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얼굴의무궁화에대한반박
무궁화는 항일독립운동의 총본산이었던 대종교의 교화이다. 임시정부를 거쳐 무궁화는 대한민국의 국화가 되었다. 대종교를 중광한 홍암 나철 대종사께서는 한배검님의 묵계를 받아 순명 조천하시기 전 '중광가' 54수를 남기셨는데 이 중 육 장에 '무궁꽃 옛 이슬은 방울방울 새 은혜'라고 무궁화에 대해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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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에서는 무궁화의 유래에 대해 이렇게 알리고 있다.
우리나라의 무궁화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동진(東晉)의 지리서(地理書) 《산해경(山海經)》에 ‘군자의 나라에 무궁화가 많은데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지더라(君子之國有薰華草朝生暮死)’ 라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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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중국의 고전인 《고금기(古今記)》에는 ‘ 군자의 나라에는 지방이 천리인데 무궁화가 많이 피었더라 (君子之國地方千里 多木槿花)’라는 기록이 있고, 《예문유취(藝文類聚)》 권(卷)89에는 '군자의 나라에는 무궁화가 많은데 백성들이 그것을 먹는다. (君子之國多木菫之華人民食)' 라는 기록이 있다. 이상에서 보더라도 최소한 4세기 중엽에는 가는 곳마다 무궁화가 만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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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이 당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신라를 '근화향'(槿花鄕:무궁화의 나라, 신라를 뜻함)이라 하였고, 《구당서》에도 같은 기록이 있다. 강희안의 《양화소록》에 중국에서 한국을 '근역(槿域)'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 예종(睿宗)은 고려를 ‘근화향(槿花鄕)’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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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무궁화는 근대 이후부터 민족의 꽃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한배검(단군)께서 이 나라를 세울 때 겨레의 영원한 표상으로 점지하신 꽃이며 오랜 역사를 두고 우리 민족의 구심점의 위치에서 우리 민족과 함께 끊임없이 피워 온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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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가사에 '무궁화 삼천리'라는 구절이 아무런 저항없이 표현된 것도 무궁화가 오랜 세월을 통해 우리나라, 우리 민족과 인연을 맺어 온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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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오얏나무를 중시한 이조 때에 와서 소외를 당하게 되었고, 일제강점기에 무궁화가 한국 민족의 상징적인 꽃이라는 것을 알고 전국적으로 뽑아 없애버림으로써 큰 수난을 겪었다. 꽃나무가 한 민족의 이름으로 이처럼 가혹한 시련을 겪은 사례는 일찍이 없었다. 애국지사 남궁억 선생은 무궁화 묘목을 전국적으로 보급해오다가 형무소에 투옥되었고, 동아일보 제호의 무궁화 도안도 삭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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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억 선생은 대종교인은 아니다. 그러나 대종교 간부들과 교류가 매우 잦았다. 주시경, 이상룡, 이회영 등 많은 기독교인들이 대종교 교도와 교류하면서 대종교로 개종을 하였으나 남궁억 선생은 끝까지 자신의 첫 신앙인 기독교인으로 남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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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억 선생이 믿으신 초기 기독교는 일제에 의해 왜곡되기 전이다. 그때는 단군을 우상시 하며 배척하지 않았다. 하느님을 믿었던 조선 백성들은 여호와를 의심 없이 그들의 '신' 하느님으로 받아들였다. 조선은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 이미 기독교가 성행했으며 초기 선교사들은 설교가 아닌 세례를 주는 일로 바빴다.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었으며 평양의 장대현 교회는 세계 기독교 역사에 유례가 없는 부흥성회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