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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의 눈부심으로 빚은 감동의 메아리
― 이양순 시인의 시세계
리 헌 석
(시인, 문학평론가, 대전문인협회 회장)
1. 이양순 시인 엿보기
이양순 시인은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고 자란다. 평생의 업으로 공직에 들어선 이래, 현재 보은군 보건소에서 우리나라 보건 행정을 위해 솔선수범하는 공무원상을 보이고 있다.
불혹(不惑)을 넘기며 그는 삶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시로 빚고자 한다. 문학 창작 수련기를 거쳐, 1999년 <시와 비평>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문인의 길에 나선다. 충청북도 행정공무원 중 문학인들이 모여서 ‘행우문학회’를 결성하고, 문학 행사와 문학지 『행우문학』을 발간하는데, 이양순 시인도 이에 참여하고 봉사한다.
직무에 성실하면서도 문학 창작의 고삐를 놓지 않은 채 창작에 몰두하여 등단 5년 만에 시집 『바람에게 말 걸기』를 발간하기에 이른다. 이는 1년에 10편 내지 20편 정도 정선(精選)한 경우인데, 다작(多作)도 아니면서, 또한 과작(寡作)도 아니어서, 꾸준히 시심을 갈고 닦은 결과라 하겠다.
그는 좋은 작품을 빚기 위해 밤잠을 설치면서 고뇌한다. 좋은 작품은 강물이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게 아니다. 시어 하나를 찾기 위해 불면의 세월을 보내야 하고, 감정의 정확한 전이를 위해 남모르는 가슴앓이를 앓아야 하며, 작품 1편을 완성하기 위해 때로는 생명을 걸고 창작에 몰두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어느 정도 마음에 드는 작품을 빚게 된다. 그러나 시의 완성이라는 것은 너무나 먼 길이어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비로소 빛나는 작품을 창작하게 된다.
싸움이다.
촛불을 켜고
가물거리는 의식의 끈을 잡고
함께 하는 줄다리기다.
똑딱거리는 시간을 잠재워도
높아진 채 침몰하는
차디찬 이마.
아, 새벽이다.
―「불면(不眠)」전문
그는 불면의 밤을 지새며 작품을 빚고, 그 작품을 통해 뭇 독자들과 가슴 떨림을 공유하고자 한다. 서정의 눈부심으로 감동의 메아리를 빚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이양순 시인의 작품 창작 자세라 하겠다.
현대 시인들의 가장 큰 화두는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집중된다. ‘무엇을’에 대한 일반적인 답은 인간 삶의 전체와 이 세상 사물의 전체라고 한다. 이는 세상의 모든 것이 시의 제재로 가능하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지만, 이 화두에 대한 답은 그보다 조금은 좁혀야 할 듯하다.
박용래 시인은 후배 시인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이 시를 쓰기 전에 가슴이 울렁거리고 코끝이 찡하던가?” 즉 시인 스스로 감동할 만큼 넘쳐흐르는 감정의 발로가 있었느냐는 물음이다. 김규동 시인은 “이 시를 쓰기 전에 울음 울었느냐?”고 묻는다. 통일을 위해 눈물을 흘릴 정도로 절실할 때 시를 쓰라는 말씀이다. 사랑을 위해 눈물을 흘릴 정도로 절실할 때 시를 쓰라는 말씀이다. 이는 영국의 계관시인 윌리암 워즈워드가 말한 ‘자연스런 감정의 발로’라는 시의 정의와도 통하는 맥락이다.
이양순 시인의 작품을 정독(精讀)하고 나서, 그 역시 이와 같은 제재로 작품을 빚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절실한 시를 빚고 있다는 점, 때로는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감동을 부여할 1차적 단계에 합격점을 받고 있다.
그 다음, ‘어떻게’ 표현하느냐, 이 과정이 문학을 예술답게 만드는 핵심 요소에 해당한다.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시인의 내면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수용되느냐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양순 시인은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여 독자와의 공감대를 형성하는가, 이에 대한 분석과 정리가 본고의 목적이다.
2. 그리움 그리고 추억
이양순 시인이 간직한 첫 번째 불면의 시심은 그리움을 동반한 추억으로 보인다. 그리움의 대상은 분명한 작품과 그러하지 않은 작품이 있는데, 가족과 연인에 대한 것은 전자의 경우이고, 막연한 동경의 대상에 대한 시는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어떠한 경우든지 간에 시인이 노래한 그리움이 너무나 절실하여, 그가 빚은 작품은 독자의 가슴에 감동의 메아리를 생성한다.
러시아의 문호 푸쉬킨은 오래 전에 시 「삶」의 끝부분에서 <지난 날은 언제나 그리운 것>이라고 노래했다. 이처럼 추억은 언제나 그립게 마련이고, 이 그리움은 많은 시인들의 작품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새벽입니다.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도회지로 떠나간 당신은
꽃철과 꽃 진 자리와
물안개 차오른 호수와
추운 날 따스했던 눈사람과
하늘빛 닮은 서러운 바다에서
아아, 떠나지 않고 있었다니요.
잊었습니다.
비 내리는 새벽
빗줄기를 타고 온 당신이
내 창을 두드려도
그리움은
밀쳐 둔 노트 속
정갈한 행간에나 있습니다.
―「그리움에게」 전문
이 시를 단순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시인은 비 내리는 새벽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당신’이라는 대상으로부터 추억의 여러 요소들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고백을 듣는다. 그러나 시인은 이미 오래 전에 잊었기 때문에 ‘당신’이 찾아와도 소용없으며, 그리움은 노트 속에 있는 과거라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이 작품은 비유와 역설에 의하여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1연에는 비 내리는 새벽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상황이 설정되어 있다.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원인은 2연에 나와 있다. 도회지로 떠난 ‘당신’은 과거의 아름다웠던 추억을 잊지 못하고 있다고 시인에게 고백한다. 꽃이 피는 아름다운 계절(꽃철), 꽃이 진 자리, 물안개 차오르는 호수, 눈사람, 바다 등의 사물을 잊지 않고 살았노라고 고백한다. 이는 시인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사물이기에 작품 속에 등장된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당신’이 아직도 시인을 사랑하고 있다는 고백이며, 시인 역시 같은 맥락이다.
3연에서 시인은 ‘잊었다’고 단언한다. ‘당신’에 대한 그리움은 ‘노트 속’에 글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며, 그것은 노트 속의 ‘정갈한 행간’에나 있는 과거의 추억일 뿐이고, 현재는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비 내리는 새벽/ 빗줄기를 타고 온 당신이/ 내 창을 두드려도>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시인이 단언한 <잊었습니다.>라는 표현은 반어적 해석을 유도한다. 즉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잊을 수 없을 만큼 절실한 그리움이라고 강조하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시인은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며, 비가 내리는 것까지 작품 속에 자리할 수 있는 것이다. 새벽에 내리는 비는 시인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방울로 환치할 수도 있고, 나아가 울음을 울 수밖에 없을 만큼 절실한 그리움이라고 웅변하는 것이다.
그리움의 대상인 ‘당신’이 <하늘빛 닮은 서러운 바다에서/ 아아, 떠나지 않고 있었다니요.>라고 노래한 행간에서 독자들은 시인의 가슴에 넘쳐흐르는 그리움의 물줄기를 만날 수 있다. 그리하여 그 물줄기에 담겨 있는 그리움의 정서를 공유하게 된다.
비 내리는데
귀 기울이면 그대
낮은 목소리 들린다.
마주 잡은 손을 펴면
남태평양 물 빛 바다가 넘치고
밤바다에 반짝이던 별
그대 눈 속에서 빛나던 날
나는 그대 눈
마법의 성에 갇혔네.
―「너를 사랑한다」일부
‘당신’의 부재에서 생성된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이 「그리움에게」라면, 「너를 사랑한다」는 ‘그대’의 부재 속에서 절실한 사랑을 고백한 작품이다. 앞의 작품이 고백을 받고 쓴 작품이라면, 뒤의 작품은 시인 스스로 고백한 작품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중심에 흐르는 그리움과 사랑의 정서는 동질적이다.
‘마법의 성’에 갇힌 시인은 <너를 사랑한다/ 전보인 듯 다급한 맘/ 뒤돌아보며/ 너를 사랑한다/ 거짓말처럼 너는 떠나가고/ 너를 사랑한다/ 비 내리는 바닷가에서/ 너를 사랑한다>고 수없이 고백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폭발적 정서를 작품으로 갈무리하여 독자의 가슴에 감동의 메아리를 짓는 것이 이양순 시인의 수준 높은 문학적 역량이다.
3. 애상 그리고 허정
이양순 시인의 작품에서 감동을 주는 또 다른 제재는 애상적 정서로 보인다. 특히 과거에 맞닿아 있는 소재들에서 시인의 눈빛은 반짝인다. 아마도 현실보다는 과거의 사물들이 더 아름답게 추억되기 때문인 것 같다.
기쁘고 아름다웠던 추억보다는 슬프고 고달팠던 삶에 대한 추억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는 정서의 특성에 연유하는 듯하다. 기쁘고 아름다웠던 정서는 바라던 바를 이루었을 때 생성되는 것이고, 애상적 정서는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나, 이루지 못한 일,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더욱 간절하게 기억될 것이다. 그래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절실하게 마련이다.
바람 불던 날
이장네 둘째가 죽던
열여드레 날
동네 장독마다 감꽃이 떨어졌다.
거적 덮인 수레가 산비탈을 오르고
찔레꽃이 기어서 그 길을 오르고
감꽃 목걸이
아이들이 따라 오르고
풋감 같은 아이를 감나무 골에 묻었다.
혼절한 아내를 수레에 싣고
감꽃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는 이장,
죽은 둘째 아들의 아버지
바람 부는 5월
산감나무 꽃 지는 비탈에
뻐꾹새 울음, 울음 새하얗게 진다.
―「5월」전문
넘치는 슬픔을 객관적 시각으로 빚은 애이불비(哀而不悲)의 작품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감상하면서, 시인이 이장 둘째 아들과 어떤 상관관계에 있을까, 막연한 호기심이 일어나게 하는 작품이다. 시인에게 직접 물어본다면, 그야말로 확연하게 밝혀질 터이지만, 모든 독자가 시인에게 물어볼 수는 없는 것이어서, 작품만으로 유추하기로 한다.
중심 개요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5월은 감꽃이 피고 지는 계절이다. 그때쯤 이장네 둘째 아들이 요절한다. 거적에 묶여 장례를 치른다. 지금도 그때가 되면 뻐꾹새가 운다.>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서술한 듯한 이 작품을 좀 더 깊이 확인해 보자.
이장네 둘째가 죽던 날은 <열여드레 날>이다. 무수한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 날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두 사람의 관계가 범상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한다. 짝사랑하는 연인이었을 수도 있다. 혹은 동생이나 오빠, 가까운 친척인데, 객관적 입장을 취해 빚었을 수도 있다. 어떤 관계이든지 시인이 오래 기억할 만큼 심정적으로 가까운 대상임에는 틀립 없다.
마지막 연의 <바람 부는 5월/ 산감나무 꽃 지는 비탈에/ 뻐꾹새 울음, 울음 새하얗게 진다>고 노래한 것은 뻐꾹새를 빌어 자신의 내면을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직접적으로 노래하지 않아 다의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표현의 멋, 이것이 이양순 시인의 문학적 개성이고 장점이라 하겠다.
대웅보전 언덕에 할미꽃이 피었다
연못 속 잉어를 내려다보는
인적 드문 길가
애기 스님
끝 간 데 없는 계곡을 따라
구불구불 흘러가는 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누가 지나갔길래
이 길이 편할까
석양 노을 물 위에 파닥일 때
불영사 제비꽃
계곡 끝에 피어나는 따스한 기운
세상으로 내딛는
발걸음 무거워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몸만 빠져 나왔다
―「불영사」전문
시인은 어느 봄날 불영사를 찾아간다. 대웅보전으로 가는 언덕길에 할미꽃이 피어 있다. 언덕 아래 연못에는 잉어들이 놀고 있고, 인적이 드문 길가에 애기 스님 혼자 계곡을 따라 세상으로 가는 산길을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서경을 묘사하던 시인은 애기 스님이 <구불구불 흘러가는 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라는 절창을 얻기에 이른다. 이는 애기 스님에 의탁하여 자신의 내면을 노래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표현에 의해 이 작품은 일차적 성공을 거둔다.
길과 시간은 직접적 접합점이 없지만,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유기적 구조체가 된다. 길은 무수한 시간과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이루어낸 구체적 산물이면서 동시에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는 <누가 지나갔길래/ 이 길이 편할까>라고 노래하여, 시인 스스로 도달한 깨달음의 경지를 보여 준다.
이러한 깨달음은 허정의 경지를 지향한다. 석양 노을이 연못 물 위에 파닥일 때(잉어 때문이 아닐까?), 시인은 불영사의 제비꽃처럼 낮은 존재가 된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희로애락(喜怒哀樂)은 남겨 두고, 몸만 빠져 나왔다고 실토한다. 이러한 고백은 그가 불교에 심취되어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는 여러 작품에서 불교적 시심을드러내는데, 관조와 허정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4. 나무 그리고 바람
이양순 시인은 비[雨]에 의탁한 애상적 정서를 담은 작품을 다수 선보인다. 이와 함께 나무와 바람에 의탁하여 자신의 내면을 표출하기를 즐기는 것 같다. 그는 나무에 대해 굳건한 믿음과 존경을 표하기도 한다. 이는 뿌리 내린 나무가 작은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는 속성 때문으로 보인다. 이는 용비어천가에서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린다>고 한 것과 동질적이다.
바람은 시인 자신이 되기도 하고, 시인과 맞서는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이는 변화무쌍한 바람의 속성에 연유한 듯하다. 그 바람은 나무에게 부정적 위해를 가하는 대상이 되기도 하고, 나무를 사모하는 연인이 되기도 하며, 이별하고 떠나는 무정한 사람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때론 당신도
바람을 붙들고 싶겠지요
어쩌면 바람이
당신을 붙들고 있는지도요
당신과 바람이 함께
길을 막고
그네를 타는
오늘, 바람 부는 날
누구든지 또한 그렇게
함께 머물고 싶지요
머무르고 싶지요
그럴 수 없는 나
당신을 멀리 돌아
지나칠 뿐이지요
―「바람 부는 날」(내 사랑 둥구나무 3) 전문
이 작품에 한정하여 살핀다면, ‘당신’은 느티나무면서 남성을 상징한다. 바람은 그 사람을 붙들고 있는 부정적 대상이고, 서정적 주체는 그 바람과 동격으로 보인다. 어찌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그 누군가(바람)에게 빼앗기고 숨어 사는 사람의 하소연으로도 보인다. 그러면서도 소극적이고 체념 섞인 주체의 간절함이 작품 속에 녹아 있다.
나무에 대해 시인이 갖는 감정은 특별하다. <날은 저물어오는데/ 하늘문은 닫힐 줄을 모릅니다/ 내 사랑 둥구나무/ 당신은 건너편 둑방에 홀로 서 계십니다>(내 사랑 둥구나무 4)에서 시인의 간절한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그 사랑은 <떠나간 당신의 사랑보다/ 빈 집을 지키는/ 당신이 더 미워요>라고 말하여, 고향을 지키는 부모님이나 마을 어른들을 연상하게 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랑은 일방적일 때가 더 절실하다. <붉게 언 손으로 일어서는데/ 툭, 당신은 자신의 몸을 부러뜨려/ 아는 체하십니다/ 어쩌면 좋아요/ 상처 난 당신을 사랑합니다>(내 사랑 둥구나무 8)라고 순수하게 사랑을 고백한다. 더 나아가 <당신 서 있는 그 곳에/ 함께 소복으로 설 수만 있다면/ 서서 풍장을 당해도>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 사랑하겠노라고 다짐하기도 한다.
빈 들
핏빛 노을에
지평선을 대좌하고
제 몸을 태우는
부처, 한 그루 나무
훌쩍
키를 넘어 하늘에 닿는
외로움을 본다
시린 사리 남기려
서녘 하늘 끌어안고
육탈하는 큰 사람
―「나무 2」전문
이양순 시인의 의식 속에는 나무의 희생이 ‘부처’의 수준에까지 이른다. <하늘에 닿는/ 외로움>은 중생들이 따를 수 없는 높은 경지를 상징하기도 한다. 즉 선각자들은 군중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듯이, 나무 또한 그러한 외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대상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위치에서 <시린 사리>를 남기는 나무가 중생을 구제하고 열반에 든 부처로 연상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특히 잎이 지는 현상을 <육탈하는 큰 사람>이라고 비유한 것은 놀라운 발상이다.
이렇듯이 시인은 작은 사물에서 그 자체에 대한 이미지와 의미, 인간 삶의 다양한 비유, 나아가 종교적 신비까지 담아낼 수 있다. 이런 상상과 표현이 바로 시인을 시인답게 만드는 요소로 기능한다. 이양순 시인의 여러 작품에서 이러한 형상화를 확인하게 되는데, 이는 그가 수준 높은 작품을 창작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5. 서정의 눈부심을 찾아
이양순 시인은 담결(淡潔)한 그리움을 지향한다. 모과 향에 몸을 씻는 바지랑대, 고추잠자리마저 맴돌다 떠나 버린 바지랑대를 지향한다. 그 끝자리에 머문 하늘빛을 사랑한다. 눈시울 떨릴 정도로 빛나는 사파이어 빛을 사랑한다.
길어진 모가지에
그리움을 받쳐 들고
모과 잎 시든 향에 몸 씻는
바지랑대
산화하는 태양
은빛이 부끄러운
고추잠자리 맴돌다 그냥 간
바지랑대 끝자리
하늘은 푸른 빛
눈시울 떨리는 사파이어 빛
―「가을 소묘(素描)」전문
무릇 시인이 추구하는 시 세계는 몇 갈래로 한정하여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게 마련이다. 이양순 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만, 편의상 이와 같이 정리한다. 못 다한 부분의 정리는 다음 분에게 맡기고 돌아보니, 개성적인 제재, 멋진 표현, 진정어린 시심 등이 정말 눈빛을 빛내며 살아 있다.
<찬 불씨를 품고/ 화석으로 누운 그녀가/ 41억 3천년만에 깨어나고 있다>고 표현한 「휴화선 1」에서 시인의 저항적 내면을 만나게 된다. <보름이면 나 또한/ 저 달과 눈 맞아/ 그대 눈썹이라도 닮은 활/ 큐피드의 화살을 떠나보내느라/ 팽팽한 시위를 붙들고/ 온 방을 헤매이지>라고 노래한 「보름이면」에서 그의 상징적 시심을 엿보게 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부활을 고대하며/ 눈물 속에 던져 버린 십-자-가-/ 때로는 분질러진 십자가>를 통해 신앙에 대한 개성적 인식을 보여 준다. <갈매기의 저 아름다운/ 지켜봄으로/ 갈대의 저 아름다운/ 죽음이 완성되는 순간>을 노래한 「갈대와 갈매기」는 상호관계의 미적 구조를 노래하고 있다.
이외에도 서정의 눈부심으로 빚어 낸 감동의 메아리를 수 없이 찾아 볼 수 있지만, 그 작품에 대한 감상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기고 일차적 작품 기행(紀行)을 맺는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