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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시대는 백부 바실리와 친지인 카람진 제콥스키 등 러시아 낭만주의 시인들의 영향을 받았다.
1811년 ∼ 181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의 차르스코예셀로의 전문학교에 다녔다.
1820년 농촌이라는 시가 널리 읽혀지자, 당시 "정부는 그것이 정부에 대항한다"는 명목으로 푸시킨을 남부 러시아로 유배시키고, 푸슈킨은 키시뇨프, 오데사에서 살았다.
키시너우나 오데사에 살던 시절, 데카브리스트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의 사상과 영향을 받았다.
1824년엔 국외망명에 실패하면서, 미하일롭스코예란 곳에서 유배되었다.
1837년 1월 27일 아내 나탈랴를 짝사랑하는 프랑스 망명귀족 단테스와의 결투로 부상하여, 2일 후에는 38세의 나이에 죽었다.
푸쉬킨의 생애와 문학
<사진: 푸쉬킨이 사랑했던 부인 나탈리아 푸쉬끼나>
A.S. 푸쉬킨 (Aleksandr Sergeevich Pushkin 1799.6.6∼1837.2.10)
푸쉬킨은 1799년 5월 26일. 모스크바의 600년전통의 오래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친가쪽의 선조들은 알랙산드르 야로슬라비치 네프스키 시대 이래 대대로 러시아 왕실에서 벼슬을 했다. 부친은 퇴역장교로 문필활동을 했으며 모친은 아프리가 출신의 한니발 장군의 후손이었다. 푸쉬킨의 외증조할아버지, 곧 푸쉬킨 어머니의 할아버지는 이디오피아 출신 흑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표트르대제의 총애를 받으며 한니발이라는 이름까지 하사받고 러시아 여인과 결혼하여 일가를 이루게 되었는데 그 아들 중의 한 명이 낳은 딸이 바로 푸쉬킨의 어머니였다.
1811년 푸쉬킨은 가정교육을 끝내고 귀족 학교의 학생이 되었다. 차르스코예 셀로라고 불리는 귀족학교는 러시아에 하나밖에 없는 특권층을 위한 학교로 미래의 관료를 양성하는 곳이었다. 그 학교는 10세에서 14세 사이의 귀족 자제에게만 입학을 허용하였다. 귀족 학교의 교육 이념은 당시 진보 정치를 펼친 재상, 스페란스키의 이념을 따르고 있었다. 이 학교에서 젊은 푸쉬킨은 처음으로 영혼과 정신의 자유에 대해 배웠다. 귀족 학교에 다니면서 그는 132편의 시를 썼다.
귀족 학교를 졸업한 푸쉬킨은 규정에 따라 외무성에서 일하게 된다. 실제로 그는 경기병 연대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쳐 10등관 관리로 외무성에서 일하게 되었다. 일을 하는 대신 그는 문학활동에 몰두하여 '푸른램프'등의 문학써클에 활동하면서 정치적인 시를 발표하고 제카브리스트 당원들과 친밀한 유대를 갖는다. 특히 차다예프와는 우정을 통해 강하게 결속되었다. 그사이에도 <루슬란과 류드밀라>라는 6편으로 구성된 낭만적인 서사시를 써서 1820년 봄에 발표하였다. 이 시는 러시아는 당시 몇 십 년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비극적이고도 영광스러운 사건(제카브리스트 봉기)이 일어나기 직전의 어수선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당시 젊은 푸쉬킨의 삶의 중심이 된 것은 '사랑'과 '자유'였다.
페테르스부르크 시절 푸쉬킨과 친교를 맺은 중요한 인물로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투르게네프를 빼놓을 수 없다. 그와의 친교를 맺고 있을 당시 푸쉬킨이 쓴 작품인 「자유」와 「마을」은 극단적 반동정치를 펴 나가던 러시아 황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말았다. 이것은 젊은 시인과 황실 사이에 갈등을 일으킨 첫 번째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뒤이어 등장한 재기 넘치는 일련의 풍자시들의 작가가 푸쉬킨으로 알려지면서 상황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으로 악화되었다. 결국 황제는 푸쉬킨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남쪽으로 유배된 첫 해인 1820년을 푸쉬킨은 여행으로 보냈다. 이후의 3년간, 곧 1821∼1823년 동안 푸쉬킨은 키슈뇨프에 머물렀다. 키슈노프는 푸쉬킨의 마음에 꼭 드는 장소였다. 그는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다양한 자연의 모습을 보고 싶어했는데 키슈노프야말로 그러한 자연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3년이나 그곳에 머무르게 되었던 것이다.
1823년에는 푸쉬킨의 생활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노보로시스크와 베사라비아의 현지사로 보론초프 백작이 새로 부임하였고 이에 따라 푸쉬킨도 새로운 현지사의 거주지인 오데사로 옮겨가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낯선 곳에서 새로 시작한 생활은 그다지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시인과 새로운 현지사 간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푸쉬킨과 보론조프의 불화는 불화로만 끝나지 않았다. 현지사는 시인의 유배 생활을 충분히 좌지우지할 만한 권력자였던 것이다. 그의 명령에 따라 푸쉬킨은 오데사를 떠나 프스코프 현의 아버지 영지로 가게 되었다. 푸쉬킨은 아버지의 영지인 미하일롭스키 마을에서 2년 이상(1824∼1826)을 살았다. 푸쉬킨 자신도 미하일롭스키 마을에서 보낸 시간을 퍽 소중하게 여겼다. 그가 바로 그 마을의 스뱌트이 언덕(현재는 푸쉬킨 언덕으로 불린다)에 자신의 어머니를 매장하고 바로 옆에 자신의 묘자리를 마련해 둔 것은 우연한 결정이 아니었다. 미하일롭스키에 도착한 후 푸쉬킨은 일기에 자신의 예술적 영감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느낀다고 적었다. "나의 능력은 최고조에 달해 있다. 무언가 쓸 수 있을 것 같다." 미하일롭스키에서 쓰여진 작품의 대다수는 민족과 역사를 주제로 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 지내는 동안 시인은 민중시가에 큰 매력을 느꼈고, 라진이나 푸가쵸프 등 민중봉기의 지도자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역사에 대한 그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당시의 가장 중요한 정치사건인 12월당 봉기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되었다.
1826년 푸쉬킨은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이 시기에 푸쉬킨은 비로소 심각하게 결혼할 생각을 했다. 그는 이전에 두 번 청혼한 적이 있었으나 번번이 신부감의 부모에게 퇴짜를 맞았었다. 그런 와중에 1829년 새해 무렵 푸쉬킨은 무도회에서 16세의 나딸리아 곤차로바를 만나게 되었다. 4월말경 이미 푸쉬킨은 곤차로바에게 청혼을 했으나 결과는 완곡한 거절이었다. 이 상황에서 그는 카프카즈의 아르즈룸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기세를 떨치는 페스트, 그리고 자신과 전 12월당원들과의 접촉을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지방관청 때문에 푸쉬킨은 페테르스부르크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페테르스부르크에서 그는 재차 곤차로바에게 청혼을 하였고 이번에는 완전한 승낙을 얻었다.
1830년은 시작되자마자 시인에게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 1월 1일, 푸쉬킨이 후원하고 델비그가 편집장을 맡았던 문학지 <문학잡지> 창간호가 빛을 본 것이다. 이 잡지의 창간은 시인이 오랫동안 고대한 것이었다. 또 그해 4월에는 푸쉬킨과 나탈리아 니콜라예프나 곤차로바의 약혼식이 있었다. 결혼식은 푸쉬킨의 아저씨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조금 미뤄졌다. 푸쉬킨의 행복은 1831년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황제의 허락을 얻어 비극 「보리스 고두노프」가 출판된 것이다.
위대한 시인의 말년은 꺼질 줄 모르는 문학적 열정과 가족에 대한 염려, 이 두 가지로 요약된다. 비록 사교계에서는 늘 경박하고 변덕스러운 사람으로 여겨졌지만 가정 생활에 있어서 그는 자애로운 아버지이자 사려깊은 가장이었다. 매우 힘든 시기였지만 여전히 푸쉬킨은 여러 곳을 여행하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는 볼지노 마을에 틀어박혀 집필에만 전념하였다. 바로 이때 러시아의 어린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재미난 이야기들, 그리고 철학적 사상을 담은 불멸의 시들이 쓰여졌다.
그러나 비평가들은 시인의 창작력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고 평했다. 벨린스키조차도 1934년 푸쉬킨의 신작 「안젤로」를 '죽은 듯이 생기가 없는'이야기라며 혹평하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정 생활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들도 푸쉬킨을 괴롭혔다. 부인 나탈리아가 바람을 피운다는 등 푸쉬킨이 한집에서 같이 살던 처형과 불륜의 관계라는 등의 소문이 무성하게 일어났다.
시인의 죽음을 부른 최후의 결투, 곧 네덜란드 공사 게케른의 양자 단테스와의 결투의 발단이 된 것은 익명의 비밀 편지들이었다. 격노한 푸쉬킨은 자신과 아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하였다. 그러나 사태는 단테스가 나탈리아 곤차로바의 언니에게 청혼하여 결혼한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푸쉬킨도 결투 신청을 철회하였다. 하지만 단테스는 결혼한 후에도 나탈리아 곤차로바에게 접근하여 일가 친척이 되었다는 이유로 무례한 행동을 하며 치근거렸다. 다시 좋지 않은 소문이 돋기 시작하고 급기야 푸쉬킨의 친구들에게까지 익명의 편지가 날아들자 푸쉬킨은 단테스에게 다시 결투를 신청하였다. 결투는 1837턴 1월 27일에 이루어졌고 푸쉬킨은 복부에 치명상을 입어 이틀 후 사망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이 결투는 그의 진보적 사상을 미워한 궁정세력이 짠 함정이었다고도 한다. 위대한 시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그가 한순간도 잊지 않았던 미하일롭스키 마을의 스뱌트이 언덕 수도원에 묻혔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치 못했던 푸쉬킨은 방대한 양의 작품구상과 초안들을 남겼다. 이들은 그의 광범위한 예술적 관심, 그리고 예술관 및 역사관의 전개 방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운명은 그 구상들이 작품으로 실현되는 것을 허락지 않았던 것이다. 푸슈킨의 작품은 모두 농노제하의 러시아 현실을 정확히 그려내는 것을 지향하였으며, 깊은 사상과 높은 교양으로 일관되어, 후의 러시아 문학의 모든 작가와 유파는 모두 푸쉬킨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푸쉬킨의 작품(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은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은 그리움이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한순간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어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고야 말리니
작별
작별이 잦은 시대
작별을 하며 사세
작별이 잦은 시대
작별을 해놓고 살아가세
작별이 올 때 아쉬움이 없도록
작별을 해놓고 살아가세
우리들끼리만 서로 사랑하지 마오
우리만 너무 사랑하지 마세
하나님이 질투 하시니까
영원한 작별이 올 때
아쉬움 없이 작별할 수 있도록
작별을 해놓고 살아가세
하늘로 향한 작별이 올 때
미련 없이 갈 수 있도록
작별을 해놓고 살아가세
작별이 없으면 만남의 기쁨이 없고
작별이 없으면 영원한 삶이 없소
세상도 작별하고
사랑도 작별하고
나와도 작별을 하고 사세
주님이 부르는 작별이 올 때
나를 더 머무도록 애쓰지 마오
작별이 올 때
웃으며 가도록
작별을 준비해 놓고 살아가세
잠에서 깨어나
꿈이여, 꿈이여,
너의 달콤함은 어디로 갔느냐?
밤의 기쁨이여,
너는 어디로, 어디로 갔느냐,
즐거운 꿈은 사라지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잠이 깬다.
주위는
말없이 밤에 싸여 있다.
사랑의 꿈은
싸늘하게 식어
한순간에 멀리 날아갔구나.
아직도 영혼은
욕망으로 가득차
추억의 꿈을 낚는데.
사랑이여, 사랑이여,
너의 환영을 내게
다시 한번 보내주렴.
다시 한번 환희에 젖어
아침이 되어도 깨어나지 않은 채
죽을 수 있게 해다오.
케른 부인에게
기적의 순간을 기억합니다.
당신은 나의 앞에 나타났습니다.
순간적인 환상처럼,
순결한 미의 화신처럼.
내가, 희망 없는 우울 속에,
시끄러운 공허의 불안 속에 허덕일 때
당신의 상냥한 음성은 오래 내 맘에 울려왔고
나는 당신의 정다운 모습을 꿈꾸었습니다.
세월은 흘렀습니다. 폭풍의 미친 듯한 격정이
옛날의 공상들을 휩쓸어 갔고
나는 당신의 상냥한 음성을 잊어버렸습니다.
당신의 천사같은 모습까지도.
어느 벽지, 유배의 어둠 속에서
나의 날들은 소리 없이 흘러가 버렸습니다.
애모도 영감도 없이
눈물도, 생기도, 사랑도 없이.
내 영혼이 잠을 깨자
또 다시 당신은 나의 앞에 나타났습니다.
순간적인 환상처럼,
순결한 미의 화신처럼.
내 가슴은 환희로 물결치고
가슴 속엔 다시
애모, 영감, 그리고
생기와 눈물과 사랑이 되살아났습니다.
詩人
아폴로 신이 신성한 희생자로
시인을 불러내기 전에는
그는 부질없는 세상의 번민 속에
무기력하게 가라앉아 있다
그의 성스러운 거문고는 울리지 않고
영혼은 얼어붙은 꿈을 먹는다
이세상 보잘 것 없는 아이들 가운데
아마도 그는 가장 미미하리라
그러나 신의 음성이
예민한 청각에 와 닿기만하면
시인의 영혼은 잠을 깬 독수리처럼 약동한다
그는 이 세상의 위안 속에서 괴로워하고
사람들의 소문을 멀리한다
민중에게 숭배 받는 것의 발치에
자랑스런 머리를 숙이지는 않는다
야심적이고 엄숙한 그는
소리와 혼돈에 가득 차
황량한 바닷가로,
또 넓게 술렁이는 떡갈나무 숲속으로 달려간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
나의 영혼 속에 아마도
사랑은 여전히 불타고 있으리라
하지만 나의 사랑은
이제 당신을 괴롭히지 않을거요
어떻게 하든 당신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다오
침묵으로, 희망도 없이
난 당신을 사랑했소
때로는 두려움, 때로는 질투로
괴로워하면서도,
나는 신이 당신으로 하여금
타인의 사랑을 받게 만든 바 그대로
진심으로, 부드럽게
당신을 사랑했소
태워진 편지
안녕
사랑의 편지여 안녕.
그 사람이 이렇게 시킨 것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 나는 주저하고 있었던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나의 손은 모든 기쁨을 불에 맡기려고 맹세하였던가
하지만 이제 지긋지긋하다.
시간이 찾아 왔다. 불타라 사랑의 편지여.
나는 각오하고 있지,
마음은 무엇에도 현혹되지 않지.
탐욕스런 불꽃은 벌써 너의 편지를 핥으려 한다.
이제 곧
활활 타올라 타올라 엷은 연기가
얽히면서 나의 기도와 더불어 사라져 간다.
이미 변치않을 마음을 맹세한 반지로 찍은 자국도
사라지고
녹기 시작한 봉랍이 끓는다.
오오, 신이여
일은 끝났다.
검어진 종이는 휘말리고 말았다.
지금은 가쁜한 재 위에 그 숨겨진 자국들이
새하얗게 남고
내 가슴은 조여진다 그리운 재여
나의 애처로운 운명 위에 그나마 가련한 기쁨이여
내 한탄의 가슴에 영원히 머물러라.
푸쉬킨과 몰도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