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암도인은 조선시대 3대 의성(醫聖)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았을 만큼 그 의술의 경지는 심오하였다하나 그의 침법은 400년동안 사장되었다. 동굴에서 13년동안 면벽참선한 끝에 열린 심안(心眼)으로 신비의 침법에 통하였다는 사암도인은 사명당 대사, 혹은 그의 수제자로 알려져 있다. 전국을 다니며 민생에게 의술을 베풀었는데 당대에 신침(神針)으로 이름이 높았다 할 뿐 상세한 역사는 남아있지 않다. 그의 기록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임상서인 사암도인 침구요결에는 수십 년의 고질병이 단 한번의 치료로 쾌차하였다는 사례들이 수없이 많아 더욱 후세인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그러나 원리에 대한 언급이 없었고 누구에게도 전수되지 않아 한의계에서는 신비로운 전설로만 남은 채 사라졌다.400년이 지나 1980년대 초 한 젊은 한의사에 의해 사암침법의 원리가 밝혀졌다. 이후 16년에 걸친 그의 노력으로 2000여명의 한의대생들에게 전수되었고, 문하생인 한의사와 한의대생들을 이끌고 사암도인의 행장처럼 전국 방방곡곡을 방랑하며 오늘도 아픈 이들을 찾아 무료 의술을 펼치고 있다.
금오 김홍경. 그가 바로 오랜 세월 사장돼있던 사암침법을 복원한 주인공이다. 그는 경희대 한의학과가 설치던 이듬해인 67년 과수석으로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대학시절의 대부분을 회의와 절망 속에서 보냈다. 당시 한의학은 사회에서 홀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 개원의 시절이었다. 척추 디스크 환자가 몇 달동안의 치료로도 낫지 않았다. 우연히 책장에서 사암도인 침구요결을 들추다가 발견한 대목대로 치료하였는데 업혀왔던 환자가 그 자리에서 걸어나갔다. 그러나 당시 사암침법은 난해하고 신비하여 해독이나 응용이 불가능했다. 언젠가는 사암도인처럼 출가하여 참선을 통해 침을 깨치리라 결심하였다.
75년 10월 송광사로 출가하였다. 절간생활 6개월. 그후 몇 년동안 주역학자와 선승을 찾아 전국 각지를 돌았다. 주역학자 아산선생에게도 사사받았다. 방황을 통해 점차 인생과 의술의 세계를 폭넓게 헤아려 볼 수 있었다. 83년 동국대 한의학과 정신과 임상의학 강사를 맡았다. 한의학의 본질은 종교와 철학이라고 강조했다. 오천년 동양지혜 원전(原典)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그의 주장에 당시 한의대 학생들의 호응은 폭발적이었으나 서양학 위주로 가르치는 당시 한의학계를 비판해 학교측과 갈등을 빚었다.
이무렵 경허 만공의 법맥을 이은 수덕사 방장 혜암선사(85년 5월 102세로 입적)의 제자로 입문했다. 이로써 그의 인생에 혁명적 전환기를 맞게 된다. 선문답을 탁마해가던 중 사암침법의 원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인간 내면의 심리를 파악하지 않고는 질병치료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칠정지부침(審七情之浮沈). 마음의 뜨고 가라앉음을 살피라. 사암도인 침구요결 서문의 한구절을 의지하여 전국을 떠돌던 십년 세월 끝에 결국 인체 12경락의 유물 유심적 특성을 완성해낼 수 있었다. 84년 광화문에 한의원을 열었다. 혜암스님은 신농백초(神農百草)라는 이름을 하사하셨다. 신농씨는 인간을 위해 모든 약초의 성품을 판별하였다는 전설 속의 의성(醫聖). 그해 12월 상경한 한의대생들의 간절한 요청으로 사암침법을 공개했다. 사암도인 침술원리 40일 강좌는 학생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전국에서 몰려든 학생들이 10평 남짓한 한의원을 가득 채우고 계단까지 줄을 섰다. 그후로는 폐교된 학교를 물색해 강좌를 열어야 했다. 지금까지 방학기간에 실시한 강의는 21차, 학생들은 잠을 자지 않는 고통을 통해 심정부침의 관심법에 개안했다. 지금까지 배출해낸 제자는 2000여명. 강의가 끝나면 학생들을 이끌고 무료진료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전국을 구름처럼 떠도는 사암한방의료봉사활동과 함께 동하계 방학기간동안 열리는 사암침술원리 40일강좌는 이미 우리 한의학사의 신화 통과 의례로 자리잡고 있다. 비인부전 (非人不傳) 그 사람이 아니면 전하지 말라하지 않았던가. 동양의 스승과 제자의 가르침 전수에는 무엇보다 초심자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생명을 다루는 의술의 세계에서 마음의 의사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리하여 도제양성식 교육의 신고전(新古典)적 모델이 될만한 사암침법의 교육과정은 혹독하기로 정평이 나있다. 의술은 곧 인술(仁術). 밤샘강의, 좌선, 두어시간 새우잠, 그리고 밤샘강의, 좌선, 자신의 몸을 찔러대는 침실습시간.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은 이기적 마음과 예민하지 못한 둔감성에 대한 스승의 질타와 자신과의 싸움이다. 진정한 의사라면 지녀야 할 비어있는 마음의 명상과 깨어있는 지혜. 그 갈고 닦음을 위한 40일과정은 인생의 축소판이라할 만큼 역동적이다.
하루아침에 이백여명의 학생들이 배낭을 꾸려 쫓겨나기도 하고, 생전 해보지 않았던 농촌일이나 목수 전기공사일에 땀을 흘리기도 하고, 소위 생사에 초연한 의사의 마음을 기르기 위해 밤샘 포카 정진(?)을 하기도 한다. 경락의 유심적 특징을 표현하는 연극제, 의료장비를 싣고 동해 서해를 가로지르며 각지의 산골짜기 마을에 파견되어 소위 게릴라식 무료진료. 주야를 쉬지 않는 40일간의 강좌는 동서양의 철학과 종교 지성을 넘나든다. 암기와 주입식으로 교육되어져 탄력을 잃은 두뇌에 직관과 느낌 철학을 강조한다. '절대적인 약이나 독은 없다'는 상대주의적인 음양철학.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서 현재를 살피는 깨어있는 각성. 지식의 전달보다는 만물의 진상을 보는 눈의 개발 교육이다. 금오는 의학자는 가장 가까운 자신을 관찰해야 하고 스스로 자신에게 배우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고 한다. 경전이나 의서(醫書)의 복잡미묘한 응용적 처방보다는 먼저 자기 자신의 내면 심리적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사암침법의 출발이라고 한다.
심정부침(審情浮沈:마음의 뜨고 가라앉음을 관찰하라), 이심치심(以心治心:마음으로써 마음을 다스리라), 대기묘용(對機妙用:근기따라 묘한 방편을 응용하라), 이화창생(理化蒼生:진리로써 창생을 교화하라)이라는 심의자생운동(心醫自生運動) 4대 명분으로 시작되는 이 강좌의 역사는 16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강좌의 역사는 16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1차 사암도인 침술원리 40일강좌
84년 겨울 10여평 남짓한 한의원에 모인 배움의 열정에 가득찬 이십 여명의 한의대생들에게 처음 사암침법이 공개되었다. 당시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자기 열등감에 주눅든 젊은이들에게 금오 김홍경의 토해내는 열강은 학문적 자신감을 불러일으켰고 한의대생들에게 반향은 엄청났다. 때로는 전체 학생들이 울음을 터트려 사람들이 뛰어 올라오기도 했다. 2차, 3차 거듭해가며 학생들은 점차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백여명의 학생들이 작은 공간에 끼어앉고 계단까지 줄을 서서 듣는 바람에 건물 주위에 전경들이 둘러쌀 정도였다. 강의를 듣지 못하는 학생들은 엄청난 양의 강의 테잎을 복사하여 돌려가며 공부를 하였다. 그러다가 3차를 수강한 몇몇 학생들이 휴학을 해가며 강의 테잎을 채록 일일이 손으로 써서 방대한 페이지의 필사본 책을 만들었다. 지금도 복사본으로 돌아다니는데 전국 한의과대학 뿐 아니라 의학 약학계 해외에까지 수십만권 퍼져나가고 있다. 전국을 방랑하며 만났던 수많은 재야 스승들에게 배운 동양의 지혜를 풀어놓았다.
당시 서양의학 분석주의에 물들어 변질된 한의학계에 대한 질타와 자성의 목소리는 향후 한의학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도 '경락은 마음의 통로이다'라는 그의 가설체계는 참으로 충격을 주었다. 그야말로 동양의학의 혁명과도 같았다.
동양의학에서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기(氣)가 흐르는 인체내 통로를 <경락>이라한다. 지금까지 침구학에서는 12경락의 유주방향 즉 지도(地圖)는 상세하게 전하고 있으나 정작 12경락 속을 운행하는 12개의 내용물 기(氣)에 대한 언급은 거의 전무했다. 그런데 금오는 바로 이 내용물에 초점을 맞추었다. 금오는 '경락은 12장부라는 <그릇>에 6개의 기운 <내용물>이 담긴 복합체'라 정의했다. 단서는 가까운 곳에서 찾았는데 바로 경락의 명칭이었다. 예를들면 <수 태음 폐 경>. 접두어 수족(手足)과 접미어 경(經)을 빼고나면 경락명은 두가지 명칭의 복합체. <간 심 비 폐 신 담 소장 위 대장 방광 심포 삼초> 12장부 앞에 붙어있는 낯선 이름에 주목했다. <태음 소음 궐음 양명 태양 소양>. 6개의 기운. 이러한 관점이 사암침법의 신비가 풀리게 된 열쇠가 되었다. 장부에만 초점을 맞춘 채 내용물인 6기를 간과해버리면서 근세 침구학이 쇠퇴하게 된 것은 아닐까. 오천년 황제내경 당시에는 분명히 살아있었을 6기의 의미가 미미해짐으로써 사암침법의 원리가 그토록 난해하였고 해독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금오는 6기의 기능 복원에 <주역周易>을 도입했다. 동양철학 원리체계의 에센스인 주역에서는 태극(太極)에서 음양(陰陽)으로 사상(四象)으로 팔괘(八卦)로 진행되는 이분법(二分法)적 분화 과정으로 우주를 설명한다. 이제마의 사상의학이 주역의 사상(四象)에 기초하고 있다면 금오의 경락의학은 팔괘(八卦)를 토대로 한다. 사상의학이 선천(先天)적 체질이라면 금오의 경락설은 후천(後天)적 체질이라고 할 수 있다. 팔괘는 각기 두가지 이름을 가지는데 하나는 <하늘 땅 못 산 물 불 바람 번개>라는 여덟가지 자연 사물을 지칭한다. 다른 하나는 <건 태 리 진 손 감 간 곤>이라는 생소한 명칭이라서 주역학자들이 곤혹을 느끼는 대목이라한다. 이는 정신적 명칭이라 볼 수 있다. 문자적 증거로는 태(兌)와 간(艮). 마음 심변을 붙이면 즐거울 열(悅)과 괴로울 한(恨)이 되는데 하나는 긍정적인 마음이고 하나는 부정적인 마음이다. 즉 주역의 8괘가 긍정과 부정적 에너지를 표현한 것이다. 그렇라면 한의학의 경락 또한 긍정과 부정의 에너지이라는 가정이 성립한다. 금오는 일단 건(하늘)·곤(땅)에 독맥(인체후면 정중앙선을 지나는 순수 양경락)과 임맥(인체전면 정중앙선을 지나는 순수 음경락)을 대응시켰다. 그렇다면 6경락의 내용물 6기(六氣)는 세가지 차원에서의 긍정과 부정적 에너지일 것이다.
세가지 차원은 무엇일까? 20세기 서양을 지배했던 지성사에서 <칼맑스 프로이드 니체>는 각각 <재산분배 성 권력의지>로써 인간의 욕망을 정의했다. 동양에서는 용수대사의 <유애有愛 무애無愛 무유애無有愛> 이제마의 <재財 색色 권權>론과 같이 인간의 욕망을 세가지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논했다.
최근 서양의 바이오리듬 학설에서도 인간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더라도 자체내의 변화주기를 가지는데 신체리듬(Physical R.) 감성리듬(Emotional R.) 지성리듬(Intellectual R.) 3가지의 주기를 가진다고 한다. 또한 3가지 주기가 만나는 대주기가 약 60년으로서 신비롭게도 동양의 환갑 주기와 일치한다. 금오는 동양에서는 3가지 리듬의 허실을 이미 간파하여 인체 내에서 흘러가는 미세통로까지 밝혀놓았는데 바로 이것이 경락이라는 것이다. 경락체계가 가지는 세가지 차원의 긍정과 부정은 <포만감과 배고픔>, <애정과 실연>, <자신감과 명예의 실추>로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의 제1차적 욕망인 의식주 욕망은 <태음 양명>경락의 작용이며 제2차 성(性) 미학적 예술적 충동은 <소음 태양>경락의 작용이고 제3차적 욕망은 명예욕 권력욕 지식욕으로 <궐음 소양>경락의 작용이다.
경락의 6기는 유심적 작용과 함께 물론 유물적 기능도 가진다. <태음 양명 소음 태양 궐음 소양>은 각각<촉촉함 건조함 따뜻함 차가움 바람 번개빛>. 우주의 모든 색깔, 소리, 향취, 맛, 촉감 또한 각각 6가지 공통 계열의 리듬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공통 계열의 인체 6경락과 상호 영향을 미친다.
사랑할 때 따뜻해진다(빨강·삼키고싶은 쓴맛). 공포를 느낄 때 서늘해진다(검정·짠맛). 자신감이 생길 때는 바람들 듯 가슴이 뿌듯해진다(파랑·신맛). 분노할 때는 번개치듯 열이 오른다(적광·뱉고싶은 쓴맛). 배고플 때는 건조해진다(하양·매운맛). 배부를 때는 촉촉해진다(노랑·단맛). 물질과 마음은 둘이 아니다.
금오는 유심적 측면을 밝혀냄으로 6경락의 유심 유물 양방면의 특성을 알아낼 수 있었다. 겁이 많고 몸이 찬 사람에게는 사랑을 주관하는 수소음심경에 해당하는 침치료·빨강색·소리·음식등을 보충해주면 몸이 따뜻해지는 한편 안도감을 느끼게 하지 않을까?
반면 음탕한 뜨거운 열정녀에게는 공포를 주관하는 족태양방광경에 해당하는 침치료·검정색·소리·짠음식등을 보충해주면 열도 내리고 겨울녀(?)와 같은 신중함과 경계심을 기르게 하지는 않을까? 자신감이 지나친 사람(족궐음간경)이나 열등감이 과한 사람(족소양담경)에게는 반대되는 경락을 보함으로써 중용의 조율을 할 수 있는데 바로 사암침법 치료의 기본이다. 그러므로 사암침법을 원리침법이며 마음의 침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장부만을 중시하는 이전 침구학적 관점에서는 신장과 방광은 둘다 오행상 물(水)에 속하므로 같은 속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금오의 이론에 따르면 경락은 두가지 복합체인데 신장의 내용물은 불(火)이고 방광의 내용물은 물(水)이므로 두 경락은 다른 속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족소음신장 경락은 불기운을 담은 물그릇
족태양방광 경락은 물기운을 담은 물그릇.
그러므로 족태양방광경은 순수한 공포이며 검은색에 해당하는데 반해 족소음신경은 두려움에 떨리면서도 정열적 쾌락에 젖는 미묘한 에너지이다. 색깔 또한 공포의 검은 색에 사랑의 붉은 색이 섞인 자주색.
이러한 관점의 변화가 사암침법을 부활시켜 꽃피우게 한 금오의 유물 유심적 12경락론의 태동이 되었다. 사암침법을 해독할 수 있는 가설을 세운 금오는 실제 마음이 일어날 때의 경락의 움직임에 따른 몸의 반응을 면밀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공포체험시 등골이 서늘하다든가 분노할 떄 옆구리에 손을 얹고 흘겨보기도 하는 무의식적 동작은 각기 그 경락의 흐르는 길과 정확히 일치했다. 자신 있을 때 내미는 엄지, 상대방을 삿대질하는 검지, 애인을 가리키는 새끼 손가락 역시 추론했던 경락과 일치했다. 또한 우리 생활언어 속에 남아있는 동양의학적 표현은 금오의 경락학의 유심론적 통찰과 일치했다. '대담하다' '쓸개빠진놈' '간뎅이가 부었다' '심뽀가 고약하다' '심장에 털난 사나이' '비위가 약하다'
또하나 금오의 유물 유심론적 12경락론이 한의학사(韓醫學史)에 남기는 학문적 가치는 <지성차원에서의 상대 기능개념의 심포 삼초론>이다.
심포와 삼초는 실제 해부학적 장기가 없으나 독립적 경락체계를 가지고 있는 신비의 장부이다. 한때 심포를 심장을 싸고 있는 막이라고 교육하였던 것이 한의계의 현실이었다. 불교의 인식론에서 제6식에 착안한 금오는 심포와 삼초의 기능을 지성리듬의 허실을 주관한다고 추론했다. 음식처럼 지성의 차원에서도 섭취와 배설이 있는데 심뽀(?)는 지식의 저장창고요, 삼초는 망각의 통로로 정의한 것이다.
최근 금오는 사암침법에 쓰이는 60혈을 천부와 비천부 삼부혈로 구분하여 각 경혈성을 해독함으로써 그동안 풀리지 않던 사암침법의 변용 사례들도 설명되었다.
금오는 사암침법 원리 발굴에 태극 음양 사상 팔괘로 벌어져 나가는 주역의 이치 가 기반이 되었으나 거꾸로 태극으로 회귀하는 구도(求道)적 수행이야말로 사암침법의 골수(骨髓)라고 한다. 그는 너와 나, 우월과 열등의 분리를 초월하여 진정한 나가 무엇인지 본질적 질문을 던져 철저히 탐구하는 속에 바야흐로 400년을 침묵하던 사암침법이 만개하리라 믿는다.
세월이 흘러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는 금오 선생은 올여름 제21차 사암침술원리 40일 강좌를 치러냈다. 청년시절 의문과 반항적 학구열로 400년동안 역사 속으로 영영 사라져버렸을 지도 모를 사암침법 원리를 복원하기까지 방황과 어려움이 많았겠지만 사재를 털어가며 이어나가는 전수교육 또한 힘겨운 과정으로 보인다. 시절은 바뀌어 보약장사로 치부되던 한의학과가 대접받는 세상이 되었는데도 그는 슬펐던 한의학의 한을 되씹곤 한다. 후배들의 등을 두드리며 자긍심을 세워주던 그는 최고의 엘리트로 자부하는 컴퓨터 신세대들에게는 걱정으로 꾸지람은 더욱 호되다. 그러나 40일이 끝날 때쯤이면 그들도 가르침에 고개 숙일 줄 아는 인간으로 성숙한다. 전국 한의과대학 사암한방의료봉사단. 경북 울진 군민 체육관, 충남 금산 인삼축제 때는 하루 칠백명의 환자가 몰려 새벽부터 밤 12시까지 진료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현재 충북 제천 봉양지역과 경북 대구 지역에 정기적인 의료봉사활동을 하고 있으며 진정한 의사를 위한 교육과 무료진료활동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