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9. 25. 설교문
기원 30. 시편139편
묵상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게 하옵소서.
신앙고백
찬송 34 전능왕 오셔서
기도인도 노미례 집사(김태숙 전도사)
성경말씀 에스겔12:1(21)~28
찬양 138. 만왕에 왕 내 주께서
설교 나는 여호와다.
봉헌찬송
광고 추수감사절 총동원 주일로(특송2팀), 2층 완공될 수 있도록, 익산역 아침식사위해
찬송 492. 나의 영원하신 기업
축도 헛된 속담에 속지 말게 하옵소서.
옛날에 게으른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게른뱅이 아들에게 메밀밭을 매라고 했습니다.
그 아들은 메밀국수가 싫다고 거절했습니다.
그 후 온 식구들은 메밀국수를 해 먹었습니다.
물론 게으른 아들은 빼고 먹었습니다.
며느리는 제 서방이 못 먹으니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밤에 게른뱅이 서방을 불러 외양간에 들어가 있게 하고
색시는 게른뱅이 아들에게 맛있는 메밀국수를 주었습니다.
외양간에서 후루룩 후루룩 메밀구수를 먹고 있는데
어머니가 뒷간에 가다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도둑이 국수를 훔쳐 먹는 줄 알고 쫓아 들어가 상투를 잡고
소리쳤습니다.
도둑잡았다!
도둑이 메밀국수 훔쳐 먹는다!
애, 며늘아! 국수도둑 잡았다!
부뚜막에 가서 성냥 가져와라!
며느리는 제 서방인줄 알고 의뭉을 떨었습니다.
성냥이 없었요!
어머니가 와서 찾아보세요!
도둑은 제가 붙잡고 있을게요!
시어머니가 성냥을 찾으러 간 사이 색시는 서방의 상투를 놓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소뿔을 대신 잡고 있었습니다.
돌아온 시어머니가 놀라며
난, 도둑의 상투를 잡은 줄 알았는데 소뿔이었구나! 말하자
외양간 뒤에 숨어있던 아들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흐흐흐 웃고 말았습니다.
며느리도 겸연쩍어하며
아이, 소가 다 웃네!
그래서 생긴 속담이 ‘소가 다 웃겠다’
살다보면 소가 웃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문 22절입니다.
인자야 이스라엘 땅에서 이르기를
날이 더디고 모든 묵시가 응험이 없다하는
너희의 속담이 어찜이뇨.
23절,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속담을 그치게 하리니 사람이 다시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 속담을 못하리라 하셨다 하고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날과 모든 묵시의 응함이 가까우니
24절, 이스라엘 족속 중에 허탄한 묵시나 아첨하는 복술이
다시 있지 못하리라
속담은 예로부터 민간에 전하여 오는 지혜가 담진 격언입니다.
또한 속담 속에는 당시 시대적 애환과 윗트가 담겨져 있기도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계속 되면서 이런 속담이 생겼습니다.
날이 더디고 모든 묵시가 응험이 없다
다시 말하면
세월이 지나도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에스겔, 예레미야, 이사야, 다니엘 등 선지자들이
무수히 많은 심판의 경고를 남겼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누가 뭐래도 끄덕없고 웃기는 애기라는 것입니다.
불신앙이 매우 심각했습니다.
도덕적, 영적 불감증이 심각했습니다.
에스겔선지자의 말뿐만 아니라
그 누구의 말도,
아무것도 믿어서는 안 되는 불확실한 시대였습니다.
까치가 나무위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옆 나무에 소리개가 앉아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까치는 소리개가 제 새끼를 잡아 먹을까봐
나가지도 못하고 소리개의 동정만 살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소리개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입니다.
까치가 소리개에게 물었습니다.
너 지금 뭐하고 있느냐?
소리개가 대답하기를 나 지금 학學하고 있다.
學이 뭔데?
응, 학이란 해물지심害物之心이 없어지는 공부야.
그 말을 믿고 까치는 새끼 밥을 구하러 나갔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소리개가 까치 새끼를 다 잡아 먹었습니다.
까치는 황당해서 소리개에게 따졌습니다.
학을 하면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 없어진다더니
어째서 다 잡아 먹었었느냐?
學도 먹어야 하는 게다.
그래서 나온 속담이 있습니다.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곧이듣는다.’
아직도 나같이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위해
아직도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는, 항상 말뿐이라고 빈정대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참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전혀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러나 혹시 깨달을 수도 있기 때문에 참고,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곧이들으려는 심정입니다.
지난 10일 뉴질랜드에서 해괴한 스포츠가 열렸습니다.
‘누드 블랙스’라는 럭비 대표팀이 있는데
선수 전원이 알몸으로 경기에 참가 했습니다.
그 모습이 신문에 게재 되었는데 참 과관 이었습니다.
시대가 사악해지면 해질수록 이런 이상한 행동들을 많이 합니다.
더 이상 말로는 이해시킬 수가 없을 때 이상한 행동으로 시선을 끕니다.
에스겔도 그랬습니다.
3절입니다.
인자야 너는 행구를 준비하고 낮에 그들의 목전에서 이사하라
네가 네 처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그들이 보면
비록 패역한 백성이라도 혹 생각이 있으리라.
4절, 너는 낮에 그 목전에서 네 행구를 박으로 내기를
이사하는 행구 같이 하고 저물 때에 너는 그 목전에서
밖으로 나가기를 포로되어 가는 자같이 하라
5절, 너는 그 목전에서 성벽을 뚫고 그리로 쫓아 옮기되
6절, 캄캄할 때에 그 목전에서 어깨에 메고 나가며
얼굴을 가리 우고 땅을 보지 말지어다.
이는 내가 너를 세워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게 함이니라.
에스겔은 이렇게 멀정한 대낮에 백성들이 보는 가운데
이상한 행동을 했습니다.
갑자기 행구를 꾸렸습니다.
행구는 전쟁이 나면 피난 가려고 꾸리는 짐 보따리입니다.
그리고 저물 때에 집 벽을 뚫었습니다.
그리고 캄캄할 때에 행구를 메고 담 벽 구멍으로
도망가는 사람처럼 얼굴을 가리고 멀리 떠났습니다.
이 모습을 본 백성들의 반응은
비웃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여전히 무관심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혹, 무언가 깨달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악하고 패역한 시대에는
정상적인 행동으로는 전혀 관심을 끌 수가 없습니다.
이런 기이한 행동이라야 겨우 주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습니까?
2절입니다.
인자야 네가 패역한 족속 중에 거하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라
지금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들어도 듣지 않습니다.
보아도 못 본 척 합니다.
그리고 듣기 좋은 말에만 솔깃합니다.
패역한 족속이기 때문입니다.
‘패역한’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메리’입니다.
메리는 ‘쓴’, ‘거역하는’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말씀뿐만 아니라 매사에 불평하고 반항 합니다.
그리고 비아냥거립니다.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저 역시도 그렇습니다.
긍정적이지 못합니다.
비판적입니다.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 못 마땅합니다.
요즘 세태가 그렇습니다.
불신이 팽배합니다.
심리학자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IMF 위기를 겪으면서 우리 가슴에 이런 상처가 생겼답니다.
이 세상 누구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우리 미래가 너무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IMF 위기 때부터 우리들은
자기 자신 말고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믿을 수 없다는 상처를 껴안고
도대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홀로 걷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를 일컬어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말합니다.
부부간에도 믿음이 없습니다.
부모자식 간에도 믿음이 없습니다.
목사와 성도 간에도 믿음이 없습니다.
성도와 성도 간에도 믿음이 없습니다.
대통령과 국민은 서로가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정치인을 믿겠습니까?
그래서 요즘 안철수 열풍에 정치인들이 깜짝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
안철수 교수는 정치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디 정치인들뿐이겠습니까?
종교 지도자들의 명예도 땅에 떨어졌습니다.
목사인 저도 부끄럽습니다.
말씀을 들고 설 때마다 막막하기도 합니다.
소귀에 경 읽는 것은 아닌 것인가?
옛날 산골에 한 형제가 송아지 길들이기에 열중이었습니다.
형님은 앞에서 고삐를 잡고
동생은 쟁기를 잡고 밭을 갈며 송아지 길들이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동생은 송아지에게 이랴! 저랴! 하고 싶어도
형님이 앞에서 송아지 고삐를 잡고 있으니 차마 이랴! 저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형님! 이리 가이소! 형님! 저리 가이소!
그러면서 송아지 길들이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동생 혼자서 밭을 갈게 되었습니다.
밭을 갈면서 이랴! 저랴! 아무리 해도 소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형님! 이리 가이소! 형님! 저리 가이소!
그때야 비로소 소가 말을 잘 듣더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이상한 행동을 보이셨습니다.
에스겔의 이상한 행동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망하게 될 것이라는 예표였습니다.
에스겔의 상징적인 행동은 주전 592년 6월 이후에 행했습니다. (겔8:1)
그리고 6년 후,
주전 586년에 이 모든 일이 그대로 이루어 졌습니다.(왕하25:1,7. 렘52:4,11)
당시 유다왕 시드기야와 군사들은 밤중에 성벽의 구멍을 뚫고
얼굴을 싸고 변장하여 도망치다가 바벨론 군사의 추격을 받았습니다.
붙잡힌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시드기야는 그의 아들들과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처형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힌체 바벨론으로 끌려가
죽는 날까지 감옥에서 지냈습니다.(렘52:7,11)
에스겔의 이상한 행동은 만 6년이 되지 않아 그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참 선지자는 배척을 받고 인기도 없습니다.
그러나 거짓 사역자들은 환영 받고 인기도 좋습니다.
거짓 사역자들은 사람들에게 인기 발언을 잘 합니다.
평안 할 것이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걱정 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안심하고 즐기자.
22절입니다.
날이 더디고 모든 묵시가 응험이 없다.
세월이 지나도
에스겔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속담에 대하여 “그것이 어찜이냐”고
직접 심문 한 것입니다.
25절입니다.
나는 여호와라. ~
28절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말이 하나도 다시 더디지 않을지니 나의 한 말이 다 이루리라.
속담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갑니다.
형님! 이리 가이소!
형님! 저리 가이소!
버릇을 잘 들이면 모두 기분이 좋습니다.
송아지도 즐겁게 일할 수 있잖습니까?
하나님께서 참고 기다리실 때
잘못 된 버릇, 습성 지금 고쳐야합니다.
불신 버려야 합니다.
서로 믿고 살면 행복 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살면 즐겁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시기를 원하시느니라.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