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 행법은 정확히 말해서, 요가의 세 번째 단계에서 시작된다.
이 세 번째 단계가 유명한 요가 자세를 지칭하는 말인 아사나(asana)로서 요가경에서는 「안정되고 유쾌한」이라고 정의한다.
다수의 하타 요가 원전들은 이 아사나를 설명하고 있지만 파탄잘리는 다만 그 윤곽만을 정의한다. 그 이유는 아사나는 스승으로부터 직접 배우는 것이지 설명에 의해서 알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사나에서는 신체에 안정된 강직함을 주는 동시에 육체적인 노력을 최소한으로 줄이는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해서 피곤과 신체의 일부 무기력에서 오는 짜증나는 느낌을 피한다. 그리고 육신의 전체적인 진행경과를 통제하면서 오직 의식의 유동적인 부분에 관여하는 의식만을 허용케 한다.
처음에 이 아사나는 편안하지 않고 심지어 참아내기 조차 어렵다. 그러나 얼마간의 연습이 지나면 육신을 일정한 자세로 유지하는 노력은 어렵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되고 나면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일체의 노력은 사라져야만 하고 자세는 자연스러워 져야만 한다. 자세에 대한 노력이 사라질때 그 자세는 완벽해지고 따라서 육체상의 어떤 움직임도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마음은 무한대로 화할 때 완벽함이 성취된다.
무한대로 화한 마음이란 자기 신체의 현존감을 철저히 중지함을 뜻한다.
아사나는 인도적인 금욕행의 독특한 기법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우파니샤드 서에서 뿐만이 아니라 베다 서에도 발견되고 있다.
명상자세들의 한결같은 목적은 “상반되는 상태에서 오는 괴로움의 절대적인 멈춤”이다.
이와 같은 식으로 요가행자는 감각의 확실한 중립을 실현한다.
의식은 더 이상 육신의 현존에 의한 괴로움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제 독존을 향한 첫단계를 실현하는것이다.
아사나는 분명히 인간의 조건을 초월하는 하나의 표시이다.
서로 상반되는 상대적인 상태및 외계에 대하여 전혀 침해를 받지않는 이와 같은 정지가 식물적인 조건으로의 퇴행을 상징하는것인지 아니면 성스런 원형으로 향한 초월을 나타내는 것인지는 나중에 다시 검토할 것이다.
우선 아사나는 인간의 생존양식들의 폐지를 의도하는 목적에서 취해진 최초의 구체적인 단계라는 것만 유의하도록 한다.
확실한 것은 육신의 초 자연적인 부동자세가 인간이 아닌 어떤 다른 조건을 모방한다는 것이다.
아사나 상태하의 요가행자는 하나의 식물이나 또는 하나의 성스러운 조상과 일치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움직이고, 언제나 동요되는 인간이라는 자격의 의미에서 본 인간과는 일치될 수 없다.
육체적인 국면에서 볼때 아사나는 일종의 에카그라타 ekagrata이다. 즉 육신은 단일한 자세속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에카그라타가 의식의 동요와 분산을 막아 주듯, 아사나는 단 하나의 원형적인 조상적 자세로 환원함으로써 육체의 변동성과 소모성을 막아 주는 것이다.
단일화와 총력화를 지향하는 것이 모든 요가기법의 특징임을 우리는 곧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단일화의 깊은 의미는, 즉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성향에 따르기를 거부하므로써 인간의 조건을 초월하거나 폐지하는 것이다.
움직임의 거부(asana), 의식의 급류에 자신을 맡기기를 거부하는것(ekagrata), 이 양자는 일체의 것에 대한 거절의 연속에 의해서 지속될 것이다.
이와 같은 각종의 거절중에 가장 중요한, 즉 가장 독특한 요가적인 것은
호흡법(pranayama), 바꿔 말하면 결코 리드미컬하지 못한 인간 대부분의 호흡방식의 거부이다. 파탄잘리는 이러한 거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프라나야마는 들숨과 날숨의 움직임에 대한 억류(vicceda)이며, 이것은 아사나가 실현된 뒤에야 달성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요가의 호흡법은 호흡리듬을 가능한 한 천천히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비록 호흡단련은 특별히 요가적인 수행법으로 상당히 중요하지만 파탄잘리는 단지 3권의 경전에서만 이것을 다루고 있다. 그는 주로 수행법의 이론상의 기초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상세한 기법은 브야사, 보쟈, 바차스파티미슈라의 주석서에서 발견되는데 그것도 특히 하타요가의 논문에서 발견되고 있다.
보쟈의 진술은 프라나야마의 심오한 의미를 밝힌다.
“호흡 기능은 신체의 모든 기능에 선행한다.”
마음의 상태와 호흡사이에는 언제나 하나의 연관성이 있다는 진술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은 이를테면 분노속에 있는 사람의 호흡은 산란한데 비해서 어떤일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의 호흡은 리드미컬하고 저절로 조용해진다는 것등은 단순한 관찰이상의 훨씬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보쟈가 언급한, 의식과 호흡의 연관은 의심할 여지없이 고대로부터 요가행자들이 관찰하고 경험하여 온 것으로, 의식을 통일하는 하나의 도구로 이용되어 왔다.
여기서 말하는 통일은 다음과 같은점에서, 즉 호흡을 리드미컬하게, 또한 점차로 완만하게
함으로써 요가행자는 완전히 명석한 상태하에서, 깨어있는 조건에서는 도달하기 불가능한 어떤 상태 -이것은 특히 수면중의 고유한 의식 상태- 를 간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수면중의 호흡리듬은 깨어 있을때의 그것보다 느리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프라나야마를 통해서 이와 같은 수면중의 호흡리듬에 도달하므로써 - 물론 수행자 자신의 명철성을 잃어서는 안된다 - 요가 행자는 수면중의 의식상태를 투시하는 것이다.
인도의 수도자들은 의식을 네 종류로 나누고 있다.
즉, 대낮의 의식, 꿈을 수반하는 수면중의 의식, 꿈이 없는 깊은 의식, 투리야(turiya) 상태가 그것이다. 프라나야마에 의해서, 즉 호와 흡을 점증적으로 연장함에 의해서 요가행자는
네 가지 의식을 모두 간파 할수 있는 것이다.
비 입문자에게는 이런 네 가지 의식사이에 단절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깨어 있는 상태에서 수면 상태로 들어 갈 때 무의식적이다.
요가행자는 의식의 연속성을 유지해야한다. 즉, 확고한 명증성을 가지고 이와 같은 각 의식의 상태를 꿰뚫어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의식의 ‘통일’(네가지 의식사이의 불연속성을 제거함으로써)과 함께 각각의 의식에 대한 ‘체험’(네가지 의식에 상응하는 독특한 호흡리듬이 있다)은 오랜 연습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다.
보통 사람의 호흡은 일반적으로 리드미컬하지 못하다. 외부의 환경이나 심적 긴장도에 따라 다양하다. 이러한 호흡의 불규칙성은 불안정및 주의 산만과 더불어 해로운 심적 유동성을
산출한다. 애써 주의를 집중하려고 노력해야 겨우 집중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요가에서 볼때, 노력은 여전히 외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만약 호흡에 대한 의식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상태가 되지 못한다면, 적어도 호흡의 연속성은 유지되어 반드시 리드미컬해야 된다.
그런 까닭에 프라나야마를 통해 먼저 호흡의 노고를 해소하려는 것이다. 즉, 리드미컬한 호흡행위가 저절로 갖춰지면 요가행자는 호흡 그 자체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프라나야마를 통해서 요가행자는 호와 흡에 의하여 방출되는 기관에너지인, 자신의 생명의 동계에 대한 직접지의 획득을 추구한다.
말하자면 프라나야마는 인간의 유기적 생명에 관한 주의 집중이요, 행동을 통한 앎이요, 곧바로 생명의 진수로 들어가는 고요하고 명석한 진입인 것이다.
요가는 그 추종자들에게 삶을 권하면서도 동시에 삶에 빠지지 않기를 권한다.
감각적인 활동은 인간을 사로잡고 부패시켜 완전히 붕괴 시킨다.
실습초기에는 호흡작용이 갖는 막강한 기능에 관한 전념은 형용키 어려운 조화감을, 리드미컬하고 선율적인 충만감을, 모든 생리적인 불균형이 평등해지는 느낌등을 발생시킨다.
이러한 단계가 지나면 자신의 육신속에 희미한 현존감이 나타나고, 자신의 위대함에 대한 고요한 의식이 뒤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