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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11.(화)
주님은 나의 목자이시다!
2020. 2. 9. 주일오전예배
그 누구보다도 영화롭게 살았다고 할 수 있는 솔로몬은 그의 인생의 말년에 쓴 전도서에서 자기 인생을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러나 다윗은 역시 그의 말년에 쓴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했다. 이 두 차이점이 어디 있는가? 요즘 세상 사람들은 말한다. 내 인생은 내 것이라고! 그래서 내 맘대로 사는 자유를 누려야 된다고. 그렇게 살면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될 뿐이다. 그러나 다윗처럼 성도는 주님께로 돌아와서 “주님이 나의 목자시니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이고 영광인지 모르겠다. 시편 23편은 다 아는 말씀인데 최근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신앙이 좀 어렸을 때는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라는 것이 ‘내게 어떤 것이 채워지기 때문에 내 삶에 구원이 있기 때문에 내 삶의 어떤 것이 부요해지기 때문에 좋구나’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했지만 이제 주님을 알고 주님을 섬기는 길에 서 있다 보니 주님이 내 목자인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온전하고 전부인지 모르겠다. 나의 모든 것은 부족하고 없어질지라도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주님으로 채워지는 것이 감사이고 은혜이다. 그렇다. 성도는 길을 갈수록 나의 것은 없어지고 주님의 것으로 내게 살아주시는 분이 주님이시므로 나도 그리스도에 대해서 산다는 이런 확고한 신앙으로 오늘의 길을 가는 것 같다.
다윗은 시편 23편 마지막 6절에 “나의 평생에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른다”라고 되어있다. 한글 성경에는 나의 평생이라고 단순하게 나와 있지만 영어성경에는 “all the days of my life 내 인생의 모든 날들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할렐루야! 우리의 길에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안 보이는 경우가 많다. 4절 말씀처럼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 때도 있다. 그 때 어떻게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보였겠는가? 다윗은 그러한 길을 많이 걸었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주님을 따라서 길을 갈 때에 결국은 그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라오는 것을 발견하고 주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날마다 날마다 나의 평생에, 나의 인생의 모든 날들 속에 내가 주님의 집에 가는 영광스런 그날까지 함께하시는 주님을 찬양한다. 그러므로 내게 주어진 어떤 평범한 날도 작은 일의 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오늘은 주님의 날이고 내일은 어떠한 날인가? 내일도 주님의 날이다. 주님을 내 목자로 모셨다면 버릴 것이 없고 부족함이 없는 주님의 날로 살아야 할 줄 안다. '정녕' 영어로는 'Surely 확실히' 주님이 함께 하시는 가운데서 확실히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른다는 것이다. 영원까지! 오늘의 작은 삶이지만 영원과 잇닿아 있는 천국적인 삶인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내 인생은 주님의 것이다.
요한복음 10장 말씀에 주님은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도적은 양을 죽이고 멸망시키려 온 것이고 예수님이 내게 찾아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했다. 여기서의 생명은 죄와 사망을 이기는 부활의 생명이고 내게 의미 없는 헛된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주님 모시고 영광의 삶을 주시는 생명이다. 나사렛 예수님은 내게 찾아오셔서 내게 진정한 삶을 주신다. 그리고 주님 모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더 풍성하고 온전한 삶을 주시는 나의 목자, 예수님이시다. 요한복음 15장에서도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라 그러면 내가 너희 안에 거하리라” 이렇게 말씀해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면 이 놀라운 생명이 내게 은혜로 역사하셔서 열매를 맺게 하고 항상 맺게 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으면서 우린 이 땅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목자가 되어주셔서 나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장소적으로 쉴만한 물가일 뿐만 아니라 내게 주시는 그 생명의 은혜 속에서도 참으로 좋은 사귐을 갖고자 하시는 분이 주님이시다. 우리를 다른 것이 아니라 조용하고도 은밀한 가운데서 친밀한 사귐을 갖기를 원하셔서 인도하시는 주님을 날마다 경험하여 사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지! 어떤 일을 위해서 사귐을 갖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립고 주님이 사모되고 주님 당신 안에 잠기고 싶어서 그 시간을 사모하며 기다릴 때 주님은 더욱 우릴 기뻐하신다. 왜냐하면 그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 주님이시기에. 그래서 거기서 우리에게 좋은 꼴, 맑은 물을 먹고 마시게 하신다. 에스겔 34장에는 성도들이 이 복된 삶을 놓치고 있어서 주님은 안타까워하셨다. “너희가 좋은 꼴을 먹고 맑은 물을 마시는 것을 왜 그렇게 작은 일로 여기느냐” 우리는 어떠한 큰 일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주님과의 사귐하는 것이 정말 하루 길의 귀중하고 큰 일로 여겨야 할 줄 안다. 이것을 빼앗기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고 기다리시는 주님을 모시고 사귐을 해야 할 줄 믿는다. 이럴 때 3절처럼 내 영혼이 소생된다. 그리고 내 이름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또 주님의 의를 위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로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신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삶을 얻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동행의 그 기쁨과 영광의 길에 세워주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하룻길에서 주님이 조그맣게 심부름하는 섬김의 일에도 또 어떤 특별한 일을 섬길 때에도 우리는 내 속의 주님의 기름으로 말미암아 내 등의 기름이 타는 것이지 심지가 타는 것이 아니다. 심지가 타듯이 애써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목자가 되셔서 주님의 은혜로 하기 때문에 그렇다. 주님의 양된 나에게는 주님이 주신 꼴 곧 주님의 살아있는 말씀과 오늘 들려주시는 주님의 그 음성이 내 생명선이다. 주님이 주시는 꼴이 오늘 없으면 우리는 방황하게 된다. 솔로몬이 그런 고백을 한 것은 그가 주님을 오늘의 내 목자로 모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했다. 어떤 성도님이 이런 간증한 것을 들었다. “내게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것이 주님의 긍휼 속에 빨리 해결되면 그건 고난이라 하기보다는 에피소드다. 그러나 그 시간이 길면 길어질수록 고난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성도님의 말이 한편 일리가 있지만 어려움이 짧든 길든간에 주님이 함께하시고 내가 주님을 붙들고 있으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내 주님과 함께라면 이 환난을 경한 것으로 여기고, 귀한 내 예수님 모신 이 삶을 전부로 알고서 오늘의 내 십자가 지고 갈 뿐이다.
요즘 뉴스를 보면 중국 우환에서 발생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말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을 두렵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것이 성도의 관점이라 생각한다. 예레미야 말씀 곳곳에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칼과 기근과 염병 곧 전염병을 내리신다고 하셨다. 지금 이런 국제적인 사태를 보면서 출애굽기 사건의 열 가지 재앙과 요한계시록의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속에서 펼쳐가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한다. 내가 보는 관점은 이렇다. “주님, 저는 모세처럼, 사도 요한처럼, 예레미야처럼 서있겠습니다!” 어찌 보면 중국이라는 강대국, 북한이라는 참으로 망나니 같은 그 정권을 미국의 경제력과 외교력과 어떤 군사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었는데 이번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로 인해 그들이 스스로 봉쇄하고 갇혀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 한국 땅에도, 중국 땅에도, 북한 땅에도 주님의 백성이 다치지 않기를 바란다. 그 때 우리의 간구하는 바는 이것이다. “주여, 진노 중에서도 긍휼을 잊지 마시옵소서!” 그 기도밖에 나오지 않는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내 영혼에 주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내가 참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그 어떠한 전염병이나 칼이 아니라 또, 어떠한 자연재해의 어려움이 아니라 주님의 음성이 내게 들리지 않을까봐 두려워한다. 바로 주님에게서 멀어질까봐 두려워한다. 주님만이 우리의 두려워하는 대상이고, 우리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그 어떠한 세력이나 어둠도 우리의 두려워하는 대상이 아니다. 겸손히 주님 앞에 나아가고 주님 편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을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영어성경에는 ...악(evil)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악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편에서 이 악을 결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잠잠히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이 진노의 곁에서 긍휼을 구할 뿐이다. 고린도후서 6장에 사도 바울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있고 징계를 받는 것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것은 사도 바울 선생님의 진심어린 인생의 고백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길 바란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몇 군데를 더 생각해본다. 2장에 그 혼인 잔치 자리에서 포도주가 부족했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는 “우리에게 포도주가 없다” 했다. 우리 인생의 즐거움은 쉽게 동이 나고 만다. 그러나 그곳에 주님이 계시고 내 목자로 주님을 모시면 주님의 포도주, 천국의 기쁨이 우리에게 임한다. 주님은 우리의 최상의 기쁨이시다.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이 “나에게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지금 있는 남자도 자기를 진정 책임질 것 같지 않았다. 주님은 그와 헤어지라는 그런 말을 하지 않으셨다. 그 여인이 주님을 만났으니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여인이 야곱의 우물에서 물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생수를 구한다면 이후의 삶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진정으로 그 여인뿐만 아니라 우리의 보호자로서 변함없는 나의 목자로 서 주시는 예수님이시다. 5장에서 “나를 이 연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삼십 팔년 된 병자를 본다. 많은 사람들이 연약함을 가지고 자기의 친구나 가족들이 그 못에 던져주었을 것이지만 그 베데스다 못가에 있는 그 사람은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가 자기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던 것이 우리 예수님의 긍휼을 받는 길이 되었다. 역설적으로 말이다. 내게 무엇이 있어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무엇이 없는 우리 인생의 마지막이 주님의 시작인 것을 우리는 경험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이다. 그의 간절한 소망을 아시고 그 한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이 베데스다 못가에 찾아오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시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게끔 주님을 모시고 살아갈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6장에서는 그 벳세다 광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어보셨다. 오병이어 곧 한 소년의 도시락을 가지고 “이것을 이 사람들이 먹을 수 있겠느냐?” 제자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이 작은 것으로 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라고 ‘턱도 없습니다’는 뜻으로 말했지만 주님은 그 작은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게 하셨고 그리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도 예수님은 이와 같은 주님이시다. 요한복음 11장에는 그 베다니의 집에서 기다리던 예수님이 더디 오시자 나사로는 죽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집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도 마르다는 마중 나왔지만 마리아는 집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인다. 마리아의 심정은 ‘일 없습니다. 이제는 예수님 늦었습니다’ 그런 뜻 아니겠는가? 정말 일 없는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특별한 일이 있다. 우리는 어떤 슬픔을 당하면 그 상황에 빠져버리는 것이 우리의 보통 본성인 것 같다. 슬프면 슬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바쁘면 바쁜 대로, 한가하면 또 한가한 대로 빠져버린다. 하지만 성도는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주님을 주목해야 될 줄 안다. 요한복음 21장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기다리지 못하고 갈릴리 호수로 나아가서 고기잡이를 했다. 그 때 동이 터오기 전인고로 제자들은 주님이 지금 물가에 서 계신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라고 물어보셨다. 제자들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지만 주님을 내 목자로 모시지 못하고 스스로의 길을 가면 우리의 고백은 한결같이 동일하다. '없습니다!' 주님은 긍휼로 그들의 삶의 오른편에 서 주시면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다. 그들은 고기를 많이 낚을 수 있었다. '주님이시다!' 배와 고기를 잡은 그물을 던져두고 베드로는 겉옷을 입고 물로 뛰어든다. '주님이시다!' 주님이 내 앞에 서 계신다. 사랑하는 내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따르는 오늘 길이다. 내 주님의 양으로서 말이다.
다윗이 사무엘 하 24장에 유다와 이스라엘 백 삼십만명의 대군을 가지고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할 때 그는 철저하게 길 잃은 양이었다. 구개월 이십일일간 요압 장군을 비롯해서 이스라엘 두령들이 전국을 다니면서 인구 조사를 하는 것은 헛된 일이었다. 다윗이 왜 그렇게 무감각하게 살고 있었는지, 갓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나서 얼마나 그가 부끄러웠으면 철저하고 가슴을 찢는 회개를 했을까 생각이 든다. 우리도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날, 이 하루 이 순간순간을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하며 방황했던 그 길을 우리의 전날로 다 십자가에 던져버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지금 보좌 앞에서 살아가야 한다. 주님이 나의 목자로 서 주시는데 나 또한 주님의 양으로 서가는 것이 우리의 영광일 줄 안다. 헛되고 헛된 것이 나의 노래가 아니다. “영광일세! 영광일세! 늘 주 얼굴 뵈오며 사는 것 나의 영광일세” 이 길에 우리 모두가 서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
2018. 10. 11.(목)
오늘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신앙생활 네 가지!
1. 내 주님께 사로잡힘 (시편 23편)
시편 23편 3절에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말씀한다.
우리가 나의 영역에서 십자가로 벗어나고 부활의 영역에 서있다면 이제는 전날의 내 행복이 아니라 내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픈 의욕이 솟아날 줄 안다.
오늘 내가 전심으로 속한 주님의 이름에 합당하고 또 내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의인의 길에 서가려면 우린 반드시 주님께 사로잡혀야 한다.
그래서 여기 시편 23편 4절에 나오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주님께 사로잡힌 다윗 자신을 의미한다.
출애굽기 4장에서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손에 있던 지팡이를 땅에 던졌을 때 뱀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금 모세가 손을 내밀어 잡았을 때 그 손에서 지팡이가 되었다.
모세, 다윗 아니 이 땅에 살고 있는 그 누구라도 오늘 주님의 손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흉측한 뱀 같은 사람이 되고 만다. 고마우신 주인님을 몰라보고 머리를 쳐드는 염소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또한 아무리 험한 인생을 살아왔던 죄인일지라도 우리 예수님께 사로잡힌다면 쓸모 있는 참된 삶을 살 수 있다는 실상을 보여준다.
왕이었던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주님을 나의 목자로 모시고 순전하게 자신의 목자 되신 주님을 따르는 한 마리 양된 행복을 고백하고 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다윗은 은밀하게 계시지만 뚜렷이 나와 함께 계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을 나의 목자로 인식할 때는 사망의 골짜기가 결코 두렵지 않았다. 사랑하는 주님께 사로잡힌 한 마리 양된 심령은 원수의 목전에서도 강하고 담대하게 또 여유롭게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우리 주님의 모습을 시종일관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으로 집약해서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단지 우리를 대신하여 화목제물 되셨던 주님의 모습만이 아니라, 더 넓게 봐서는 주님이 지상에서 살아오셨던 것과 같이 천상에서도 여전히 아버지 하나님 한 분을 목자로 모시고 순종하므로 아버지의 영광에 참여하시는 한 마리 어린 양 같은 분이란 것이다.
우리의 주님과 신랑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바로 아버지 하나님께 사랑 가운데 사로잡히신 어린 양이시다.
2. 내 주님께 다스림 받음 - 기다림 (시편 24편)
시편 24편 10절에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말씀한다.
나의 왕 되신 주님은 오늘도 주님께 속한 나 한 사람을 당신의 나라로 삼으시고 다스려 가신다.
사무엘 상 9장, 10장에서 청년 사울은 주님께 다스림을 받는 인격과 삶이 있었기에 11장에서 길르앗 야베스 거민을 암몬 사람 나하스의 칼날에서 구할 수 있는 주님의 돕는 자요 아름다운 형제로 설 수 있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보기에도 참으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울 만 했다.
그런데 사무엘 상 13장, 15장에서 사울이 주님의 다스림보다 스스로 왕위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세우고자 할 때는 주님을 기다리지 못하고 망령되이 행하게 되었고 결국 비참하게 추락하고 말았다.
예레미야 5장 1절에서 패역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불신과 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통해 멸망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 때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예루살렘의 구원의 소망은 다름 아닌 의인 한 사람이었습니다.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오늘날도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무슨 권력이나 재력 혹은 재주 있는 자가 결코 아니다. 여기 시편 24편 4절과 6절 말씀처럼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이다.
바로 “주님을 찾는 자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이다.
한 마디로 내 주님께 다스림을 받는 자가 필요하다.
이것은 언제나 내 주님께 다스림을 받는 자가 주님께 제대로 영광을 돌리기 때문이다.
3. 살아계신 주님과 함께 - 살아있는 말씀, 살아있는 뜻, 살아있는 명령 (시편 25편)
우리가 지나온 길도 주님의 은혜로 걸어왔지만, 항상 나의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는 주님께 대해 오늘! 이 시간에 살아있는 신앙은 너무도 소중하다.
시편 73편의 성도는 악하고 불공평한 세상에서 잠시 마음이 흔들렸고 어지러웠지만, 하나님의 유일한 성소 되시는 주님 안에 설 때에야 세상을 내려다보는 안목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 땅에서 날마다 주님과 함께하고자 마음의 귀를 주님께 기울이는 자에게 주님은 살아있는 교훈으로 나를 인도해 가시고, 가까운 후일 천국에서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해 주신다고 확신 있게 말씀한다.
여기 시편 25편 4절, 5절에서 다윗은 “주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고백한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서도 주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말씀하셨다.
우리가 생명나무 되시는 주님과 오늘 이 시간 살아있는 관계를 맺고 있다면 생명의 진액은 가지된 우리 각자에게 반드시 살아있는 말씀으로, 살아있는 뜻으로, 살아있는 명령으로 임해온다.
그래서 성도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뜻대로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주어진 상황에 대충 걸맞게 생활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이것이 과연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인지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내 주님을 주님답게 알아드리고 섬기는 길이라는 명료하고도 확신 있는 믿음을 가지고 삶을 꾸려가야 할 것이다.
그 증거가 사도행전이요, 사도 바울 선생님과 베드로 사도, 야고보 사도, 요한 사도의 서신서요, 오늘 살아계신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꾸려가고 있는 우리 각자가 주님의 살아있는 증인이다.
4. 기도를 내 집으로 (시편 26편)
우리 몸 된 교회 식구님들이 지난 9월에 조그만 빈들판 등을 각자의 집 안으로 들여오면서 기도를 내 집으로 삼고자 더욱 견고하게 건축한다는 간증들을 들으면서 함께 기뻐했고 주님께 감사를 드렸다.
시편 26편 8절에서 다윗은 “주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라고 말씀한다.
물론 다윗은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을 가리켜서 한 말이겠지만, 주님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그 어느 곳이든 상관없이 내 주님과 은밀히 기도하고 사귐하는 시간이야말로 진정 주님을 모신 집이 있는 것이요, 내 주님과 함께 영광스러운 삶을 꾸리고 있다고 할 것이다.
골로새서 4장 2절에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말씀한다.
골로새서 1장과 2장에서 우리 주님의 영광스러운 복음 곧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하늘 보좌의 주권이 골로새서 3장처럼 우리의 마음과 생활 속에 참으로 감사가 될 만큼 뿌리를 내리고 열매가 맺혀지기 위해서는 오늘 그 보좌의 주님께 깨어 기도하는 길이 최선의 선택이다.
결론적으로 오늘 내 주님께 사로잡힘, 오늘 내 주님께 다스림 받음, 오늘 살아계신 내 주님과 함께함 그리고 오늘 기도를 내 집으로 삼는 것은 최상의 삶이요, 날마다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삶이다.
2018. 3. 9.(금)
He restores my soul; He guides me in the paths of righteousness For His name's sake.
(Psalms 23:3 NASB)
오늘도 내 목자 예수님은 주님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로운 길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인도하신다.
그리고 그 길로 우리가 힘있게 따라가도록 우선 우리 각자의 영혼을 소생시키려 하신다.
그래서 양된 우리를 쉴만한 풀밭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데 바로 빈들판에서의 사귐이다.
그 사귐에서 해답을 찾고 영혼이 새힘을 얻고나서 의의 길은 부담이 아닌 기쁨이고 영광이다.
또 주어진 길속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나든 원수를 얼굴로 대면하든 모두 담대하고 넉넉히 이겨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주님과의 복된 사귐이 흐려진다면 죄악의 길과 오만한 자리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영원한 길에 잇닿아 있는 오늘의 길에 내 목자 예수님을 전투하는 군사처럼 민감하고 철저한 마음으로 따라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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