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진 시인과 함께 떠나는 섬여행(11)
가로림만의 진주 <고파도>
106년 만에 개방된 섬 <옹도>에 이어 다음 일정은 고파도. 고파도는 서산시 팔봉면 가로림만에 위치하고 있는 섬이다.
팔봉면 구도항에서 하룻밤을 잔 후 아침 7시30분에 고파도 행 여객선을 탄다. 여객선 운임은 3,100원. 고파도는 구도항에서 여객선으로 약 5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구도항은 서산 아라메길 4구간에 있는 포구이다. 팔봉산에서 가깝다.
이번 여행에 함께 한 이생진 시인은 고향이 바로 서산이다. 서산시 읍내동에서 태어나 서른한 살 때까지 읍내동과 동문동 일대에서 살았다. 이생진 시인은 초등하교 시절부터 양대리, 간월도, 만리포, 안면도에서 바다와 사귀면서 섬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고 한다.
2010년 7월에 처음 개통된 아라메길 입구에는 이생진 시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아라메길’은 바다의 고유어인 ‘아라’와 산의 우리말인 ‘메’를 합친 합성어로, 서산의 아름다운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을 함께 둘러볼 수 있는 길이라는 뜻이다.
가면서 정들고
오면서 추억이 되는
아라메길
세월이 닳지않는
마애삼존불의 얼굴에
너의 미소 활짝 피었다
보원사 오층탑에 앉았던 봉황
개심사 아미타여래랑
해미읍성 저 멀리
도비산 너머 바다를
한숨에 다녀왔는데
너는 지금
아라메길
어디쯤 가고 있니
이생진 시인의 시 ‘아라메길’은 이번 여행에 동행한 현승엽 가수의 노래로도 많이 불리워지고 있다. 현승엽 가수가 직접 작곡한 노래로, 곡조가 잔잔하고 아름답다.
아침 7시 30분. 고파도 행 배가 출항한다. 여객선이라지만 낚싯배 수준의 조그만 배다. 선실에는 필자 일행이 대부분이다. 바다에는 안개가 자욱하다. 멀리 육지가 보일 듯 말듯 실루엣을 그려낸다. 한폭의 동양화 같은 풍경. 몽환적이다.
바닷바람 탓인지 날씨가 꽤 춥다. 그래도 운무에 덮힌 바다가 보고싶어 갑판에 나간다. 배는 어디쯤인지도 모를 안개 속을 돛단배처럼 흘러가고 있다. 배 좌측으로는 잠수함같은 바위섬도 보이고, 물고기를 잡기 위해 쳐 놓은 정치망들도 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추운 데도 불구하고 이생진 시인은 갑판에서 화첩을 꺼내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다. 이생진 씨는 시인이면서도 화가이다. 그는 섬여행을 할 때 마다 즉석에서 주위풍경을 스케치한다. 섬과 바다가 그의 화첩에서 멋지게 되살아난다.
약 50분 후 드디어 고파도에 도착. 섬 주위는 아직도 안개가 자욱하다. 우리 일행이 머무를 민박집 주인이 선착장에 나와 우리들을 맞아준다. 민박집 주인은 김동남 씨(53). 부인 윤명숙 씨와 둘이서 살고 있다. 아들 둘이 있는데 대학 다니느라 육지로 나가 있다. 간판은 달지않았지만 인터넷에는 ‘섬마을 펜션’(010-5402-6662)로 올려져 있다. 고파도에는 섬마을 펜션 이외에도 고파도 펜션이 있다. 김동남 씨는 마을 이장이기도 하다. 이장이 알려준 대로 마을 앞길을 무작정 걸어간다. 큰 길이 끝날 무렵 해안 돌길로 이어진다. 잘못 들어왔나 싶어 우측 언덕길을 올라가 본다. 길이 없다. 이장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이장에게 전화로 다시 물어 찾아간다.
꿈길을 가듯 안개 속 해안길을 한참 가니 또 다른 마을이 나온다. 마을이라야 집이 불과 두 채 밖에 안되는 조그만 포구이다. 고파도에는 마을이 네 개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주민이 살지 않는 곳도 있고, 이장 댁이 있는 에미동도 두채 밖에 없기 때문에 마을이름이나 숫자는 별 의미가 없다.
이장 집에 도착하여 짐을 푼 후 일행 중 일부는 먼저 섬 현황파악에 나선다. 이장이 4륜구동차로 직접 안내한다. 이장의 말에 의하면, 고파도에는 50여 명 정도의 주민이 주로 굴, 바지락 등을 캐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주민이 환갑을 넘긴 어른들이지만 어린이가 있는 가정도 있어 초등학교 분교가 열려 있다. 학생 3명에 교사가 3명. 교회도 있다. 3명 중 교회 목사님 댁 딸이 2명이고 새마을지도자 아들 1명이다.
이장은 섬 소개를 하면서 밀림 속을 헤쳐가듯 길이 제대로 포장되어 있지않은 산길을 덜컹덜컹 차를 몬다. 먼저 동네에서 제일 높다는 당산으로 안내한다. 정상에 마을의 안녕을 빌던 당집이 있다. 선착장 뒤, 교회가 있는 제일 큰 마을과 초등학교 분교를 지나 갯벌로 필자 일행을 안내해 준다.
500여 미터의 아담한 해수욕장, 사리 때라 물이 많이 빠져 있다. 갯벌에는 동네 어른들의 바지락 캐는 모습이 장관이다. 한 집에 한 명씩 25명 내외의 마을 어른들이 나와 일하고 있다. 모두 장화를 신고 여자들은 ‘일복(일명 몸뻬라고도 함)’이라고 부르는 간편바지를 입고 일을 한다.
여자분 중에는 83세의 양재희 할머니도 계신다. 이마의 주름살이 이 분의 한 생을 말해주는 듯 하다. 13세에 이곳 고파도로 시집 와서 아들 셋, 딸 다섯을 낳았다. 자식들은 모두 육지로 나가고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사신다. 고파도에서 가장 나이 많은 어른은 90세의 할머니라고 한다. 갯벌 한 가운데에는 트럭 한 대가 서 있고 바지락을 캐는 대로 즉석에서 20 kg 씩 그물망에 담아 싣는다. 섬마을펜션 윤영숙 씨의 말에 의하면, 바지락은 매일 캐는 게 아니란다. 한 달에 보름 정도 사리 때 만 가능하단다. 사리는 한 달에 두 번 또는 세 번 온다. 배를 이용하여 육지로 운반하는 데 배 한척에 1톤 반 정도 밖에 실을 수 없기 때문에 한번에 1인당 60km 만 가능하다고 한다. 여자분들은 주로 바지락을 캐고 남자들은 차 있는 곳으로 옮기는 역할을 한다. 섬 사람들의 삶의 냄새가 진하게 풍겨오는 모습이다.
일하는 남자분들이 주는 막걸리 한 잔을 얻어 마신 후 마을 구경도 할 겸 걸어서 민박집 쪽으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시간 대에는 안개가 걷혀 동네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해수욕장 입구에는 폐염전들이 보인다. 폐염전 중에는 해삼약식장을 하던 흔적도 눈에 띈다. 선착장 고개를 넘어 섬 중앙은 분지 형식으로 오목하다.
대나무숲도 있고 갈대밭도 펼쳐져 있다. 전에는 이곳에서 논 농사도 지었는데 지금은 일손이 모자라 아예 논 논사는 접었다고 한다. 논이었던 자리는 완전히 갈대밭으로 뒤덮혀 있다. 당산 아래 집들이 아담하게 들어서 있다. 섬 같지않은 목가적인 풍경이다. 섬 모양이 새의 보금자리처럼 아늑하다.
이번 여행에서는 ‘옹도 여행기’에서 소개한 것처럼 우리나라 섬을 1,000개 이상 여행하고 섬관련 시집을 34권이나 펴낸 이생진 시인과 함께, 섬문화답사기 등 섬 관련 책을 16권이나 펴낸 갯벌 및 섬문화전문가인 전남발전연구원의 김준 박사도 함께 했다. 또 다음의 섬여행 전문카페인 ‘섬으로’ 운영자 이승희 씨 등 섬여행매니아 총 16명이 함께 했다.
필자는 해수욕장에서 민박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김준 박사와 둘이서 아침에 차로 잠깐 들른 당산 등을 다시 가보기로 했다.
당산으로 가는 길 중간에는 아침에 지나갔던 분교를 만나고 폐가들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팔봉초등학교 고파도 분교’라고 쓰여진 정문에는 ‘경축-제35회 충청남도 학생과학발명품 경진대회 은상(3학년 현서랑), 동상(4학년 현서원)’이라고 쓴 현수막이 걸려 있다. 불과 학생 3명인 이곳 분교에서 2명이 각각 은상과 동상을 수상했다니 정말 경축할 만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두명 모두 목사님 따님들이다.
당산을 가기 위해 고갯길을 오른다. 당집은 산 정상 부근에 위치해 있는 게 보통이다. 산이라고는 하지만 매우 낮은 야산이다.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들어 차 있다. 이러저리 숲을 헤치고 오르다 보니 역시 정상 부근에 당집이 있다. 전에는 이곳에서 마을의 안녕을 비는 당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30여 년 전부터 당제를 지내지않아 폐가가 되어 있다. 당집 안에는 조그만 부엌도 보이는 데 이젠 완전히 허물어져 흔적 만 남아 있다.
고개를 넘어 선착장 마을인 끝뿌리 쪽으로 내려가 본다. 고갯길 옆 집마당에는 생선을 말리는 건조대가 앙증맞게 세워져 있다. 섬 마을임을 실감케 해주는 풍경이다. 깃발처럼 우럭과 망둥어들이 하늘높이 걸려 있다.
창문 안으로 3세 쯤 보이는 애기가 보인다. 반갑다. 어린이가 귀한 섬에 애기라니 반가울 수 밖에 없다. 모기장문 안으로 보이는 애기의 모습이 귀엽기 그지없다. 섬에서 가장 어린 애기로 이름은 김아라. 전(前) 이장 딸이다. 섬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한다고 한다. 요즘 섬들은 대부분 젊은 사람들은 육지로 떠나고 나이든 어른들 만 남아 섬을 지키고 있는 실정이다. 이곳 고파도 역시 50대가 10여 명, 어린이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60-90세 노인들이라 한다. 머지않아 주민이 떠난 무인도가 점차 늘어날 것 같아 걱정이기도 하다.
민박집 바로 뒤에도 폐가 한 채가 보인다. 전에는 꽤 아담한 집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폐가이다. 마루도 넓고 부엌도 제법 크다. 무너진 벽 틈으로 햇볕 만 기웃거린다. 주인이 쓰던 그릇과 가재소품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점심식사 후 오후에는 민박집 우측 해안길을 걸어본다.
돌해안 코너를 돌면 빈 집 한 채가 보이고 앞에 긴 부장교가 놓여져 있다. 배가 왕래하기 쉽게 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이라 한다. 물이 들어왔을 때 부장교 위에서 낚시를 즐겨도 좋을 것 같다.
부장교 앞 바다 위에는 가두리양식장 시설도 눈에 들어온다. 마치 바다 위에 조그만 마을이 떠다니는 것 같은 풍경이다. 이곳 가두리양식장은 마을주민이 아니고 외지인이 운영하는 양식장이다. 물이 빠지면 섬 주위 해안을 한바퀴 돌아볼 수 있다. 약 4시간 정도 걸린다.
마을 앞 바다에는 또 다른 섬이 지척으로 보인다. 분점도라는 섬이다. 분점도는 웅도와 고파도 사이에 있는 섬인데 이곳 역시 유인도이다. 선착장 좌측으로는 우도도 눈에 들어온다. 우리나라 섬 중에는 우도라는 이름의 섬이 많다. 제주도 성산포에도 우도가 있고 통영 연화도 앞에도 우도가 있다. 서산 우도에는 20여 가구, 40명 정도의 주민이 살고 있다고 한다.
분점도와 우도는 고파도에서 매우 가까운 섬인데도 불구하고 대산항 근처 벌말포구에서 여객선이 다닌다고 한다.
고파도, 옹도, 분점도, 우도 등이 들어서 있는 가로림만. 이곳은 지금 새만금 개발 때처럼 또 하나의 개발논쟁 지역으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거론된 ‘가로림만 프로젝트’는 가로림만 입구를 막아 거대한 공업기지를 건설한다는 프로젝트이다. 당시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가로림만에 건설될 공업기지는 창원 공단의 10배에 달하는 1억 ㎡(3억평) 규모에 400만 정도가 거주할 공간과 원스톱 생산이 가능하고 국내적으로 항구화 공업기지가 건설되면 수송비를 대폭 줄이는 효과와 상대적으로 낙후된 서해안 개발에 새로운 동력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고 한다.
암튼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논의가 최근에는 조력발전소 프로젝트로 발전하여 활발하게 추진 중이라 한다. 즉, 태안군 이원면 내리와 서산시 대산읍 오지리를 2km의 해수유통 방조제를 축조한 뒤 52만KW 규모의 발전소를 건설한다는 계획이다.
한국서부발전 산하 (주)가로림조력발전이 추진하고 있는 이 사업은 지난 해 국토해양부로부터 가로림만 일대 34만 3,174㎡(약 10만 3,800평)의 공유수면 매립계획을 승인받아 향후 사업추진 여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새만금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가로림 조력발전소 건설을 둘러쌓고 현재 주민들과 환경단체 등이 날선 공방을 벌이고 있다. 아뭇튼 방조제사 건설된다 해도 고파도 섬 자체는 수몰되는 것이 아니고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 한다.
고파도에도 서서히 해가 기운다. 고파도를 떠날 시간이 다가온다. 구도항에서 고파도 행 여객선은 07:30, 16:10 하루 두 번 출항한다. 그리고 고파도에서는 08:20, 17:00 역시 두 번 육지로 떠난다. 오후 5시 배로 떠나지않으면 하루 더 머물러야 한다. 고파도에서 여유롭게 푹 쉬고 쉽은 사람이라면 몇일 더 머물러도 좋다. 그러나 단지 관광이 목적이라면 하루면 충분하다.
고파도는 이름처럼 뭔가 '고픈' 사람 만 가는 섬이다. 특별히 볼거리가 많지않아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편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식당도 없다. 특별히 여행객을 반기는 눈치도 아니다. 그런데도 가고싶은 섬이다. 조용히 쉬고싶은 사람들에게 안성마춤인 섬이다. 나태주 시인의 시 <들꽃>처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고파도>도 그런 섬이다.
선착장에서 돌아갈 배를 기다린다. 요즘은 스마트폰 사진도 좋다. 스마트폰으로 고파도를 파노라마로 찍어본다. 이생진 시인도 재미있다고 웃으신다. 바다가 고향인 시인, 바다를 육지처럼 쉽게 걸어다니는 시인. 이생진 시인의 모습이 바다처럼 맑고 천진스러워 보인다.(글,사진/임윤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