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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 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예조판서 지경연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 해평부원군 세자이사 문정 윤공의 묘지명 서문을 아우르다 〔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禮曹判書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海平府院君世子貳師文貞尹公墓誌銘 幷序〕 / 영의정 윤두수의 아우
신종황제(神宗皇帝) 20년(1592, 선조25)에 소경왕(昭敬王 선조(宣祖))께서 의주(義州)로 출수(出狩)하였다. 임금의 행차가 동파역(東坡驛)에서 머무르게 되자 문정공(文靖公) 윤두수(尹斗壽)와 문정공(文貞公) 윤근수(尹根壽)를 불러 유지(諭旨)를 내려 말하기를, “왜노
(倭奴)가 반역을 일으켜 대해(大海)를 건너 우리 강토를 유린하였다.
내가 서쪽으로 파천(播遷)하여 광복(匡復)을 도모하려 하니 경(卿)의 형제는 나의 곁을 떠나지 말라.”하였다. 공(公)의 형제는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며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할 것을 맹세하였다. 이에 문정공(文靖公 윤두수)이 정사(政事)로서 우의정에 발탁되어 행재소에서부터 환도(還都)할 때에 이르기까지 독상(獨相)으로 왕실을 보좌하여 왜노를 축출하고 마침내 강토를 회복하였다.
문정공(文貞公 윤근수)은 사명(辭命)으로 대제학에 발탁되어 중국에 진주(陳奏)할 자문(咨文)을 갖추어 군사(軍士)를 청하였는데, 한 해에 세 번 광녕(廣寧)에 달려가고 여섯 번 요양(遼陽)에 달려가 그 명성이 천하에 널리 알려졌다. 황조(皇朝)의 장수와 병졸들을 두루 설득하여 그들의 환심을 얻었으므로 황조에서 군사를 내어 조선을 구원하였으니, 자애로운 어머니가 갓난아이를 구해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앞뒤에서 인도하는 자가 있으며, 덕으로 깨우치고 명성을 선양하는 자가 있다 하노라.”라고 하였으니, 바야흐로 왕실이 위태롭고 어지러울 때에 공의 형제가 혹 앞뒤에서 인도하고 혹 덕으로 깨우치고 명성을 선양하였다. 두 분 다 큰 공을 세웠으나 문정공(文貞公 윤근수)이 사방을 다니며 힘을 다해 주선한 공이 더욱 크니, 아! 훌륭하도다.
공의 자는 자고(子固)이며 선산(善山) 사람이다. 증조할아버지 계정(繼丁)은 관직이 장원서 장원(掌苑署掌苑)에 이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할아버지 희림(希琳)은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변(忭)은 관직이 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이르고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 현씨(玄氏)는 현명함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의정공(議政公 윤변(尹忭))은 문정공(文正公) 조 선생(趙先生)의 문생제자를 따라 주자(朱子)의 글을 배웠다. 공은 어려서부터 사리에 밝고 민첩하며 백가(百家)에 능통하였다. 문순공(文純公) 이 선생(李先生)과 문정공(文貞公) 조 선생(曺先生)의 문하에서 유학하며 강문(講問)한 바가 많아 주자의 학문이 정학(正學)이며 상산(象山) 육씨(陸氏)의 학문이 이단임을 알았으니, 두 분 선생이 경탄하고 감복하였다.
공은 가정(嘉靖) 37년(1558, 명종13)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임시로 임명되었다가 추천을 받아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에 보임되었다. 공이 자신의 나이 아직 어려 배우지 못했다고 말하며 사직하고 물러나서 책을 읽겠다고 청하니, 명묘(明廟 명종(明宗)께서 윤허하였다.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를 거쳐 외직으로 나가 연천 현감(漣川縣監)을 지냈으며, 41년(1562, 명종17)에 홍문관 부수찬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전에 문정공(文正公) 조 선생(趙先生 조광조(趙光祖))이 소인(小人) 남곤(南袞)의 참소를 받아 하옥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영정왕(榮靖王 인종(仁宗))께서 사후에 관작(官爵)을 회복시켰으나 그 억울함을 아직도 밝게 씻어내지 못하였고, 상서(庠序)는 삭막한 것이 다시는 글 읽는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공이 밤을 타서 임금을 대면하여 말하기를, “조광조는 백세(百世)의 스승입니다.
도덕이 순수하여 거의 요순(堯舜)의 정치를 일으킬 만하였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참소가 소인에게서 싹틀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위에서는 지극한 정치〔至治〕가 일어나지 못하고 아래에서는 당인(黨人)의 금고(禁錮)가 먼저 일어났으니, 신은 남몰래 비통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습니다.
이에 영정왕께서 조광조에게 죄가 없음을 가엽게 여기시어 관직을 회복시키셨으니, 참으로 크고 훌륭하신 덕입니다. 그러나 유사(有司)가 상공(上公)의 작위에 추증하지도 않고 영광스러운 시호(諡號)를 내리지도 않았으니, 이는 ‘덕 있는 이를 숭상하고 그 어진 덕을 닮은 후손에게 제사를 받들게 하는’ 전하의 뜻이 아닙니다.”하자 명묘께서 노하여 그날로 과천 현감(果川縣監)으로 폄출(貶黜)하였다.
다음 해에 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이 되었다가 병조와 형조, 양 조(曹)의 좌랑(佐郞)을 거쳐 어사(御史)로 충원되어 관서(關西) 지역의 재상(災傷)을 살펴보았다. 홍문관에 들어가서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가 이조좌랑 겸 교서관교리 한학교수(吏曹佐郞兼校書館校理漢學敎授)로 옮겼으며, 다시 서장관(書狀官)의 자리에 충원되어 천자(天子)에게 조회를 드렸다.
이전에 왕수인(王守仁)이 육씨(陸氏 육상산(陸象山))를 종주로 삼아 주자(朱子)를 비판하여 천하의 학자들로 하여금 우르르 양지(良知)의 학문으로 귀의하게 하였다. 황조(皇朝)의 학사(學士) 육광조(陸光祖)가 더욱 그 학설을 좋아하여 하루아침에 주자의 도를 배반하고 왕씨가 지은 글을 존신(尊信)하였다. 그러므로 경사(京師)의 현사대부 가운데 선(禪)에 빠져들지 않은 이들이 거의 드물었다.
공이 개탄하며 육광조에게 말하기를, “성인(聖人)의 학문은 성(性)에 근본하고 석씨(釋氏)의 학문은 심(心)에 근본하는데, 왕씨(王氏 왕수인)는 석씨의 말을 조술(祖述)하였으니 이것은 이단입니다. 학자가 어떻게 주자를 배반하고 이단에 귀의할 수 있단 말입니까.”하였다.
육광조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이에 이르기를, “옛날의 이른바 성인은 미처 전하지 못한 학문을 말하여서 천하의 스승이 될 수 있었습니다. 명(明)나라가 천하를 소유한 200년 동안 진신선생(搢紳先生)으로 도덕을 말한 이를 이루 헤아릴 수 없으나, 왕씨가 홀로 정미(精微)한 경지에 나아가 이에 능히 양지(良知)의 학문을 창도하였으니 어찌 이른바 성인이 아니겠습니까.”하였다.
공이 더욱 분개하여 준열하게 육광조를 꾸짖으며 말하기를, “왕씨의 학문은 양지(良知)에 도달하는 것을 종지(宗旨)로 삼는데, 이른바 양지라는 것은 단지 밝고 신령스러운 체(體)만 보았을 뿐이요, 맹자(孟子)가 말한 바 인의(仁義)의 양지는 아닙니다. 그러한즉 왕씨가 자기 자신을 그르치고 다른 사람까지 그르친 것은 양지에 도달하는 것에 있지 않고 도달한 바가 양지가 아닌 것에 있습니다.
비록 스스로 말하기를 맹씨(孟氏)에게 공헌한 바가 있다고 하였으나, 성인의 문하에 무거운 죄를 지었음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주부자(朱夫子 주자(朱子))께서 ‘허령(虛靈)한 지식을 고수하여 하늘의 진리에 어두우며, 유자(儒者)의 말을 빌려 노불(老佛)의 말을 꾸민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를 이른 것입니다.”하였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하여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구분,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변별을 극구 논하였더니 육광조가 대답하지 못하였다. 바야흐로 이때에 양지(良知)의 학문이 천하에 횡행하여 황조의 학사들이 왕씨의 도를 존숭하지 않음이 없었으되 공이 거듭하여 물리치니, 유림(儒林)들이 서로 칭찬하여 말하기를, “주자의 도가 망하지 않을 것이다.”하였으며, 육광조 또한 답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참으로 호걸지사(豪傑之士)이니, 비록 중국 땅이라고 해도 그런 호걸지사는 또한 있기 드뭅니다.”하였다.
사신들이 돌아오기에 미쳐서 이 문순공(李文純公 이황)이 공이 광조와 나눈 말에 대해서 듣고 탄식하여 마지않았다. 융경(隆慶) 원년(1567, 선조 즉위년)에 공이 이조 정랑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의정부에 들어가 검상(檢詳)이 되었다가 자리를 옮겨 사인(舍人)에 제수되었다.
사헌부 집의(執義)를 거쳐 부응교(副應敎)에 고쳐 제수되었다가, 어사(御史)의 자리에 충원되어 영남 지방의 재상(災傷)을 살펴보았다.
이전에 김개(金鎧)가 공을 포함한 17명을 미워하여 탄핵하고자 하였으니 조정이 흉흉하였다. 정철(鄭澈) 공이 화를 내면서, “이것은 김개가 신하들을 모함한 것이다.”하며 즉시 임금을 뵙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김개가 간사하니, 어찌 조정에 재앙을 초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소경(昭敬 선조)께서, “정철의 말이 지나치다.”하자 정공(鄭公)이 나아가 말하기를, “비록 천둥 번개가 친다고 해도 신의 말씀을 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하며 김개의 간사한 죄에 대해서 진정(陳情)하였다. 이에 소경께서 크게 깨닫고, 즉시 김개를 내쫓고 관작(官爵)을 삭탈하였다.
호서(湖西) 지방에 기근이 들자 공이 사간(司諫)으로서 어사(御史)의 자리에 충원되어 가서 진휼(振恤)한 후 얼마 있다 돌아와 복명(復命)하였다. 전한(典翰)에 발탁되었다가 직제학(直提學)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사복시 정(司僕寺正)을 거쳐 승정원에 들어가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다시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고쳐 제수되었다.
이 문청공(李文淸公)이 명나라 경사(京師)에 갈 때에 공을 부사로 삼았다. 다음 해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으로 승진하였으며, 외직으로 나가 경상 관찰사가 되었다. 1년 남짓 지난 후에 홍문관 부제학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사헌부에 들어가 대사헌이 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 경기 관찰사가 되었다.
이전에 김성일(金誠一)이 공을 심하게 미워하여 진도 군수(珍島郡守) 이수(李銖)의 쌀 사건을 드러내어 공격하고, 이에 이수를 의금부에 하옥하였다. 때마침 진도의 저리(邸吏)가 고하기를 이수가 선미(船米)를 장사꾼 장세량(張世良)의 집에 두었다고 하자, 이에 또 장세량을 옥에 가두고 장(杖) 600여 대를 때렸는데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김계휘(金繼輝) 공이 말하기를, “윤(尹) 아무개는 왕조의 어진 선비로서 전하께서 알아주시고 장려해주신 은혜를 입어 충성을 다 바쳐 큰 과오를 저지른 바 없습니다. 그런데 성일(誠一)이 뇌물을 받았다고 비방하니, 간사한 자가 말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지 어찌 알겠습니까.”
하였다.
그 말이 매우 간절하니, 소경께서 비로소 공이 원통한 상황에 처하였음을 알고 이수와 장세량을 풀어주라고 명하였다. 승정원에서 네 번이나 아뢰며 강력히 간쟁하자 소경께서 노하여 도승지 이산해(李山海) 등 여섯 명의 관직을 파면하고 공을 예전처럼 대하였다.
다음 해에 강릉 부사(江陵府使)에 기용되었으나 공은 어머니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에 제수되어 임기를 마쳤고, 좌윤(左尹)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황해 관찰사가 되었으나 또 어머니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대사간을 거쳐 이조 참판으로 옮겼다가 어머님 상(喪)을 당하였다. 상복을 벗은 후 공조참판 겸 도총부부총관(工曹參判兼都摠府副摠管)으로서 주청사(奏請使)에 충원되어 국계(國系)에 대하여 변무(辨誣)하였다. 자헌대부 판형조(資憲大夫判刑曹)로 승진하였다가 예조 겸 예문관제학(禮曹兼藝文館提學)으로 고쳐 제수되었으며,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 공신(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이라는 호(號)를 하사받고 해평군(海平君)에 봉해졌다.
이전에 김효원(金孝元)이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과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그때 처음으로 붕당이 나눠지게 되었는데 유언비어가 점점 자라 무함(誣陷)을 낳게 되었다. 송언신(宋言愼)이 호남 지방의 순무 어사(巡撫御史)가 되어 나주(羅州)에 이르러서 기효증(奇孝曾)에게 일러 말하기를, “선왕(先王 명종(明宗))께서 돌아가셨을 때 심의겸 당(黨)의 뜻이 흥녕군(興寧君)에게 있었지, 금상(今上 선조(宣祖))에게 있지 않았다.”하였다.
기효증이 이러한 내용을 소문내자 소경왕께서는 심의겸이 흥녕군 편에 붙었다고 의심하며 마음속으로 미워하면서, 유언비어가 무함하는 것인 줄 알지 못하였다. 공 또한 심의겸과 같은 당(黨)으로서 점점 소외당하여 전형(銓衡)의 직에 제수되지 못하였다. 숭정(崇政)에 가자(加資) 되고 의정부우찬성 겸 판의금부사(議政府右贊成兼判義禁府事)가 되었다.
정철(鄭澈) 공이 강계(江界)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을 때 그 일에 연루되어 관작(官爵)을 삭탈당하였다가평수길(平秀吉 풍신수길(豐臣秀吉)이 반란을 일으키자거가(車駕)를 호종하여 평양부에 이르렀다. 임금의 명을 받들어 광녕진(廣寧鎭)에 군사를 청하고 돌아와 의주(義州) 행재소에 보고한 후, 판공조(判工曹)에 기용되고 보국판중추부사 겸 예조판서 지경연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輔國判中樞府事兼禮曹判書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에 가자(加資)되었다.
병부 시랑(兵部侍郞) 송응창(宋應昌)이 천자의 명을 받고 경략(經略)이 되었을 때 공이 접반사(接伴使)에 충원되어 요동(遼東)에 들어갔다. 이전에 급사중(給事中) 위학증(魏學曾)이 광해군을 위해 왕위를 갈아치울 것을 도모하고 곧 건의하여 속국(屬國 조선(朝鮮))의 반을 분할할 것을 청하였다.
국왕을 교체하는 일을 병부(兵部)에 내려 보내니 병부 상서 석성(石星) 공이 불가하다고 하였다. 송응창이 이에 위학증의 논의를 꺼내어 공에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조정의 의론이 이와 같으니 당신네 나라에서 어떻게 스스로 도모하겠는가. 내 장차 있는 힘껏 보호할 터이니, 당신도 돌아가서 당신네 나라의 왕에게 고하여 자위책을 도모하도록 하시오.”하였다.
공이 눈물을 흘리며 요동에서 돌아와 위학증의 의론을 조정에 아뢰었다. 소경(昭敬)께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 반드시 이런 변고가 있을 줄 오래 전부터 알았더니, 이제 과연 그렇게 되었구나.”하였다. 이에 대신(大臣) 유성룡(柳成龍)을 불러 술을 내리며 말하기를, “경(卿)의 재주와 학문이 옛날의 현인(賢人)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는데, 나를 섬기느라 이룬 것이 없구나.”하니 유성룡이 부끄럽고 두려워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니 위학증의 의론을 발고(發告)하여 광해(光海)의 역모를 꺾은 것은 공의 힘이다. 의정부 좌찬성으로 승진하였다. 25년(1597, 선조30)에 수길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공이 왕비를 모시고 수안(遂安)에 있었는데, 거가(車駕)가 장차 남쪽으로 행차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이에 차자(箚子)를 올려 거가를 호종할 것을 청하자 소경께서 윤허하고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 공신(忠勤貞亮効節協策扈聖功臣)의 호를 하사하였다.
그때에 황조(皇朝)에서 왕씨(王氏)를 공자(孔子)의 사당에 배향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여 왕에게 자문(咨文)을 보내온 일을 공경(公卿)에게 내리니 공이 말하기를, “왕씨의 학문이 석씨(釋氏)에게서 나왔음을 숨길 수가 없는데 어떻게 칠십 제자와 함께 중니(仲尼)에게 종사(從祀)할 수 있겠습니까. 대저 석씨의 ‘명심견성(明心見性)’은 유가의 ‘진심지성(盡心知性)’과 서로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석씨는 마음〔心〕에서 깨닫지 성(性)에서 깨닫지 않습니다. 이제 왕씨의 명심(明心)의 학문이 석씨에게로 들어갔으나 스스로 그러한 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정(嘉靖) 연간에 태학사(太學士) 계악(桂萼)이 말하기를, ‘왕씨가 이설(異說)을 세워 고원(高遠)하다 여기며 주자의 격물(格物)설을 비판하고, 문도를 모아 서로 창화(倡和)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사특한 학설을 금지함으로써 인심을 바로잡아 주십시오.’하였습니다.
계악은 군자가 아닌데도 오히려 왕씨의 학설을 물리칠 줄 알았습니다. 그러한즉 왕씨를 중니에게 종사하게 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또 왕씨가 옛 《대학(大學)》에 서(序)를 달아 말하기를, ‘성의(誠意)에 힘쓰지 않고 다만 격물(格物)로써 하는 것을 지엽적이라 말하고, 격물을 일삼지 않고 다만 성의(誠意)로써 하는 것을 텅 비었다고 말하며, 치지(致知)에 근본하지 않고 다만 격물성의로써 하는 것을 망녕되다고 말한다.’하였습니다.
이에 《대학》을 장(章)으로 나눈 체재를 버리고 구본(舊本)의 형태로 되돌렸으니, 성인(聖人)의 문하에 죄를 지은 것을 어찌할 것입니까.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성왕(聖王)이 더 이상 나오지 아니하여 제후들이 방자해지고 초야의 선비들이 제멋대로 논설을 펴서 양주(楊朱). 묵적(墨翟)의 말이 천하에 가득하게 되었으니 천하의 말이 양주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묵적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양씨는 자신만을 위하니 이는 군주가 없는 것이요, 묵씨는 모두 다 똑같이 사랑하니 이는 아버지가 없는 것이다. 아버지가 없고 군주가 없으면 이는 금수(禽獸)와 다를 것이 없다.’하였습니다. 아아! 왕씨와 양주ㆍ묵적은 다를 것이 없으니, 어떻게 금수가 되지 않겠습니까. 신이 이르건대, 왕씨는 중니에게 배향하기에 부족합니다.”하고 이에 의논을 올려 종사(從祀)를 저지하였다.
황조의 학사들이 그 의논을 보고 두려워하며 떨지 않음이 없었으며, 조 문효공(趙文孝公)은 “선생은 이 시대의 맹자이시다.”라고 하였다.
34년(1606, 선조39)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이라는 논의가 있어 안석(案席)과 지팡이를 하사하였는데, 공이 고사(固辭)한 연후에야 논의가 그쳤다.
10년 후인 병진년 8월 모갑(某甲)일에 병으로 집에서 졸(卒)하였으니, 향년 80이었다. 부고가 들리자 조정에서는 이틀 동안 조회를 폐하고 시호를 내려 문정(文貞)이라고 하였다. 모월 모일에 장단군(長湍郡) 임강현(臨江縣)의 언덕에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다.
공은 사람됨이 단아(端雅)하면서 영수(英粹)하고 선비에게 몸을 낮출 줄 알았으며, 자애롭고 신실(信實)하여 외물(外物)을 사랑하였다. 대학사(大學士) 허국(許國) 공이 조서(詔書)를 받들고 국경에 이르러 공의 용모를 보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참으로 아름다운 선비이다.”라고 하였다.
성품이 청렴결백하여 늙어서까지 집이 없었으며, 문장을 지을 때에는 경술(經術)에 근거하여 황복(荒服)의 비루함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서경(西京) 시대의 수준으로 돌이켰으니 순수하고 전아(典雅)하였다. 학자들이 월정 선생(月汀先生)이라고 일컬었으며, 저술한 문집 약간 권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부인 풍양 조씨(豐壤趙氏)는 절도사 조안국(趙安國)의 딸로, 여섯 명의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다. 장남 환(晥)은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이고, 차남 질(晊)은 가평 군수(加平郡守)이며, 그 다음 명(㫥)과 그 다음 유(曘)는 모두 진사(進士)이고, 그 다음은 환(㬇)이며 그 다음은 민(▼(日+敏))이고, 딸은 윤문성(尹聞性)에게 시집갔다.
서자(庶子) 창(㫤)은 학관(學官)이 되었고 서녀(庶女)는 여지길(呂祉吉)에게 시집갔다. 환(晥)에게 아들이 하나 있으니 응지(應之)이고, 질(晊)에게 아들이 넷 있으니 택지(擇之)ㆍ상지(尙之)ㆍ열지(悅之)ㆍ종지(宗之)이며, 명(㫥)에게 아들이 하나 있으니 정지(挺之)이다.
바야흐로 왜노가 평양을 함락했을 때 공이 군사를 청하러 아홉 번이나 요수(遼水)를 건넜는데, 광녕(廣寧) 사람들이 공이 폐백을 바치는 것을 보고 모두 감탄하며 “윤 대부(尹大夫)는 어쩌면 그리도 공손한가.”라고 하였으며, 요양(遼陽) 사람들이 공이 명(命)을 아뢰는 것을 보고 모두 감탄하며 “윤 대부는 어쩌면 그리도 수고로이 일하는가.”라고 하였다.
그 후에 사신들이 경사(京師)에 들어가면 중국 조정의 인사들이 공의 안부를 물었으니, 어찌 충성스럽고 곧은 절개가 중국 조정을 감동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선대부(先大夫) 문정공(文貞公)께서 호소격(號召檄)를 지어 대신(大臣) 유성룡(柳成龍)의 죄를 물었다가 10여 년 동안 유배되고 폐고(廢錮)되어 끝내 관작(官爵)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공이 차자(箚子)를 올려 말하기를, “정욱(廷彧)의 정직함이 유성룡의 중상모략을 입어 강호(江湖)에 내쳐졌습니다. 병까지 위독하여 죽을 날이 멀지 않았는데 그 원통함을 아직도 명백히 밝히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명지(明旨)를 내리시어 관작을 회복시켜 주십시오.”하였으나 소경(昭敬)께서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의 마음이 붕우(朋友)에게 돈독하여 선대부께서 공의 한 마디에 힘입어 눈을 감기 전에 원통함을 벗을 수 있었으니, 그 은혜가 지극히 깊다. 공이 졸(卒)한 후에 어진 후손 윤득관(尹得觀)이 선조를 위하여 묘지명(墓誌銘)을 청하니, 내가 차마 사양할 수 없어서 이에 명(銘)을 지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이 문공(文公 주자(朱子)을 내리사 / 天降文公
나에게 대도(大道)를 밝혀주셨네 / 昭我周行
육경을 바로잡으셨으니 / 六經旣正
백가가 걸은 길이로다 / 百家攸程
어찌하여 자정은 / 如何子靜
양지를 궁구하였나 / 良知是究
연원이 같지 않으니 / 淵源不猶
천 리만큼 어긋나버렸네 / 千里之謬
저 왕씨의 아들이 / 彼王氏子
또 뭇 성인(聖人)을 모욕하여 / 又侮羣聖
마음을 따르고 안에서 구하며 / 率心內求
성을 보지 않았네 / 不見其性
공께서 처음 강학하실 때 / 公初講學
무원을 존숭하여 / 㜈源斯尊
남기신 가르침을 공경하고 따르며 / 祗服餘訓
마치 곤륜산을 우러러보듯 하였네 / 如仰昆侖
전주가 풍부하니 / 傳注之富
심오한 도리를 탐구할 수 있고 / 能探其賾
필찰의 오묘함은 / 筆札之竗
능히 그 획을 얻었네 / 能得其畫
아름다운 군자 육군은 / 有斐陸君
중국의 영재로서 / 中國之英
성인은 / 曰聖人者
오직 문성뿐이라고 하였네 / 其惟文成
학사들이 이에 화답하여 / 學士和之
앞 다투어 선사를 배신하니 / 胥倍先師
공께서 엄숙한 태도로 / 公乃肅容
편벽한 말을 물리치셨네 / 以距詖辭
“여요의 학문은 / 餘姚之學
성명을 알지 못하여 / 不知性命
우리 유가의 성명을 버리고 / 棄我誠明
불가(佛家)의 혜정으로 돌아갔네 / 而歸慧淨
우뚝하신 무이만이 / 武夷巖巖
도의 지극함이라. / 惟道之極
사특한 말로 백성을 속이니 / 邪說誣民
누가 그 의혹을 분별할까 / 孰辨其惑
왜가리 울 듯 떠드는 무리가 / 鴂舌之徒
날로 달로 늘어나니 / 日增月滋
비유하자면 홍수를 / 譬彼洪水
다스릴 수 없는 것과 같네 / 莫之治之
내 비록 부족한 학문이지만 / 吾雖末學
어찌 고하여 가르치지 않을 수 있을까.” / 曷不告誨
공의 말씀 더욱 높아져 / 辭氣益厲
해내를 쭈뼛하게 하였네 / 竦動海內
사람들 또한 말하기를 / 人亦有言
이 시대의 맹자라고 하였으니 / 今之孟子
내 공의 무덤에 명을 지어 / 我銘幽堂
천 년 만 년 드리우리라 / 垂千萬祀
<끝>
[註解]
[주01]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 …… 윤공 : 윤근수(尹根壽, 1537~1616)를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자
고(子固), 호는 월정(月汀)이다.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의 아우로, 1558년(명종 13) 문과에 급제한 후 동부승지ㆍ대사성ㆍ부제학
ㆍ경기도 관찰사ㆍ황해도 관찰사ㆍ형조 판서ㆍ대사헌ㆍ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를 한 공으로 1590년 광국 공신(光國功臣) 1등에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으로 봉해졌다. 1591년 정철
(鄭澈)이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건의한 일로 유배되자 형 윤두수와 함께 파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예조 판서로 재기용되었다.
난중에 선조를 호종(扈從)하고 문안사ㆍ원접사ㆍ주청사 등에 임명되어 명나라와의 외교를 담당한 공으로 1604년 호성 공신(扈聖
功臣) 2등에 봉해졌다. 이황과 조식(曺植)에게서 학문을 배워 양명학을 배척하고 육구연(陸九淵)ㆍ왕수인(王守仁)의 문묘종사를
반대하였다. 저서로 《월정집》ㆍ《월정만필》ㆍ《조천록》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주02] 신종황제(神宗皇帝) : 1563~1620. 중국 명(明)나라의 제13대 황제로, 이름은 주익균(朱翊鈞)이다. 연호는 만력(萬曆)이며 재위
기간은 1572~1620년이다. 신종의 재위 기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주03] 출수(出狩) : 파천(播遷)을 의미한다. 임진왜란을 만나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의주(義州)로 피난한 것을 가리킨다.
[주04] 동파역(東坡驛) : 지금의 경기도 문산(汶山) 지역에 해당한다.
[주05] 윤두수(尹斗壽) : 1533~1601.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자앙(子仰), 호는 오음(梧陰)이다. 우찬성 윤근수
(尹根壽)의 형이다. 1558년(명종13) 문과에 급제한 후 대사간ㆍ도승지ㆍ한성부 좌윤ㆍ형조 참판ㆍ전라도 관찰사ㆍ평안 감사ㆍ대
사헌ㆍ호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를 한 공으로 1590년 광국 공신(光國功臣) 2등에 해원군(海原君)으로
봉해졌다.
1591년 정철(鄭澈)이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건의한 일로 유배되자 아우 윤근수와 함께 파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재기용되었다. 난
중에 선조를 호종(扈從)하고, 어영대장ㆍ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명나라에 대한 원병 요청을 반대하고 평양성 사수를 주장
하였으며, 함흥 대신 의주로 피난 갈 것을 주장하여 선조의 요동행을 막았다.
1595년에 왕비를 해주로 시종하고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599년 관직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곧 사직하였고, 1605년 호성 공신(扈聖功臣) 2등에 추록되었다. 성수침(成守琛)ㆍ이황(李滉) 등에게 배웠으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저서로
《오음유고(梧陰遺稿)》ㆍ《성인록(成仁錄)》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주06] 반역을 일으켜 : 원문의 ‘不庭’은 왕실에 내조(來朝)하지 않는 나라를 말한다. 《시경(詩經)》 〈한혁(韓奕)〉에 “내조하지 않는 나라
를 바로잡아 너의 임금을 보좌하라.〔榦不庭方, 以佐戎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니, 조회하러 오지 않는다는 것은 곧 반역을 뜻한
다.
[주07] 독상(獨相) : 영의정ㆍ좌의정ㆍ우의정의 세 정승 가운데 하나만이 자리에 있어 세 정승의 일을 겸무(兼務)하는 것을 말한다.
[주08] 사명(辭命) : ‘사명(詞命)’이라고도 하며, 한 나라의 사신이 임금의 말이나 명령을 받들어 외교 무대에서 응대하는 것을 말한다.
[주09] 자문(咨文) : 조선 시대에 중국과 주고받던 공식적인 외교문서이다.
[주10] 앞뒤에서 …… 하노라 : 《시경》 〈면(緜)〉의 제9장에 나오는 말로, 원문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虞)와 예(芮)가 분쟁을 질정하
러 오거늘 문왕이 그 흥기할 기미를 고동시키니 윗사람을 친애하게 하는 자가 있으며, 앞뒤에서 인도하는 자가 있다 하며, 덕으로 깨
우치고 명성을 선양하는 자가 있으며, 적의 침입을 막아내는 자가 있다 하노라.〔虞芮質厥成, 文王蹶厥生. 予曰有疏附, 予曰有先
後. 予曰有奔奏, 予曰有禦侮.〕” 우(虞)나라와 예(芮)나라의 군주가 토지를 두고 분쟁을 일삼다가 함께 주(周)나라에 조회하러 갔
다.
국경을 넘어가니 백성들이 서로 길을 사양하며, 읍에 들어가니 남녀가 길을 달리하고, 머리가 반백이 된 자가 짐을 들거나 끌지 아니
하며, 조정에 들어가니 서로 벼슬이 오르기를 사양하였다. 이에 두 나라의 군주가 감동하여 다투던 토지를 묵는 밭으로 만들고 물러
갔다.
이 말을 듣고 40여 국이 주나라로 귀의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문왕이 흥기할 수 있는 세력이 일어났다. 이는 문왕의 덕이 성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 시에 나오는 것과 같은 신하들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하였다는 것이니, 여기서는 윤근수 형제가 이러한
신하와 같은 인재임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 시를 인용한 것이다.
[주11] 변(忭) : 윤변(尹忭, 1493~1549)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구부(懼夫), 호는 지족암(知足庵)
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기묘사화 때 조광조가 투옥되자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그의 무죄를 호소하였다.
1522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기묘당인(己卯黨人)이라 배척받기도 하였으나 성균관 학유가 되었고, 이후 의정부 사록ㆍ
사헌부 감찰ㆍ호조 좌랑ㆍ충청도사ㆍ형조 정랑ㆍ삼척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지족암집》이 있다.
[주12] 정경부인(貞敬夫人) 현씨(玄氏) : 부사직(副司直) 현윤명(玄允明)의 딸이다. 자세한 내용은 미상이다.
[주13] 의정공(議政公) : 윤근수 형제의 아버지 윤변(尹忭)이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주14] 문정공(文正公) 조 선생(趙先生) : 조광조(趙光祖, 1482~1519)를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
직(孝直), 호는 정암(靜菴)이다.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으며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金宗直)의 뒤를 잇는 사림파의 영
수가 되었다. 1515년(중종10) 문과에 급제한 후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이후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를 역설하고 현량과를 통해 신진사류들
을 정계에 진출시켰다. 그러나 이들이 훈구세력인 반정공신을 공격하면서 훈구파의 탄핵을 받게 되었고, 또 신진사류의 도학정치
와 과격한 언행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 왕이 탄핵을 받아들여 김정ㆍ김구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가 사사되었으니, 이를 기묘사화
(己卯士禍)라고 한다. 선조 초에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정암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정
(文正)이다.
[주15] 문순공(文純公) 이 선생(李先生) : 이황(李滉, 1501~1570)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문신ㆍ성리학자로, 본관은 진보(眞寶), 자
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ㆍ퇴도(退陶) 등이다. 1527년(중종22) 진사에 합격하고 1534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세자시강원 문학ㆍ충청도 어사ㆍ성균관 사성ㆍ풍기 군수 등을 역임하다가 1549년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간 후 벼슬을 마다
하고 수양과 저술에 전념하며 많은 제자를 길렀다. 주리론(主理論)을 형성하여 성리학을 심화ㆍ발전시키고 조선 후기 영남학파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선조에게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리고 《논어》ㆍ《주역》ㆍ정자(程子)의 〈사잠(四箴)〉ㆍ장재(張載)의 〈서명(西銘)〉 등을
진강(進講)하였으며,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하여 바쳤다. 사후에 도산서원을 사액 받았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주16] 문정공(文貞公) 조 선생(曺先生) : 조식(曺植, 1501~1572)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
仲), 호는 남명(南冥)이다. 25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고 깨달음을 얻어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고향에 돌아가
산림처사로 자처하면서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썼다.
이론보다는 실천궁행을 강조하면서 당시의 사회 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였다. 이를 계승한 문인들 역시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이러한 사상은 경상우도의 특징적 학풍을 이루어 이황(李滉)의 경상좌도 학맥과 더불어
영남유학의 쌍봉을 이루었다. 덕산(德山)ㆍ회현(晦峴)ㆍ신산(新山) 3개의 서원이 사액되었으며, 대사간과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남명집》과 〈학기유편(學記類編)〉이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주17] 상산(象山) 육씨(陸氏) : 육구연(陸九淵, 1139~1193)을 가리킨다. 중국 남송(南宋)의 철학자로, 자는 자정(子靜)이며 상산(象
山)은 그의 호이다. 외물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를 강조한 주희(朱熹)와 달리 내면의 성찰과 자습(自習)을 중시하였다.
사람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선하여 그 선이 물욕으로 더럽혀지고 소멸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노력에 의해 다시 생성, 발전시킬 수 있
고, 그러한 과정에서 도(道)의 가장 높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의 사상을 심학(心學)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육구연의 사상은 3세기 이후 명나라의 성리학자 왕양명(王陽明)에 의해 완성되었고, 이들을 육왕학파(陸王學派)라고 불러 정주학
파(程朱學派)와 구별하였다. 저서로 《상산전집(象山全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주18] 가정(嘉靖) : 중국 명(明)나라 세종(世宗)의 연호로, 1522~1566년에 해당한다.
[주19] 남곤(南袞) : 1471~1527.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의령(宜寧)이며 자는 사화(士華), 호는 지정(止亭) 혹은 지족당(知足
堂)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494년(성종25)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ㆍ사간원 정언을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
書)를 하였다.
갑자사화 때 서변(西邊)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 때 풀려났는데, 박경(朴耕) 등이 반역을 꾀한다고 무고하여 그 공으로 가선대부
가 되었다. 이후 대간의 탄핵을 받고 황해도 관찰사로 좌천되었으나 문장 실력을 인정받아 이후 전라도 관찰사ㆍ홍문관 대제학ㆍ대
사헌ㆍ예조 판서ㆍ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중종14) 심정(沈貞) 등과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등 신진사림파를 숙청한 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사
후에 문경(文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나 사림파의 탄핵을 받아 1558년(명종13) 관작과 함께 삭탈당하였고, 선조 초에 다시 관
작을 추삭(追削)당하였다. 저서에 《지정집》, 〈유자광전〉 등이 있다.
[주20] 영정왕(榮靖王) : 조선의 제12대 왕 인종(仁宗, 1515~1545)을 가리킨다. 시호가 영정헌문의무장숙흠효 대왕(榮靖獻文懿武章
肅欽孝大王)이기 때문에 영정왕이라고 부른다.
[주21] 상서(庠序) : 학교를 가리킨다. 향교(鄕校)를 주(周)나라에서는 상(庠), 상(商)나라에서는 서(序)라고 부른 데서 나온 말이다.
[주22] 덕 …… 하는 : 원문의 ‘崇德象賢’은 《서경》 〈미자지명(微子之命)〉에 나오는 구절로, 숭덕(崇德)은 ‘덕이 있는 자를 숭상하여 제
사를 받든다.’라는 뜻이고 상현(象賢)은 ‘선현을 닮은 어진 후손이 있으면 명하여 제사를 모시게 한다.’라는 뜻이다.
해당 부분의 원문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은(殷)나라 왕의 원자(元子)야. 옛날을 상고하여 덕이 있는 선왕을 높이고 그 어진 덕을
닮은 후손에게 제사를 받들게 하여 선왕을 계승해서 예악과 문물을 닦아 왕가에 손님이 되게 하노니, 나라와 함께 아름다워 영원토
록 무궁하게 하라.〔殷王元子! 惟稽古, 崇德象賢, 統承先王, 修其禮物, 作賓于王家, 與國咸休, 永世無窮.〕”
[주23] 어사(御史)로 …… 살펴보았다 : 윤근수의 나이 28세인 1564년(명종19) 가을의 일이다.
[주24] 왕수인(王守仁) : 1472~1529. 중국 명(明)나라의 철학자로, 자는 백안(伯安)이며 호는 양명(陽明)이다. 1499년 진사에 합격한
후 공부 주사ㆍ형부 주사 등을 역임하였다. 육구연(陸九淵)이 처음 주장한 심성론(心性論)을 완성하여 ‘양지(良知)가 바로 천리
(天理)’이므로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 천리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니, 이는 실재하는 사물에서 이(理)를 찾아야 한다는 주자
의 이론에 대립하는 것이다.
또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제창하여 사람은 실제로 효도를 행하고 있을 때에만 비로소 효도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바른 앎이 있어야만 바른 행위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의 주장은 유교 사상과 어긋난다는 인식 때문에 한동안 사학(邪學)으로 간
주되었으나, 1584년 공자의 묘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왕문성전서(王文成全書)》가 있으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주25] 육광조(陸光祖) : 1521~1597. 중국 명(明)나라의 문신으로, 자는 여승(與繩)이며 불교에 뜻을 두어 오대거사(五台居士)라고 자
호하였다. 1547년 진사에 합격한 후 남경 예부 주사(南京礼部主事)ㆍ병부 우시랑ㆍ공부 상서ㆍ국자학 정(國子學正)ㆍ이부 상서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육장간공유고(陆庄简公遗稿)》가 남아있으며, 윤근수(尹根壽)가 중국에 갔을 때 그와 함께 주자와 육상
산(陸象山) 학설의 차이점을 논변한 글이 《월정집(月汀集)》 별집에 실려 있다.
[주26] 성인(聖人)의 학문 : 유학(儒學)을 가리킨다.
[주27] 맹자(孟子)가 …… 양지 :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맹자가 생각하는 양지(良知)란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
다. “사람이 배우지 않고도 능한 것이 양능(良能)이요, 생각하지 않고도 아는 것이 양지이다. 어린아이치고 자기 어버이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가 없으며, 장성하여서 자기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이가 없다.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이 인(仁)이요, 어른을 공경하는 것이 의(義)인데,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천하 어디에서나 통하는 똑같은 이
치이다.〔人之所不學而能者, 其良能也; 所不慮而知者, 其良知也. 孩提之童無不知愛其親也, 及其長也, 無不知敬其兄也. 親
親, 仁也; 敬長, 義也, 無他, 達之天下也.〕”
[주28] 허령(虛靈)한 …… 꾸민다 : 〈주자행장(朱子行狀)〉에 나오는 말이다.
[주29] 융경(隆慶) : 중국 명(明)나라 목종(穆宗)의 연호로, 1567~1572년에 해당한다.
[주30] 김개(金鎧) : 1504~1569.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자는 방보(邦寶), 호는 독송정(獨松亭)이다. 우의정 김
국광(金國光)의 증손이며, 김집(金集)의 족증조(族曾祖)이기도 하다. 1525년(중종20) 진사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40년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정자ㆍ정언ㆍ수찬ㆍ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54년 형조 참의가 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청홍도 관찰사ㆍ이조 참의ㆍ대사헌ㆍ한성부 판윤ㆍ형조
판서ㆍ호조 판서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569년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祖) 등을 현자로 추대할 때 조광조를 비방
한 사실이 드러나 기대승(奇大升) 등의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1552년 청백리에 녹선(錄選)된 바 있다.
[주31] 이전에 …… 하였으니 : 김장생(金長生)의 《사계전서(沙溪全書)》 권2 〈신용석과 이옥여에게 답한 편지〔答辛用錫李玉汝〕〉에 다
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선조 무진년(1568, 선조1)에 우리 집안의 어른인 김개(金鎧)가 대사헌이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체직되
었습니다.
그 후 정릉동에 사는 문관 이유근과 진사 신화국이 대사헌의 아들 김세휘를 찾아가자 그가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대사헌으로 있
을 때 영의정의 말에 따라 박순ㆍ박응남ㆍ기대승ㆍ선군자(先君子)ㆍ이후백ㆍ정유일ㆍ구봉령ㆍ이모(李某)-율곡(栗谷)ㆍ정철ㆍ윤
두수ㆍ윤근수ㆍ구사맹ㆍ박근원ㆍ홍성민ㆍ이해수ㆍ신응시ㆍ오건 등 17인을 논죄하려고 하였으나, 생각지 않게 체직되는 바람에
뜻대로 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영상은 이준경입니다.〔宣祖戊辰年, 余門丈金鎧爲大憲, 未久見遞. 後貞陵洞人文官李惟謹進士申華國往見大憲之子
世輝則爲言, 吾父爲大憲時, 以領相之言欲論朴淳朴應男奇大升先君子李後白鄭惟一具鳳齡李某【栗谷】鄭澈尹斗壽根壽具思
孟朴謹元洪聖民李海壽辛應時吳健等十七人矣, 不意見遞, 故未果云. 其時領相卽李浚慶也.〕” 선군자는 김계휘(金繼輝)를 가리
킨다.
선조 초에 조정에서 조광조(趙光祖) 등 기묘제현을 현자로 추대하려고 하자 김개가 “조광조는 일을 처리함에 잘못이 있어 자기에게
붙는 자는 천거하고 거역하는 자는 배척하였다.”라고 비방하였고, 이에 대간의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주32] 정철(鄭澈) : 1536~1593.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등이다. 을사사화 때 부
친과 함께 유배되었다가 1551년(명종6)에 풀려났다. 이후 전라도 담양에 내려가 살면서 김인후ㆍ송순ㆍ기대승에게 수학하고, 이
이ㆍ성혼ㆍ송익필 등과 교유하였다.
1562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수찬ㆍ좌랑ㆍ호남 어사 등을 역임하다가 동ㆍ서 분쟁에 휘말려 고향인 창평으로 내려갔다. 1578년 조정에 다시 나왔으나 진도 군수 이수(李銖)의 행뢰사건(行賂事件)으로 탄핵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년에 재기용되어 강원도 관찰사ㆍ대사성ㆍ도승지ㆍ예조 참판ㆍ함경도 관찰사ㆍ대사헌ㆍ우의정ㆍ좌의정 등을 역임하였으나
1591년 건저(建儲)를 하려다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파직되었다. 그 후 명천ㆍ강계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풀려나 선조를
호종하였으며, 이후 강화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저서에 《송강집》과 《송강가사》가 전하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주33] 이 문청공(李文淸公) : 이후백(李後白, 1520~1578)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자는 계진(季
眞), 호는 청련(靑蓮)이다. 1555년(명종10) 문과에 급제하고 1558년 사가독서 한 후 이조 정랑ㆍ대사간ㆍ도승지ㆍ홍문관 부제학
ㆍ이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573년 변무사(辨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인성왕후(仁聖王后)가 죽자 삼년상을 주장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다. 이후 형조 판
서ㆍ평안도 관찰사ㆍ이조 판서ㆍ양관(兩館) 제학ㆍ호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청백리에 녹선 되었고,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
로 1590년 광국 공신(光國功臣) 2등으로 연원군(延原君)에 추봉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아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한다.
저서로 《청련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주34] 김성일(金誠一) : 1538~1593. 조선 중기의 문신ㆍ학자로,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이다. 이황(李
滉)의 문인으로, 1568년(선조1) 문과에 급제하고 사가독서를 하였다. 1577년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宗系
辨誣)를 하였으며, 이후 함경도 순무 어사ㆍ사간ㆍ나주 목사 등을 지냈다.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정사 황윤길(黃允吉)과 함께 일본의 실정을 살핀 후 침략의 우려가 없다고 보고하였으나 임진
왜란이 일어났다. 처벌이 논의되었으나 같은 동인(東人)인 유성룡의 변호로 경상우도 초유사에 임명되었고, 그 후 경상우도 관찰사
겸 순찰사를 역임하다 병으로 죽었다.
학문적으로 이황의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하여 영남학파의 중추 역할을 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동인에 속하여 서인(西人)의 영수
정철(鄭澈)을 규탄하였다. 저서에 《학봉집》ㆍ《해사록(海槎錄)》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주35] 선미(船米) : ‘선저미(船儲米)’라고도 하며, 전선(戰船)과 병선(兵船)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쓰기 위해 마련하는 쌀이다.
정약용(丁若鏞)의 《경세유표(經世遺表)》 권12 〈지관수제(地官修制) 창름지저(倉廩之儲) 1〉에 “선저미라는 것은, 임진왜란 후
에 전선과 병선을 많이 두었는데, 선저미를 마련해서 배를 고치는 밑천으로 삼았다.
[船儲米者, 壬辰倭寇之後多置戰船兵船, 遂設此米以爲改船之資.]”라고 하고, 그 주에 “또 호남 열세 고을에 선미가 있는데, 선
저미와 같은 것이다. 전선을 개수하는 비용과 선지기의 삭료(朔料)를 이것으로 회계하였다.[又湖南十三邑有船米, 與船儲米同.
戰船改槊價及船直朔料以此上下.]”라고 하였다.
[주36] 김계휘(金繼輝) : 1526~1582.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자는 중회(重晦), 호는 황강(黃崗)이다.
김장생(金長生)의 아버지이다. 1549년(명종4) 문과에 급제하고 사가독서를 하였다.
1557년 김여부(金汝孚)와 김홍도(金弘度)의 반목으로 옥사가 일어났을 때 김홍도의 당으로 몰려 파직되었다가 1562년 이조 정
랑으로 복직되었으나 부친상중이어서 나가지 않았다. 삼년상을 마친 후 직제학ㆍ동부승지ㆍ대사헌ㆍ평안도 관찰사ㆍ예조 참판ㆍ
경연관 등을 두루 역임하고, 1581년에는 종계변무의 주청사로 중국에 다녀왔다.
1575년(선조8) 동인ㆍ서인이 나누어질 때 서인에 속했으나 당파에 깊이 간여하지 않고 당쟁 완화를 위해 노력하였다는 평가를 받
았다. 경서(經書)와 사서(史書) 등을 폭넓게 읽었으며 문장에도 뛰어났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나주 월정서원에 제향되었다.
[주37] 이산해(李山海) : 1539~1609.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 등이다.
이색(李穡)의 7대손이며, 선조조 문장팔가(文章八家)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1561년(명종16) 문과에 급제한 후 대사성ㆍ도승지ㆍ대사간ㆍ대사헌ㆍ이조 판서ㆍ대제학ㆍ우의정ㆍ죄의정ㆍ영의정 등 요직을 두
루 역임하였으며,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 공신(光國功臣)에 책록되고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임진왜란 때 나라를 그르쳤다는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고 평해(平海)에 중도부처 되었다가 1595년 풀려난 후 대제학ㆍ영의정 등
을 지내고 선조가 죽자 원상(院相)으로 국정을 맡았다. 동인에 속하였으며, 동인이 남ㆍ북으로 갈라진 후 북인의 영수로 정권을 장
악하였다.
1578년에 서인인 윤두수(尹斗壽)ㆍ윤근수(尹根壽)ㆍ윤현(尹晛) 등 삼윤(三尹)을 탄핵해 파직시켰고, 정철(鄭澈)이 건저(建儲)
문제를 일으키자 탄핵하여 강계로 유배 보내고 황혁(黃赫) 등 서인의 영수급을 파직 또는 귀양 보냈다. 저서로 《아계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주38] 이전에 …… 대하였다 : 1578년(선조11)에 일어난 이수 진도 미옥사건(李銖珍島米獄事件)을 말하는 것이다. 사헌부ㆍ사간원 양
사(兩司)가 도승지 윤두수(尹斗壽)ㆍ경기 감사 윤근수(尹根壽)ㆍ이조 좌랑 윤현(尹晛) 등 세 윤씨를 탄핵했다 하여 ‘삼윤(三尹)의
논핵’이라고도 한다.
윤현과 김성일(金誠一)은 붕당이 서로 다른 관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서인인 윤현의 작은아버지 윤두수ㆍ윤근수 형제가 동인
의 세력을 탄압하자 김성일이 진도 군수 이수(李銖)가 삼윤에게 쌀을 뇌물로 바쳤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경연석상에서 폭로하였다.
이에 대간이 이수를 탄핵하고, 이어 부제학 허엽(許曄)이 양사가 뇌물을 받은 삼윤을 탄핵하지 않는 것을 탄핵하였으며, 대간이 다
시 삼윤의 죄를 주청하였다. 이에 직제학 김계휘(金繼輝)와 척신 심충겸(沈忠謙) 등 서인이 삼윤을 옹호하였고, 대사헌 박대립(朴
大立)과 대사간 이산해(李山海) 등 동인을 중심으로 한 양사가 삼윤의 죄를 공격하며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를 계기로 동ㆍ서 붕당의 싸움이 격화하였는데, 이런 와중에 이수에게 원망이 있었던 진도의 저리(邸吏) 한 사람이 이수가 삼윤에
게 쌀을 바친 사실을 고함으로써 삼윤은 결국 파직되었다.
[주39] 공조참판 …… 변무(辨誣)하였다 : 윤근수가 37세이던 1573년에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明)나라에 가서 종계변무(宗系辨誣)
를 한 사실을 말한다.
[주40] 김효원(金孝元) : 1532~1590.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백(仁伯), 호는 성암(省庵)이다. 조식(曺植)ㆍ
이황(李滉) 등에게서 배웠다. 1565년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병조 좌랑, 정언 등을 지내다가 사가독서 하였다.
심의겸(沈義謙)과 함께 동ㆍ서 분당의 시발점이 된 인물로, 이를 우려한 이이(李珥)의 상소로 심의겸과 더불어 외직으로 밀려나 경
흥ㆍ부령ㆍ삼척의 부사를 역임하고 안악 군수를 자청하여 나갔다. 당쟁이 격화하자 책임을 느끼고 시사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
았다고 한다. 후에 영흥 부사로 재직하던 중 죽어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삼척 경행서원(景行書院)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 《성암
집》이 있다.
[주41] 심의겸(沈義謙) : 1535~1587.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자는 방숙(方叔), 호는 손암(巽菴) 등이다.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동생으로, 자신이 척신(戚臣)이었으나 척신의 전횡을 비판하고 사림을 옹호하였다.
1562년(명종17) 문과에 급제한 후 병조 좌랑ㆍ정언ㆍ제학ㆍ동부승지ㆍ대사간ㆍ이조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김효원(金孝元)과 함
께 동ㆍ서 분당의 시발점이 된 인물로, 이를 우려한 이이(李珥)의 상소로 김효원과 더불어 외직으로 밀려나 개성 유수ㆍ전라 감사
등을 지냈다.
1580년 다시 등용되었다가 정인홍(鄭仁弘)의 탄핵을 받고 동인의 득세로 파직당하였으나 이후 청양군(靑陽君)에 봉해지고 나주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 되었다.
[주42] 김효원(金孝元)이 …… 되었는데 : 조선 명종(明宗) 때 심의겸(沈義謙)이 공무로 영의정 윤원형(尹元衡)의 집에 갔다가 거기
서 김효원(金孝元)이 유숙하는 것을 보고 문명(文名)이 있는 자가 권문(權門)에 아첨한다고 멸시하였다.
그런데 1572년에 오건(吳健)이 김효원을 이조 전랑(吏曹銓郞)으로 추천하자 마침 이조 참의로 있던 심의겸이 그가 권신(權臣) 윤
원형의 문객이었음을 들어 거부하였다. 그러나 조정기(趙廷機)의 추천으로 김효원은 결국 이조 전랑이 되었다.
3년 뒤인 1575년에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이조 전랑으로 추천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그가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동
생임을 들어 전랑은 척신(戚臣)의 사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였다. 이에 심의겸은 “외척이 원흉의 문객에게 지겠느냐.”라
고 하며 더욱 심하게 대립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효원을 지지하는 신진사림파와 심의겸을 지지하는 기성사림파가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는데, 김효
원의 집은 서울의 동쪽인 건천동(乾川洞)에 있고, 심의겸의 집은 서쪽인 정릉방(貞陵坊)에 있었기 때문이다.
[주43] 송언신(宋言愼) : 1542~1612.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자는 과우(寡尤), 호는 호봉(壺峰)이다. 이황(李
滉)의 문인으로 유희춘(柳希春)과 노수신(盧守愼)의 문하에 출입하였으며, 10여 세 때 당시의 권신 승려 보우(普雨)를 죽이고 불
교를 배척해야 한다는 건의문을 작성하였다.
1577년(선조10) 문과에 급제한 후 정언ㆍ예조 좌랑ㆍ호남 순무 어사ㆍ사헌부 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 때 정여립
(鄭汝立)과 가까운 사이였다는 혐의로 파면되었다가 복권되어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1592년에 다시 삭직되었다.
1596년 동면 순검사(東面巡檢使)로 다시 등용되었고, 이후 대사간ㆍ병조 판서ㆍ이조 판서 등을 지냈다. 젊어서 언관으로 서인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으며, 당쟁의 선봉에 섰다가 광해군 초년에 축출되었다. 저서로 《성학지남(聖學指南)》이 있으며, 시호는 영양
(榮襄)이다.
[주44] 송언신(宋言愼)이 …… 되어 : 송언신은 45세이던 1586년(선조19)에 호남 지역의 순무 어사(巡撫御史)로 파견되었다.
[주45] 기효증(奇孝曾) : 1550~1616. 조선 중기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행주(幸州)이며 자는 백로(伯魯), 호는 함재(涵齋)이다. 기대승
(奇大升)의 아들로,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고 현감에 이르렀으나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 연구에 힘썼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김덕령(金德齡)이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도유사(都有司)로 격문을 짓고 군사를 모집하여 전라도 각지에
서 왜군을 물리쳤다. 그 후 휘하의 의병을 이끌고 용만(龍灣)에 있는 왕의 행재소에 이르러 시위하였고, 이에 왕의 총애를 받아 형조
정랑에 발탁되고 군기시 첨정에 올랐다.
[주46] 선왕(先王)께서 돌아가셨을 때 : 원문에서는 ‘선왕의 궁거가 늦게 납시었을 때〔先王宮車晏駕〕’라고 표현하였다. ‘궁거(宮車)’는
왕이나 후비(后妃)가 타는 수레의 일종으로 임금의 죽음을 수레가 늦게 거둥한다고 표현하였으니, 《사기(史記)》 〈범저전(范雎
傳)〉에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세 가지 있고,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세 가지 있습니다.
왕께서 언제 세상을 떠나실지, 이것이 예측할 수 없는 일의 첫 번째입니다.[事有不可知者三, 有不柰何者亦三. 宮車一日晏駕, 是
事之不可知者一也.]”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주47] 흥녕군(興寧君) : 조선의 제14대 왕인 선조(宣祖)의 사촌이다. 중종(中宗)의 후궁인 창빈 안씨(昌嬪安氏)는 영양군(永陽君)과 덕
흥대원군(德興大院君), 정신옹주(靜愼翁主) 등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인 영양군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차남인 덕흥대원군은 하
원군(河源君)ㆍ하릉군(河陵君)ㆍ하성군(河城君) 세 아들을 두었다.
이에 영양군이 족후손 흥녕군(興寧君)을 후사로 삼았는데,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평소 명종의 사랑을 받던 하성군이 왕위
에 올랐으니 이가 바로 선조이다. 이전에 영양군이 흥녕군을 후사로 삼으면서 창빈 안씨의 제사를 모셔왔으나, 선조는 심수경(沈守
慶)의 의견에 따라 안빈의 사당까지 덕흥대원군의 묘정(廟庭)으로 옮기고 자신의 큰형인 하원군에게 제사를 모시게 하여 이이(李
珥) 등 사림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주48] 강계(江界) : 평안도 북동부에 위치한 땅의 이름이다.
[주49] 위리안치(圍籬安置) : 안치는 전근대의 유형(流刑) 가운데 하나로, 귀양 간 곳에서 다시 거주의 제한을 받는 것을 말한다. 그중에서
도 위리안치는 죄인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어 가두는 형벌이니, 왕족이나 고위 관료에게 적용
된 무거운 형벌이었다.
[주50] 정철(鄭澈) …… 삭탈당하였다가 : 1591년에 정철은 당시 동인(東人)의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함께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건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정철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였으며, 이산해는 아들 이경전(李
慶全)을 시켜 인빈(仁嬪)의 오빠인 김공량(金公諒)에게 정철이 인빈과 신성군(信誠君)을 해치려 한다는 말을 전하고 정철을 탄핵
하게 하였다.
이에 신성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던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논척을 받
고 파직되어 명천(明川)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진주(晋州)로 옮기라는 명을 받았으며, 명을 받은 지 사흘 만에 또다시 강계(江界)로
이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당시 우찬성이었던 윤근수는 세자 책봉 문제를 정철에게 당부했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고 형 윤두수와 함께 관직을 삭탈당하였으며,
이 일과 관련해 백유성(白惟成)ㆍ유공진(柳拱辰)ㆍ이춘영(李春英)ㆍ황혁(黃赫) 등 서인의 영수급 인사들이 대거 파직당하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다.
[주51] 평수길(平秀吉)이 반란을 일으키자 : 임진왜란을 말하는 것이다. 평수길은 풍신수길(豐臣秀吉)로서, 어렸을 때 평신장(平信長)이
양아들로 삼아 성을 평씨(平氏)로 고쳐 길렀다. 평신장의 뒤를 이어 관백이 된 후에 풍신(豐臣)이라는 성을 썼다.
[주52] 거가(車駕) : 임금이 타는 수레로, 임금의 행차를 이르기도 한다.
[주53] 송응창(宋應昌) : 1536~1606. 중국 명(明)나라의 장수로, 자는 사문(思文) 혹은 시상(時祥)이며 호는 동강(桐崗)이다.
1565년(세종44) 진사에 합격한 후 강주 지부(絳州知府), 부도 어사(副都御史), 산서 부사(山西副使)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신종20)에 풍신수길(豐臣秀吉)이 조선을 침략하자 상소를 올려 “우리가 조선을 구하는 것은 다만 속국을 위해서가 아니
라, 조선이 견고하면 동쪽으로 요동 지방을 보호하여 경사(京師)가 태산보다 공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왜구 방비책으로
선장(選將)ㆍ연병(練兵)ㆍ적속(積粟) 세 가지를 말하였다.
8월에 병부 우시랑으로 경략 비왜 군무(經略備倭軍務)에 임명되어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조선으로 와서 평양을 탈환하고 개성ㆍ
강원 등 4도(道)를 수복하였으며, 그 공으로 우도 어사(右都御史)가 되었다. 저서로 《경략복국요편(經略復國要編)》이 있다.
[주54] 경략(經略) : 총지휘관이라는 뜻으로, 송응창(宋應昌)은 1592년(선조25) 8월에 경략 비왜 군무(經略備倭軍務)로 조선에 부임하
였다.
[주55] 위학증(魏學曾) : 1525~1596. 중국 명(明)나라의 장수로, 자는 유관(惟貫)이다. 1553년(세종32)진사에 합격한 후 광록시 소경
(光祿寺少卿)을 거쳐 우첨도 어사(右僉都御史)로 요동(遼東)을 순무하였다. 이후 병부 우시랑ㆍ이부 좌시랑ㆍ호부 상서를 지내
고 1591년(신종19) 병부 상서에 임명되어 삼변 군무(三边军务)를 총독한 공으로 태자소보(太子少保)에 가자되었다.
다음 해에 발배(哱拜)와 유동양(劉東暘)이 영하(寧夏)의 순무 당형(黨馨)을 죽이고 영하를 점령하자 평정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그 죄로 체포되고 섭몽웅(葉夢熊)으로 대체되었으나 후에 영하를 평정한 섭몽웅이 공을 양보하여 원래의 직책으로 돌아갔다. 저서
에 《위학증문집(魏學曾文集)》이 있다.
[주56] 석성(石星) : 1538~1599. 중국 명(明)나라의 신하로, 자(字)는 공신(拱宸)이며 호(號)는 동천(東泉)이다. 1559년(세종38) 진사
에 합격하여 이과 급사중(吏科給事中)에 발탁되었으나 내신(內臣)들을 비난하다가 매를 맞고 쫓겨나 평민이 되었다.
신종(神宗) 때 재기용되어 호부와 공부를 거쳐 병부 상서에 올랐고, 임진왜란 때 일본이 조선을 공격하자 조선에 파병할 것을 적극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가 울산ㆍ남원 전투에서 잇따라 패배하자 사임하였으며, 전력 손실을 이유로 탄핵당하고
옥사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석성을 변호하였으며,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명나라 군대가 처음 참전하였던 평양에 무
열사(武烈祠)를 세워 애도하였다. 또 그 후에 석성의 아들 석담이 조선에 들어와 해주에 정착하자 수양군에 봉하고 땅을 하사하였으
니, 이가 해주 석씨의 시조이다.
[주57] 유성룡(柳成龍) : 1542~1607.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다. 이황(李
滉)의 문인이며 김성일(金誠一)과 동문수학하였다. 1566년(명종21) 문과에 급제한 후 대사간ㆍ도승지ㆍ대사헌ㆍ양관 대제학ㆍ
병조 판서ㆍ우의정ㆍ이조 판서ㆍ좌의정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일본의 침입에 대비하여 권율(權慄)과 이순신(李舜臣)을 각각 의주 목사와 전라 좌수사에 천거하였으며, 1592년(선조25) 임진왜
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 겸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하고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하였다. 다음 해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
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으나 다시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었고, 이듬해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한 후 삼
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하였다.
이어 영의정으로 사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는 한편, 군비 확충에 노력하고 백성을 진휼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
(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하였다. 이때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의 탄핵으로 관작을 삭탈당하였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1604년 호성 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저서로 《서애집 西厓集》ㆍ《징비록 懲毖錄》 외 다수가 있
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주58] 25년 : 중국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만력(萬曆) 25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하 마찬가지이다.
[주59] 25년에 …… 때 : 정유재란(丁酉再亂)을 의미한다.
[주60] 수안(遂安) : 황해도 동북부에 위치한 고을의 이름이다.
[주61] 왕씨(王氏) : 왕수인(王守仁, 1472~1529)으로, 자는 백안(伯安), 호는 양명(陽明)이다. 중국 명(明)나라의 철학자로, 1499년 진
사에 합격한 후 공부 주사ㆍ형부 주사 등을 역임하였다. 육구연(陸九淵)이 처음 주장한 심성론(心性論)을 완성하여 ‘양지(良知)가
바로 천리(天理)’이므로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 천리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니, 이는 실재하는 사물에서 이(理)를 찾아야 한
다는 주자의 이론에 대립하는 것이다.
또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제창하여 사람은 실제로 효도를 행하고 있을 때에만 비로소 효도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바른 앎이 있어야만 바른 행위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의 주장은 유교 사상과 어긋난다는 인식 때문에 한동안 사학(邪學)으로 간
주되었으나, 1584년 공자의 묘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왕문성전서(王文成全書)》가 있으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주62] 가정(嘉靖) : 중국 명(明)나라의 제11대 황제인 세종(世宗)의 연호로, 1522~1566년에 해당한다.
[주63] 계악(桂萼) : ?~1531. 중국 명(明)나라의 문신으로, 자는 자실(子實)이며 호는 고산(古山)이다. 1511년(무종6) 진사에 합격한 후
여러 현의 현령 및 남경 형부 주사(南京刑部主事) 등을 지냈다. 1523년(세종2)에 대례의(大禮議)가 일어나자 세종의 뜻에 영합하
여 세종의 생부를 흥헌제(興獻帝)로 추숭하여 황고(皇考)라 칭하고 효종(孝宗)을 황백고(皇伯考)라 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일로 세종의 눈에 들어 중용된 반면, 이에 반대했던 신하들은 파직되거나 투옥ㆍ장살되었다. 이후 이부 우시랑ㆍ한림학사ㆍ예부
상서 겸 한림학사ㆍ무영전 대학사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소보 겸 태자태부(少保兼太子太傅)에 가자되었다. 1529년 내각에 들
어가 기무(機務)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사상 유례없을 정도의 고속 승진이었으나 내각의 탄핵이 두려워 물러날 것을 자청하였다.
저서에 《역대지리지장(历代地理指掌)》ㆍ《명여지지장도(明舆地指掌图)》 등이 있다. 청(淸)나라 목종(穆宗) 때 태부에 추사(追
賜)되었으며,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주64] 가정(嘉靖) …… 알았습니다 : 왕양명은 1527년에 광서(廣西)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을 받고 6개월 만에 반란을 평정하였
다. 그러나 지병인 천식이 도져 중태에 빠졌고, 1529년 개선하여 돌아오던 도중 길에서 죽었다. 이전에 왕양명의 병이 도져 일어날
수 없게 되자 조정에 면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권신 계악(桂萼)이 주머니에 넣고 황제에게 보이지 않았다.
병이 깊어진 왕양명이 기다리다 지쳐 고향으로 떠나자 계악은 왕양명이 근무지를 무단이탈하였으며, 주희(朱熹)를 비난하고 거짓
학문을 유포하였다는 죄목을 엮어서 상소하였다. 이에 그의 작위와 세습봉록이 박탈되어 왕양명의 두 아들은 전혀 혜택을 받지 못하
였으며, 이 조치에 항의한 사람들은 파면되거나 유배당하였고 그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것 또한 철저히 금지되었다.
[주65] 양주(楊朱) : 기원전 440~기원전 360(?). 중국 전국 시대 초기 위(魏)나라의 철학자로, 자는 자거(子居)이다. 생애는 《장자(莊子)
》와 《열자(列子)》에 언행 정도가 남아 있으며, 저술 역시 전하지 않고 《맹자》나 《장자》, 《순자(荀子)》 등에 그의 주장이 산견된
다.
맹자가 “양주와 묵적(墨翟)의 말이 천하에 가득하다.”라고 했던 것으로 보아 대단히 융성했던 것으로 보이며, 맹자는 “털 하나를 뽑
아 온 천하가 이롭게 된다 하더라도 하지 않는다.〔拔一毛而利天下, 不爲.〕”라고 하며 양주의 위아설(爲我說)을 비난하였다. 이후
양주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철저한 개인주의자이며 쾌락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주66] 묵적(墨翟) : 기원전 470(?)~기원전 391(?). 중국 전국 시대 초기 노(魯)나라의 철학자이다. 원래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던 유학자
였으나 유교가 의례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종교적 가르침을 소홀히 한다고 생각하여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이에 유교의 번례후장(繁禮厚葬)을 반대하고, 단계적 사랑인 인(仁) 대신 보편적 사랑인 겸애(兼愛)를 강조하였으며 전쟁을 반대
하는 평화주의를 견지하였다. 묵적의 사상이 담겨 있는 《묵자(墨子)》는 현재 53편이 남아있는데, 여러 가지 내용을 다루고 있으나
중심이 되는 것은 상현(尙賢). 상동(尙同). 겸애(兼愛). 비공(非攻). 절용(節用). 절장(節葬). 천지(天志). 명귀(明鬼). 비악(非樂)
.비명(非命) 등의 10가지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주67] 성왕(聖王)이 …… 없다 :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나오는 말이다.
[주68] 조 문효공(趙文孝公) : 조익(趙翼, 1579~1655)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비경(飛卿), 호는
포저(浦渚)ㆍ존재(存齋)이다. 윤근수(尹根壽)의 외손이자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음보로 정포 만호가 되어 군량미 23만 석을 운반
하는 공을 세웠다.
1602년(선조35) 문과에 급제한 후 삼사의 관직을 두루 지냈다. 1611년(광해군3)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
迪). 정여창(鄭汝昌) 등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주장하다 고산도 찰방으로 좌천되었고,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유폐되자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다시 나와 대사간. 대사성. 대사헌. 예조 판서. 한성부 판윤. 우의정. 좌의정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면
서 이원익(李元翼), 김육(金堉)과 함께 대동법 시행에 기여하였다. 성리학의 대가로 예학(禮學)에 밝았으며, 병법 및 복술에도 뛰어
났다. 《포저집》 외 다수의 저술이 전하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주69] 기로소(耆老所) : 조선 시대에 퇴임한 관리들을 예우할 목적으로 설치한 기구의 이름이다.
[주70] 장단군(長湍郡) :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일대와 개성 장풍군 일대에 있던 옛 고을의 이름이다.
[주71] 자애롭고 신실(信實)하여 : 원문의 ‘子諒’은 《악기(樂記)》에 나오는 말로 “예와 악은 잠시도 몸에서 떠나서는 안 된다. 음악을 이
루어서 마음을 다스리면 화평하고 곧고 자애롭고 신실한 마음이 유연히 생긴다.〔禮樂不可斯須去身. 致樂而治心, 則易直子諒之
心油然生矣.〕”라고 하였다.
[주72] 허국(許國) : 1527~1596. 중국 명(明)나라의 문신으로, 자는 유정(維楨)이며 호는 영양(穎陽)이다. 1565년 진사에 합격하여 한림원 검토에 제수되었다. 신종(神宗) 즉위 후에 우찬선ㆍ예부 시랑ㆍ이부 시랑 등을 역임하였으며, 1583년 예부상서 겸 동각대학사로 기무(機務)에 참여하였다. 다음해 운남성(雲南省)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소보(少保)로 승진하고 무영전 대학사(武英殿大学士)에 제수되었다. 사후에 태보(太保)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한림원 검토로 있던 1567년(명종22)에 사신으로 조선에 왔다.
[주73] 황복(荒服) : 고대 중국의 통치구역인 오복(五服) 가운데 하나로, 황제의 통치가 직접 닿지 않는 황폐한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夏)나라의 우(禹) 임금이 9주(州)를 정할 때 왕기(王畿)를 중심으로 전 지역을 전복(甸服). 후복(候服). 수복(綏服). 요복(要
服). 황복(荒服)의 다섯 구역으로 나누었으니, 한 구간이 5백 리씩이었다.
이 중 요복의 ‘요(要)’는 문교(文敎)로 요속(要束)한다는 뜻이며 ‘황(荒)’은 정교(正敎)가 거칠고 소홀하다는 뜻으로, 요복 이내의
땅을 ‘내복(內服)’ 또는 ‘내지(內地)’라고 하고 천자가 직접 통치하는 지역을 가리켰다.
[주74] 서경(西京) 시대 : 서경은 중국 전한(前漢)의 도읍인 장안(長安)을 가리키는 말로, 후세에 전한 시대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
다. 이 시기에 훈고학ㆍ경학(經學)ㆍ시문(詩文) 등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주75] 조안국(趙安國) : 1501~1573.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풍양(豊壤)이며 자는 국경(國卿)이다. 1524년(중종19) 무과에 급
제하였으며 이후 동부승지ㆍ종성 부사ㆍ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냈다. 권신 김안로(金安老)에게 아부하였다는 탄핵을 받아 장
단 부사로 좌천되었다가 관내의 도적을 일소한 공으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전임되었다.
을묘왜변 때 전라병사 겸 방어사로 나주 일대의 왜적을 소탕하였으나 2차 전투에서 적에게 패하여 관직을 박탈당한 채 녹도(鹿島)
에 장류되었다가 1557년 다시 장단부사에 서용된 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경기도 수군절도사. 포도대장. 오위장. 부총관 등을 역
임하였다. 무예가 뛰어나 28세에 통정대부에 올랐으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주76] 윤문성(尹聞性) : 1566~?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견초(見初)이다. 형조 참판. 의정부 우참찬. 호조 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친 자헌대부(資憲大夫) 윤현(尹鉉)의 아들로, 선조 21년(1588) 진사에 합격하였다.
[주77] 여지길(呂祉吉) : 1595~? 조선 후기의 무인으로,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여순원(呂順元)의 서자이며, 여유길(呂裕吉). 여우길
(呂祐吉) 형제의 서제(庶弟)이다. 자세한 내용은 미상이다.
[주78] 문정공(文貞公) : 황정욱(黃廷彧, 1532~1607)의 시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장수(長水)이며 자는 경문(景文), 호
는 지천(芝川)이다. 1558년(명종13)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 검열ㆍ시강원 설서ㆍ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584년(선조17) 주청사로 명나라에 가서 오랫동안 문젯거리였던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을 해결하고 돌아왔다. 1589년 정여립
(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으나 곧 복직하였으며, 이듬해 종계변무의 공을 인정받아 광국 공신(光國功臣) 1등으로 장
계부원군(長溪府院君)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 항복 권유문을 썼다는 이유로 동인의 탄핵을 받아 길주(吉州)에 유배되었으며, 사후에야 신원(伸寃)되었
다. 문장ㆍ시ㆍ글씨에 능하였으며, 저서로 《지천집(芝川集)》이 있다.
[주79] 호소격(號召檄) : 문체의 이름으로, 호소사(號召使)로 가서 격문을 짓는 것을 말한다. 황정욱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소사가 되
어 왕자 순화군(順和君)을 배종해 관동으로 피신하였고, 여기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지어 돌렸다.
[주80] 폐고(廢錮) : 평생 관리가 될 수 없게 벼슬을 막는 것이다.
[주81] 나에게 대도(大道)를 밝혀주셨네 : 《시경(詩經)》 〈녹명(鹿鳴)〉에 나오는 말로, 원문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답게 부르며 사슴
들이 울면서 들에 있는 사철 쑥을 뜯고 있네. 나에게 아름다운 손님이 있어 비파를 타며 젓대를 부노라. 젓대를 불며 생황을 연주하
며 광주리로 받들어 폐백을 올리니 나를 좋아하는 분이여, 나에게 대도를 보여주소서.〔呦呦鹿鳴, 食野之苹. 我有嘉賓, 鼓瑟吹笙.
吹笙鼓簧, 承筐是將. 人之好我, 示我周行.〕”
[주82] 자정(子靜) : 육구연(陸九淵, 1139~1193)을 가리킨다. 중국 남송(南宋)의 철학자로, 자는 자정(子靜), 호는 상산(象山)이다.
외물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를 강조한 주희(朱熹)와 달리 내면의 성찰과 자습(自習)을 중시하였다. 사람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선하
여 그 선이 물욕으로 더럽혀지고 소멸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노력에 의해 다시 생성, 발전시킬 수 있고, 그러한 과정에서 도(道)의 가
장 높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의 사상을 심학(心學)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육구연의 사상은 3세기 이후 명나라의 성리학자 왕양명(王陽明)에 의해 완
성되었고, 이들을 육왕학파(陸王學派)라고 불러 정주학파(程朱學派)와 구별하였다. 저서로 《상산전집(象山全集)》이 있으며, 시
호는 문안(文安)이다.
[주83] 왕씨의 아들 : 왕수인(王守仁, 1472~1529)을 말한다. 중국 명(明)나라의 철학자로, 자는 백안(伯安), 호는 양명(陽明)이다.
1499년 진사에 합격한 후 공부 주사ㆍ형부 주사 등을 역임하였다. 육구연(陸九淵)이 처음 주장한 심성론(心性論)을 완성하여 ‘양
지(良知)가 바로 천리(天理)’이므로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 천리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니, 이는 실재하는 사물에서 이(理)
를 찾아야 한다는 주자의 이론에 대립하는 것이다.
또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제창하여 사람은 실제로 효도를 행하고 있을 때에만 비로소 효도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바른 앎이 있어야만 바른 행위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의 주장은 유교 사상과 어긋난다는 인식 때문에 한동안 사학(邪學)으로 간
주되었으나, 1584년 공자의 묘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왕문성전서(王文成全書)》가 있으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주84] 마음을 따르고 : 원문의 ‘率心’은 마음을 따른다는 의미로, 유교의 ‘솔성(率性)’에 상대되는 말이다. 솔성은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
(本性)을 따른다는 의미로, 《중용(中庸)》 제1장에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한다.〔率性之謂道.〕”라고 하였다.
[주85] 무원(㜈源) : 주희(朱熹)를 가리킨다. 무원은 중국 강서성(江西省)에 있는 현(縣)의 이름으로, 주희가 태어나고 강학하던 곳이다.
여조겸(呂祖謙)과 함께 《근사록(近思錄)》을 편찬한 곳으로도 유명하며, 따라서 후인들이 여기에 사당을 세워 주희를 향사(享祀)
하였다.
[주86] 전주(傳注) : 경서(經書)에 주석을 단 것을 말한다.
[주87] 필찰의 …… 얻었네 : 필찰은 서체(書體)라는 뜻으로, 글씨를 잘 썼다는 말이다.
[주88] 육군(陸君) : 육광조(陸光祖, 1521~1597)를 가리킨다. 중국 명(明)나라의 문신으로, 자는 여승(與繩)이며 불교에 뜻을 두어 오대
거사(五台居士)라고 자호하였다. 1547년 진사에 합격한 후 남경 예부 주사(南京礼部主事). 병부 우시랑. 공부 상서. 국자학정
(國子學正). 이부 상서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육장간공유고(陆庄简公遗稿)》가 남아있으며, 윤근수(尹根壽)가 중국에 갔을 때 그와 함께 주자와 육상산(陸象山) 학설
의 차이점을 논변한 글이 《월정집(月汀集)》 별집에 실려 있다.
[주89] 문성(文成) : 왕수인(王守仁, 1472~1529)을 말한다. 중국 명(明)나라의 철학자로, 자는 백안(伯安), 호는 양명(陽明)이다.
1499년 진사에 합격한 후 공부 주사ㆍ형부 주사 등을 역임하였다. 육구연(陸九淵)이 처음 주장한 심성론(心性論)을 완성하여 ‘양
지(良知)가 바로 천리(天理)’이므로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 천리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니, 이는 실재하는 사물에서 이(理)
를 찾아야 한다는 주자의 이론에 대립하는 것이다.
또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제창하여 사람은 실제로 효도를 행하고 있을 때에만 비로소 효도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바른 앎이 있어야만 바른 행위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의 주장은 유교 사상과 어긋난다는 인식 때문에 한동안 사학(邪學)으로 간
주되었으나, 1584년 공자의 묘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왕문성전서(王文成全書)》가 있으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주90] 학사들이 …… 배신하니 : 선사(先師)는 선대의 스승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주희(朱熹)를 가리킨다. ‘양지(良知)가 바로 천리(天
理)’라는 왕양명의 주장은 주희(朱熹)의 “각각의 사물에 그 이치가 있다.”라는 주장과 정면으로 대립하기 때문이다.
[주91] 여요(餘姚) : 왕수인(王守仁)을 가리킨다. 여요는 중국 절강성(浙江省) 여요현(餘姚縣)으로 지금의 항주(杭州)에 해당하며, 왕수
인이 나고 자란 곳이다.
[주92] 성명(誠明) : 《중용》에 나오는 말로, “성실함〔誠〕으로 말미암아 선(善)에 밝은 것〔明〕을 ‘성(性)’이라 하고, 선에 밝아짐으로 말미
암아 성실해지는 것을 ‘교(敎)’라고 하는데, 성실하면 사리에 밝고 사리에 밝으면 성실해지는 것이다.〔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
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라고 하였다.
[주93] 무이(武夷) : 주희(朱熹)를 가리킨다. 무이는 중국 복건성(福建省)에 있는 산의 이름으로, 주자(朱子)가 강학하던 문공서원(文公
書院)이 여기에 있다.
[주94] 왜가리 울 듯 : 이단의 학설을 말하는 것이다. 원래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에 나오는 말로, 남만(南蠻)의 말소리가 왜가
리 소리와 같다고 하여 농가(農家) 사상의 대표적 인물인 허행(許行)을 비하한 것이다. 《맹자》의 원문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
금 남만의 왜가리처럼 떠드는 자의 말이 선왕의 도가 아니거늘, 그대는 그대의 스승을 배반하고 이를 배우니 또한 증자와 다르도다.
[今也南蠻鴂舌之人, 非先王之道. 子倍子之師, 而學之, 亦異於曾子矣.]”
[주95] 해내(海內) : 여기서는 중국 국내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 박재금 이은영 홍학희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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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禮曹判書,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海平府院君,世子貳師文貞尹公墓誌銘 幷序
神宗皇帝二十年。昭敬王出狩義州。車駕次于東坡驛。召文靖尹公斗壽,文貞尹公根壽。諭曰。倭奴不庭。涉大海。蹂我疆土。予西遷以圖匡復。卿兄弟無離左右。公兄弟稽首流涕。誓以死報。於是。文靖公以政事。擢右議政。自行在。至于還都。獨相王室。逐倭奴。遂復疆土。而文貞公以辭命。擢大提學。具奏咨。乞師旅。一歲中。三趍廣寧。六赴遼陽。而聲名聞於天下。歷說皇朝諸將士。得其懽心。故皇朝出師救之。與慈母之拯赤子。無以異也。詩云。予曰有先後。予曰有奔奏。方王室危亂之時。公兄弟或先後焉。或奔奏焉。皆有大功。而文貞宣力四方。爲最多。於乎盛矣。公字子固。善山人也。曾祖繼丁。官至掌苑署掌苑贈吏曹判書。祖希琳。贈議政府左贊成。父忭。官至軍資監正贈議政府領議政。母玄氏貞敬夫人。以賢明聞。議政公從文正公趙先生門生弟子。學朱子書。公幼精敏。能通百家。游文純公李先生,文貞公曹先生門。多所講問。知朱子之爲正學。而象山陸氏之爲異端也。二先生爲之驚服。嘉靖三十有七年。擧文科。權承文院副正字。薦補承政院注書。公自陳年少不學。乞去職。退居讀書。明廟許之。由奉常寺主簿。出監漣川縣。四十一年。遷弘文館副修撰。初文正公趙先生。爲小人南衮所讒。下獄賜死。榮靖王追復官爵。而幽枉猶未昭雪。庠序索然。不復聞絃誦之聲。公因夜對言。光祖百世之師也。道德純粹。庶可興唐虞之治。而孰知不測之讒。萌於小人哉。故至治未興於上。而黨錮先成於下。臣竊悲之。榮靖王愍其無罪。而復其官。甚盛德也。然有司不贈上公。不賜榮謚。非殿下所以崇德象賢之意也。明廟怒。卽日貶監果川縣。明年。校檢承文院。由兵刑二曹佐郞。充御史。檢災關右。入弘文館。爲副校理。遷吏曹佐郞兼校書館校理,漢學敎授。充書狀官。朝天子。初王守仁宗陸氏。以觝朱子。使天下學者。靡然歸良知之學。皇朝學士陸光祖。尤好其說。一朝。叛朱子之道。尊信王氏之所爲書。故京師賢士大夫不入於禪者幾希矣。公慨然爲光祖言曰。聖人之學。本於性。釋氏之學。本於心。而王氏祖述釋氏。此異端也。學者惡可叛朱子。而歸異端乎。光祖不從。乃以爲古之所謂聖人者。能言其不傳之學。爲天下師也。明有天下二百年。搢紳先生言道德者。不可勝數。而王氏獨造精微。乃能倡良知之學。豈非所謂聖人者哉。公益憤切責光祖曰。王氏之學。以致良知爲宗旨。其所謂良知者。只見其昭昭靈靈之體而已。非孟子所謂仁義之良知也。然則王氏之所以自誤而誤人者。不在於致良知而在於所致之非良知也。雖自以爲有功於孟氏。而不自知其重得罪於聖人之門也。朱夫子有言曰。守虗靈之識。而昧天理之眞。借儒者之言。而文老佛之辭者。此之謂也。因極論人心道心之分。天理人欲之辨。光祖無以爲答。方是時。良知之學。行於天下。皇朝學士。無不尊王氏之道。而公反復以距之。儒林相賀曰。朱子之道不喪矣。光祖亦謝曰。子固豪傑之士也。雖中國。亦鮮有也。及使還。李文純公聞公所與光祖言者。歎息不已。隆慶元年。公以吏曹正郞。賜暇讀書。入議政府。爲檢詳。遷拜舍人。由司憲府執義。改副應敎。充御史。檢災嶺南。初金鎧最惡公等十七人。欲劾之。廷中恟恟。鄭公澈恚曰。此金鎧謀陷諸臣也。卽求對。言鎧奸邪。安得不嫁禍朝廷邪。昭敬曰。鄭澈過矣。鄭公進曰。雷霆雖震。臣言不可以不盡。因陳鎧姦邪之罪。昭敬大悟。立黜鎧。削其官爵。湖西饑。公以司諫充御史。往振之。旣而復命。擢典翰。遷直提學。由司僕寺正。入承政院。爲同副承旨。改成均館大司成。李文淸公如京師。以公爲副。明年。陞漢城府右尹。出爲慶尙觀察使。歲餘。遷爲弘文館副提學。入司憲府。爲大司憲。出爲京畿觀察使。初金誠一嫉公甚。發珍島守李銖米事以中之。於是下銖義禁府。會珍島吏告。銖船米置市人張世良所。於是又繫世良獄。杖六百餘。終不服。金公繼輝言。尹某王朝賢士。被殿下知奬之恩。竭忠志。無大過惡。而誠一詆以受賕。安知非宵人造言乎。語甚切。昭敬始知公寃狀。命釋李銖,張世良。承政院四啓固爭。昭敬怒。免都承旨李山海等六人官。視公如故。明年。起拜江陵府使。公以母老。辭不赴。未幾。授開城府留守。秩滿。由左尹。出爲黃海觀察使。又以母老辭。不赴。由大司諫。遷吏曹參判。居母憂。服除。以工曹參判兼都摠府副摠管。充奏請使。辨國系。進資憲大夫判刑曹。改禮曹兼藝文館提學。賜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號。封海平君。初金孝元。與靑陽君沈義謙。不相合。朋黨始分。而飛語稍稍媒孽。宋言愼廵撫湖南。至羅州。謂奇孝曾曰。先王宮車晏駕。沈黨意在興寧君。不在今上。孝曾以聞。昭敬疑義謙之附興寧也。心惡之。不知其飛語之誣也。公亦以義謙之黨。寖見疏。不授銓衡。加崇政。爲議政府右贊成兼判義禁府事。鄭公澈安置江界。坐削爵。平秀吉叛。從車駕。至平壤府。承命乞師廣寧鎭。還報義州行在所。起判工曹。加輔國判中樞府事兼禮曹判書,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兵部侍郞宋應昌。受天子命。爲經略。充接伴使。入遼東。初給事中魏學曾。爲光海君謀易王位。卽建議。請分割屬國之半。易置國王事下兵部。石公星以爲不可。應昌乃出學曾議示公曰。朝議如此。汝國何以自謀邪。吾且力保。然汝歸告汝國王。善爲之謀。公流涕歸自遼東。以學曾議。上于朝。昭敬歎曰。予久知必有此變。今果然矣。乃召大臣柳成龍。賜酒曰。卿才學無愧昔賢。而事予不能有爲矣。成龍慙懼不能對。然發告學曾之議。以折光海逆謀者。公之力也。進議政府左贊成。二十五年。秀吉復叛。公陪王妃。在遂安。聞車駕將幸南方。乃上箚乞執覊靮。昭敬許之。賜忠勤貞亮効節協策扈聖功臣之號。是時。皇朝以王氏。宜配孔子。移王咨事。下公卿。公以爲王氏之學。出於釋氏。不可掩也。烏得與七十弟子。從祀仲尼邪。夫釋氏。明心見性。與儒家盡心知性。有相似者。然釋氏有見於心。無見於性。今王氏明心之學。入於釋氏而不自知也。嘉靖之世。太學士桂萼言。王氏立異爲高。觝朱子格物之說。聚門徒互相倡和。請禁邪說。以正人心。萼非君子。而猶能知距王氏。然則王氏不可以從祀仲尼也明矣。且王氏序古大學曰。不務於誠意。而徒以格物者。謂之支。不事於格物。而徒以誠意者。謂之虗。不本於致知。而徒以格物誠意者。謂之妄。於是去分章而復舊本。其得罪於聖人之門何如也。孟子曰。聖王不作。諸侯放恣。處士橫議。楊朱墨翟之言。盈天下。天下之言。不歸楊則歸墨。楊氏爲我。是無君也。墨氏兼愛。是無父也。無父無君。是禽獸也。嗚呼。王氏與楊墨。無以異焉。幾何其不爲禽獸也。臣謂王氏。不足以配食仲尼也。乃獻議。沮其從祀。皇朝學士覽其議。莫不竦動。趙文孝公曰。先生今之孟子也。三十四年。入耆社議。賜几杖。公固辭。然後乃止。後十年丙辰八月某甲。以疾。卒于家。享年八十。訃聞。輟朝二日。謚曰文貞。某月某日。禮葬于長湍臨江之原。公爲人端雅英粹。能下士。子諒愛物。大學士許公國。奉詔至境上。見公容貌。語人曰。誠嘉士也。性廉潔。老而無宅。爲文章。本原經術。而一埽荒服之陋。反之西京。純如也。學者稱月汀先生。所著文集若干卷。藏于家。夫人曰豐壤趙氏。節度使安國之女。生男六人。女一人。男長曰晥。掌樂院僉正。次曰晊。加平郡守。次曰㫥。次曰曘。俱進士。次曰㬇。次曰(日+敏)。女適尹聞性。庶子曰㫤。爲學官。庶女適呂祉吉。晥子一人。曰應之。晊子四人。曰擇之,尙之,悅之,宗之。㫥子一人。曰挺之。方倭奴之陷平壤也。公乞師。九渡遼水。廣寧人觀公將幣。皆歎曰。尹大夫何其恭也。遼陽人觀公致命。皆歎曰。尹大夫何其勞也。其後使者。入京師。中朝人問公安否。豈非以忠貞之節。感動中朝也哉。余先大夫文貞公作號召檄。數大臣柳成龍罪。流竄廢錮十餘年。終不復爵。公箚言。廷彧正直。爲柳成龍所中傷。放斥江湖。病且篤。朝夕將死。而其寃尙未昭晰。乞降明旨。復其爵。昭敬不許。然公心篤於朋友。先大夫賴公一言。未瞑目得白其寃。恩至深也。公旣卒。賢孫得觀。爲其祖請銘于墓。余不忍辭。乃爲之銘曰。
天降文公。昭我周行。六經旣正。百家攸程。如何子靜。良知是究。淵源不猶。千里之謬。彼王氏子。又侮羣聖。率心內求。不見其性。公初講學。㜈源斯尊。祗服餘訓。如仰昆侖。傳注之富。能探其賾。筆札之竗。能得其畫。有斐陸君。中國之英。曰聖人者。其惟文成。學士和之。胥倍先師。公乃肅容。以距詖辭。餘姚之學。不知性命。棄我誠明。而歸慧淨。武夷巖巖。惟道之極。邪說誣民。孰辨其惑。鴂舌之徒。日增月滋。譬彼洪水。莫之治之。吾雖末學。曷不告誨。辭氣益厲。竦動海內。人亦有言。今之孟子。我銘幽堂。垂千萬祀。<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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