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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 구경후에 라 람블라 동쪽에 있는바르셀로나의 고딕 지구!! 바리 고틱으로 향합니다..
바르셀로나 상징탑..
지금은 시청사로 사용되는 성당!!
대성당으로 향합니다!!
대성당은 무료 입장!!
12시까지는 무료 이후는 유료 입장이라고 합니다..
오픈된 연못이 있는 조금 밝은 분위기..
내전 기간 대다수의 성당들이 큰 피해를 입었으나 이곳은 전화를 피한 몇 되지 않는 곳..
안달루시아, 바스크와 함께 가장 극렬하게 공화파에 저항한 곳이 카탈루야 지역..
지금도 마드리드와는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죠!!
다른 지역의 대성당과는 달리 분리된 정원이 있어 조금 밝고 환한 분위기..
시각적으로 훨씬 좋아보입니다..
카톨릭의 성당들 실내를 컴컴하고 우중충하게 만들고 있는데 시대적인 조류에 맞게 조금 바꾸는 것은 어떨까요??
스테인드 글라스 통한 밝지 못한 조명보다 조금 창문도 크게 늘이고 자연광이 더 유입되게 하면
한결 더 편하고 부드러운 공간이 되지 않을까요??
그런 부분이 힘들다면 임의로 조명을 조금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 하고..
세상이 변하면 패턴이나 조류도 바뀌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를 유발하는 방법이 될 듯 한데..
1298에 착공하여 150년 만인 1448년에 완공되었으며,
길이 93m, 너비 40m, 첨탑 높이 70m의 거대한 규모!!
정면의 현관은 1408년에 만들어진 설계도에 따라 500여 년 만인 1913년에 완성!!
실내는 일반 성당과 다름없는 구조와 장식..
성당 안에 정원이 있다보니 여러 개의 부속 예배당으로 나누어져 성인들의 유체가 안치되어 있으며,
중앙 제단 밑에 바르셀로나의 수호 성인인 산타 에우라리아의 묘가 있다.
오랜 세월 바르셀로나 시민들과 함께해온 대성당은 시민들의 문화생활 공간으로도 널리 활용되고 있다.
주말에는 대성당 앞 광장에서 오래된 성당 물품이나 투우사의 옷 등을 파는 벼룩시장이 열리고,
축제가 있는 날에는 시민들이 모여 전통춤인 사르다나를 추기도 한다.
다른 지방의 성당과는 달리 조금 자유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공간이기는 합니다!!
성당 구경..
무료 입장이라 입장료를 내고 옥상으로 올라가 봅니다..
첨탑의 조각이 예술이네요!!
걸어 올라가는 것을 상상하였지만 유감스럽게 승강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보수공사가 한참이네요!!
첨탑의 조각이 아름답고 바르셀로나 도심과 잘 어울리는 공간입니다!!
멀리 몬주익 언덕!!
내일은 하루종일 몬주익과 바르셀로나 구장 "뉴캄프"에서 보낼 생각입니다..
인증샷..
혼자 사진 찍는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젊은이들 셀카봉을 들고 다니던데 구태어 번잡하게 그럴 필요까지는 느끼지를 못하겠고..ㅎㅎ
요즈음 세태!!
같이 여행을 와도 셀카봉을 이용 자기 사진을 찍더군요!!
친구가 만들어주는 마음에 들지않는 구도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황홀한 구도를 찾겠다는 생각..
하루종일 연못에서 자기 얼굴을 바로보며 자아 도취에 빠지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샤방샤방한 원피스의 한국 여자애들!!
"진정한 아름다움은 외면가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에 안쓰럽기도 합니다..
지나친 외모 지상 주의.. 한국의 현주소!!
저처럼 지나치게 거지 패션도 조금 문제가 있지만..ㅎㅎ
옥상 구경 조금 더..
거지 패션 장점도 많습니다!!
일단 삐끼가 붙지 않으며 별 가진 것이 없어 보이다보니 소매치기들의 표적도 되지 않습니다..
생긴것은 현지인과 조금 달리 보이고 또 들고 다니는 것이 없다보니 고급 호텔을 출입해도 별 제지는 없고!!
그런 장점을 위하여 쭈~~~~우욱 트렌드로 만들 생각입니다!!
제가 참기름을 바른 것처럼 뺀질삔질하게 다닌다고
장동건이나 정우성, 원빈이 될 것도 아니고..
또 젊은 외국애들이 부킹이 들어오겠습니까?? ㅎㅎ
오랫동안 바르셀로나 시내 감상..
멀리 사그리다파밀리아..
혹자들은 이야기 합니다!!
바르셀로나를 거쳐 지나가면서 시간이 없으면 사그리다파밀리아를 보라고!!
그러나 작은 시간으로는 보기 힘듭니다..
일년에 300만명 이상이 이곳을 방문하기 때문에 줄을 서고 또 입장을 하려면 반나절 이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바르셀로나 바다와 접한 분지 지형으로 조망이 너무나 좋습니다!!
지중해 바람의 영향으로 덥지도 않고..
여행하기에는 너무나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기에 연중 관광객이 붐비는 곳..
스페인 여행 일번지라고 할 수가 있는데 옥의 티도 있습니다..
모든 공간에서 입장료를 받으며 금액도 결코 저렴하지가 않습니다..
유명한 박물관, 피카소 미술관등 미술관, 유명한 건물, 그리고 사그리다 파밀리아와 뉴캄프까지 유명한 장소를 모두
입장하면 최소한 300-500유로의 입장료가 필요한 황당한 관광지입니다!!
별 뽀족한 사는 방법이 없으니 관광객을 호구잡아서 사는 느낌까지 들더군요..
저는 꼭 필요한 장소를 제외하고는 입장료를 극도로 아꼈습니다..
사그리다 파밀리아만 입장료를 내고 입장한 기억이 있는데 다른 곳에 또 들어갔는지는 가물가물..ㅎㅎ
뉴캄프는 당연히 갔습니다만 입장료를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설명!! 몬주익의 국립미술관도 갔습니다만 입장료를 지불하지 않았고..
성당내의 피에타 상..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
미켈란 젤로가 만든 피에타상이 가장 유명합니다만 대부분의 성당에는 피에타상이나 그림이 반드시 있습니다..
예수!! 저는 예수라고 부르는 이유도 갸우뚱..
영어로 JESUS!!
물론 각나라에서 표기가 틀리기는 합니다만 기독교는 우리에게 전래되어 들어온 엄격히 말하면 전래종교..
그 종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표기부터 통일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지금은 조금 바뀌었지만 역자도 분명하지 않은 번역 성격에 집착하여 교리 논쟁을 펼치는 우리 기독교 성직자들..
심심하면 이단 논쟁!! 전래종교를 표기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 부터 이단아닌가요??
국제화 시대에 아직도 마태, 누가, 요한이라 불리우는 이유가 뭐죠??
영어 성경이나 라틴어 성경을 읽기 위해서는 인명부터 다시 배워야하는 촌극..
지금이라도 용단을 내려서 바꾸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성당 구경 조금 더..
JESUS CHRIST..
인류 역사에서 첫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으로 보아야 하겠지요!!
그의 탄생으로 서력이 시작될 정도이니..
불과 33년의 역사를 살았고, 현존하는 성경외에 카톨릭에서 발표를 금지하는 외전에 그의 생애가 언급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신약 성경에 나와 있는 그의 생애가 전부..
불과 33년의 세월을 살았고 성경에 명시되지 않은 시절에 대해서의 그의 생애는 알지 못하면서도
그를 모르는 지식인 아니 지구인은 없을 정도..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름을 알리는 것은 산 기간이 아니라 그가 살았던 시대와 부합되는 인생인 듯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억압하는 암울한 시대에 핍박받는 영원에게 듣도 보지도 못했던
평등, 사랑, 박애를 주장하니 얼마나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 왔을까요??
그가 전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은 것도 그의 사후 300년이 지난 니케아종교회의에서 부터라고 하니
그의 제자들의 그를 알리기 위한 노력도 대단했다고 볼 수 있고..
많은 신자들이 그를 "신의 아들"로 추앙하고 있으나, 신의 아들이던 사람의 아들이던 간에 인류역사에 대단한 족적을
남긴 사람임에는 분명합니다!!
아버지는 변변하지 않은 사람으로 취급받으나, 어머니까지 성모 마리아로 불리우며 신격인 대우를 받고 있으니
정말 동서고금을 통털어 가장 큰 효자라고 볼 수도 있고..
기독교 신자들에게 이런 논리를 이야기하면 바로 칼맞아 죽을 수도 있겠지요!!
제가 생각하는 기독교관이지만 종교 문제이기에 더 이상 언급을 생략하겠습니다..
저만의 공간이니 저의 종교관을 언급한다고 별로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요..
혹시 태클 거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나 무시하렵니다..
오픈된 공간이기는 하지만 저에게 관심있는 분들도 자기 의지로 들어오는 공간이니 보기 싫으면 넘어가면 되지 않나요??
대성당 옆인데 이름은 잊었습니다!! 지송..
뭐 이름이 중요하겠습니까..
그냥 보면 그 뿐인 장소인 것을..
박물관 건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고딕 지구에는 많은 성당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유료 입장!!
그냥 외관만 구경했으며 간혹 무료로 개방이 된 곳을 내부 구경..
보시다시피 대등 소이합니다..
간단하게 건성건성보고 넘어 갑니다!!
성당 구경!!
워낙 많은 곳을 보다보니 슬 지겨워집니다..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이 있다고 가이드북에 소개하지만 대부분의 그림들도 하품나는 수준입니다!!
성경에 기초하여 성직자들의 요구에 부합하여 그린 중세 암흑시대의 그림이 되다보니 천편일률적으로 그림은
성당의 조명만큼이나 어둡고 파격을 느끼게 하는 묘사는 전혀 없습니다!!
일반 서민이 성경을 읽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던 시절이니 단지 성경의 구절을 그림으로 옮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뭐 감동을 느낄 만한 구석이 없네요!!
단지 작은 그림인지 큰 그림인지 차이외에는 작가의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대등소이합니다..
서유럽을 처음 여행할때는 신기한 마음에 열심히 구석구석 보았지만 요즈음은 대충 넘어갑니다!!
사람들이 많이 움직이는곳!!
피카소 미술관입니다..
피카소가 말라가 사람인데 어떻게 카탈루냐에 미술관이??
결국 상업적인 장소로 보아야 합니다..
대부분 피카소 초창기의 데생이나 스케치등이며 유명한 작품은 없는 장소로 가이드북에 명시..
적지 않은 입장료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입장합니다..
저는 어차피 마드리드를 가서 레나 소피아에서 "게르니카"를 볼 생각이기에 생략합니다..
별 대작이 없이 그저 그런 그림이 전시되어 있는지 입장료는 다른 곳에 비하여 저렴하네요!!
파블로 피카소!!
1881년에 태어나서 1973년에 작고한 스페인을 대표하는 작가..
전성기인 1907년 입체파 운동을 전개하면서 현대적인 화풍을 선도한 작가..
1936년 내전 당시 인민전선을 지지하고 1944년 프랑스공산당에 입당하면서 살아서 부와 쾌락을 모두 누린 복많은 화가!!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이기에 그의 생애에 대하여 한번 살펴보기로 합니다..
1881년 10월 25일 에스파냐 말라가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미술교사!!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
초급학교에서는 읽기와 쓰기를 어려워했고 졸업이 어려울 정도로 학습능력이 저조했지만 그림을 그리는 능력은 뛰어난 재능!!
14세 때 바르셀로나로 이주하였는데, 이때부터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미술공부를 시작!!
하지만 출석을 거의 하지 않았고 학교 규칙과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학교를 그만두었다.
다시 마드리드에 있는 왕립미술학교에 다녔지만 결과는 같았다. 1
7세 때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왔으며 이 무렵부터 프랑스와 북유럽의 미술운동에서 많은 자극을 받고
특히 A.르누아르, H.툴루즈 로트레크, E.뭉크 등의 화법에 매료되어 이를 습득하려고 노력하였다.
1900년 그가 19세 때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하였고, 다음 해 재차 방문하여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자유로운 제작활동을 하고 있던 젊은 보헤미안의 무리에 합류하였다.
피카소는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등 인상파들의 작품을 접했으며 고갱의 원시주의, 고흐의 열정적 표현주의 등의 영향도 받았다.
당시 피카소는 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몰랐고 세계적인 도시 파리의 모습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화려함의 이면에 가려진 빈곤과 비참함을 목격하였으며 질병과 성병이 가득한 도시의 가난을 두려워하였다.
피카소는 자살을 결심하기도 하였으며 파리의 구석진 다락방에서 추위와 가난을 인내하며 지냈다.
하지만 당시의 요절한 화가들에 비하면 피카소는 단기간에 명성을 얻게 되었다.
20세에 첫 전시회를 열었고 그의 상황은 나아지기 시작하였다.
피카소는 파리의 비참한 생활상에 주목하여 거지와 가난한 가족 등을 그렸다.
청색이 주조를 이루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때를 피카소의 ‘청색시대(靑色時代)’라고 부른다.
이때 제작된 작품들은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활 참상과 고독감이 두드러졌다.
또한 파리에서 동고동락하면서 지낸 절친한 친구였던 카를로스 카사헤마스가 비극적인 자살을 함으로써 그의 충격은 더했다.
1903년에 제작된 《인생》은 당시 피카소의 혼란스러웠던 감정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1904년 몽마르트르에 정주하면서부터는 연애를 하였고 그림의 색조가 청색에서 장밋빛 시대로 바뀌면서 색상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과거의 에스파냐예술, 카탈루냐지방의 중세조각, E.그레코, L.F.J.고야 등이 지닌 독특한 단순화와 엄격성이 가미되어 갔다.
테마는 작품 《공 위에서 묘기를 부리는 소녀》 《광대》 《곡예사가족》 등에서처럼 곡예사들을 묘사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어릿광대나 곡예사는 무대 위의 모습이 아니고 그 생활의 이면을 파헤친 것이었다.
1905년 피카소는 파리에서 인정받는 화가가 되었다. 기욤 아폴리네르를 만났고 다음 해에는 H.마티스와 교유하였다.
그러나 작풍은 P.세잔의 형태관을 살려나가 점점 단순화되고, 1907년의 그의 대표작인《아비뇽의 처녀들》에 이르러서는
아프리카 흑인 조각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는 동시에 형태분석(形態分析)이 비로소 구체화하기 시작하였다.
조르쥬 브라크와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으로, 그와 함께 공동작업으로 입체주의 미술 양식을 창안하였다.
1909년에는 분석적 입체파, 1912년부터는 종합적 입체파시대에 들어갔다.
이 무렵 그는 이미 20세기 회화의 최대 거장이 되었고, 종합적 입체파수법을 1923년경까지 계속하면서 여러 가지 수법을
차례대로 전개하였는데, 활동범위도 J.콕토와 알게 되면서 무대장치를 담당하는 등 점점 확대되어 갔다.
1915년 《볼라르상(像)》과 같은 사실적인 초상을 그리고, 1920년부터는 《세 악사》 등 신고전주의를,
다시 1925년에는 제1회 쉬르레알리슴전(展)에 참가하였다.
또 1934년에는 에스파냐를 여행하여 투우를 소재로 그렸으며 1936년의 에스파냐내란 때는 인민전선을 지지하고,
다음 해 프랑코장군에 대한 적의와 증오를 시와 판화로 나타낸 연작 《프랑코의 꿈과 허언(虛言)》
및 전쟁의 비극과 잔학상을 초인적인 예리한 시각과 독자적 스타일로 그려낸 세기의 대벽화 《게르니카》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통곡하는 여인》도 이 무렵의 작품이며 이때부터 피카소 특유의 표현주의로 불리는 괴기한 표현법이 나타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해는 에스파냐에서 지냈으나 다음 해 독일군의 파리 침입 직후 파리로 돌아와
레지스탕스 지하운동 투사들과 교유하고, 1944년 종전 후는 프랑스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주로 남프랑스의 바닷가에서 생활하면서 그리스신화 등에서 모티프를 취하여 밝고 목가적 분위기마저
자아내는 독특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도기(陶器) 제작과 조각에도 정열을 쏟고 석판화의 제작도 많아 이 영역에서도 새로운 수법을 창조하였다.
그 후 6·25전쟁을 주제로 한 《한국에서의 학살》(1951), 《전쟁과 평화》(1952) 등의 대작을 제작하여, 현대미술의 리더로서
거장다운 활약을 하였다.
한마디로 재능도 있었지만 시대도 잘 태어나고 운때도 잘 만나서 대단한 부와 명성을 누리고 자기 하고 싶은 일은 다하고
천수까지 누렸으며, 노년에도 자기를 추종하는 여인과 사랑을 나무면서 남 부럽지 않은 삶을 산 얼마되지 않는 화가!!
제가 조금 언급한 것처럼 피카소는 두얼굴을 가진 삶은 산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피카소는 생전에 나는 공산주의자며 나의 그림은 공산주의자의 그림이다”라는 자주 언급했습니다만
그는 수많은 하인을 거느리며 누구보다 호화롭게 살며 ‘공산주의’ 운운했던 僞善(위선)을 보여 주었으며
뛰어난 天才(천재)성으로 역사를 빙자한 수없는 거짓을 그려온 사악한 작가로 치부하는 지식인도 많습니다..
피카소의 거짓을 증명하는 작품으로 자주 거론되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을 소재로 한 작품입니다..
6·25사변을 소재로 그린 <조선에서의 학살>은 이른바 <1950년 10월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황해도 신천군에서 저지른 미군의 양민학살>을 다룬 작품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실제 신천학살은 미군과 무관한 좌우익 피아간 벌어진 살상극이었다.
“김일성은 이순신, 세종대왕 같은 위인”이라고 떠받들며 密入北(밀입북)한 황석영마저
소설 <손님>에서 신천학살은 미군과 무관한 것이라고 기록했다.
건국대 이주영 명예교수(사학)는 “황해도는 지주, 엘리트가 많았고 기독교 세력도 강했기 때문에
공산주의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 과정에서 6·25가 벌어지자 우익들이 봉기해서 좌우익 사이에 희생된 이들이 많았다”며
황해도 신천군은 평양으로 진군하는 미군의 진격路(로)와 떨어져 미군이 개입할 수도 없었는데
북한은 신천역사박물관을 만들어 반미(反美)선전장으로 활용해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선전과 다르게 6·25 당시 학살은 대부분 북한 인민군과 좌익들에 의한 ‘인민재판’의 형식으로 이뤄졌다.
당시 인민재판으로 처형된 민간인은 총 12만 2,799명(대한민국통계연감. 1952년 발간)에 이른다.
이 참극은 남경대학살, 바르샤바 게토(Warsaw Getto)의 유태인 학살과 함께 20세기 세계적 학살 중 하나로 기록된다.
붉은 완장을 차고 다니던 '바닥 빨갱이들'은 죽창이나 도끼, 쇠스랑, 괭이, 곤봉 등으로 우익인사를 죽이는
원시적 학살행위를 자행했다.
북한 입장에서 6·25는 자신들의 도덕성을 부정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다보니 북한은 한국에 의한 6·25北侵說(북침설), 미국에 의한 6·25南侵誘導說(남침유도설) 등 온갖 조작을 해왔고
미군과 국군에 의한 소위 양민학살‘說(설)’을 날조해왔다.
피카소는 진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의 ‘증오의 신념’을 따라갔다.
급기야 <조선에서의 학살>이라는 거짓을 화폭에 담아 세계인을 상대로 사기극을 저질렀다.
영국의 유명한 저술가인 폴 존슨(Paul Johnson)은 피카소에 대해 “내가 실제로 만났던 사람 중에 가장 邪惡(사악)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적었다.
그의 <위대하거나 사기꾼이거나>에 나오는 피카소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게르니카>를 그릴 당시 그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두 여자를 서로 공격하게 한 뒤 두 여자가 작업실 바닥에서 싸우는 모습을 흡족한 마음으로 구경했다. 그는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화가였고 고트족, 반달족, 청교도 혁명가들과 전체주의 악당들의 해악을 모두 합해도 그가 예술에 끼친 해악은 따라올 수 없다”
또 다른 농산물 시장으로 향합니다..
피카소가 불우하게 살다갔으며 현대 미술사의 평론가에게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일반 화가처럼 사후에
자본가들의 재산 축적 수단으로 그림이 전락을 하면서 주목을 받았다면 이렇게 극단적인 평가는 나오지 않았겠죠!!
사람이 유명하여지면 당연히 안티가 생기는 것이겠지만 피카소의 경우 안티는 이론적인 뒷바침이 대단하네요..
너무나 유명한 화가이고 피카소 미술관이 이곳 바르셀로나 뿐만 아니라 스위스 루쩨른, 파리, 그의 고향 말라가
마드리드등 세계 곳곳에 산재하여 그의 작품수를 추정하여 보기 위하여 연감을 검색하니 나오지도 않는다!!
미술에 대한 나의 생각은 다음 기회에 정리!! 피카소에 대한 생각은 이쯤에서 마감합니다!!
바닷가 도시답게 싱싱한 생선이 많네요!!
거리에는 수도없는 길거리 악사가 있습니다..
도네이션을 하는 기타 박스에서 아주 작은 적선만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너무나 많은 거리의 악사들!!
스페인 경제 위기는 거리의 악사들의 수로 느낄 수가 있네요..
수시로 공연이 열리는 장소 카탈루냐 음악당..
이곳도 입장료 징수!! 그냥 외관만 봅니다!!
1908년 모더니즘(아르누보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가인 도메네크 이 몬타네르(1850~1923)가 심혈을 기울인 걸작!!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합창, 실내악, 교향악의 환상적인 장소로 카탈루냐의 전통과 역사를 대변하는 성당 건축물이다.
파사드는 모자이크 타일의 기둥과 바흐, 베토벤, 바그너 등 유명 작곡가들의 흉상들로 장식되어 있다.
실내 공간은 형형색색의 모자이크 타일과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어 마치 동화 속 나라의 왕국 같다.
내부를 장식한 작품 대부분이 모두 몬타네르의 상상력에서 나온 것으로 장미, 백합과 같은 꽃무늬를 주제로 한다.
내부 투어의 하이라이트는 2층의 장엄한 콘서트홀이다.
안토니 리갈트의 작품인 화려한 푸른 황금색의 둥근 스테인드글라스 천공광(천장에 낸 채광창)이 천사들의 합창단을
의미하는 여자 40명의 머리로 둘러싸여 있다.
아치형의 무대 앞에는 작곡가 바그너와 끌라베의 조각상이 있다.
성당 내부의 발코니나 천장 타일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싶다면 쌍안경을 지참하는 것이 좋다.
내부는 영어, 스페인어, 카탈루냐어로 진행되는 가이드 투어로만 볼 수 있고 관람 시간은 약 50분 소요된다.
현재는 이곳에서 클래식 음악 콘서트가 개최된다.
고전적인 스타일의 건물을 관람하는 것만도 가능하지만, 음악 애호가이거나 시간이 있다면 이곳에서 개최되는 콘서트를
꼭 감상해 보길 권한다. 내부 안내서를 그냥 옮기는 것으로 끝~~~~~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