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이 따뜻했던 시간들/이종효
봄이 오긴 왔어도 진우회장의 가슴엔 찬바람만 불었다. 진우회의 문학기행을 이태동안 가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올해에도 문학기행을 가지 못하면 야구경기에서 ‘삼진’이라는, 자존감마저 흔들어버릴 수도 있는 사태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매화가 피고, 목련이 피고, 벚꽃이 피고, 개나리가 피고 또 졌어도 가슴엔 휑하니 찬바람으로 남았다.
문학기행 기획을 맡은 총무님은 모든 일을 척척, 뚝딱, 잘도 하시면서, 청바지 보다 더 끈질기게 시‘낙화’시리즈 『낙화4』까지 탈고하시고, 지난 문학기행에서 저녁밥을 안치는 준비성까지 겸비하시고도 ‘최소 정원 5명’의 ‘인원미달’로 문학기행의 ‘문’자도 들먹이지 말아달라는 섭섭함이 잔뜩 묻어나는 메시지를 남긴 후론 평소와 같이 매일 ‘시’ 한 편만 배달할 뿐 다른 말은 없었다.
오래 전에 읽었던, 제목만 보고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책,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을 기억해본다. 1970년대에 출간된 자서전 형식의 동화 같은 소설로, ‘작은 나무’라 불리는 주인공 꼬마가 산속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삶에서, 어린 손자에게 세상과 이웃과 호흡하며, 대자연에서 지혜와 영감, 그 중에서 『꿀벌들은 언제나 자기가 필요한 것 보다 더 많이 쌓아두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똑같아』라는 교훈과 ‘지혜’와 ‘여유’라는 단어가 문학기행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5월이 올 무렵 『푸른 꿈』시집과 『나에게로의 여행』에세이집을 남긴 고문님이 ‘절망은 느껴도 포기는 하지말자’며, ‘문학기행 둘이라도 떠나자’고 희망의 문자를 보내오면서 내 가슴의 찬바람은 서서히 온기로 바뀌어 절망이라 여겼던 ‘최소 정원 5명’이 희망으로 물들기 시작하여 ‘여성작가님 2명 이상일 경우 참여 가능’한 조건의 2+1명에서 3+1명, 4+1명으로 최소 정원 5명이 모이게 됨을 축복이라 여기며, 근간 강릉시 강문동 해변에 호텔식 펜션 건물을 신축하여 ‘블루스테이’ 상호로 운영한다는 친구의 SNS의 스토리가 생각나서 일정을 잡고 예약부터 하였다.
어느 때보다 업무의 속도와 시기, 그리고 민원에 대한 친절, 청렴까지 강조되는 일선 지방자치단체의 업무처리 구조에서 진정으로 문학기행의 휴식을 필요로 했던 회원님들은 이번 기행에 참여하지 못한 회원님들이라 생각해본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이 책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던져주며 지금 잠시 내 속도에 쉼표를 찍고 싶은, 그래서 여유와 조용한 자연을 찾고 싶고, 보다 더 지혜롭고 싶어서 다시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문학기행은 차창 밖으로 스치는 아름다운 오월이 온통 눈부시게 펼쳐지면서 시작되었다. 경상북도 안동시 상아동의 ‘50년헛제삿밥’일반음식점에서 안동간고등어구이, 안동전통음식인 헛제사밥에 안동소주를 곁들인 점심은 찬바람만 불었던 일행의 가슴을 데우기에 충분하였고, 후식으로 나온 안동식혜는 자신이 쉰 김치 국물을 즐기는 터라 그 맛이 일품 이었다. 도산서원과 이원록(陸史)문학관에서의 느낌, 꼬불꼬불 태백산맥을 넘어 강원도 삼척의 탄광촌을 지날 무렵에는 남쪽에서 벌써 피고 진 벚꽃이 있고, 개나리가 활짝 피어, 새로운 봄의 느낌으로 오롯이 새롭게 나를 바라볼 계기가 되기에 흐뭇하였다.
그런데 오롯이 나를 바라볼 여유가 없어진 것은 운전대를 잡고 강원도 삼척을 지나 산골에 접어들면서부터 도계에서 신기 간, 국도 14호선 개설공사 일부구간이 개통되면서 2년 전에 구입한 차량의 내비게이션 업그레이드가 되지 않아 새로 난 국도와 기존 국도를 갈아타며 최적의 길을 알 수 없어 운전의 여유가 없었던 그때, 조수석에 앉은 고문님이 핸드폰의 내비게이션으로 길을 안내해준 그 마음이 참으로 고마웠다.
그리고, 고마움은 계속 이어졌다. 동해바다가 발아래로 펼쳐진 옥계휴게소에서 김작가님이 건네는 따끈한 아메리카노 한 잔도 고마웠고, 지난번 뉴스를 보면서 애태웠던 강원도 산불로 옥계휴게소 커피숍이 불타버렸고, 가림 막으로 가려진 틈사이로 잿더미가 된 커피솝 실내도 보고, 불타버린 웅장한 산야를 보면서 참담함도 보았지만, 휴게소를 찾는 고객의 편의를 위하여 간이 커피코너를 마련하고, 친절한 휴게소 종업원에게까지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끈한 아메리카노를 반 쯤 마셔갈 무렵 강릉의 ‘블루스테이’숙소 대표의 도착예정시간을 묻는 전화가 왔다. 잊지 않고 시간 맞추어 기다려 준 친구가 고맙다. 도착과 동시에 체크인 안내를 받아 짐을 풀고, 바로 동문 모래해변이 훤히 보이는 해파랑횟집 2층에 자리를 잡고 생선회와 오징어순대, 물회와 전복죽으로 이어지는 안주들로 술잔을 기울이는데 모자람이 없었다.
지난 문학기행에서‘모래소주’가 생각난다. ‘모래소주’란 우리끼리만 아는 용어로 ‘반쯤 마셨던 소주병을 그네 옆에 세우고 천천히 그네를 타고 있을 때 누군가가 친절하게도 뒤에서 밀어주는 바람에 옆에 세워두었던 소주병이 모래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잡아채긴 하였는데 모래가 소주병으로 조금 들어갔던 그 소주’가 일명 ‘모래소주’이며, 그 때 그 그네도 그대로 있어 한참동안 그네를 타며, 밤 바닷바람으로 볼을 적셨다. 내 볼을 적시며 스쳐 지나간 이 바람이 행여 어릴 적 내 여자 친구의 볼도 스쳐갈 확률이 있을지 부터 시작하여 모래밭의 발자국들을 보면서 내가 남길 발자국까지 염려하면서 그렇게 강릉의 밤은 깊어 갔다.
밤 10시 무렵 카카오톡으로 사진을 보내며 산책 마치는 대로 오라고 했다. 친구 아내가 운영하는 ‘블루스테이’ 건물 2층 카페에 수제맥주 1인 1병과 날개치킨을 포함한 안주 세 접시 외에 유리포트에 가득 담긴 갈색액상은 커피보다도 연하고, 양주는 양주병에 담겨 있어야 품격이 있는데 유리포트에 담긴 알 수 없는 것에 호기심이 발동하게 만드는 사진 속의 내용물을 직접 미각으로 확인하기까지는 얼마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친구는 카페를 운영하는 아내로 하여금 종이가방에 선물을 준비하게 하였고,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어 나는 합장하며 고마움을 고개 숙여 전했다. 일행들을 소개하고 내 친구와 친구의 아내를 소개하고 수제맥주와 유리포트의 담금 주가 줄어들어든 만큼 대화는 따뜻함이 더해지고, 청바지 삼행시에 ‘청춘은 지금부터’로 건배도 하는 동안. 친구 내외분이 상냥하게 대하는 그런 모습들을 보며 몹시 부럽다는 색각을 하며, 더 오래토록 내외간의 행복을 기원하는 덕담 한마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 仁者樂山)의 준말로 지혜 있는 자는 사리에 통달하여 물과 같이 막힘이 없으므로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의리에 밝고 산과 같이 중후하여 변하지 않으므로 산을 좋아한다는 뜻의 樂山樂水 문구가 생각나서 ‘산은 절대로 물을 건너지 않습니다. 그리고 물은 절대로 산을 넘지 않듯이 내외간의 도리를 다하시고, 산은 물이 있어 더 높아 보이고, 물은 산이 있어 더 깊어 보이듯, 지금의 모습과 같이, 같이 있어 더 돋보이고, 같이 있어 더 행복하도록 지혜롭게, 반드시 지혜롭게 오래오래 행복하기길 발원합니다.’라고 축복하였다.
친구의 SNS 스토리에서 ‘블루스테이’의 오션뷰가 멋지다고 사진과 동영상을 첨부하여 자랑을 하였는데 실제로는 오션뷰보다 정돈된 하얀 침구와 인테리어가 더 돋보였다. 전날 밤늦도록 마시고도 일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것은, 미리 강릉항의 물때표를 검색하여 05:28분의 일출시간을 알고 있었던 것보다 더 오션뷰의 최고인 일출을 내손으로 카메라에 담아보고 싶었던 내 영혼이 시간 맞추어 나를 깨워준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객실에서 실제로 보는 해 뜨는 동해 바다는 장관이었다.
인간들만 모여 살까? 서울로 대도시로 모여 사는 인간들처럼 영덕에는 대게로, 기장 대변항에는 멸치로 가득하였다. 인간들은 멸치를 가지고 회로 먹고, 찌개로 먹고, 찜으로 쌈 싸서 먹고, 구워 먹고, 말려 먹고, 젓갈로 담아 잘도 먹는다. ‘고양이 앞에 생선을 맡기다’는 속담도 있는데, 대변항의 배부른 길고양이는 멸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문학기행 동안 먹어본 인간들만 먹는 우리나라 식혜요리 중 첫날 안동의 식혜, 둘쨋 날 강릉의 순두부찌개 아침밥 식후에 나온 식혜, 물가자미 찌개 점심 반찬으로 동해의 가자미 식혜 등 세 종류를 다 먹어 보았지만 못내 먹어보지 못한 강릉의 감자옹심이와 감자전이 그립다.
원래 인간은 설렘으로 목적지를 향할 때에는 그 길이 어디든 가깝게 느껴지나, 되돌아오는 길은 멀기만 한 것이 이치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신부가 입은 하얀 드레스의 레이스 같기도 한 아카시아도 피었을 뿐 아니라,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등 집안 행사가 겹친 이 5월에 문학기행 짝지가 되어주신 시『기도1』의 강작가님과 시『세월』의 김작가님이 너무 고맙게 느껴지고, 우리 일행을 따뜻하게 맞아준 강릉시 강문해변의 ‘블루스테이’대표님 내외분은 강릉을 방문한 일행 다섯 작가들의 건필을 기원한다는 의미로 종이끈으로 역어진 모양새 있는 빈 노트 한 권씩과 마른안주를 종이가방에 사랑가득 담아준 그 마음이 고마워서 돌아오는 동안 달구어지는 가슴의 온기들이 모여 내 영혼이 따뜻했던 시간들로 추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