sovereignty of God)의 저자요, 20세기 탁월한 성경 연구가 가운데 한 사람인 아더 핑크(Arthur W. Pink)는 이 장면이 성경 전체를 통틀어 하나님께서 서두르시는 유일한 장면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황폐한 땅을 고치실 때에도 서두르지 않으셨습니다. 침착하셨습니다. 신중하셨습니다. 질서 정연하셨습니다. 여유가 넘치셨습니다.
세상만사가 오직 당신의 뜻에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돌아올 때는 그렇게 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잠시라도 더 기다리시지 못하실 정도로, 보는 순간 달려가실 수밖에 없을 정도로 조급하셨습니다. 아들을 향한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지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탕자의 비유에 앞서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 없는 아흔아홉 명의 의인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명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눅15:7b), “이처럼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크게 기뻐할 것이다.”(눅15:10b)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방탕한 아들까지도 꾸짖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마음은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고 사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절대 주권을 행하십니다. 창세전 작정대로 섭리하십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 당하고 있는 혹독한 고난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는 도무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할지라도,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난 속에 방치해 두지 않으십니다.
당신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풀무로 뛰어든 다니엘의 세 친구와 마찬가지로 풀무로 뛰어드십니다. 그들과 함께 하셨듯이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그들이 나온 풀무에 여전히 머무십니다. 당신을 섬기기 위해서 목숨까지도 기꺼이 포기할 믿음의 사람들과 영원히 동행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우리는 실망스러운 현실 앞에서 서로 다른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갑니다. 하나님을 욕망합니다.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의 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깁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패를 돌리는 목적을 잊어버린 게 분명해. 내 패를 좀 봐. 내 인생은 적어도 이런 식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지 않아!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해주시지 않는다면 나도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겠어!”라고 말하곤 하나님을 아주 떠나버립니다. 그러나 설교의 황제 스펄전(C. H. Spurgeon)은 “갈보리는 우리의 주님이요 구세주이신 주님의 슬픔이 절정에 달했던 곳이지만 주님의 백성인 우리의 슬픔이 그치는 곳이기도 하다. 십자가는 주께 말할 수 없는 번민을 안겨드렸지만 주님을 믿는 모든 이에게 위로와 기쁨을 안겨주기도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고난의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은 누구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현실을 얼마든지 뛰어넘을 수 있는 참된 위로와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천로 역정의 저자 존 번연(John Bunyan) 역시 우리가 마땅히 기뻐해야 할 최상의 이유에 대해서 “평안이라는 꽃을 가슴에 달고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 꽃이 ‘죄의 용서’라는 꽃밭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자라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을 통해서 자신의 허물과 죄로부터 용서를 받은 사람에 주어진 기쁨보다 큰 기쁨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성경은 “가장 높은 것이나 깊은 것이나, 그 밖의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8:39)라고 말씀합니다. 특히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에서 돌이켜 영원한 생명을 구하도록 도우시기 위해 때로 우리 삶의 슬픔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고후7:10 Living Bible)라는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슬픔을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슬픔을 사용하십니다. 바로 그 슬픔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당신께로 더욱 더 가까이 끌어당기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혹독한 상황들을 영적인 알람으로 사용하십니다. 깊은 영적인 잠에서 깨우십니다. 당신 가까이 부르십니다. 오직 당신 한 분에게만 온전히 집중하게 하십니다. 욕망하게 하십니다. 영원한 당신의 나라를 사모하게 하십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당신의 평안과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하십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희망하나 찾을 수 없는 칠흑같이 어두운 환경과 상황과 조건들까지도 얼마든지 참고 견딜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뛰어넘을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실제로 욥은 주어진 고통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영적으로 각성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에 대하여 귀로 듣기만 했는데 이제 저는 주를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욥42:5)라고 고백할 수 있는 놀라운 은혜까지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평안과 기쁨과 만족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환난 중에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믿음으로 “주의 구원에 대한 기쁨을 내게 다시 주셔서 내가 주께 순종하게 하소서.”(시51:12)라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도무지 희망이라곤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는 온갖 학대와 유린과 고통 속에 놓이게 된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바라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애가 끊어지는 것 같은 참담한 심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고난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언제든 가장 먼저 달려오실 하나님 한 분만 믿고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 나라를 사모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간절하게 욕망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증거 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환난과 시험 속에서도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안과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여전히 어려움 속에서 힘겨워하고 있는 형제를 진심으로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는 복된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