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삼국지 125
(소설 삼국지 )
1권 제7장 십상시의 난
5) 십상시의 난
하진을 처치하고 나서 장양과 단규 등은 조서를 위조해 태위 번릉(樊陵)을 사례교위에, 소부 허상(許相)을 하남윤에 임명했다.
이들은 다 환관들에 붙어서 출세한 자들이었다.
상서가 이 조서를 보고 의심스러워 즉시 시행하지 않고 말했다.
“대장군을 불러 함께 의논해야 할 것이오.”
중황문이 하진의 머리를 상서에게 던지며 말했다.
“하진이 모반하여 이미 복주되었다.”
상서는 하진이 임명한 사람이었다. 몰래 사람을 밖으로 보내 하진의 부곡장(部曲將) 오광(吳匡)과 장경(張璋) 등에게 하진이 피살된 사실을 알렸다. 오광은 즉시 휘하 부대를 이끌고 입궁하려 했으나 궁문이 닫혀 있었다. 원술이 호분 이백 명을 이끌고 달려와 오광에게 합세했다. 함께 궁문을 부수려 하자 중황문이 병사를 이끌고 나와 궁문을 수비했다.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원술과 오광은 궁 안에 진입할 수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원술이 환관들을 위협하기 위해 남궁의 청쇄문(青瑣門)에 불을 질렀다.
화염이 하늘을 찔렀다.
장양 등이 무리를 이끌고 태후에게로 갔다.
“대장군의 군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궁에 불을 질렀습니다. 상서성 달문(闥門)을 공략하고 있으니 급히 피해야 합니다.”
환관들은 칼을 빼어들고 태후와 어린 황제, 황제의 동생 진류왕(陳留王) 유협과 궁성 내의 관속들을 겁주고 협박했다. 환관들은 태후와 황제를 끼고 북궁으로 통하는 통로를 따라 도망쳤다. 남궁과 북궁은 벽이 있는 긴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를 합도라 한다.
이 때 상서 노식이 궁중에 난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 입궐하다가 분합문 아래에서 이들과 마주쳤다. 노식이 창을 들고 단규를 노려보고 그 죄상을 꾸짖자 단규가 놀라 태후를 잡았던 손을 노쳤다. 이틈을 타서 하태후는 합도의 창문을 통해 밖으로 뛰어내려 탈출했다.
원소는 숙부 원외(袁隗)와 의논하여 조서를 고쳐 번릉과 허상을 불러들인 후 목을 베었다. 원소와 하묘는 휘하 병사들을 이끌고 와 북궁 주작궐(硃雀闕) 아래에 주둔했다. 조충 등 도망치지 못한 환관들을 붙잡아 모두 참했다.
오광을 위시한 하진의 직속부하들은 평소에 하묘가 하진의 일을 방해한 것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오광은 하묘가 환관들과 통모하여 하진을 죽였다고 대장군부의 군사들을 선동했다.
“대장군을 죽인 자는 바로 거기장군 하묘이다. 그대들은 대장군을 위해 복수할 수 있겠는가?”
군리와 병사들이 다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오광은 동탁의 동생 봉거도위(奉車都尉) 동민(董旻)과 합세해 주작궐 밑에서 하묘를 습격했다.
대장군부의 병사들은 하묘를 죽여 시체를 후원에 버렸다.
원소는 이 소동에 아랑곳 하지 않고 병사들을 지휘해 북궁의 문을 다 폐쇄한 후, 병사들을 풀어 환관들을 모조리 체포하게 했다. 노소를 막론하고 다 죽여 버리니 그 수효가 이천여 명에 달했다.
행실이 바른 환관들도 죽음을 모면할 수 없었다. 이 중에는 수염이 없어 환관으로 오인되어 죽음을 당한 자들도 있었다. 어떤 자는 바지를 내려 고추를 보여 주고 나서야 죽음을 면하기도 했다.
원소의 권력남용이 이와 같았다.
27일, 원소가 병사들을 궁 안으로 진입시켰다. 일부 병사들은 궁전의 정문 지붕 위로 올라가 궁 안을 공격했다. 다급해진 장양과 단규 등은 어린 황제와 진류왕 등 수십 명을 인솔해 곡문(谷門)을 이용해 궁을 빠져 나갔다. 황제를 포함해 모두 걸어서 도망쳤다.
한밤중에 소평진(小平津)에 이르렀다. 그 사이 황제의 옥새 여섯 개를 다 잃어버렸다.
공경들 중에 황제를 따라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상서 노식만이 홀로 어린 황제를 찾아 나섰다. 도중에 하남윤 왕윤의 무리를 만났는데 왕윤은 하남 중부연(中部掾) 민공(閔貢)에게 수하의 병졸들을 이끌고 노식을 수행해 함께 황제를 찾게 했다.
민공과 병사들이 한 밤중에 강가에서 장량의 무리와 마주쳤다. 민공이 소리를 높여 장양 등을 꾸짖었다.
“지금 빨리 자살하지 않으면, 내가 곧 너를 죽이겠다!”
민공이 손에 칼을 쥐고 환관 몇 명의 목을 치자, 장양 등이 두려워 황제 앞으로 나아갔다. 손을 모아 재배한 후 머리를 조아리고 말했다.
“신들은 죽습니다. 폐하께옵서는 부디 스스로를 보살피기 바랍니다.”
절을 마친 장양, 단규 등 환관들은 강물에 투신해 죽었다.
민공은 황제와 진류왕 유협을 부축하고 밤길을 걸어 궁으로 향했다.
동후 유협은 사후 유변이 황제가 된 직후 진류왕에 봉해졌었다. 길을 밝힐 등불도 없었으므로 반딧불을 따라 남쪽을 향해 걸었다. 몇 리를 걸어간 후에 다행히 민가를 만나 짐수레 하나를 얻어 황제와 진류왕을 함께 태웠다.
낙사(雒捨)에 이르렀을 때 자정이 되었다.
낙사는 낙양인근의 역사였다. 민공이 역사에서 말을 취해 황제는 홀로 말을 타고 진류왕은 민공과 함께 말을 탔다.
황제가 구출된 것이 알려지자 공경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공경백관들이 북망산 아래에서 황제를 영접했다.
이 일이 있기 전에 한 동요(動搖)가 유행했었다.
“제후는 제후가 아니고, / 왕은 왕이 아니네. / 수레 천대와 기병 만 명이 / 북망산으로 몰려가네.”
과연 동요처럼 되었다.
이 때 동탁은 군사를 이끌고 낙양 인근 현양원(顯陽苑)에 도착했다.
멀리 화광이 충천하는 것을 보고 경사에 변란이 일어난 것을 알았다.
동탁은 병사들을 급히 진격시켰다.