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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한 때는 제주시 무근성에 살면서 북교를 나왔다면 최고로 쳤다고 한다. 문관영, 서봉준, 하순철 회원의 고향동네로 보면 된다.
무근성
무근성의 옛집 <사진 한승훈>
제주목 관아지 서북쪽, 현 제주시 삼도2동 부근에 위치해 있는 옛 읍성으로, 탐라국 시대에 고(高), 문(文), 강(康)의 세 성씨의 부호가 살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무근성의 동쪽은 대부호 강만호 집, 서쪽은 고만호 집의 주위 부근을 무근성 이라고 한다. 지금은 그들이 살던 집터는 거의 원형을 잃고 사람들도 흩어져 있어 무근성에 대한 내력을 알기가 어렵다.
새로 축조한 성 이전의 것이라고 하여 묵은 성이라고 부른다. 『증보탐라지』에는 “고주성(古州城) 서북에 옛 성터가 있으니 동명을 진성동(陳城洞)이라 칭한다” 고 하였다.
현재 성터는 남아 있지 않고 제주시가 세운 “탐라시대 고성터”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성은 석축으로 둘레 4,394척 높이 11척이라 했다.
서문 사거리에서 북쪽의 해안가로 연결된 탑동로의 오른쪽에 있는 길로서 작은 길(구린질) 사이를 무근성이라 한다. 관덕정 뒤 왼편에 해당된다.
[참고문헌] • 『제주시 옛지명』(제주시·제주문화원, 1996) • 『제주의 핵심 삼도2동』(향토지발간 추진위원회, 2003)
무근성의 옛집 <사진 한승훈>
耽羅時代 古城址
탐라성터 - 제주시 무근성에 있는 조선시대 제주읍성의 모태가 되었던 성 터이다.
탐라국 시대에 해당하는 5~7세기 후반 무렵 현재의 ‘ 묵은성 ’ 일대에 걸쳐 쌓아졌던 성터로서, 이 성은 조선 시대에 제주읍성의 성곽으로 계속 활용되었다. 지금의 제주북초등학교 서북쪽은 통칭 ‘묵은성’이라 일컫는 지역이고, 호칭도 고성(古城)이 있었다는 데서 연유했다.
이는 1899년(광무 3) 편찬한 『제주군읍지(濟州郡邑誌)』에 수록된 「제주지도(濟州地圖)」 등에 ‘진성동(陳城洞)’이 표기되어 있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즉 ‘진성동’은 ‘묵은성골’의 한자 차자 표기로서, ‘진(陳)’은 ‘묵은’의 훈독자, ‘성(城)’은 ‘성’의 음가자, ‘동(洞)’은 ‘골’의 훈독자 표기인 것이다.
‘묵은성’ 주변의 성은 1411년(태종 11)에 보수가 이루어졌던 제주읍성의 성곽으로 계속 활용되기도 하였으나, 처음 축조된 시기는 5세기 무렵 이후로 보인다.
즉 ‘묵은성’ 일대 성의 축조 시기는 제주 지역이 탐라(耽羅) 등으로 불리고, 정치적 지배자가 문헌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국주(國主)·왕자(王子)·좌평(佐平) 등으로 일컬어지며, 한반도 육지부의 삼국과 일본 및 중국 지역과도 자율적으로 정치적 교역을 행하던 탐라국(耽羅國) 시대에 해당하는 5~7세기 후반 무렵일 것이다.
또한 그 성의 범위는 동쪽으로 산지천 서안, 서쪽으로 병문천 동안을 각각 경계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제주시 삼도2동, 지금의 제주북초등학교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최초의 제주북교 교사(校舍). 1929년경 사진 배경은 제주목사가 객사관으로 사용하던 '영주관' 한옥 건물로 북교교사로 이용되었다.
• 『제주시의 옛터』(제주시·제주대학교 박물관, 1996) • 오창명, 『제주도 오름과 마을 이름』(제주대학교 출판부, 1998) • 김일우, 『고려시대 탐라사 연구』(신서원, 2000) • 『잊혀져 가는 문화유적』 -제주시편-(유적지표석세우기추진위원회·한라일보사, 2002) • 김일우, 「마을의 형성과 변천」(『삼도1동지』, 삼도1동지편찬위원회, 200
<아침을 열며> '무근성'과 '새성안'
김찬흡 <제주도문화재위원·논설위원> 제민일보 2009년 7월 26일
한라산 정북 중심지를 흔히 '제주성안'이라고 한다. 이 '성안' 서북 모퉁이의 지명을 '무근성'이라 한다. 그러면 그에 대립되는 '새성'이 있기 마련이다. '새성'은 어디일까?
오래된 성곽 '무근城'
'무근성마을'을 한자어로 '진성동(陳城洞)'이라 표기했으니 진(陳)은 '묵을 진', 곧 오래된 성곽이란 뜻이다. 지금까지 알려지기는 '무근성동네'에서 제주북교 북쪽으로 '산지포구'까지의 해변 가라고 말하며 그런 글을 본 일이 있다.
나의 생각은 이와 달리한다. 다음과 같은 나의 풀이는 지형지물로 보는 견해이다. 성곽을 쌓으려면 성지(城池)를 점쳐야 한다. 성곽 주변의 성지라는 지형지물과 용천수를 고려하여 축성하는 게 원칙 가운데 첫째의 수칙이라 하겠다.
병문천은 한라산 백록담에서 발원하여 제주시 바다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병문천(屛門川)은 바로 그 성지요, 내의 하구에 이르기 전에 '선반물'이, 더 내려가면 '동한두기'란 용천수가 있다. 이들 물이야 말로 성안의 주민을 위한 생명줄이다. 병문내의 하구는 지금 '버랭이깍'이라 한다. 옛 기록에 벌랑포(伐浪浦)라 하였으니 이는 벌랑이 변음되어 '버랭이'라 하고 '깍'은 명사 뒤에 붙는 접미사로서 끄트머리, 아랫부분, 꼴치, 끝맺는 지점 등의 뜻을 가진 제주방언이다. 또한 '선반물'의 선반은 매우 중요한 어휘임이 분명하다. 벌랑포는 '병문내'의 상류 들판을 밭으로 개간, 토사가 밀려내려 고려 말에는 이미 포구의 구실을 잃고, '선반물'은 최근 복개공사로 볼 수 없다.
여름날 병문천 하류에서 젊은이들이 그물로 몰려 온 멸치떼를 잡고 있다.
한편 성내 중심부는 을나촌(乙那村)의 주거지로, 늘 을나의 후예들은 동쪽의 '건들개'<健入浦>와 서쪽의 '버랭이개'를 출발하여 선진 군주국 백제, 신라와 교통했다. '한내'의 하구 '서한두기'는 을나촌과의 출입처로는 부적합하니 포기, 다음 '동한두기'와 '버랭이깍' 주변을 자연포구의 최적지로 선택했다. 지형지물은 성곽을 선택하는 중요한 요소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무근성'은 '동한두기' 서쪽 바닥가로 축성을 시작, '선반물'을 성안에 포함시켜 서쪽 밖으로 성을 쌓았다. '병문내'에는 돌로 무지개다리를 쌓았으리라. 그 다리를 건너 '무근성' 남쪽에서 '제주목관아' 서쪽 길가로 제주북교 서북쪽까지 쌓아 현 라마다호텔의 북서쪽 바닷가에 이르러 '무근성'은 멎었다고 본다.
'새城'은 어디
이 섬에 을나촌이 형성된 아득한 옛날부터 이 성곽도 존재하였으리라, 본격적인 '무근성'은 탐라시대 곧 고려 충렬왕 때의 원나라 다루가치총관부(達魯花赤總官府)란 식민지 통치기구의 지휘부가 존재한 요충지였다. 후일 총관부를 혁파, 군민안무사부(軍民按撫使府)를 설치하여 탐라 백성과 함께 하는 통치기구로 변모시켰다. 예나 지금이나 수법은 같구나! 처음은 군부통치로, 나중은 군민통치로, 이어 민간통치로 야금야금 침탈수법의 꾀도 고도화한다. 탐라 1백년은 몽고의 침탈이란 치욕의 역사이다.
이원진의 <탐라지>에 "在州城北海岸 有古官府遺祉 疑卽基地"라고, 또 "又 設軍民按撫使府 以塔羅赤 爲達魯花赤"이라는 글로 보아서 이를 뒷받침한다. 따라서 '무근성' 다음에 쌓은 '새성'은 어디인지, 또 언제 성을 쌓았을까? 이는 고려 말이나 조선 건국 초기에 쌓은 주성(州城) 곧 삼읍(三邑) 구진(九鎭)의 첫째인 제주성으로 추정한다. 이 주성에 대한 언급은 뒤로 미룬다. 달포 전에 평소 존경하는 黃교수와 저녁을 함께 하면서 성씨 얘기도 하고 또 '무근성'에 대해 마을 원로들과 오간 말을 하기에 좀 생각 끝에 이 글을 구상한 것이다.
묵은성(古城)의 위치
홍순만 제주문화원장은 지난 1989년 한라일보에 '사연 따라 칠백리‘를 연재한 바 있다. 그 중 “탐라국의 궁전은 어디에”라는 글에서 “월대가 있는 근처에 탐라궁전이 있었던 게 아닌가”라고 추정하고 있다. 탐라궁전이 있었다면 당연히 제주성 이전의 묵은성(古城)이 있었던 자리에 위치해야 마땅한 일이다. 이 같은 추정은 만농의 “칠성대는 북두칠성에 대한 봉제의 제단이니 삼을라의 추장이 중심이 되어 치제하는데 각부족의 번영과 아울러 나라의 융성함을 기원했던 자리”라는 언급과 맥을 같이 한다. 제정일치(祭政一致)시대에 탐라사회를 지배해 온 추장이 궁궐 중심부에 칠성단을 쌓고 부족들을 거느리며 제를 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해석이다.
그런데 왜 왜 조선정부는 이처럼 신성한 공간을 가로막으며 관덕정을 세웠는가. 그것은 일제가 광화문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를 세움으로써 조선왕국의 정통과 정신을 말살하려는 의도를 연상케 한다. 태종 초기에 고봉례 성주는 호칭이 과분하다며 스스로 성주 직함을 조정에 반납함으로써 성주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당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려 했던 태종의 정책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자의적 반납이라 여기기 힘들다. 더구나 조선시대 5백년간 고씨에게 제주목사 자리 하나 주지 않았던 조선조였다면 관덕정이라는 커다란 권위건물을 세움으로써 탐라의 정신적 구심점을 가리려 했다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일종의 탐라 흔적 지우기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칠성대는 또 다른 수수께끼도 불러일으킨다. 필자는 1991년 가을 한 노인과 일곱별자리(칠성대) 답사에 나선 뒤 “칠성대를 아십니까”라는 기사를 보도한 적이 있다. 그 노인은 일도동에서 나서 자랐고, 서울로 유학해 배제고를 다녔던 분이다. 그 후 일도동장을 오랫동안 지냈던 고 송천택(당시 83세) 옹이다. 송 옹은 직접 지팡이를 짚고 일곱 별자리를 확인 해주었는데 일도동에서 시작, 칠성통을 거쳐 제주목관아 서쪽과 중앙성당 부근을 거쳐 남문로터리 가기 직전 만수당 약국 부근에 마지막 별자리가 있었다고 했다. 일도, 이도, 삼도를 관통하는 배치로 이들 지역을 하나로 꿰매고 있는 형태다.
그러면 마지막 별자리는 단순히 북두칠성 형태에 따라 배열하다 보니 그 자리에 서게 된 것일까. 이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그러나 힌트처럼 다가오는 것이 있다. 북두칠성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운행하는 별무리다. 사철에 따라 조금씩 위치는 달라도 여전히 북극성을 기축으로 움직인다. 그러면 북극성은 어딘가. 필자는 삼성혈이라고 추정한다. 과학사전을 훑어보면 북극성은 별자리와 별자리 거리의 두 배 반 거리에 위치해 있음을 알게 된다. 삼성혈은 중앙성당과 만수당 약국 간의 거리를 볼 때 두 배 반 정도에 위치해 있다.
이러한 추정은 칠성대가 삼을라의 결속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세워진 제단이라는 것과 의미가 닿는다. 삼성혈에서 용출한 삼신인은 활을 쏘아 일도, 이도, 삼도에 거처를 정했다. 삼성의 후예들은 그 후 이곳에 북두칠성 형태로 칠성대를 세웠다. 그리고 자신들이 세운 궁전 주변의 칠성대(월대)에서 나라의 안녕과 부족의 번창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 그런 삼을라 후예들이 자신들의 뿌리인 삼성혈을 북두칠성의 기축인 북극성으로 설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본다면 탐라국은 북극성인 삼성혈을 따라 움직이는 북두칠성(일도, 이도, 삼도)과 그 곳에서 번져나간 부족들의 신표로서 만든 칠성눌과 같은 작은 별들이 가득찬 밤하늘을 연상케 한다. <글 - 고치호>
사라져가는 옛것들에 대한 안타까움
제주그림책연구회, 그림책 '우리 동네 무근성' 원화 전시회 양미순 기자 <제주의 소리> 2006.12.08
무심코 지나치는 우리의 소중한 옛 것들이 개발과 변화 속에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것에 안타까움이 있다. 제주섬 사람들의 마음의 고향인 '무근성'의 과거와 현재를 엮어낸 그림책 '우리 동네 무근성(8000원·도서출판 온누리)'에 수록된 원화가 전시된다. 제주그림책연구회(회장 부순영)는 8일부터 10일까지 제주기적의도서관에서 그림책 '우리 동네 무근성'에 수록된 원화전시회를 갖는다.
과거의 명성을 뒤로 하고 현재는 도시 공동화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중인 무근성.
그 곳의 골목골목에는 250여년이 된 기와집도 있고 50~60년째 간판이 그대로인 이발소, 사라진 올레, 경로당 등 과거를 추억하고 현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소중한 이야기들이 있다.
제주그림책연구회는 그림책 '우리 동네 무근성'을 내기 위해 지난 봄부터 무근성 일대를 꾸준히 답사하며 30~40년, 혹은 평생을 무근성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우리동네는 무근성입니다. 그 옛날 성이 있어 무근성이라 불린답니다. 왕할머니 버선처럼 생긴 동네예요.
기와지붕은 예전 모습이 아니예요. 오랜 세월 비바람을 견디느라 낡아진 기와에 우레탄 옷을 입혔거든요.
오늘도 왕할머니는 내 어릴적 유모차를 지팡이 삼아 집을 나섭니다.
윤희순 회원은 "소중한 옛 것들이 우리 주변에 알게 모르게 많은데 이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사라져가는 것이 안타깝다"며 "개발과 변화 속에 하나둘씩 살아져가는 우리의 옛모습을 그림책에서만이라도 기억하고 간직하고 싶다"고 말했다.
또 "실제 답사기간에 찾았던 오래된 기와집이 11월초 다시 찾은 무근성에서 더이상 볼 수 없게 됐을 때의 그 허탈감과 안타까움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며 "우리에게 정겨운 정서로 다가오는 소중한 옛 것에 대한 보존방법 등이 많이 모색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제주그림책연구회는 오래된 기와집은 사라졌지만 '우리 동네 무근성' 그림책을 보며 무근성 이야기를 계속할 것을 다짐했다. 이번 전시회에는 원화 뿐 아니라 답사 과정을 생생히 보여주는 사진도 전시되고 어린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우리 동네 지도 그리기' 체험행사도 마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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