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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일본의 교과서 왜곡
군국주의 국수주의 역사관으로 인근국가 비난 빗발,
국제사회에서 고립 자초
다시 불거진 일본의 교과서 왜곡 문제가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일본의 극우 인사들로
구성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제출한,
왜곡된 과거사가 실린 중학생용 역사교과서인 「신일본역사교과서」안(案)을
문부과학성이 통과시킬 것이 확실시되어 일본의 국내는
물론 관련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고 있다.
2001. 3. 1 한국 교원총연합회 회원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역사왜곡에 항의하며 왜곡된 역사 교과서를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국가가 국사교과서를 공식 편찬하는 한국과 달리
검인정제인 일본의 중·고교 국사교과서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교과서가 4년마다 실시되는
문부성 검정을 통과할 경우, 기존의 7종에 더해 8종 교과서가
2002년 4월 신학기부터 사용될 예정이다.
「신일본역사교과서」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가 되고 있는 「신일본역사교과서」에는 종군위안부의 내용을 삭제하고 일본의 태평양 침략전쟁을 아시아 해방전쟁으로 미화하는 등 근·현대사를 비롯해 고대사까지 왜곡되어 역사왜곡의 결정판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한국, 북한 그리고 중국은 일제히 「신일본역사교과서」의 검정통과 불가(不可)를 주문했다. 한국과 중국에서는 교과서 왜곡에 대한 항의 데모를 하는가 하면 이례적으로 양 국가의 정상들이 성명서까지 냈다.
김대중 대통령은 3·1절 기념사를 통해 1998년 방일 당시 일본측과 합의한 ‘21세기를 향한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상기시킨 가운데 “일본이 올바른 역사인식을 갖고 인근 나라들과 미래지향적 우호 협력 관계를 더욱 발전시키도록 노력해 줄 것을 기대한다”고 거론함으로써 교과서 왜곡 문제가 일본측의 성의있는 자세로 조속히 해결돼야 한다는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전했다. 중국은 장쩌민 국가주석이 2월 27일 하이난다오에서 열린 보아오 포럼에서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와 회담을 갖고, “우리도 이 문제(교과서 왜곡)에 대해 많이 걱정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잘 배려해 주기를 바란다”고 중국의 입장을 전했으며 그 며칠 전에는 외교부 대변인이 “역사를 왜곡하는 교과서의 출간을 금지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었다.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2월 14일 논평에서 “공식적인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통해 일본사람들 속에 체계적으로 군국주의, 국수주의 사상을 주입시켜 ‘대동아공영권’의 옛 꿈을 실현해 보려는 일본 극우익 반동세력의 범죄적인 목적과 지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며 원색적으로 비난을 퍼부었다.
이렇듯 주변국의 성토가 빗발치자 일본 문부성은 지난 3월 4일 문제의 교과서를 수정한 것으로 발표했다. 한일합방을 비롯한 난징(南京)학살사건 등 주로 근·현대사에 관한 사항 중 일본의 잘못을 정당화했던 대목이 일부 고쳐졌지만 역사 왜곡 대목을 삭제하거나 대폭 수정하지는 않은 채 일부 표현만 완화하거나 보완한 것으로 나타나 고치는 시늉만 한 미진한 수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일합방’ 대목에서는 “합법적이었다”는 표현 대신 “무력으로 합병을 단행했으며 심한 저항과 독립운동이 끈질기게 일어났다”고 기술했지만 한일합방이 동아시아 지역 안정에 기여했다는 왜곡된 시각은 여전하다. 또 ‘대동아공영권’에 관한 서술에서는 “패전 후 일본의 전쟁이나 아시아점령을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는 비판을 받았다”고 일부 내용을 추가했지만‘대동아전쟁’이란 용어는 그대로 사용했으며 “이를 통해 그 동안 식민지배를 받아온 아시아 각국이 해방됐다”는 왜곡된 주장이 여전히 들어 있다.
이 같은 점으로 미루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측은 한국, 중국 등의 강력한 비난을 받은 대목의 일부는 고치되 기본적인 역사인식은 고수하려는 전략을 편 것으로 보인다. 이 교과서는 일부 내용을 고쳤다고 하지만 다른 교과서와 비교할 때 일본의 가해행위에 관해 훨씬 적게 기술하고 있으며 종군위안부에 대한 기술은 한 줄도 없다. 결국 과거의 잘못된 역사에 대한 반성의 뜻이 담기지 않은 교과서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기존 교과서들도 이들의 주장에 큰 영향을 받아 기존 7종의 교과서가 종군위안부 기술을 아예 삭제하거나 대폭 줄인 것으로 드러났다. 모든 역사교과서에 ‘침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점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교과서 수정 내용이 유출돼 보도된 경위가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최초 검정신청본이나 수정된 내용은 집필자, 출판사, 문부과학성 일부관계자 외에는 전혀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관련 내용이 언론에 공개되고 있는 것이다. 언론보도 → 한국·중국의 압력 유발 → 일본 정부의 개입유도 식으로 사태가 진행되고 있는데 이는 문부과학성이 언론 플레이를 위해 일부러 교과서 내용에 관한 정보를 흘리고 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외부 반응 탐색용이나 통과시 관련 국가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김빼기 작전’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일본 언론들은 3월 5일 문제의 교과서 내용이 대폭 수정됐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이제는 검정 합격에 문제없을 것이란 식으로 보도했다. 도쿄신문은 “중국과 한국의 반응을 예측할 수 없지만 더 이상 수정을 요구하는 것은 현 검정제도에서는 무리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위험한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
일본 우익 세력의 역사 왜곡이나 미화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82년에 발생한 소위 일본 교과서의 ‘역사 왜곡 파동’때 한국은 정부는 물론 일반 국민들까지 나서서 성금을 모아 독립기념관을 건립하였으며 일본 문부성으로부터 역사 교과서 검정기준에 “아시아와 관련된 근·현대사의 역사적 사실의 취급은 국제이해와 국제협조의 견지에서 배려한다”는 근린제국 조항을 추가한다는 약속까지 받아낸 적이 있다.
그러나 일본 문부성은 지난 82년 역사 왜곡 파동 이후에도 중·고교용 역사교과서에 대한 검정과정에서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배와 2차대전의 책임문제 등을 축소, 삭제토록 출판사 측에 강요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일본 출판노련에 따르면 내년도 사용 예정인 교육출판사 간행 고교용 사회교과서는 당초 종군위안부에 대해 “젊은 여성도 정신대 등의 명목으로 전장에 송출됐다”고 표현했으나 검정 후 “젊은 여성도 공장 등에 동원됐다”로 바꾸었다. 또 오사카서적이 발간한 교과서에 “일본이 불평등조약을 강요한 조선에서는 경제혼란과 중과세로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농민들의 저항운동이 일어나 내란으로 번졌다”는 기술이 검정 후 전문 삭제되기도 했다.
문부성은 이밖에도 일본의 전쟁책임 문제에 관해 “국가차원의 배상은 이미 끝났다는 사실을 명기하라”고 요구하고 있으며 한국인 징용자 수를 당초의 70만∼2백만 명에서 약 80만 명으로 바꾸었다. “한국인 종군위안부가 8만∼20만 명에 이른다”는 문구도 삭제토록 했다.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그런 사실을 가르치는 것은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상 ‘일본의 치부는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다. 이들은 군위안부는 사실이 아니며, 개인적인 상업행위였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았다. 또 관동대지진 당시 한국인 학살 사건에 대해서도 학설이 엇갈리거나 연구 중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책임소재를 불분명하게 하거나 구체적인 서술을 하지 않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의 우익 인사들로 구성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기존 교과서를 바꾸려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그 해 8월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가 종전 50주년을 맞이하여 아시아 국가들을 상대로 일본의 침략에 대해 사과한 일이다. 우익 인사들은 일본이 왜 사과를 해야 하느냐며 무라야마 총리를 비난했다.
이같은 움직임은 “지금의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잔학한 민족의 자손이라는 열등감을 심어주고 있다”는 이른바 ‘자학사관(自虐史觀)’논쟁으로 비화됐다. 기존의 역사교과서들이 너무 일본을 비하하고 있으므로 자학사관을 타파해야만 일본이 군사적으로 재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우익 인사들은 1995년 ‘자유주의사관’연구회를 만들었다. 우익계 신문 산케이는 1996년부터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는 역사’라는 기사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집필자는 물론 자유주의사관연구회 회원들이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78명의 일본 지도층 인사로 구성되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만들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자유주의사관’에 입각한 교과서를 스스로 만들겠다는 것이 이 모임의 목적이었고 이번에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받는 교과서가 바로 이 단체가 만든 책이다. 이들은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일본 역사의 ‘자부심’을 가르쳐야 한다는 ‘자유주의 사관’을 바탕으로 지난 1997년부터 꾸준히 「신일본역사교과서」 채택을 위한 로비를 벌여왔다.
정치권도 이들의 활동을 도왔다. 자민당은 93년 8월 당내에 ‘역사검토위원회’를 만들어 일본의 침략을 부정하고 이를 국민의 역사인식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국민운동을 부추기고 ‘새로운 교과서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제창했다. 모리 요시로(森喜朗) 총리를 비롯해 현 내각 각료 중 7명이 바로 이 역사검토위원회 회원이였다.
우익세력에 의한 문제의 역사교과서는 일본인의 평균적 역사관이나 역사인식을 바꿀 수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집요하고 치밀한 교과서 왜곡운동을 펼쳐온 우익세력이 역사교육 현장에 거점을 확보,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위한 파상공세에 본격 돌입할 것이란 점에서 주변국들의 우려를 더하고 있다. 1982년에는 교과서 왜곡의 주체가 문부성이었던 반면 이번에는 학자, 평론가, 만화가, 언론인, 교사, 변호사 등 다양한 그룹들이 참여, 점차 시민운동으로까지 확산돼 가는 추세이며, 과거에 비해 여론의 제동을 별로 받지 않아 그 위험성이 심각한 실정이다.
일례로, 「신일본역사교과서」 문제가 주변국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음에도 2월18일 노로타 호세이(野呂田芳成) 중의원 예산위원장은 “일본의 침략이 아시아 식민지 해방으로 연결됐다”고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망언이 이어졌으며 지난해 문제의 교과서를 제대로 심의해 줄 것을 촉구했던 교과서 심의위원이 자민당과 관련 단체의 압력으로 경질된 일도 주변국의 입장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일본의 우경화 현상을 말해주고 있다.
최근 들어 왜곡된 주장을 늘어놓는 우익단체들의 활동은 더욱더 활발해져서 우파단체들의 집회나 시위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풍경이 되었다. 그들은 인터넷 공간에서도 세력확장에 열을 쏟고 있다. “일본의 주권을 위협하는 불량 외국인들에게 참정권을 주지 말라”고 주장하거나 교과서 왜곡을 반대하는 인사들의 인적사항을 올려 사이버 테러를 서슴지 않으며, 집회에서 한국인을 비하하는 단어를 거리낌없이 사용하는 ‘우국청년단’ 같은 우익단체들의 홈페이지가 200곳이 넘게 널려있다.
일본의 우익으로부터 테러 위협을 받고 있는 ‘전시 여성에 대한 폭력-일본네트워크’ 대표 마츠이 야요리(松井耶依·66) 씨는 “정치·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미래가 불투명한 청년들이 극우주의에 빠져들고 있다. 애국심을 강조하면 그들은 쉽게 동화되어 버린다”며 우익 세력이 일본 사회에서 힘을 얻고 있는 실정에 대해 설명하고 군국주의로 흐를 수 있기 때문에 아주 위험하다고 우려한다.
정치권에서는 야스쿠니 신사에 당당히 참배하는 국회의원들이 줄을 잇더니 1999년에는 태평양전쟁의 상징이 되었던 기미가요와 히로마루를 국가와 국기로 할 것을 입법화했고, 지난해 말 자민당은 군대 보유 및 교전권을 허용, 일왕을 국가 원수로 하자는 헌법 개정안까지 제출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군국주의 부활의 움직임이 결국 역사교과서 왜곡으로 귀결된 것이다.
정재정 교수(서울시립대)는 「일본의 논리-전환기의 역사교육과 한국인식」이라는 저서에서 일본사회의 우익화에 대해 “경제대국으로서의 자신감과 버블 붕괴 이후 장기불황에 따른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묘하게 얽혀 우익세력이 준동(蠢動)하게 되었다”면서 보수 우익을 견제하던 마르크시즘의 퇴조도 원인 중 하나라고 그 배경을 설명한다.
선사시대 유물의 날조는 역사의 열등의식으로 비춰져
문제의 「신일본역사교과서」는 20세기 전반기 근대사의 왜곡에 그치지 않고 고대사까지 왜곡, 말살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 일본의 역사 콤플렉스를 반증한다.
고대에서부터 중세를 거쳐 근세에 이르기까지 문화적 수혜를 받던 입장에서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화과정에서 이를 역전시킨 일본이 현재의 선진적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과거의 역사마저 자신들의 지배사로 바꾸어버려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려 하고 있다. 한국인을 자극하는 대표적인 대목인 고대 한반도에 일본의 식민지를 두었다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만 해도 그렇다. 과거 일본 학자들은 일본이 가야 지역을 식민지로 삼아 임나일본부를 두었다고 왜곡했다. 이 주장을 ‘입증’하고자 1880년대에 일본 육군참모본부는 중국 지린성의 광개토왕릉 비문까지 변조했었다.
민족이 우월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급기야는 선사시대 유물까지 날조하게 했다. 도호쿠(東北)구석기문화연구소 부이사장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 50)가 미야기(宮城)현 가미타카모리(上高森) 석기유적을 발굴하여 70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기 구석기문화가 일본에 존재했음을 입증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는데 이것이 작년 11월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후지무라는 1981년에 4만 년 전의 석기유적을 발견한 것을 비롯하여 발굴할 때마다 최고의 기록을 세우면서 일본 고고학계에서 ‘신의 손’이라고 불리어 온 인물이었다. 현재는 그가 발굴한 180여 곳에 달하는 유적 대부분이 조작된 것으로 의심이 일고 있어 일본의 고대사를 전면적으로 다시 써야 될 형편에 놓여있다. 이런 유물 조작 사건은 한 고고학자의 단순한 역사 조작이 아니라 일본에 이집트 문명과 맞먹는 고대 문명이 존재했다고 믿고 싶어하는 역사적 우월성에 대한 열망이 일본 사회 저변에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좋은 예이다.
MS사, 한국 역사 왜곡 해프닝
일본의 역사 왜곡은 일본인의 정신세계에 악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퍼질 개연성을 가지고 있어 심각성을 더한다. 실례로 작년에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사는 게임 ‘제국의 시대’에 일본의 임나일본부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적이 있다. 일본의 야마토 문명편 6장의 경우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면 야마토 왕조의 식민지가 피해를 보니, 백제를 도와 신라의 침입을 막아라”라고 서술하고 7장에는 “당나라가 한반도를 침입하려 하니 당나라의 공격에서 식민지를 안전하게 하라”는 내용을 담았다.
이는 삼국시대에 일본이 가야 지역을 지배했다는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 잘못된 동북아의 역사를 전세계에 소개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한국에 대한 별다른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고대 한국이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 사건은 마이크로소프트 전략 게임 소프트웨어 사업 부사장의 사과와 더불어 문제의 부분을 전면 재수정, 전세계 버전에 반영키로 결론지으면서 일단락 됐다.
그러나 비슷한 사건이 1년 전에도 있었다. 1999년에는 국가 지도와 정보를 망라해 소개하는 CD-ROM 타이틀 ‘MS 엔카르타 97’에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기해 물의를 일으켰다. 불과 1년 만에 다시 일본이 왜곡한 역사가 게임소재로 채택된 것을 보면 앞으로도 유사한 사고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 정부의 홍보 부족으로 세계는 한국에 대해 너무나 무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에 대한 별다른 지식이 없는 외국인들이 고대 한국이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그래서 이 문제의 본질은 수정된 게임을 내놓는 것에서 끝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현재 미국이나 유럽지역에서 접할 수 있는 아시아 자료는 거의 일본의 자료이거나 일본이 발표한 내용을 참조한 것이 다. 일본은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해외에 홍보하는 사업에 일찌감치 투자, 그 결실을 거두고 있다. 그로 인해 해외에 알려지는 아시아의 문화와 역사에 일본의 시각이 반영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자국이 부르짖는 가치관과 역사관을 홍보하는 것은 국가 이익의 논리로 보아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하다. 그에 반해 우리는 해외 홍보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세월이 흘러 지금 일본과 같이 자국의 사상과 논리를 선전하는 수준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하는 수준이다. 일본의 왜곡된 역사교과서를 올바로 시정하고 제대로 된 역사를 세계에 알리는 작업의 결과는 단기간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꾸준한 노력이 요구되며, 이 사안에 대해 중요하게 인식해야만 한다.
한국교육개발원의 ‘한국 바로 알리기 사업팀’ 팀장 이찬희 박사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문제에 대해선 우리 국민들이 잠깐 흥분했다가 끝나는 게 문제”라며 “앞으로 인터넷에 이 분야 연구논문과 자료들을 통합해 띄우는 자료전산화 작업이 우선 시급하다”고 정부와 국민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촉구했다.
과거 전범국이던 독일과는 판이한 일본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역사에 대한 숙제를 짊어지고 있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일본과 같은 전범국이었던 독일의 역사는 지대한 관심사로 떠오른다.
1970년 12월 당시 서독 총리였던 빌리 브란트. 폴란드의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 추모비 앞에서 비가 내리는 악천후
속에서도 2차대전 당시 독일이 저지른 범죄 행위에 대해
참회했다.
독일은 일본처럼 세계 대전의 전범 국가지만 그들의 역사
접근방식은 일본과 크게 다르다. 독일은 그들의 과거가 ‘집단
범죄’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역사관에서 출발한다. 전후
독일의 국가적 정체성은 나치를 부정하는 기반 위에 서 있다.
전후 동서독은 모두 철저한 과거사 반성과 청산작업을 단행하여, 서독의 경우 나치범죄자 1만 3천 명을 처벌하고 주변국과 이스라엘 등 피해국가에 대한 거듭된 사죄와 배상, 경제지원 등 온갖 노력을 경주해 왔다. 1962년 서독은 이스라엘과 배상협정을 맺고 250억 마르크를 국가 배상금으로 지불하는 한편 추가로 150억 마르크를 나치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지급했다. 또 나치 피해보상법에 따라 국적에 관계없이 720억 마르크의 개별보상금을 지급했으며, 폴란드,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주변국에는 별도로 150억 마르크의 배상기금을 출연했다. 이를 모두 합치면 2천억 마르크에 달한다.
전후 4반세기 만인 1970년 12월, 당시 서독 총리였던 빌리 브란트는 폴란드를 방문해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 추모비 앞에서 2차대전의 범죄행위에 대해 사과를 했다. 그는 쏟아지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릎을 끓고 눈물을 흘려 사죄했다.
통일 후 독일은 지난해 7월, 나치강제노역 피해자 배상에 관한 협정을 미국, 이스라엘, 러시아, 폴란드 등과 사실상 마무리지었다. 2차대전 중 나치 점령지에서 군수기업 등에 동원되어 강제노역을 한 피해자 중 생존자를 위해 1백억 마르크(50억 달러)의 배상기금을 조성한다는 내용의 협정을 이들 나라와 체결한 것이다. 이 협정이 수혜 대상으로 삼고 있는 생존 피해자는 폴란드, 러시아 등 중동부 유럽에 약 70만 명 그리고 미국에 약 20만 명 정도인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 중 재미 피해자 일부가 미국법원에 집단소송을 제기하여 2년간 협상 끝에 일괄배상 합의에 이른 것이다.
독일은 나치의 죄과로 인해 참담한 패전과 분단을 안았지만, 전후 수십 년간 정성을 다한 자발적 배상을 통해 과거사에 대한 속죄를 행동으로 실천하여 도덕성을 회복하고 거듭났다. 이런 독일의 도덕성은 교과서에도 잘 나타나 있다. 명확한 역사관과 과거 청산의 의지를 지닌 독일은 교육법에서 교과서의 기본요건으로 “교조적인 사상을 주입하거나 국가의 중립성, 사회의 관용성 원칙을 침해하는 내용을 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학교 교육의 목적으로는 “나치주의와 폭력적 지배를 추구하는 모든 이데올로기에 대해 불굴의 의지로 저항하는 인간을 육성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독일은 전후 역사 교과서를 편찬할 때 폴란드, 프랑스 등 이웃 나라들과 협의과정을 거친다. 서로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오해의 소지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독일, 프랑스, 폴란드의 역사·지리학자, 교사들은 장기간 위원회 활동과 공동 연구를 통해 권고안 형태의 합의문서를 만들어 이를 자국의 교과서 편찬에 적극 반영한다. 이 방법은 과거 불행한 역사를 공유한 해당국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교과서 왜곡분쟁을 미연에 방지하는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독일의 학교와 시민단체도 유대인 학살 현장인 강제수용소 견학을 수시로 실시, 잘못된 역사에 대한 성찰을 통해 편협하지 않은 국민, 세계 시민으로서의 정신을 고취시키고 있다. 독일의 이러한 나치 청산에 대한 태도는 초·중·고교의 교육과정에서도 관철되고 있다. 직접 세계2차대전 당시 포로수용소를 견학하는 등의 프로그램을 설정, 전쟁의 참상을 보고 느끼게 해준다.
독일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박흥기 씨는 김나지움 6학년(고1) 때 안네 프랑크가 머물렀던 ‘베르겐-벨젠’이라는 이제는 박물관이 된 포로수용소로 수학여행을 간 적이 있다. 그는 “전쟁 직후 해골이 쌓여있는 사진을 슬라이드로 보여주고 가스실을 재현하는 등 자라나는 학생들 앞에 여과없이 나치의 죄과를 보여주는 점이 참 인상적이었으며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당시의 경험을 술회했다.
이처럼 역사 청산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사죄, 배상에 전념을 다하여 나치로부터 단절하고자 노력하여 국제사회에서도 인정받고 있는 독일과 달리 2차 대전 중 수백만의 사상자를 내고, 1백만 명이 넘는 한국과 중국, 필리핀인을 전쟁과 강제노역에 동원한 일본은 피해자에 대한 개별배상을 현재까지 거부하고 있다.
일본의 이런 태도에 대해 일본 전문가인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 개번 매코맥 교수는 “근본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전쟁 책임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범 처리가 불충분한 가운데 냉전을 맞아 일본 제국주의의 과거 청산이라는 과제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결국 이는 최근 ‘국체’라든가 천황 절대주의 등 1930년대의 의식이 다시 부상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고 지적하며 특히 사회당마저 헌법, 국기와 국가 문제 등에 대해 입장을 바꾸고 있으며 지도급 지식인들도 점차 국가주의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이 일본의 현주소라고 우려했다.
물론 일본 내에서 ‘어린이와 교과서 전국 네트 21’을 비롯한 단체들과 일부 양심적인 지식인의 역사 왜곡 교과서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우익 세력의 확대로 인하여 이들의 주장은 거대한 우익 소용돌이 속에 묻혀버리는 게 현실이고 보면 「신일본역사교과서」는 발행될 것임에 분명하다.
일본이 역사를 왜곡한 교과서를 발행하여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관에 반하는 자국의 국가주의적 가치를 앞세우는 것은 일본의 국익을 위해서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유럽과 북미의 지역적 결합이 급진전함에 따라 동아시아의 단결이 당면 과제로 떠오르고 있는 이 때, 일본의 태도는 동아시아 공동체 형성에 큰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자칫 국가적 양식도, 자부심도 없는 것으로 비춰져 국제적인 고립을 자초하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를 일이다.
왜곡된 역사의 희생자는 미래세대다
교과서는 삶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정립시키는 과정에 있는 학생들이 가장 가깝고 오래 접하는 책인 만큼 미래세대에게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 그래서 국가는 다음 세대를 짊어질 젊은이들에게 국가의 교육 이념이나 목표를 구현하기 위해 교과서라는 수단을 사용하기도 한다. 특히 역사교과서의 경우 과거를 반추하여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교훈을 주기 때문에 더욱 더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서술이 요구된다.
역사는 지구상에 있었던 수많은 과오가 되풀이되어왔음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열등의식을 포장하기 위해 민족의식과 자신감 회복이라는 미명하에 실제로 있었던 침략을 부정하고 조작된 역사를 실음으로써 삶의 가치나 세계관이 올바로 정립되어야 할 시기에 있는 학생들에게 자칫 가치관의 혼돈과 도덕성의 부재로 이어질 개연성이 농후하므로 일본의 역사 왜곡은 결국 자승자박(自繩自縛)하는 셈이다. 따라서 「신일본역사교과서」는 더욱더 사실을 기록해야 할 의무가 있다. 피해 당사국들은 연대를 통하여 지속적이며 체계적으로 바른 역사관을 요구해야 하며 철저한 사죄와 보상을 받아내야 할 것이다.
“아우슈비츠보다 더 무서운 것은 단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인류가 그 사실을 잊는 일이다.”
2차대전 때 유대인 학살현장이었던 폴란드 아우슈비츠에
세워진 기념비에 적힌 내용이다. 지난 과오에 대한 인간의
망각 때문에 한번 일어난 비극이 다시 되풀이될 수 있다는
경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