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봇을 찾아서
분필가루를 맡다 보면 그런단다. 고압적이고 나이보다 보수적인. 그러고보면 스스로도 움찔할 때가 많다. ‘쯧쯧쯧’ 혀를 차는 훈계며, 수시로 달고사는 고전적 꾸지람까지. 핑계 같지만, 플라톤부터 공자님, 하다못해 요즘 집밥 백선생까지, 뭐든 가르치는 언어는 ‘내가 가르치면, 너희는 잘 배우거라’ 이런 식이라 그런건지. 그래도 납덩이같은 이 낡음은 매번 반성한다. 물론 막상 애들과 실갱이할 때면, 또 멋없는 훈장질을 재생할테지만
얼마전, 식탁 앞에서 아내와 뉴스를 보며, 내 훈장노릇은 정점이었다. 리포터가 중계하는 풍경은, 새벽녁 마트에 줄지어선 아저씨, 아줌마들 모습이었다. 프테라킹? 다이노포스? 생판 처음 듣는 변신로봇 장난감을 사겠다고, 새벽부터 전쟁통이었다. 번호표를 받고 한참을 기다렸을 애기아빠. 기적처럼 장난감 박스를 손에 쥐자, '다 이루었다’는 듯 바닥에 드러눕는다. ‘아이고. 멀쩡한 양반들이 왜 저래!’ 대뜸 식탁에 숟가락을 탁탁 치며, 나는 아내 앞에서 격문의 교육학적 소견을 턴다. ‘아이 떼부림에 사다바치는 건, 즉각적 욕구의 충족이고, 이건 비교육적이다. 욕구를 유보하고 지연시키는게 발달과업이다.’ 뭐 이런. 아내는 당장 피식 웃는다. ‘막상 우리 애 생기면 다를걸요.’ 정색하며 그럴리 없다했다...지만, 에이, 사실 내가 날 모르겠나. 당장 우리 두살, 네살박이 조카애들 보면, 여름날 아이스크림처럼 흐물거리는게 나인데. 아. 날 보며, 발그란 보조개를 붉히는 그 애기웃음이란. 아니나 다를까. 방학을 맞아, 고향 조카들과 몇 일 있는 동안, 나도 거침없이 로봇을 척척 갖다바쳤다. 남 힐난할 거 하나 없다. 선생이고 뭐고, 애들 우는데는 장사없더라.
그래도 이 정체불명 장난감을 결제하면서도, 의아한 감정은 물음표로 남았더랬다. 아니. 대체 어떻게 방방곳곳 어린이들이 한결같이 같은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를 쓸 수 있는걸까. 장난감 품절사태가 어떻게 사회적 이슈가 되는 걸까. 변신로봇에 관한, 이 일사분란한 ‘기호’를, 네살박이 애들은 어디서 얻은걸까.
정답은 무척 간단했다. 애들 달래며 함께 어린이채널을 보노라니 금새 알겠더라. 내가 사준 공룡로봇이, 텔레비전 속에서 고스란히 악당들과 싸우고 있었던 것. 아. 에니메이션 기획자들이 또한 장난감 제작업자였다니! One source, multi-contents! 경제 신문에서나 읽던 마케팅 사례다. 옛날 김영만 아저씨 색종이 접던 방송 수준이 아니었다. 만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오르면, 아이들은 그날 저녁, 일사분란하게 마트에 가자고 조르게 되어 있었다. 완구업체들, 수완 참 좋다.
그간 트랜드라는게 성인들 패션잡지에서나 형성되는 줄 알았는데, 아동전문 컨텐츠 시장의 고도화는 놀랍더라. 방송은 영민하게 기획된 장난감 트랜드를 포교하고, 기저귀 찬 소비자들은 경쟁적으로 이를 소비해댄다. 우리 조카들과 몇 일 같이 있다보니, 알면 알수록 어른들이나 애들 멘탈리티가 별다를게 없더라. 훈장질로 혀를 찰만큼, 그리 이해못할 일도 아닌거다. 어린이집에서, 놀이터에서 나 빼놓곤 다들 공룡 장난감이 있다면, 아이 마음이 얼마나 애절하겠나. 누구든 마음 한켠에 구매목록을 담아운, 소유지향의 기제를 품고 살지 않나. 그 옛날 에리히프롬 선생께선 ‘소유인가, 존재인가'라며 사뭇 진지하게 둘 사이 선택을 강권하였지만, 사실 이런 물음은 좀 뜬구름 같다. 현실 속 우리네 실질의 풍경은 어떤가. 내 소유를 점점이 이으면, 그게 곧 내 존재의 틀걸이가 된다. 인간의 존재 양식 자체가 소유하고, 소유되는 삶인걸. 연인 간의 사랑도, 부모 자식간의 그것도, 남과 나눌 수 없는 배타적 소유의 연장이다.
사실 아이든 어른이든, 진짜로 문제되는 건 갖고픈 맘 자체가 아니라, 이 욕망이 놀랍도록 일사분란하다는 점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갖고픈 속마음은 옳은가. 이 욕구는 하나님의 계명 앞에, 또 당대의 통념에 비추어 건전한가. 그걸 획득하기 위해, 나는 어떤 욕망을 유보하고, 어떤 자원을 지불할건가. 우리는 이런 고민으로, 자기를 대면하고 신자로서, 당대인으로서 정체성을 형성한다. 내 욕망을 점점이 잇다보면 얼추 내 자아상이 그려지는거다. 우리가 그려가는 욕망의 점들이 부도덕하고 말씀과 거리가 있다면, 어느 순간 우리의 그려진 거울 속 면모는 하나님의 기대와 어긋나는 괴이한 형상일거다.
매스미디어는 바로 이런 자기대면을 방해하고, 단조로운 욕망을 유포하는 첨병이다. 가져야하는 것의 목록을 성경말씀이 아닌, 쇼핑호스트가 포교한다. 주변 사람이 어디쯤 가고 있는지, 어디에 살고, 가진 차량 배기량은 얼마인지 궁금한, 불안한 동기를 추동한다. 노인부터 갖난 아이까지, 그렇게 일사분란해진다. 아이쿠. 이거 너무 어둡고 세기말적인가. 그래도 다소 고민할 일이긴 하다. 옆집 아이가 갖고 있는 저 장난감, 지인이 새로 입주한다는 강남, 서초의 브랜드 아파트. 저마다 부여받은 인생풍경이 다를진데, 우리가 주목하는 것들은 어찌그리 일사분란한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지라, 관심갖고 관심받고픈게 당연하다지만, 타인을 향한 관심이란게 결국은 '비교우위'를 확인하혀는 날선 안테나를 세우기라면 좀 서글프다. 그이가 풍성히 살아가는게 기쁨이 아니라, 혹여라도 나만 뒤떨어지는건 아닌가 싶은, 타들어가는 의구심으로 페이스북을 접속하고, 남의 집 부뚜막 사정을 살피는 건, 쓸데없고 유해한 ‘사회성'일 뿐이다.
사실 이건 태초부터 있어온 유구한 역사다. 하나님께서 카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었다면, 이건 어떻든 그와 하나님 사이의 해결해야할 문제일진데, 카인의 솔루션은 뭐였나. 엉뚱하게도 아벨을 제거해버리는 것이었다. 나의 좌절과 너의 평강이 상호독립적임을 인정하길 힘들어하는 삶의 태도는 우리의 덕성을 망가뜨린다. 여러모로 아이부터 어른들까지, 우리네 관심은 좀 더 고독해질 필요가 있다.
다시 처음 고향집 얘기로 돌아가자. 나 참 이상도 하지. 여전히 말이 어눌한 귀여운 조카들. 가벼운 주머니 사정에 '사줘'라는 말을 맞닥뜨리면, 폭염처럼 텁텁해야할건데. 아가들이 나를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며 ‘사죠’할 때, 가슴을 쓸어내리는 이 청량감이란. 자식 농사 끝내고, 이제 ‘자식의 자식’ 농사를 시작이라는, 부모님 마음이 십분 이해된다. 나는 오늘도 '또봇'이며, ‘드래곤특공대’, ‘프테라킹’을 찾아 가게들을 뒤진다. 내일은 옆도시에도 원정을 다녀올 생각이다. 돈 벌어서 뭐하겠나. 조카들 장난감이나 사지. 욕구를 지연하고 유보시키라고? 교육학 저리가라. 나는 대한민국 큰아빠다!
문득 아내가 옆에서 한마디 거든다. ‘오빠 자식한테는 얼마나 더 할까 싶다’고. 어째 불안하다. 몇 년 뒤 뉴스에 장난감 상점 앞에서 애타게 줄지어선, 배 나온 아저씨로 전파를 탈 것만 같은./
첫댓글 또봇...
좀 심한 경향은 있는 것 같아요...
조금 시간이 지나면 또 시들해질 유행 같은...
제 아는 분은 홈플러스에서 파는 모든 또봇을 들어오는 날 전량을 구매하시고 자기는 또봇에서 해방되었다고 구매한 또봇 사진을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 올린것도 봤네요...
좀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