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최근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의 화상통화에서 러시아가 가하고 있는 핵위협의 심각성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줄 것을 요청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임기(1993∼2001) 중 미국과 우크라이나 관계 개선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 제공: 세계일보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오른쪽)이 8일(현지시간)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화면 속)과 화상 대화를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제공, EPA연합뉴스
9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대통령실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날 클린턴 전 대통령과 화상으로 대화를 나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먼저 지난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클린턴 전 대통령이 지속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지지한 것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앞서 우크라이나계 미국인이 많이 다니는 교회를 찾아 우크라이나 국화인 해바라기를 헌화하며 평화를 기원했다. 개전 1개월을 맞은 3월24일에는 CBS와의 인터뷰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경이롭다”며 그의 전쟁 리더십을 극찬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가 이번 전쟁을 ‘동결된 분쟁’(frozen conflicts)으로 만들려 한다고 비난했다. 우크라이나 영토 일부를 점령한 채 종전도, 평화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잠시 분쟁을 덮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했다가 국제사회의 관심이 시들면 결국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체의 병합을 시도할 것이란 분석이 담겨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리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분쟁의 동결이 없도록 미국이 나서 막아야 한다”고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요청했다.
과거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같은 최악의 핵물질 유출 위험이 큰 자포리자 원전에 미국이 경각심을 가져줄 것도 촉구했다. 원자로 6기를 보유한 자포리자 원전은 개전 직후인 지난 3월 러시아군에 점령당했다. 이후 이를 탈환하려는 우크라이나군과 방어에 나선 러시아군 간에 치열한 포격전이 전개되면서 핵물질 유출 등 사고가 날 것이란 우려가 크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가 핵을 볼모 삼아 우크라이나는 물론 전 세계를 상대로 테러를 저지르고 있다”며 클린턴 전 대통령이 직접 나서 이 문제를 해결해줄 것을 호소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우크라이나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한 우크라이나와 미국의 수교는 전임자인 조지 H W 부시(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의 몫이었으나 이후 우크라이나와 미국의 관계를 심화시킨 건 전적으로 클린턴 전 대통령의 공적이다. 그는 임기 중 1994년과 1995년, 그리고 2000년 최소 3차례 이상 우크라이나를 방문했다. 이 기간 미국은 우크라이나와 전략적 동반자 관계(strategic partnership)를 맺었고 또 우크라이나 원전에 거액을 투자해 낡고 위험한 원전은 폐쇄하는 한편 기존 원전에는 안전장치를 보강했다.
© 제공: 세계일보1994년 ‘우크라이나는 핵무기를 포기하고 자국 영토에 배치된 핵무기를 전부 러시아로 이관한다’는 내용의 부다페스트 각서가 체결된 뒤 협상의 주역들인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왼쪽부터),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레오니드 쿠치마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손을 맞잡은 채 기뻐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는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포기한 데 따른 보상의 성격도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소련에서 독립할 당시 자국 영토 안에 엄청난 양의 소련제 핵무기를 갖고 있었다. 1994년 미국, 영국,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전부 러시아로 이관하는 대신 3국이 우크라이나 안보를 돕는다는 내용의 이른바 ‘부다페스트 각서’를 체결했는데 이를 주도한 이가 바로 클린턴 전 대통령이다. 훗날 우크라이나는 핵무기 포기를 후회했으나 그 대가로 1990년대에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 등 막대한 도움을 얻은 건 분명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